○ 일본의 조선침략론(朝鮮侵略論)
4천년 문화민족을 자부해온 나라에서 국권을 빼앗은 흉적(兇賊)의 우두머리를 처단하는 의사(義士)가 없다면 민족의 정기는 어디서 찾을 것이며, 5백년 동안이나 성리학(性理學)을 장려해왔다는 왕조의 정신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조선왕조는 영조(英祖)·정조(正祖) 이후 변변한 군왕이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지배층은 점점 부패하고 타락했고, 국력이 쇠퇴하고 민력은 졸아들었다.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면서 민심은 이미 왕조를 떠나 있었다. 전봉준(全琫準)이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을 일으켜서 마지막으로 왕조 회생의 기회를 갖고자 했지만 지배세력은 외세를 끌어들였고 틈새를 노리던 일본에게 조선침략의 기회를 내주고 말았다.
세계정세는 엄청나게 변하고 있었는데 조선은 창문을 걸어 닫고 권력 싸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특히 노론(老論) 세력이 3백여년 동안 집권하면서 그나마 좁은 땅의 여러 지역을 배척했고, 몇 가문의 일족이 세도정치(勢道政治)를 자행하면서 부패와 일상적인 매관매직(賣官賣職)으로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에서는 칼 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조선을 침략해 지배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 조야(朝野)를 망라하고 광범위하게 전개된 것이다. 막부(幕府) 말기에 이미 하야시 순샤이[林春濟]는 “한반도는 일본의 신화에 나오는 신(神)인 스사노 노미고도[素盞鳴尊]가 경력(經歷)한 곳으로, 이 신이 삼한(三韓)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망발은 일본의 국가체제가 확립되어 가면서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785년 하야시 시헤이[林子平]와 혼다 도시아키[本多利明]는「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을 통해 조선과 유구(오키나와) 등이 일본 국방에 깊은 관계가 있다면서 국방력 강화와 팽창주의 정책을 제시하였다. 19세기 초에는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가 “일본의 각 부(府)가 각각 조선의 함경도ㆍ강원도ㆍ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를 하나씩 맡아서 진공할 것”을 제기하였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뒤에 일본 조야의 한국침략론(韓國侵略論)은 더욱 거세게 일었다. 정부 요직에 있던 기도 다카오시[木戶孝允]는 “사절을 조선에 보내 그들의 무례를 묻고 그들이 만일 불복한다면 그 죄를 따져 그 땅을 공격하여 신주(神州)의 위(威)를 신장해야 한다”라고 떠들고, 내각에는 조선에 사절단을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기도의 제안은 한국침략론에 불을 붙였다. 외무권대승(外務權大丞) 야나기와라 사끼미쓰[柳原前光]는 1870년 “조선을 복속시키면 황국보존의 기초가 되어 앞으로 '만국경영'의 기본이 된다”라고 떠들었다. 여기에 외무경 사와 노부요시[澤宜嘉]도 적극 동조하여,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려는 이 때 일본이 먼저 조선을 점령하자고 맞섰다. 이어서 그는 조선에 사절을 파견할 것을 제의하여, 1870년 10월에 사절을 조선에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조정은 일본사절이 가져온 오만무례한 국서의 내용을 크게 꾸짖고 이들을 배척하였다. 일본이 기대하던 그대로였다.
이때 일본사절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사다 하쿠보[佐田白芽]는 귀국하여 조선을 군사작전을 통해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사다와 동행했던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도 “유신에 불만을 품은 50만 사족(士族)을 조선에 이식하면 내란을 밖으로 돌리는 길인 동시에 국리(國利)를 해외에 개척하는 기초가 되어 일거양득이 된다”라고 조선침략을 부추겼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자신의 적대 세력을 조선침략의 희생물로 이용하고자 했던 수법 그대로였다.
○ ‘탈아론(脫亞論)’의 희생양이 된 조선
일본에서 조선침략론이 더욱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일본사회에 영향력이 큰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역할 때문이었다. 왕정복고(王政復古)에 큰 공을 세운 사이고는 1873년 8월 외수경ㆍ참의ㆍ태정대신 등 실력자들을 움직이고 각의에서 조선과 전쟁의 구실을 찾으려는 목적에서 자신을 조선에 파견하도록 공작하여, 이것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사이고의 조선침략론은 이른바 내치파(內治派)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사이고와 그의 추종자들은 귀향하여 군사를 모아 반란을 기도하다가 정부군에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일본에서 조선침략의 주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권력 내부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잠시 잠복되었을 뿐이었다. 내치파들도 조선침략론에는 동조하면서 그 시기를 계산하고 있었다. 사이고의 세력이 몰락하면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구로다 기요다까[黑田淸隆]·야마가다 아리도모[山縣有朋] 등이 실세가 되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신정부는 더욱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영토 확장주의’를 대외 정책으로 내걸었다. 이에 맞춰 국가신도사상과 국수주의가 심화되고 흑룡회(黑龍會)와 같은 대외침략주의자들이 활개치게 되었다.
흑룡회는 “일본의 세력범위를 만주 북쪽 흑룡강까지 확대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1901년에 설립되어 일본의 대륙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였다. 1889년에 공포된 메이지헌법은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천황(天皇)이 대일본제국을 통치하고, 천황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라고 규정’하여 신도사상을 명문화시켰다. 이로써 일본의 군국주의ㆍ침략주의는 국가체제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 ‘아시아주의’와 ‘탈아론(脫亞論)’이 일본 조야에 풍미하였다. 이른바 ‘아시아주의’는 미야케 세츠레이[三宅雪嶺], 나카에 조오민[中江兆民] 등이 주창한, “서구열강의 침략대상이 되고 있는 중국을 일본의 손으로 개혁하여 거대한 국가를 만들면 일본에 의한 세계 통일도 가능하다”는 침략주의론(侵略主義論)이었다. ‘탈아론’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제기한, “무지몽매한 아시아주의에서 벗어나 구주적 제국, 구주적 인민으로 변하자”는 주장이었다.
유키치와 이노우에가 각각 주창한 ‘탈아론’의 핵심은 이러했다. “인접국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유예가 없다. 오히려 대오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가와 진퇴를 함께하고, 그들 중국·한국에 접하는 법도 인국(隣國)이란 이유로 특별히 대할 필요가 없으며, 바로 서양인이 이들에 하는 방식으로 처분해야 한다. 악우(惡友)를 친하게 하는 자는 악명을 면할 수 없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악우를 사절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도 아시아이면서 아시아를 벗어나 아시아를 지배하자는, 대단히 무례하기 그지없는 침략주의 ‘사무라이 정신’의 발로였다.
후쿠자와는 1893년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조선인민을 위해 조선의 멸망을 하(賀) 하다’는 논문을 기고하여 공공연하게 조선 정벌을 주창하고 나섰다. 후쿠자와는 1894년에도 시사신보에 “조선은 부패한 유생의 소굴로서 위로는 뜻이 크고 과단성 있는 인물이 없고 국민은 노예의 환경에서 살고 있다. 상하 모두가 문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학자는 있지만 다만 중국의 문자만 알고 세계 정세는 모르고 있다. 그 나라의 질을 평가한다면 글자를 아는 야만국이라 하겠다”라는 조선을 극도로 폄하하는 글을 써서, 조선침략의 명분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들 조선침략론자(朝鮮侵略論者)들은 ‘야만조선’에 대한 침략을 ‘탈아론’의 핵심과제로 포장하면서 일본 국수주의 세력을 부추겼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일본의 사무라이 세력이 이웃 나라들에게 무차별적인 칼춤을 추게 만들었다. 그 첫 희생양이 조선이었다.
이 무렵에 조선에서 벌어진 갑오농민항쟁은 저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1894년 4월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자 일본군도 함께 들어와 수십만명의 동학농민군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폐정개혁(弊政改革)’과 ‘척왜척양(斥倭斥洋)’의 기치를 내걸었던 갑오농민항쟁이 엉뚱하게 외국 군대, 특히 일본군의 진주를 가져오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일본이 국수주의와 대외팽창의 칼날을 갈고 있을 때 조선 조정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암우한 군주와 황실 그리고 신료들은 여전히 세력 다툼과 백성들에 대한 분탕질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략군 21만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한 지 4백여 년 만에 똑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면 비슷한 역사가 되풀이 된다는, 무서운 역사의 업보가 조선 땅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