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5.반일의병항쟁 ⑵

대모달 |2011.03.19 19:37
조회 93 |추천 0

○ 1907년 8월 1일 고국 떠나



안중근이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해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망명길에 오른 것은 1907년 8월 1일이다. 서울에서 동지 김동억과 함께 부산으로 출발하였다. 김동억과는 절친한 사이였으나 그의 부일성(附日性)이 드러나 간도나 노령에서 관계는 유지되지 않는 듯하다. 안중근은 남문 밖 정거장으로 전송나온 정근과 공근 두 동생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지금은 우리들이 제 몸과 가족만 돌보고 있을 때가 아니므로 나는 집과 나라를 멀리 떠나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며 나라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모사(某事)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성사 여부는 하늘에 달렸으니, 내가 어찌 성사 여부를 미리 짐작할 수 있겠느냐? 옛적부터 꼭 성공할 수 있다 하여 사업에 착수한 영웅호걸이란 없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의 열성과 굳센 의지로 백번 좌절당하여도 굽히지 않았으며 목적을 달성하지 않고서는 그칠 줄 몰랐다.


나 역시 그렇게 할 뿐이다. 우리 나라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단합인데, 이것은 사람들이 겸손의 미덕이 적고 허위와 교만으로 일을 처리하며, 남의 위에 있기를 좋아하고 남의 밑에 있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들이 허심하게 좋은 것을 배워 익히고 자기를 낮추고 남을 존중하며 사회에 해독을 끼치지 않기를 바란다.


삼흥학교는 힘써 유지하도록 해야하며 실제 효과를 거두기 바란다. 하느님이 화(禍)를 내린 것을 후회하실 때면 우리들도 나라를 되찾을 날이 오게 될 것이고, 우리 형제들도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될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나의 뼈를 어디서 찾을 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안중근이 고국을 떠나기까지에는 곡절이 적지 않았다. 우선 동생 정근이 이를 만류하였다. 장남으로써 노모를 봉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장남이 가장이 되어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당연한 책무였다.



빌렘 신부도 한사코 만류했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면서, 조선의 힘으로는 강력한 일본을 막아낼 수 없다는 상황론을 펴면서 설득하였다. 무엇보다 홀로 되신 어머니와 부인, 장녀 현생(賢生), 장남 분도(芬道), 갓 태어난 차남 준생(俊生)을 두고 기약없이 떠나는 것은 쉬운 발걸음이 아니었다. 그 무렵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이때 안중근의 심사를 헤아리거나 한 듯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누가 처자를 어여삐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열사(烈士)가 나라를 위함에는 가족까지 희생하는 법이니, 나라 사랑과 아내 사랑은 서로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안중근은 고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청계동을 찾아 부친의 묘소를 참배하고, 다니던 성당에 들러 빌렘 신부와 신도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진남포로 돌아와서는 정든 삼흥학교와 돈의학교의 교사, 학생들과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학교 운영은 정근, 공근 두 동생에게 맡겼다.



안중근이 망명을 앞당기게 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안중근은 이 대목을《안응칠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느날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그의 기상을 살펴보니 위풍이 당당하여 자못 도인의 풍모가 있었다. 성명을 통해 보니 그는 김(金) 진사(進士)였는데 그는 다짜고짜 나를 충고하려 드는 말투였다.


"나는 본시 그대 부친과 친교가 두터운 사람이라 특별히 찾아온 걸세."


"멀리서 오셨는데 어서 여기 앉으셔서 좋은 말씀을 해 주십시오."


나는 자리를 권하면서 정중히 여쭈었다.



"그대의 기개를 가지고 지금 이같이 나라 정세가 위태롭게 된 때에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려 하는가?"



사뭇 나무라는 말투였다. 예사 분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무슨 계책이 있겠습니까?"



나는 간절한 심경으로 물었다.



"지금 백두산 뒤에 있는 간도와 러시아 영토인 블라디보스톡 등지에 조선인 백여만 명이 살고 있네. 그곳은 물산이 풍부하여 과연 한 번 살 만한 곳이네. 그러니 그대 재주로 그곳에 가면 뒷날 반드시 큰 사업을 이룰 것일세."



진사의 사업이란 말 속에는 나라를 위해 할 일을 함축하고 있었다.



"예. 가르치신 대로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 진사는 이야기를 끝내고는 무언가 바쁘다는 듯이 총총히 사라지셨다.’



‘김 진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시 우국지사 중에는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돌면서 의병항쟁을 하거나 해외 망명지를 물색하고 다니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김 진사’도 그런 유형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안중근이 서둘러 고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 것은 꼭 ‘김 진사’의 ‘재촉’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있었고, 머릿속에는 해외에서 전개할 의병항쟁의 밑그림이 어느 정도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 간도에서 다시 러시아 땅으로



간도에 도착한 안중근은 주로 천주교인의 집에 기숙하면서 동포들을 만나고 향후 계획을 구상했다. 간도에는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래되어 많은 동포들이 신자였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간도는 빈곤과 일제 탄압의 이중고에 시달리던 동북 지역의 동포들이 건너와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군 곳이었다. 여기에 천주교가 들어와 용정에 교회당이 건립되고 선교사가 상주하면서 신도들이 늘어났다.



그렇지만 을사늑약과 더불어 용정에 한국통감부 임시 간도파출소가 설치되어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한국인들의 활동이 통제되기 시작했다. 일제가 청나라와 ‘간도협약(間島協約)’을 맺기 전이었지만 치안명목으로 일본군이 주둔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한국인들을 감시하고 천주교를 탄압해 이들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이동녕(李東寧)·이상설(李相卨)이 1906년 간도에 세운 서전서숙(瑞甸書塾)도 일제의 압력으로 폐교되었다. 안중근이 서전서숙을 찾았을 때는, 그해 4월에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네덜란드로 떠난 뒤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1909년 여름에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안중근은 거사 뒤 여순감옥에서 일제의 심문을 받을 때 “동인(同人)의 포부는 대단히 크다. 세계대세에 통하고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고 말하고 “여러 차례 만나서 그의 인물을 보니 기량이 크고 사리에 통한 대인물로서 대신의 그릇됨을 잃지 않는다”라고 높게 평했다.



안중근이 3개월여 동안 체류하면서 지켜 본 간도에서의 한국인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청나라 관리들에게 들볶이고 일제 관헌들에게 탄압을 받았다. 게다가 마적들이 나타나 피땀흘려 지은 곡식과 가축을 빼앗아갔다. 동포들의 의지처이던 천주교의 활동이 어려워지고 자제들의 민족교육을 담당했던 서전서숙도 폐교되었다.



간도에서 의병부대 조직이 어렵다고 판단한 안중근은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으로 떠났다. 안중근은 간도를 떠나 종성과 경원에서 5~6일간 머문 뒤 국경지대 연추(烟秋)에서 며칠을 보냈다. 포시에트에서 기선으로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0월 20일 경이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국인 4천~5천명이 살고 있었다. 학교도 몇 곳이 있었고 청년단체도 조직되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계동청년회에 가입해 임시 사찰이란 자리를 맡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잡은 안중근은 먼저 연해주 각지의 한국인 마을을 순회하면서 동포들의 실정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들에게 국내의 사정을 전하고 한국인 집단거주지인 연추(크라스키노라) 지역뿐만 아니라 하바로프스크 이북의 흑룡강 유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인 마을까지 두루 순방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니는 길이었다.



당시 연추라 부르던 크라스키노라 지방에는 국내에서 일제와 싸우다가 북상해 온 유인석(柳麟錫)·홍범도(洪範圖)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이 지방 한국인들이 스스로 조직한 의병부대가 있었다. 어느 지역보다 동포들이 구국의 열정에 깃들어 있는 곳이었다. 안중근은 이곳에 온 것을 감사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중에는 간도관리사를 지내다가 러일전쟁 때부터 반일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이범윤(李範允)도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의병 활동이 중단된 상태였다. 이범윤은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군이 귀환할 때 함께 러시아로 와 그곳에 살고 있었다.



연해주 한인사회에는 최재형(崔才亨)도 있었다. 그는 함경북도 출신으로 1860년대 러시아에 이주하여 귀화한 인물로서 러시아 당국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는 신망이 높고 재력이 넉넉하여 한국인 사회의 중심이 되었고, 의병의 독립전쟁을 적극 지원했다. 안중근은 11월 어느 날 이범윤을 찾아갔다.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우자고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각하는 러일전쟁 때 러시아를 도와 일본을 쳤는데 그것은 하늘의 뜻을 어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일본은 동양의 대의(大義)를 들어 동양 평화의 유지와 대한의 독립을 굳건히 할 의사를 가지고 이를 세계에 선언한 다음 러시아를 물리쳤으므로, 이것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각하께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을 친다면 그것 또한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지금 이토는 자신의 공을 믿고 망년되이 건방지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듯이 교만하고 극악해져서, 위로는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함부로 죽이며, 이웃 나라와의 의를 끊고, 세계의 신의를 져버려, 그야말로 하늘의 뜻을 거역하여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해가 뜨면 이슬은 사라지고, 달도 차면 반드시 기울어진다고 했습니다.

각하께서는 황상의 거룩한 은혜를 받고도 지금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에 팔장을 끼고 구경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늘이 주시는 것을 제때에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원컨대 각하께서는 속히 큰 일을 이루시어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말은 옳지만 군자금이나 병기를 마련할 길이 전혀 없으니 어쩐단 말인가?”


“조국의 흥망이 오늘 내일 하는데 팔장을 끼고 앉아 기다리기만 하면 군자금과 병기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의 뜻에 따르기만 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제 각하께서 의거를 일으키기로 결심만 한다면 비록 재주 없는 저이지만 만분의 일이라도 힘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범윤은 망설이며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 이범윤 등 만나 의병항쟁 설득 나서




안중근은 이범윤을 여러 차례 만나 다시 의병부대를 조직해 일제와 싸울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이범윤은 거병하는데 필요한 자금과 무기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섣불리 일어났다가는 인명만 희생된다는 신중론을 폈다. 그는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중근은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설득하는 한편,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많은 동포들을 만났다. 이 지역에서 발간되는《공립신보(共立新報)》를 열독하면서 정보와 상황 인식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루는 어떤 한국인으로부터 이유 없이 폭행을 당했다. 결국 그를 설득해 화해했지만, 이로 인해 한 달 이상 귓병을 앓기도 했다. 좋은 동지들과도 만나게 되었다. 엄인섭(嚴仁燮)과 김기룡(金起龍)이다. 두 사람은 담력과 의협심이 뛰어난 청년들이었다. 그들과 의형제를 맺었다. 엄인섭이 큰형, 안중근이 둘째, 김기룡이 셋째가 되었다. 엄인섭은 러일전쟁 때 러시아군에 공훈을 세워 러사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인물로, 안중근과 함게 최재형의 의병부대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기룡은 단지 동맹의 일원이었다.



안중근은 한국인 마을을 순회하면서 나라의 위급한 실정을 설명하고 의병으로 궐기해 일본인들을 몰아내자고 동포들에게 간곡하게 호소했다.



“지금 한국의 3천리 강산 13도에서는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의병이 패하는 날에는 슬프게도 저 간악한 도둑놈들은 옳고 그르고는 따지지도 않고 폭도란 이름을 붙여 한국 사람은 모두 죽일 것이요, 집집에 불을 지를 것이니, 그런 다음에 한국 민족이 된 사람들은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오늘,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인들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총을 메고 칼을 차고 일제히 의거를 일으켜 이기고 지는 것과, 잘 싸우고 못 싸우고를 돌아볼 것 없이 통쾌한 한판 싸움을 벌여 천하 후세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처럼 최선을 다해 싸운다면 세계열강의 공론도 없지 않을 것이므로 독립할 희망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앞으로 5년 안에 러시아, 청국, 미국 등 세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될 것이니 그때가 한국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때 만일 한국인이 아무런 준비가 없다면 설사 일본이 진다해도 한국은 결국 다른 도둑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안중근의 설득은 주효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까? 분발하여 힘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이러한 안중근의 호소와 설득에 많은 동포들이 뜻을 모았다. 그리고 많은 청장년들이 의병에 지원했다. 자원해서 출전하는 사람, 병기를 내놓는 사람, 군자금을 내놓겠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사회에는《해조신문(海朝新聞)》이 발행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톡(해삼위)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이 만든 신문”이라는 뜻의《해조신문》은 1908년 2월에 창간되어 같은 해 5월 26일까지 3개월 동안 총 75호가 간행되었다. 주로 러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국권수호,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민족의식의 고양, 청년자녀의 교육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사장 최봉준(崔鳳俊), 총무 겸 주필 정순만(鄭淳萬), 편집인 이강(李剛)·이종운(李宗運), 주필 장지연(張志淵) 등이 함께했다.《해조신문》은 원산항을 통해 국내에도 배포되었는데 날카로운 반일 논조 때문에 번번히 통감부에 압수되었다.



안중근은 1908년 3월 21일《해조신문》에 ‘긔서’라는 글을 발표했다. 의거 전에 발표한 몇 편 안되는 글이라, 안중근의 사상을 아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귀보의 논설에서 인심이 단합하여야 국권을 홍복하겠다는 구절을 읽으매 격절한 사연과 고상한 의미를 깊이 감복하여 천견박식으로 한 장 글을 부치나이다.


대저 사람이 천지만물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삼강오륜을 아는 까닭이라. 그런고로 사람이 세상에 처함에 제일 먼저 행할 것은 자기가 자기를 단합하는 것이오, 둘째는 자기집을 단합하는 것이오, 셋째는 자기 국가를 단합하는 것이니 그러한 즉 사람마다 마음과 육신이 연합하여야 능히 생활할 것이오. 집으로 말하면 부모처자가 화합하여야 능히 유지할 것이오. 국가는 국민상하가 상합하여야 마땅히 보전할지라.


슬프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 참혹한 지경에 이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불합병(不合病)이 깊이 든 연고로다. 불합병의 근원은 교오병(驕傲病)이니 교만은 만악의 뿌리라. 설혹 도적놈이 몇이 합심하여야 타인의 재산을 탈취하고 작비군도 동류가 있어야 남의 돈을 빼앗나니 소위 교만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자기보다 나은 자를 시기하고 약한 자를 능모하고 같이 하면 다투나니 어찌 합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교오병에 약은 겸손이니 만일 개개인이 다 겸손을 주장하여 항상 자기를 낮추고 타인을 존경하며 책망함을 참고 잘 못한 이를 용서하고 자기의 공을 타인에게 돌리면 금수가 아니거늘 어찌 서로 감화하지 않으리오.


옛날에 어떤 국왕이 죽을 때에 그 자손을 불러 모아 회초리나무 한 뭇(묶음)을 헤쳐주며 각각 한개씩 꺾게 함에 모두 잘 부러지는 지라 다시 분부하여 합하여 묶어놓고 꺾으라 함에 아무도 능히 꺾지 못하는지라. 왕이 가로대, “저것을 보라. 너희가 만일 나 죽은 후에 형제간 산심(散心)되면 남에게 용이하게 꺾일 것이오 합심하면 어찌 꺾일 것이오.” 라고 하였다 하니 어찌 우리 동포는 이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리오.


오늘날 우리 동포가 불합한 탓으로 삼천리강산을 왜놈에게 빼앗기고 이 지경 되었도다. 오히려 무엇이 부족하여 어떤 동포는 무슨 심정으로 내정을 정탐하여 왜적에게 주어 충의한 동포의 머리를 베어 왜적에게 받치는가.


통재 통재라, 분함이 철천(徹天)하여 공중에 솟아 고국산천 바라보니 애매한 동포가 죽는 것과 무죄한 조선의 백골을 파는 소리를 참아 듣고 볼 수 없네. 여보 강동(해삼위 지역, 저자) 계신 우리 동포, 잠을 깨고 정신을 차려 본국 소식 들어보오. 당신의 일가가 친척일가가 대한 땅에 다 계시고 당신의 조상 백골 본국강산에 아니있소. 나무뿌리 끊어지면 가지를 잃게 되며 조상 친척 욕을 보니 이내몸이 영화될가 비나이다.


여보시오 우리 동포, 지금 이후 시작하여 불합 이자 파괴하고 단합 두 급성(急成)하여 유치자질(幼稚子姪) 교육하고 노인들은 뒷배보며 청년형제 결사하여 우리 국권 어서 빨리 회복하고 태극기를 높이 단 후에 처자권속 거느리고 독립관에 재회하여 대한제국 만만세를 육대부주 혼동하게 일심단체 불러보세.’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