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담하다.
1913년 2월 4일 마침내 애국 청년 김좌진(金佐鎭)은 2년 형기를 마치고 감옥을 나왔다. 어머니 이씨 부인과 아내인 오숙근이 딸 옥남이를 데리고 김좌진을 마중나왔다.
“좌진아,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서방님, 얼굴이 많이 수척해지셨어요.”
김좌진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웃음을 지으며 아내의 등을 토닥거렸다.
“어머니,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스럽습니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나라 안 사정은 많이 변했겠지요?”
오숙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지요. 정말 이 땅이 일본의 국토가 되었나 봐요. 병합 당시 일본인 인구사 17만여명 정도 되었던 것이 지금은 30여만명이나 되었고 작년에는 안명근(安明根) 지사(志士)가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다가 사전에 탄로가 나서 체포되었어요. 이 계획에 연루되었다고 해서 신민회(新民會)의 회원들이었던 양기탁(梁起鐸)·이승훈(李昇薰)·유동열(柳東說) 등 수백명의 애국지사들이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어요.”
“그 소식을 누구한테 들었소?”
“그야 신문을 보고 알았지요.”
김좌진의 얼굴은 금세 침울해졌다.
“아! 반일운동의 산실이자 애국적인 비밀결사단체였던 신민회가 그렇게 와해되는구나!”
김좌진은 일단 어머니와 아내를 따라 갈뫼마을로 돌아와 잠시 몸을 숙이며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의 고향인 갈뫼마을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무단통치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예전에 호명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가 들어섰는데 이곳에서 자주 김좌진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김좌진의 가족들을 협박하고 줄곧 감시하는 것이었다.
김좌진은 방 안에서 쥐죽은 듯이 앉아 독립운동의 효과적인 방안에 골몰하였다.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일본 헌병들의 감시 속에서 친일파의 밀고 등으로 자신의 행동까지도 제약을 받으니 감옥 생활이 끝났어도 여전히 자유스러운 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할일없이 7~8개월 정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국내에서는 임병찬(林炳瓚)이 중심이 되어 각지에 격문을 보내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구성하고 일본 정부에 대한제국의 국권을 반환하라는 요구를 담은 서한을 보내는 한편, 일제를 일시에 구축(驅逐)하려는 의병항쟁을 계획했다가 발각되어 실패한 사건이 일어났다. 또 국외에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에 의해 흥사단(興士團)이 조직되어 교육계몽운동(敎育啓蒙運動)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김좌진은 예전에 의기투합했던 동지들의 소식이나 좀 알아볼까 하는 생각에 홍성 읍내로 나왔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붙들려 아무 이유 없이 10개월 넘게 유치장에 감금되기도 하였다. 한때 일본 재판정에서 강도미수죄로 판결받아 2년 징역형을 지냈던 과거가 이 정도로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로 변했다는 생각을 하니 김좌진은 기가 막혔다. 일본 헌병대의 감시와 압박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김좌진은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선 고향인 갈뫼마을을 떠나야 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문제는 어떻게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홀연히 고향에서 사라지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점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예전에 김좌진과 함께 활동했던 채기두(蔡基斗)이란 사람이 김상옥(金相玉)이란 청년을 데리고 김좌진을 찾아왔다.
“지금 풍기 지방에서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란 단체가 구성되었는데, 국내 1백여 군데에 잡화상을 설치하여 연락처로 삼고 일본인들의 지배 속에 안주하는 친일부호를 처단, 그들의 돈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만주 각지의 신한촌(新韓村)에 보내려는 의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어찌 두 눈 뜨고 왜놈들이 이 땅의 백성들을 학대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대한광복회의 목표는 무력(武力)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데에 있습니다.”
채기두가 대한광복회의 구성 소식을 전하자 김좌진은 심장이 더 빨리 뛰고 피가 용솟음치는 듯 하였다.
“오! 그것은 바로 내가 평소에 자주 주장하던 것이오. 대단히 장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단체는 조직했지만 손에 무기가 없어서 어려운 실정입니다.”
김좌진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채기두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든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해결해 봅시다. 우리가 정의를 위해 몸을 수고롭게 하는데 어찌 하늘이 돕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채기두는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김상옥을 소개했다.
“이 친구는 영어에 능통하고 축구·사격·수영 종목에 능숙한 김상옥이라고 합니다. 김 동지의 좋은 동무가 될 듯 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김상옥은 훗날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 가입하여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관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의거를 결행하게 되는 인물이다. 김좌진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김상옥과 형제결의(兄弟結義)를 맺고 다 함께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김좌진은 채기두의 도움으로 일본 헌병들의 눈과 귀를 피해 갈뫼마을을 떠났다. 그리하여 1915년 4월에 신현대(申鉉大)·김한종(金漢鐘)·박성태(朴性泰) 등과 더불어 박상진(朴尙鎭)이 총사령관으로 있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였다. 박상진은 중국에서 일어난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진상을 살펴보기 위해 상해(上海)에 다녀온 후 현 상황에서 국권회복(國權恢復)의 길은 오직 무력(武力)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고 이에 상응하는 독립운동 단체 조직에 부심하고 있던 때였다.
그의 이러한 판단은 1915년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의 초대 총통 원세개(袁世凱)에게 산동성(山東省)에서의 일본인 권익 확보 등 21개 비밀조항을 요구함으로써 중국 국민들의 반일 감정(反日感情)이 고조되고 있으며,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도 이에 동조하여 피해국민들간에 합동반일저항(合同反日抵抗)의 뜻이 성숙되고 있었기에 실제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결론지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살피고 온 박상진은 일제(日帝)와 무력(武力)으로 맞서야 한다는 자판(自判)을 내려 많은 애국지사들이 그 뜻에 호응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1913년 풍기에서 조직된 한국광복단(韓國光復團)과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재탄생하게 되었으니 그 회원 수는 2백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문제는 총기(銃器)로 무장하여 활동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박상진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석탄광과 직산(稷山)에 있는 금광을 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회원들 몇명을 보내어 현지를 확인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채기두가 중요한 정보를 알려 왔는데, 11월 17일경에 경주 광명리에서 경주·영일·영덕 등 3개 지역에서 징수한 세금을 마차로 운반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광복회원 7명이 출동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마차가 나타나자 호송하는 경찰관 3명을 제압하고 마부를 쓰러뜨린 뒤 돈 8만원을 탈취하고 경찰관의 권총까지 빼앗아 달아났다. 이 돈은 회원 일부의 기부로 2만원을 더 보태서 무기를 구입하는 자금으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제사(同濟社)·경학사(耕學社) 같은 독립운동 단체에 보내졌다.
김좌진은 독립운동 관련 자금을 모으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제의 고위급 관리를 암살하는 의열투쟁(義烈鬪爭)을 통해 일본 측을 긴장시키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박상진과 이 일을 의논했다. 그리하여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을 암살하기로 하고 성낙규(成樂圭)·조성환(曺成煥)·이관구(李觀求)에게 그 임무를 맡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대한광복회원 중에는 특출난 부호들도 많았다. 사령관 박상진은 만석군이었고 그가 우선 사촌 처남 최준에게 맡겨 처분하였던 논만도 9백여두락으로 그 시가가 7만원이었으며, 1910년에 자기 집안 소유의 부동산을 일본 삼정특산회사(三井特産會社)에 10년 연부로 저당잡히고 여기에서 얻은 현금 10만원을 출자하여 도합 24만원의 자금으로 평양의 김덕기, 전주의 오혁태 등과 함께 대구의 상회를 세워 여기에서 얻어지는 이윤으로 독립운동 관련 자금을 마련했다. 이 상회의 명칭은 3인의 이름을 따서 상덕태(尙德泰)라 하고 대구에서 전당포를 경영했었다.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본부 유세부장이었던 정순영(鄭舜永)은 중국 봉천(奉天)에서 삼달양행(三達洋行)과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었고 정운역(鄭雲驛)도 대구에서 전당포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재산을 털어내어 독립운동 관련 자금으로 아낌없이 바쳤다.
이 때 대한광복회의 중진이었던 김좌진은 1백만원의 의연금을 모아 간도(間島)에 군사교육기관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제대로 일이 진척되지 않으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언제부터 이 나라에는 민족의 피를 빨아 제 배를 불리려고 왜놈들에게 아부하여 미리 돈만 모아 일신의 안녕과 욕심을 차리는 거머리 같은 인간들이 생겨났을까?’
김좌진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동포들을 탄압하는데 열을 올리는 친일파 부호들을 생각할 때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괴로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