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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14 다시 만주행에 오르다 ⑵

대모달 |2011.07.03 13:48
조회 229 |추천 0

 

② 백정기(白正基)과 윤봉길(尹奉吉)의 엇갈린 운명

 

일제를 공포에 떨게 했던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의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은 1932년 2월에 발생한 상해사변(上海事變) 때문에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상해사변이란 일제의 만주 점령으로 중국 대륙 전체에 항일투쟁이 확산되고, 특히 상해의 정세가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 군부에서 상해마저 점령하려고 무력도발을 한 사건이었다. 일제는 심양의 노구교를 끊어 놓고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우기며 만주를 전면 침공했었다. 그런 일제가 이번에는 매수한 중국인에게 일본의 대표적 불교 종단인 일련종의 탁발승을 살해하게 한 것이었다.

 

드디어 1932년 1월 28일 일본 조계의 경비를 담당하던 일본의 해군 육전대가 상해를 점령하려 하자 상해에 주둔해 있던 중국의 19로군과 장치중(張治中) 근위대가 저지에 나섰다. 채정해(蔡正楷)가 이끄는 19로군은 예상과는 달리 일본의 해군 육전대를 거듭 격퇴하였다. 그러자 일본 측은 남경의 장개석 행정부에 압력을 넣어 19로군의 즉각 해체와 배상을 요구했다.

 

남경 정부는 일본과 전면전을 치를 역량이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채정해에게 전투를 중지하고 즉각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19로군의 장병들은 이 명령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했다. 그러자 일제는 본국에서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大將)과 쇼쿠다[稙田野郞] 중장(中將) 등이 이끄는 3개 사단 병력을 파견했다. 반면에 확전을 우려한 장개석은 더 이상 증원군을 파견하지 않았다. 19로군은 고립된 상태에서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상해에서 퇴각했다.

 

이 사건은 항일구국연맹의 진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상해사변 때 임시정부에서도 일제와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자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처럼 19로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자 많은 사람이 지지했다. 하지만 19로군이 장개석의 철수 명령을 어긴 것 때문에 19로군과 남경 정부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항일구국연맹의 재정부장 왕아초는 19로군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인물이었는데, 이렇게 되자 남경 정부에서 왕아초를 요주의 인물로 주시하게 되었다. 더구나 국민당 정부의 비밀경찰격인 남의사(濫衣社)의 두월생(杜月笙)과 왕아초는 양립할 수 없는 견원지간이어서 왕아초와 화균실은 홍콩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피신하기 직전에 일본군은 상해 점령 전승 축하 겸 일본 황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을 열기로 했다. 흑색공포단은 이 날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행사장인 홍구공원(虹口公園)에 잠입해 권총과 폭탄으로 습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의 화암 정현섭은 일본인 종군기자를 통해 기념식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들었다.

 

백정기가 거사를 자처했다. 백정기는 중국 최대의 도시 상해를 점령했다고 자만에 빠져 있는 일본군 고위장성들을 저승길 동무로 삼겠다며 그 의기가 대단했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이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며 거사가 벌써 성공한 듯 기쁨에 들떠 있었다.

 

사실 이런 거사에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이 적격이었다. 임시정부의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김오연(金吾淵)을 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에게 보낸 것은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거사를 준비하는지를 탐문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백범의 의도를 읽은 화암은 거사 계획이 없다고 잡아뗐다. 오히려 그는 역심문을 통해 임정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한 윤봉길이 당일 11시 조금 넘어 거사를 실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11시경이면 행사에 참석한 외국사절들이 전부 퇴장하고 일본 고관과 군인들만 남게 되므로 이 때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다. 외국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한 거사 계획이었다.

 

그러자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임정의 계획보다 앞서 10시경에 공격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외국사절들에게 다소 피해가 있을지라도 나라를 빼앗긴 약소민족으로서 당연한 저항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왕아초로부터 폭탄도 입수했으니 남은 문제는 무사히 식장에 입장하는 것이었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물론 상해의 일본인 거류민들조차 일본 영사관에서 발행하는 출입증이 있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고 알려졌다. 왕아초는 일본 영사관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서 출입증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 당시 사건을 기획한 화암의 회고를 보자.

 

"4월 29일!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백정기는 완전하게 준비를 마치고 출입증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출입증을 구해 주겠다던 왕아초와 화균실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출입증은 오지 않으니 우리의 가슴은 설레었고 초조해졌다. 예정된 시간이 지나 버렸다. 우리가 실망하고 있을 무렵, 일본인 종군기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당신들의 계획은 대성공을 했소. 지금 홍구공원이 수라장이 되었소.”

 

임정에서 통쾌한 거사를 해냈다. 그 종군기자는 우리가 그 일을 해낸 것으로 알고 취재하려고 뛰어왔던 것이다."

 

일본인 종군기자의 생각과는 달리 임정 한인애국단 소속의 윤봉길이 성공한 거사였다. 화암과 백정기는 힘이 쭉 빠졌다. 백정기는 다 차려진 밥상을 놓쳤다는 듯 분하게 생각했고 화암은 어쨌든 한국인이 해낸 거사이니 마찬가지 아니냐며 그를 위로했다. 그 덕분에 살아 있지 않느냐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조국에 목숨을 바쳤기에 조금이라도 영광된 자리에서 죽게 되기를 갈구해 왔다. 나중에 화암은 실패하게 된 원인을 우당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결국 우리는 거사하지 못하고 백범은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그 차이는 이래서 났습니다. 백범은 단순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윤봉길이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과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왜놈 옷에 왜놈 게다신짝을 신을 채 왜놈으로 행세해 통과시키면 들어가서 거사하고 통과시키지 않으면 거기서 분풀이하면 되지 않겠는가? 어떤 쪽이든 큰일을 일으키면 되는 것 아닌가? 더 따질 것이 무엇이냐?’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했던 것입니다.”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로 상해 방면 일본군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大將)과 가와바타[河端貞次] 상해 거류민단장이 즉사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中將)과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시게미쓰[重光葵] 중국 주재 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홍구공원의거 직후 상해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를 남화한인청년연맹으로 지목했다. 사건이 일어나자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벌인 일로 상해 전체에 소문이 났던 것이다. 영사관 경찰대는 우당과 화암 등을 체포하려고 광분했다. 그 때 백범이 통신사를 통해 홍구공원의거가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의 작품임을 발표했다. 이에 일제는 프랑스 조계지역까지 들어와 임정 관련자들을 붙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임정 요인들은 모두 피신했으나 미리 연락을 받지 못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므랑스 조계 보강리(寶康里)의 교민회장 이유필(李裕弼)의 아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러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유필은 체포되지 않고 도산만 체포되었다는 사실에 논란이 일었다. 이유필이 밀정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으나 그도 이듬해 체포되어 3년형을 복역하면서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는 중국에서의 한국인 독립운동에 큰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고, 일제에 굴욕적인 외교를 펼치던 장개석 행정부한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모든 중국인들은 윤봉길과 한인애국단의 용기를 칭송했고, 장개석 행정부도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 쪽에게 많은 재정 지원과 편의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다만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재정적 지원은 물론 동지들의 안위마저 위태로울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우당 이회영도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우당은 멀리 도망가는 대신 상해 근교의 남상(南翔)으로 피신하는 길을 택했다. 그곳에는 류자명이 교편을 잡고 있는 농촌학원이 있었는데 인적이 드문 곳이므로 괜찮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남화한인청년연맹은 계속 상해에 남아 있기로 했다. 임정이 피신한 상해에 남화한인청년연맹만 남아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 공간은 극히 좁아졌다.

 

일제가 더욱 기승을 부린 것은 물론 중국 내부 사정도 어려워졌다. 왕정위 저격 사건을 왕아초가 주도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자연히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쳤다. 잘못하면 중국 내부의 분쟁에 휩싸여 한국인들이 희생될 가능성이 커졌다. 우당은 이 모둔 실수가 중국인 아나키스트들이나 중국 정부의 지원에 의존해서 생긴 일이라고 깊이 자책했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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