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사(百濟史)의 흐름.
소서노(召西奴)로부터 시작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연합정치체제(然合政治體制)로 출발한 백제(百濟)는 지금의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중국 동해안 일대에 자치백제군(自治百濟郡)을 설치하여 해외 식민지를 개척했고, 한국 역사의 연장으로서 왜국을 직할 통치하거나 야마토[大和] 등에 백제분국(百濟分國)을 두어 지배했던 백가제해(百家濟海)의 해상강국이었다. 그러나 백제가 나,당 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으로 멸망한 뒤, 백제의 역사는 '패배자의 역사'로서 승리자의 방식으로 왜곡, 조작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역사가 왜곡되기 시작한 시초로서 백제사(百濟史)가 본원적으로 조작당한 시초는 중국인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으로 그는 여기서 해상강국 백제가 중국 동해안 일대에 7군데의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부여, 고구려, 동옥저, 예(濊), 왜(倭) 등을 거론하면서 백제를 제외하고, 이미 200여년 전에 자취를 감춘 삼한(三韓)만을 언급하였다.
150년 뒤의 범엽(范曄)은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서 진수를 이어받아 백제를 들지 않고 한전(韓傳)을 그대로 옮겨놓았으며, 당황(唐皇) 태종(太宗)은 백제국(百濟國)이 중국의 하북성(河北省), 하남성(河南省), 산동성(山東省), 양자강구(揚子江區)의 옛 오월(吳越) 영토를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점령했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진서(晉書)를 직접 편찬했는데, 여기서도 백제의 존재를 무시하되, 이미 200년 전에 백제에 흡수당한 마한(馬韓)을 거론하여 중국에 내공(來貢)한 것처럼 조작해 놓았다.
그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후 금(金) 황제 희종(熙宗)의 위협을 받으면서 고려 인종(仁宗)대의 학자였던 신라 왕실의 후예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중화사대모화사상(中華事大慕華思想)에 입각한 역사관을 그대로 드러내며 고기(古記)를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 가야 등의 화려한 해외활동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한적상에 나타난 중원 왕조에의 예속적인 것만 주워모아 민족자주정신(民族自主精神)을 훼손하였다.
그 뒤 700여년이 지나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를 강점, 식민지 통치를 하게 되면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편성되어 한국의 역사를 일본국사(日本國史)에 예속시키는 작업이 30여년 동안 진행됐으며, 해방이 된 이후에도 일제 식민사관을 이어받은 일부 강단사학자들이 왜곡된 역사를 잘못 전달하는 반민족적 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백제 건국 당시의 사정과 그 후 해상강국으로서 중국 동해안과 일본 열도에 식민지를 경영했던 역사적 흐름은 어떠한 것인가? 사실상 백제의 건국자로 봐도 무방한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백제의 기틀을 마련한 비류(沸流)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은 사국시대(四國時代) 역사에 있어서 최대 미스테리의 하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시조(時祖) 온조왕(溫祚王)편에는 온조(溫祚)가 한산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으며, 비류(沸流)는 미추홀(彌鄒忽)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했으나 위례성에 와서 보고 참회하여 죽었으며, 그 신민(臣民)이 모두 위례성에 귀부하였고, 온조가 후에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연대나 과정 등이 모두 의혹에 쌓여있다.
삼국사기 등 제반사료를 검토해볼 때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즉 비류는 기원전 18년에 건국했다가 기원전 7년 미추홀로 천도하고,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하자 백제는 연합왕국(聯合王國)이 된 듯하다. 다음해인 기원전 6년 비류가 위례성을 공격했으며, 이때 소서노가 죽고 온조는 북천(北遷)하여 광주(廣州)에 도읍했다. 이는 삼국사기에 "늙은 암여우가 남자가 되고 다섯마리의 호랑이가 입성[五虎入城]했으며, 왕모(王母)가 돌아가시니 61세였다."는 괴기사가 뒷받침하는데, 바른 대로 말하기 거북한 사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비류는 서기 16년 남마한(南馬韓)의 구장(舊將) 주근(周勤)이 남원과 운봉을 거쳐 함안으로 진출하여 서부 경남일대를 점령하고,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여 백제를 역습하자 친히 군사 5천여명을 지휘하여 토벌하고 서부 경남의 8읍(邑)을 차지했다. 그 뒤 비류는 큰 강이 있는 웅진(熊津)으로 천도했으며, 서기 25년 처음 천도했던 아산벌에서 온조의 세력에게 패배하여 전사하고 그의 능은 주서(周書)에 기록된 대로 웅진에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온조왕(溫祚王) 43년 조의 문헌에서 "그 해 8월에 왕이 아산벌[牙山之原]에서 5일 동안 사냥을 했다"고 은폐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때에 전쟁을 벌였으며 비류는 온조에 의해 패사(敗死)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류가 죽은 뒤 비류 계열 세력의 일부는 온조와 함께 백제 왕족이나 외척이 되고, 귀족이 되어 왕위를 이어받기도 하고 백제 8대 성(姓)의 하나인 진씨(眞氏)나 우씨(優氏)로서 통치관료가 되기도 했다. 온조백제국(溫祚百濟國)의 비류(沸流) 계열 군왕으로는 여덟번째 임금인 고이왕(古爾王), 아홉번째 임금인 책계왕(責稽王), 열번째 임금인 분서왕(汾西王), 열두번째 임금인 계왕(契王), 스물두번째 임금인 문주왕(文周王), 스물세번재 임금인 삼근왕(三斤王), 스물네번째 임금인 동성왕(東城王) 등이며, 비류백제국(沸流百濟國)이 패망하면서 그 일족은 해상 무역국가였던 완하국(玩夏國)에서 함께 내려왔던 석탈해(昔脫解) 일족과 더불어 서부 경남 8읍 경락을 경험으로 남해안을 거쳐 함안(咸安)과 마산(馬山)지역을 중심으로 아라가야(阿羅伽倻)를 세웠고, 영산강 유역에 머물던 석탈해 일족은 남해안을 거쳐 왜지(倭地)로 가서 다파나국(多婆那國)에 살다가 금관가야(金官伽倻)를 지나 경주 동쪽 아진포(阿珍浦)에 상륙하여 신라 국왕이 된다.
마을의 어원인 모라(牟羅)를 전파시킨 석탈해 일족에 관하여 수서(隨書)는 "본왕(本王)은 백제인인데 스스로 바다로 도망가서 신라에 들어와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석탈해가 선주하던 완하국에 팔품성골(八品姓骨)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비류백제국(沸流百濟國)의 팔성대족(八姓大族0, 일본군왕가(日本君王家)의 대팔주기원(大八州起源)의 8이란 성수(聖數)가 공통되므로 같은 계열의 종족임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후에 아라가야(阿羅伽倻)의 국왕 아라사등(阿羅射等)의 아들 천일창(天日槍)이 서기 390년에 일본에 건너가 야마토[大和] 정권을 열게 되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아라사등은 가야를 본토로 왜지(倭地)에 신토(新土)를 개척했는바, 아라가야 즉 의부가라(意富加羅)의 국왕으로 오호도모[大玗]씨의 시조이며, 소잔명존(素棧鳴尊), 임나왕(任那王)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응신왕(應神王; 天日槍)은 중국 문헌에는 왜왕(倭王) 찬(讚), 일본 문헌에는 호무다왕[譽田王], 대기귀신(大己貴神), 식장진인(息長眞人), 모야신(毛野臣), 숭신왕(崇神王) 등으로 불리며 역사왜곡과 은폐에 이용됐으나, 현대에 이르러 그 내용이 드러나고 있다.
재야사학자인 문정창(文定昌)은 서진(西晉)의 무제(武帝)가 선비족(鮮卑族) 모용괴(慕容傀)를 평주자사로 삼았고 모용괴가 부여를 급습하자 패전(敗戰)한 부여의 국왕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왕자 의라(依羅)는 옥저로 달아났다가 북구주(北九州)로 가서 275년 고이왕(古爾王)의 도움을 받아 응신조(應神朝) 왜국(倭國)을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부여계인 응신왕릉(應神王陵)은 높이 36m, 전후측 415m에 달하는 웅대한 고분으로 오사카[大阪]에 있다. 일본에 수천개 있는 야하다[八幡] 신사는 모두 응신왕(應神王)을 주제신(主祭神)으로 모신 신사이다.
응신왕(應神王)이 천일창(天日槍)과 동일 인물이므로 결국 그의 선조는 부여, 고구려 사람으로 한반도 남쪽 가야지역으로 남하하여 마침내는 왜지(倭地)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곳에서 처음 개척한 땅이 북구주(北九州) 이도국(伊都國)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풍토기(風土記) 일문(日文) 이토군조(怡土郡條)를 보면 알 수 있다.
응신왕(應神王)은 또 일본서기(日本書紀) 민달기(敏達紀)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보면, 그 형이 금왕(金王)이고 아버지는 임나왕(任那王) 아라사등(阿羅射等)이며 그 출자는 임나왕(任那王) 용주왕(龍主王)이라 했는 바, 이는 그 조상이 비류왕(比流王)으로서 부여의 해모수(解慕漱)가 용광인(龍光刃)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왔으며,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소서노와 비류가 용성국(龍成國)을 거쳐 백제를 세웠다가 비류는 죽고 그의 후손이 아라가야(阿羅伽倻)와 응신조(應神朝) 대화[大和]정권을 세운 것을 추론할 수 있다.
한편, 온조왕(溫祚王)의 후손으로 국력을 크게 신장한 근초고왕(近肖古王)은 366년 일본 열도에 진출하여 분국(分國)을 설치, 26년간 직할통치를 했고 일본의 대호족인 모노베[物部]씨와 후손인 침류왕(枕流王)계의 집권세력이며 목(木)씨가 번성했다는 소가[蘇我]씨를 출자시켰으며, 일설에는 국조신(國祖神) 아마데라스 오오미까미[天照大神]로 추존되어 이세신궁(伊勢神宮)과 석상신궁(石上神宮)의 제신으로 있다고 한다.
무내숙미(武內宿彌)는 근구수왕(近仇首王)의 장남이라고 전해지는 천수일(天穗日)로서 형칠지도(形七支刀)를 갖고 왜(倭) 후왕(侯王)으로 부임했으나, 백제 왕실에 항명하고 가야계의 오오도모[大伴]가에 가담하므로 가야지역에서 칠국평정(七國平定)과 같은 대란(大亂)이 있기도 했으며 담로도(淡路島)의 서쪽에서 응신군(應神軍)과 함께 아신왕(阿辛王)을 공격했으나 기이국총산(紀伊國寵山)에서 내분이 생겨 와카야마시[和歌山市]에서 살해되었다. 이때가 384년의 일로 응신왕(應神王)이 대화조정(大和朝廷)을 세우는데 결정적 기초를 마련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경행기(景行紀) 40년조의 문헌에는 백조삼릉(白鳥三陵)으로 근초고왕릉(近肖古王陵), 근구수왕릉(近仇首王陵), 침류왕릉(枕流王陵)을 일컫고 있으며, 다케다[武內]의 후손 중 한사람이 일본(日本)의 문무왕(文武王)이다.
이부동복 형제간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백제연합왕조(百濟聯合王朝)를 세웠다가 비류백제국(沸流百濟國)이 패망하자 비류의 후손은 백제의 왕통을 교대로 이어가거나 지배층으로 통치체제에 참여했으며, 가야와 왜국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한편 온조의 후손인 근초고왕(近肖古王)부터 진사왕(辰斯王) 때까지는 왜(倭)에 백제분국(百濟分國)을 두어 담로제(擔魯制)로 직할 통치했고, 아신왕(阿辛王)대부터 삼근왕(三斤王)대까지 87년간은 왜국이 백제에서 분리되어 비류의 후손인 응신왕(應神王)이 야마토[大和] 정권을 세웠으며, 이는 응신왕의 동생 진(珍)과 그의 아들 제(濟) 및 손자 흥(흥)과 무(武)로 5대 왕까지 이어졌으며, 응신왕 형의 후손인 동성왕(東城王)은 동조(東朝)로서 479년에 왜국을 백제에 통합한 아스카시대[飛鳥時代]를 열었고, 아스카시대는 동성왕의 뒤를 이은 근초고왕의 후손인 무령왕(武寧王)이 이어, 그 후손들이 의자왕(義慈王) 때까지 182년간 계속되었다. 제후국인 왜(倭)는 근비조(近飛鳥), 본국인 백제는 원비조(遠飛鳥)라고 했고, 또 왜는 오다라(Odara; 작은 나라) 백제는 쿠다라(Kudara; 큰 나라)라고도 했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후손은 백제와 왜국을 갈등과 협조 속에서 약 300년간 나눠서 통치했으며, 의자왕(義慈王)의 아들 부여용(扶餘勇)인 천지왕(天智王)이 세운 일본의 왕족도 온조의 후손이라 할 수 있어 고대의 일본 왕국은 백제의 이동 왕국이라 부를 수 있다.
온조왕(溫祚王)이 창업(創業)한 백제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착실하게 국력을 신장하여 주변의 소국(小國)들을 병합하고 남마한(南馬韓)지역의 목지국(目支國)까지 정복함으로써 북쪽으로는 예성강, 동쪽으로는 춘천, 남쪽으로는 직산, 서쪽으로는 서해에 이르는 강역을 한반도에서 확보하였다. 이같은 백제의 발전은 동북 방면의 예맥(濊貊; 靺鞨)과 북쪽의 낙랑(樂浪)과의 대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히 246년에는 대방(帶方)과 충돌하여 그 태수인 궁도(弓道)를 사살하는 등 중국 군현(郡縣) 새력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해졌다.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고이왕(古爾王)은 서무(庶務)를 분장하는 육좌평제(六左平制)와 십육품(十六品)의 관등과 이에 다른 관복제(官服制)를 실시하는 등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장도(臟盜)에 대한 법령을 내려 관리로서 제물을 받은 자와 도둑질한 자는 각기 그 3배를 배상케 하고 종신금고(終身禁錮)에 처하게 하는 등 법령을 정비하였다. 이같은 제도와 법령의 정비를 통하여 백제는 고대왕국으로서의 지배체제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내적 기반을 바탕으로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대대적인 국내외 영토확장사업(領土擴張事業)을 추진하였다. 백제는 우선 낙동강 유역의 남가라(南加羅), 안라(安羅), 다라(多羅) 등 6개의 소국(小國)을 병합하고 이어 나주, 보성, 강진 등에 있는 남마한(南馬韓)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영토를 전라남도 남해안가지 확장하고, 북쪽으로는 옛 대방(帶方)의 땅에 진출하여 371년에 대동강 유역에서 고구려군을 격퇴시켰다. 이어 태자 귀수(貴首)와 더불어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근초고왕 재위기의 백제는 현재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전부와 낙동강 중류지역, 강원도와 황해도의 일부가지 차지하게 되었다.
백제의 팽창정책(膨脹政策)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까지 뻗어나갔는데 특히 요서지방과 일본 열도로의 진출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해외진출은 주로 상업 활동면과 전략면에서 가치를 지닌 해안 식민지 개척을 위한 것으로 요서지방 진출은 산동반도에서 이 지방에 걸쳐 널리 분포하고 있던 동이족(東夷族)과 연관되고 일본 열도 진출은 백제 지배세력의 일부가 이 지역에 건너가 일종의 분국(分國)을 건설한 것과 연관된다. 일본 열도 분국 건설은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 수립을 의미하며 일본의 기원이 백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근구수왕(近仇首王)대의 활발한 영토확장사업(領土擴張事業)으로 백제는 대네적 국가체제를 더욱 정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근초고왕이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국사(國史)인 서기(書記)를 편찬케 하여 통치이념을 정비하였으며 침류왕(枕流王)대인 384년에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왕조로 성장해갔다.
● 백제의 중국 동해안 식민지 건설과 왜국 지배
동이족(東夷族)이 형성했던 국가들 가운데 최대의 해상강국이었던 백제는 우수한 해양기술과 군사력으로 동북아시아의 재해권을 장악하고 국민들의 빼어난 기상, 뛰어난 무용, 고도의 정신문화, 훌륭한 건축기술과 교역활동 등으로 한반도의 한강유역, 중국 요서지방, 일본 열도 등에서 국력을 떨쳤다.
백제의 중원대륙 동편 식민지 경영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구당서(舊唐書)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의 강역에 대하여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른다."고 설명하여 양자강 연안 옛 오월(吳越)의 영토가 백제의 국토였음을 밝히고 있다. 주서(周書)와 북사(北史) 백제전에도 진대(晉代)에 백제가 양자강 좌우 오월(吳越)의 땅을 통치하여 송(宋), 제(齊), 양(梁) 시대까지 약 250년간 계속 지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에는 백제가 전성기 때에 백만의 강병(强兵)을 양성하여 남쪽으로 오(吳), 월(越), 북쪽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 지역을 장악했다고 한다. 거기에다 양서(梁書)의 백제전에는 요서(遼西), 진평(晉平) 등 화북지방에 백제군(百濟郡)이 설치되어 수(隨)가 중원대륙을 통일할 때까지 백제의 영역으로 다스려졌다는 내용도 나온다. 이 두 백제군(百濟郡)은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라고 통전(通典) 백제전(百濟傳)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에 의하면 246년에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管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와 대방태수(帶方太守)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여 하자 고이왕(古爾王)이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파견하여 요동지방에서 낙랑군(樂浪郡) 일부를 점령하도록 하고, 분서왕(汾西王)은 낙랑서현(樂浪西縣)을 차지했으며, 책계왕(責稽王)은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대방(帶方)을 돕기 위해 지원군을 보냈다. 비류왕(比流王)은 요서(遼西)와 진평(晉平) 두 군(郡)을 차지하였고,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근구수왕(近仇首王)대에는 본격적으로 요서(遼西), 진평(晉平)을 비롯해 산동성(山東省), 강소성(江蘇省) 절강성(浙江省) 등지를 공략하여 넓은 영토를 장만하였다.
동성왕(東城王)은 남제(南齊)와 외교관계를 맺어 중원대륙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힘썼으며 488년에 북위(北魏)가 군사를 일으켜 중원대륙의 백제군(百濟郡)을 침범하자 저근(姐瑾), 양무(楊茂) 등의 장수들과 더불어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 북위의 침략군을 격퇴시켰다. 이에 북위(北魏)의 황제 고조(高祖)는 489년 8월 남제(南齊)의 국왕 세조(世祖)에게 특사인 형산(邢産)과 후영소(候靈紹)를 보내 화평관계를 맺고 남제와 백제간의 동맹관계를 깨뜨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세조(世祖)가 친위노선(親魏路線)으로 방향을 선회하자 마침내 하북성(河北省)지구의 백제군(百濟郡)을 무너뜨리기 위해 490년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향한 재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은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 네명의 장수들에게 병력을 안겨 응전(應戰)토록 하니 북위의 10만 기병은 백제군과의 일전에서 완패, 거의 전멸당하고 말았다.
이때 전공(戰功)을 세운 사법명(沙法名)을 포함한 장수 4명에게는 각각 매라왕(邁羅王), 벽중왕(辟中王), 불중후(弗中候), 면중후(面中候) 등으로 봉했다는 남제서(南齊書) 백제전(百濟傳)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중원대륙에 백제의 식민지가 오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백제도 중원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왕(王)이나 제후(諸侯)를 봉하여 대륙 식민지를 분할, 통치하는 봉건제(封建制)를 실시했던 거대왕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일본 열도 분국(分國) 통치에 대해 고찰(考察)해 보자.
백제가 해상강국으로서 영토를 크게 확장한 것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로서 그는 담대한 정복군주(征服君主)다운 기질을 발휘하여 왜지(倭地)를 비롯한 해외의 전략적 요충지를 개척, 경락했는데, 왜지(倭地)에서 가야국(伽倻國)의 분국(分國)인 야마토[大和] 정권이 신공왕후(神功王后) 사후(死後) 붕괴되어 분열상태에 있을 때인 366년에 태자인 귀수(貴首)가 왜(倭) 후왕(侯王)으로서 일본 열도를 직할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근초고왕은 당시 일본 열도가 백제의 분국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등에는 천희대신(天熙大神), 송고대왕(悚古大王), 천대언(天帶彦)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때부터 의자왕(義慈王)의 아들 부여용(夫餘勇)이 천지왕(天智王)으로 등극한 이후 일본(日本)으로 국호를 고칠 때가지 약 300여년간 백제가 왜지(倭地)를 통치, 경영한 것이고, 백제 멸망을 계기로 백제 출신의 왜인(倭 人)들은 국호를 일본으로 고쳐 왜국 경영을 계속했다고 할 수 있다.
최재석(崔在錫)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도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의 기록을 검토해 본 결과 일본 국왕은 백제 계열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백제에 의한 왜(倭) 직할 통치는 근초고왕에 이어 근구수왕(近仇首王), 침류왕(沈流王), 진사왕(辰斯王)대까지 약 26년간 존속했는데, 아신왕(阿辛王) 때에는 왜지(倭地)에 비류의 후손인 아라가야의 국왕 아라사등(阿羅斯等)의 아들 응신왕(應神王)이 야마토 정권을 세워 백제로부터 분립하여 5대왕 87년간 계속된다. 응신조(應神朝)의 왕권은 그 동생 진(珍) 왕가로 교체되었다. 응신왕이 즉위하기 전후의 백제와 일본의 사정은 만주 집안현에 있는 영락기공비(榮樂紀功碑)의 신묘년조(辛卯年條) 기사에 직접 관계되는 것으로 응신왕은 아신왕이 즉위하는데 협력하였다.
서기(書紀)에는 백제 침류왕이 죽고 난 뒤 태자인 아화(阿花)가 연소하므로 진사왕이 대신 즉위하자 기각숙이(紀角宿邇) 등이 백제로 가서 그 무례함을 꾸짖었고 백제국이 진사왕을 죽이고 사죄했으며 기각숙이 등은 아화를 국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진사왕조(辰斯王條)를 보면 국왕이 신묘년(辛卯年) 전년에는 구원(狗原)에서 사냥을 하였고, 신묘년에는 국서대도(國西大島)에서 친히 사냥을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구원(狗原)에 사냥 행궁했다 죽었다고 하므로 아신왕과 응신왕의 연합군에게 패사(敗死)한 것으로 보여 앞의 기사와 일치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아신왕이 백제 국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아신왕(阿辛王)에 앞서 근구수왕(近仇首王)의 명을 받고 장남 무내숙미(武內宿彌)가 서기 369년 지배권의 상징인 형칠지도(兄七支刀)를 가지고 왜(倭)의 후왕(侯王)에 부임하여 응신왕(應神王)과 함께 가야지역에서 백제에 전단(戰端)을 벌이자 근구수왕은 둘째아들 비류왕(比流王; 書紀에는 天律彦根命)을 보내 이를 제압했으며 침류왕(沈流王)은 371년 제칠지도(弟七支刀)를 가지고 왜의 후왕에 부임했다. 75cm인 형칠지도는 지금 일본의 천리시(天理市) 석상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日帝)가 글자를 조작하여 한반도 침략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 곡나산(谷那山) 백련철(百練鐵)로 만든 이 칠지도(七支刀)는 고대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를 푸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유물이다.
임승국(林承國) 전 명지대학교 교수는 칠지도의 명문 가운데 태화(泰和) 4년을 고이왕(古爾王) 재위 4년으로 보고, 고이왕이 야마토[大和] 정권을 무너뜨리고 왜왕과 종친들에게 발전을 기원하여 히시힌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의 역사학자인 손영종(孫英宗)은 칠지도(七支刀) 명문(名文) 가운데 태화 4년은 진지왕(眞智王) 재위 4년인 서기 408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응신왕(應神王) 계열인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은 삼근왕(三斤王)과 대화(大和) 무왕(武王)의 뒤를 이어 백제와 왜(倭)의 통합왕국인 아스카시대[飛鳥時代]를 열어 온조(溫祚) 계열인 무령왕(武寧王)에게 이어주고 백제가 멸망할 때가지 182년간 왜지(倭地)를 통치하고 경영했다.
무령왕은 왜지(倭地)에다 백제의 동조(東朝)를 두고 경영했고 각라도(各羅島)라는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마(斯麻)라 했는데, 이는 19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武寧王陵) 석관(石棺)에서 입증되었다. 무령왕의 딸 수백향(手白香)이 왜국의 계체왕(繼體王)에게 시잡을 가서 흠명왕(欽明王)을 낳으니 계체왕(繼體王)으로부터 숭준왕(崇峻王)까지 5대 120년간 무령왕의 사위와 외손이 왕위에 올랐다. 이와 관련하여 소진철(蘇鎭轍) 원광대학교 교수는 '스다하치망거울[人物書像鏡]'과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 지석(誌石)을 연구한 다음 스다하치망거울은 무령왕이 신임장(信任狀)으로 왜왕(倭王)인 계체왕에게 하사하여 승인한 것으로 왜왕은 백제의 제후였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와 같은 백제와 왜국의 직접적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일본 국왕인 아키히토왕[明人王]이다. 그는 2001년 12월 23일 일본 국회에서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의하면 간무왕(桓武王)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자손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본인은 일본 왕실이 전통적으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느끼고 있다."라고 발언하여 고대 일본의 군주였던 간무왕(桓武王)이 백제 왕족의 후손이라고 확인하였다. 간무왕(桓武王)의 생모(生母)는 화을계(和乙繼) 부인으로서 광인왕(光仁王)의 왕비인 고야신립(高野新笠)인바 그녀의 묘소는 일본 교토시 외곽 이세코우산 라쿠사이 주택단지 위에 있는 오에릉[大技陵]이라고 한다. 간무왕의 묘소는 가시와라릉[栢原陵]인바, 간무왕은 서기 794년에 천도하여 교토에다 헤이안궁을 짓고, 왕궁 북쪽에 백제 성왕(聖王)을 주신(主神)으로 모신 히라노신사[平野神社]를 세웠다.
또 무왕(武王)의 딸인 보황녀(寶皇女)는 서명왕(舒明王)에게 시집갔다가 서명왕이 죽자 황극여왕(皇極女王), 제명여왕(齊明女王)으로 두차례 등극하여 11년간 왜왕(倭王)으로 재위했다. 서기(書紀)와 성씨록(姓氏錄)에 의하면 서명왕은 나라현[奈良縣] 백제사(百濟寺) 옆에 백제궁(百濟宮)을 짓고 죽은 다음에 백제대빈(百濟大殯)을 만들었으며, 그의 조부 민달왕(敏達王)은 백제대정(百濟大井)을 만들었고 백제계 일본 국왕이라는 것이다. 또 백제에는 분국(分國)으로서 일본 왕실을 관리하는 일궁부(日宮部)가 있었는데, 이는 왜왕이 백제를 섬기기 위하여 보낸 제관(祭官)이 상주하는 곳으로 무령왕(武寧王)의 딸 수백향(手白香)을 왜왕에게 시집보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백제가 아스카시대[飛鳥時代]에 왜지(倭地)에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 등을 통해 불교문화를 전하여 나라[奈良],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지방에 꽃피운 문화를 아스카문화[飛鳥文化]라 하는데, 아스카문화의 우위성과 호화찬란함은 정평이 났다.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종교 예술작품은 호류사[廣隆寺] 영보전(靈寶殿)에 안치되어 있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다. 이 보살상은 백제의 후예인 진조하승(秦鳥河勝)이 백제인 조사공(造寺工)을 시켜 건축하게 한 절인 호류사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 추고기(椎古紀) 11년조의 문헌에 의하면 성덕세자(聖德世子)가 이 소나무[松木]로 만든 보살상을 진조하승에게 주었으며, 이는 백제국 공덕부(功德部)에서 한국에서 가장 질이 좋은 전라북도 변산반도 소나무로 제작하여 일본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에 대하여 독일의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한국인이 만든 이 불상은 인간 실존의 깊이까지 도달한 자의 표정이며, 지상에서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얻은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원만하며 영원한 심법(心法)의 모습이었다. 나는 수십년 철학자로 일해왔으니 동서고금에 이만큼 인간 실존의 평화로운 참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아직껏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 백제의 정치와 사회
백제사회는 원래 남하한 부여족에 의해 지배권이 획립되고 왕권이 비류(比流)와 온조(溫祚) 계통으로 세습 강화되었으므로 전통적인 사회의 유대가 견고하지 못하였다. 백제는 도리어 북부의 한군현(漢郡縣)이나 고구려의 압력 및 영향을 받으며 지배기구가 갖추어져 편제에 있어서 동서연합왕조(東西聯合王朝)격인 흔적이 있다. 따라서 백제의 왕실은 원래 이 지역의 부족세력과는 관계없는 유이민 세력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왕권세력은 흔히 팔대성씨(八代姓氏; 沙氏, 解氏, 燕氏, 眞氏, 岡氏, 木氏, 苗氏, 協氏)로 대표되는 귀족들이었다.
백제의 관료체계에서는 이미 정무분담의 형식과 문무관(文武官)의 분화현상이 나타났다. 백제의 관등은 16관등으로 분화, 발전되었으며 그 중에서 대신급인 제1품 좌평(佐平)에는 6명을 두어 왕명출납, 재무, 예식, 숙위, 사법, 국방 등 6개 부문의 정무(政務)를 분장하게 하였다. 좌평 밑의 여러 솔관(率官; 達率, 恩率, 德率, 蘖率, 奈率)이 차례로 2~6등급을 이루고 그 밑에 여러 덕관(德官; 將德, 施德, 固德, 季德, 對德)이 7~11등급을 이루었다. 그 밑에는 문독(文督), 무독(武督), 좌군(佐軍), 진무(振武), 극우(剋虞) 등이 12~17등급의 관등을 이루었다. 이들 16등급의 관료군은 크게 3단계로 나뉘어 그들이 착용하는 복색(服色)으로 그 신분을 엄격히 구별하였다. 1~6등급의 좌평과 솔관들은 자의(紫衣)를, 7~11등급의 덕관들은 비의(緋衣)를, 12~16등급의 하급관료는 청의(靑衣)를 착용하게 되어 있었다. 복색에 의한 신분제한은 신라의 골품에 의한 신분제한과 대비를 이룬다.
백제에서는 관서(官署)도 현저히 분화 발전하였는데, 크게 내관(內官)과 외관(外官)으로 나뉘어 도합 22부의 관서명을 남기고 있다. 각 관서의 장은 3년마다 교체되었는데 전대의 족장선거의 유품인 동시에 족장 사이의 세력균형을 위한 조처로 생각된다.
백제의 지방행정구분은 원래의 부족세력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방위로서 표시되어 수도를 상부(上部), 전부(前部), 중부(中部), 하부(下部), 후부(后部)의 5부로 구분하고 다시 전국을 동, 서, 남, 북, 중의 오방(五方)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방에는 방령(方領)이라는 지방장관을 두어 이를 통솔하게 하되 방 밑에 각각 십군(十郡)을 두게 하고, 군(郡)에는 3인의 장(將)을 파견하여 700~1200여명씩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방수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전국 22개처(제주도와 일본 열도도 포함)의 주요 성읍(城邑)에는 왕족을 보내 이에 분거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담로(擔魯)라 하였다.
한편 종래의 족장들이나 중앙귀족들이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로 흡수되면서 그들이 지배하던 공유지는 토지국유의 원칙하에 재편되어 갔으며, 왕실이나 국가의 직할지를 위시하여 식읍(食邑), 사전(私田)의 형태로 특수한 공훈이 있는 귀족, 장수들에게 국왕으로부터 토지가 사여되고 전쟁 포로의 분배, 개간 등에 의하여 토지,인민의 사유화과정이 진전되어갔다. 또한 고구려에서와 같이 불교의 공인,수용에 따라 사사전(寺私田)이 있었다.
농민들의 토지소유를 보면 고구려와 같이 각기 소규모의 경작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농민에게는 미(米), 견(絹), 마포(麻布) 등의 부세(賦稅)가 부과되었고, 그 위에 빈번한 전쟁과 요역노동에 동원되었다. 그들이 전쟁 포로가 되는 경우에는 노예로 전락하였고 때로는 집단적인 사민(徙民)의 대상이 되어 예민(隸民) 집단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 백제의 종교와 문화
백제는 남마한(南馬韓)지역에 터잡은 건국 초기부터 민족 고유의 신선도(神仙道)가 계승된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삼한전(三韓傳)에는 국읍(國邑)에서 각각 1인을 세워 천신제사(天神祭祀)를 주관케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하고, 이는 제정이 분리된 상태에서 제사인 무축(巫祝)을 담당하는 자이며 천군이 사는 지역을 소도(蘇塗)라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온조왕(溫祚王) 원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으며 온조왕이 해마다 제사를 지낸 후 동명왕묘에는 다루왕(多婁王) 이래 제왕들도 배알 제사를 지냈고, 동명왕묘에 기우제를 지내 비가 오게 된 경우도 있으며 온조왕 20년 2월에 대단(大檀)을 세우고 천지(天地)에도 제사를 지냈다.
백제는 매년 사중월(四仲月)에 국왕이 하늘과 오제(五帝)의 신을 제사했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기록 중 온조왕 17년 4월에 사당을 세우고 국모(國母)를 제사 지냈다는 것과 잡지제사(雜志祭祀)에 나오는 "그 시조 구이(仇怡)의 묘를 나라 도성에 세우고 4계절로 제사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비류왕(沸流王)과 관련된 것으로 비류왕의 실부(實父) 우대와 어머니 소서노를 제사지낸 내용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호암사(虎巖寺)에 정사암(政事巖)이란 바위가 있는데, 나라에서 장차 재상감을 의논할 때 봅힐 사람 3,4명의 이름을 쓰고 상자에 넣어 봉한 뒤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뒤에 열어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리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는데 이는 신선의 뜻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또 부여고을 안에는 신산에 3개가 있어 그것을 일산(日山), 오산(烏山), 부산(浮山)이라고 하였는데, 백제가 전성기를 누리던 때에 신선들이 그 산들 위에 살면서 서로 날아 왕래하기를 조석으로 끊임없이 하였다고 한다. 근래 발견된 산경문전(山景文轉)에도 삼봉이나 신선, 도원(道院) 같은 것이 그려 있었는데, 이런 것으로 보아 백제시대에도 신선도를 닦는 선인(仙人)류가 심산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발굴된 무령왕릉(武寧王陵)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구리거울과 달을 상징하는 구리거울이 발견됐는데, 달거울에서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신선을 그린 명문이 나왔다.
한편,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에 "승니(僧尼)와 사람은 많으나 도사(道士)는 없다."고 하여 신선도가 중국화한 도교는 들어오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백제에서는 천제(天祭)를 지내는 추수감사제 국중대회를 효천(曉天)이라고 불렀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가야보다 336년, 고구려보다 12년 뒤진 침류왕(枕流王) 원년의 일로 동진(東晉)으로부터 마라난타(滅難陀)가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그 이듬해인 385년에 백제는 한산(漢山)에 왕흥사(王興寺)라는 절을 짓고 불교를 유포하게 하였다. 백제의 명승(名僧)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 불교를 전수한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 천축국(天竺國) 구법승(求法僧)으로 가서 범어(梵語)를 배우고 인도의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더불어 오부율문(五部律文)을 가져온 겸익(謙益), 일본에 계율종(戒律宗)을 전파했던 혜총(惠聰), 일본 추고여왕(推古女王)대의 실권자 성덕세자(聖德世子)에게 불법(佛法)을 가르쳤던 혜자(惠慈) 등이 있었다. 백제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사상, 교리와 미술, 공예를 비롯한 광범위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백제의 사찰로는 한산사(漢山寺), 왕흥사(王興寺), 무량사(無量寺), 정림사(定林寺), 미륵사(彌勒寺) 등이 유명하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近肖古王)대에 고흥(高興) 박사에 의하여 서기(書記)가 편찬되었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璨) 등 백제의 대표적인 국사서(國史書)가 있었다고 기록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런 책들이 전하지 않는다. 백제에는 오경박사(五經博士)와 의역박사(醫易博士)가 있어 유학 교육을 했고, 아직기(阿直岐)와 왕인( 王仁) 같은 학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유학을 전수해주기도 하였다.
백제는 북방의 부여, 고구려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남조(南朝)의 동진 등 육조(六朝)의 문화를 받아들여 온화하고 세련되며 우아한 예술적 감각을 부각시켰다. 그리하여 불교를 위시한 사상, 학문, 신앙, 미술, 공예 등 문화를 독자적으로 성장시켰고 이를 다시 일본에 전파시켜 찬란한 아스카문화[飛鳥文化]의 원류가 되었다.
백제의 분묘는 복장(複葬)이 가능한 석실묘(石室墓)의 전통과 벽화의 내용면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최근에 발견된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보이는 것 같은 남북조(南北朝)의 전실(塼室) 고분 형태까지 수용하여 활발한 문화교류의 단면을 보여준다.
조각품의 대표적인 불상은 외형적으로는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에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인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내면적으로는 우아하고 정밀한 세계가 넘쳐 흐른다. 충남 서안의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과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의 얼굴 모습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 백제의 변화
한간유역을 중심으로 근초고왕(近肖古王)대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는 고구려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남진정책(南進政策)으로 수도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개로왕(蓋鹵王)이 전사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나,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긴 이후 호서(湖西), 호남(湖南)의 곡창지대를 차지하면서 서서히 국력을 회복하였다. 동성왕(東城王)과 무령왕(武寧王) 때에는 중국 북위(北魏)와의 전쟁에 승리하여 산동반도(山東半島)에 있는 백제군(百濟郡)의 세력을 넓히고 탐라(耽羅)를 복속시켰으며, 지방에 22군데의 담로(擔魯)를 두고 여기에 왕족을 파견하여 분할 통치함으로써 국가의 통일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웅진이 군사상으로 요충지이긴 하나 협착한 산골짜기여서 수도로서 수도로서 작당한 곳은 아니었다.
백제의 성왕(聖王)은 538년 웅지를 품고 수도를 사비(泗批)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하였다. 성왕은 행정제도를 개편하고 불교의 진흥을 꾀하여 국가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밖으로는 중국과 분국(分國) 왜(倭)와의 연결을 강화하여 양(梁)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고 왜에게는 전문 기술자들을 많이 보내고 불교를 전해주어 분국인 일본의 문화개발을 지원하였다.
국력이 어느 정도 신장되자 성왕은 한강유역의 옛 딸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와 동맹관계를 맺고 고구려의 내분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북진시켰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유역 하류의 6군(郡)을 접수하여 옛 땅을 수복하였다. 이 때가 서기 547년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은 백제와의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기습적으로 군대를 이동시켜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의 영지(領地)를 쳐서 빼앗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에게 참패를 당하고 최후를 맞았다.
백제의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 패배는 백제 집권체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백제는 심각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왕(武王)대에 와서 다시 국력이 회복되어 신라에 대한 침공이 지주 시도되었고, 익산(益山) 지역을 중심으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꾀하였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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