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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19.황제국 고려의 이상과 현실

개마기사단 |2011.10.05 09:43
조회 314 |추천 0

왕건(王建)은 건국 후 천수(天授)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고려가 제후국이 아닌 독립적 주권을 지닌 황제국임을 선언했다. 또한 스스로를 '짐(朕)' 또는 '천자(天子)'라고 지칭해 황제실권국가를 지향했다. 그러나 선택에서는 언제나 현실주의 노선을 걸음으로써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큰 괴리를 낳았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도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등 중원 대륙에서 강자로 등장하는 국가들의 연호를 차례로 사용해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상과 현실이 달랐던 고려 왕실의 모습은 왕건 사후(死後) 왕위를 둘러싼 호족 내부의 극심한 분쟁으로 연결된다.

● 황제와 호족

918년 왕위에 오른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했다. 고려라는 국호는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뜻이고 천수라는 연호는 '하늘이 천명(天命)을 내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은 고려가 내적으로 중국에 예속된 제후국이 아닌 독립적인 황제국을 지향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즉위 다음 날 내린 조서(詔書)에서 "짐이 여러 신하들의 추대에 의해 천자의 지위에 올라[朕資群公推戴之心登九五統臨之極]"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짐(朕)'은 황제의 자칭으로 고려의 건국자인 왕건의 웅대한 포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반면 조선 국왕들의 자칭인 '과인(寡人)'은 제후의 용어다. 또 '구오통림(九五統臨)'이란 표현 역시 '구오지위(九五之位)'가 천자(天子)의 지위를 뜻한다는 점에서 '짐'과 같은 맥락의 용어다. 조서(詔書) 역시 마찬가지다. 제후라면 교서(敎書)라는 용어를 써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살펴볼 때 왕건은 고려를 제후국이 아닌 황제국으로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즉위 당시만 해도 고려는 후백제보다 국력이 약했으며, 내부가 모두 왕건에게 복종하는 상태도 아니었다. 왕건은 고려 내부의 체제 정비를 단행한 후 후백제와 삼한의 운명을 건 대회전(大會戰)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어도 그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 호족들이 많이 있었다.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청주나 공주 지역은 아직 왕건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또한 궁예가 984년 양길(梁吉)에게서 독립해 장군으로 추대되었을 당시 중요한 군사 기반이었던 명주(溟州) 지역의 호족 순식(順式)은 반왕건(反王建) 세력의 중심축으로 남아 있었다.

왕건이 즉위한 지 5일만에 발생한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桓宣吉)의 모반과 그 직후의 마군장군 이흔암(李昕巖)의 모반사건은 왕건의 권력이 공고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사례다. 환선길은 아우 향식(香寔)과 함께 왕건 추대에 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거사(擧事)를 도모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는 왕건이 학사(學士) 몇사람과 궁전에서 국사(國事)를 의논하는 자리에 병장기(兵仗器)를 지닌 50여명의 도당과 함께 뛰어들었는데, 이때 왕건이 "짐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 이 자리에 올랐으나 이는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 천명이 이미 정해졌는데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고 당당하게 꾸짖자 환선길은 복병이 있는 것으로 알고 도망치다 참살되었다. '짐이 너희들의 힘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라는 왕건의 말에서 그의 미약한 위상이 드러난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9일 후, 궁예에 의해 마군장군에 임명되어 웅주(熊州)를 장악하고 있던 이흔암이 반역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기시형(棄市刑)을 당했다. 이들이 궁예 지지세력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런 사례들은 왕건의 지위가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함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해 8월 웅주, 운주 등 10여개 주현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에게 자발적으로 귀부한 것 또한 왕건의 즉위에 대한 반발의 성격이 있었다.

왕건은 호족들의 군사적 반발에는 진압으로 대응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군사력을 사용하기보다 회유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런 회유정책의 하나가 각지의 호족들에게 후한 폐백을 주며 말을 낮추는 '중폐비사(重幣卑辭)' 정책이었다.

즉위년 8월에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짐은 각처의 도적들이 짐이 처음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혹 변방에서 변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된다."며 "각지에 단사(單使)를 파견해 후한 폐백을 주며 말을 낮추어서 혜화(惠和)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말했다. '변방에서 변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는 세력' 중에는 도적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호족들이 대부분이었다. 호족들이 왕건의 즉위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자 각지의 호족들에게 후한 폐백을 주며 자신을 낮추어 회유하려 한 것이다.

호족들은 궁예가 자신들의 독자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졌으나 왕건의 즉위 또한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다름 없는, 호족에 지나지 않았던 왕건이 제왕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각지의 호족들은 왕건의 '중폐비사' 조치에 마음을 풀었다. 물론 그해 9월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이 그의 출신지인 청주인과 결탁해 반역을 도모한 것이나 10월에 청주사(靑州師) 진선(陳瑄)이 동생 선장(宣長)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는 등 궁예를 축출하고 즉위한 왕건에 대한 반발은 끊이지 않았지만 이 '중폐비사' 정책은 고려사(高麗史)가 "견훤을 제외하고 귀부(歸附)하는 자가 많았다."고 적고 있듯이, 호족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에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 예로 9월 상주적수(尙州賊帥) 아자개(阿慈介)가 사신을 보내 귀부하자 태조는 정중한 의례를 갖추어 영접했는데, 이에 앞서 예행연습까지 했을 정도로 각지의 호족 포섭에 정성을 다했다.

중폐비사 정책과 함께 왕건의 호족 융합정책의 핵심을 이루는 정책은 결혼정책이었다. 왕건은 재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정주(貞州) 출신 유천궁(柳天弓)의 딸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와 나주 출신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를 부인으로 두었다. 이후 왕건은 6명의 왕비를 포함해 모두 29명의 부인을 갖게 되는데 이들 대다수가 각지 호족들의 딸이었다. 신정왕후(神貞王后) 황보씨는 왕건의 세력 기반이었던 패강(浿江)의 호족 황보제공(皇甫悌恭)의 딸이고, 신명순성황후(神明順成皇后) 유씨는 충주 호족 내사령(內史令) 유긍달(劉兢達)의 딸이고,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왕씨는 광주 호족 대광(大匡) 왕규(王規)의 딸이며, 정목부인(貞穆夫人) 왕씨는 명주의 호족 왕경(王景)의 딸이었다. 왕건은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景順王)의 백부인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맞아들여 신성왕후(神聖王后) 김씨로 삼았으며, 후백제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朴英規)의 딸을 맞아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으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의 두 딸을 경순왕에게 주어 이중의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기도 했다.

왕건은 또 자신의 정적이었던 명주 출신의 호족 김순식(金順式)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 귀부해 오자 전택(田宅)을 내리는 한편, 왕씨(王氏) 성을 하사하는 사성정책(賜姓政策)을 통해 유력 호족들과 의제(擬制) 가족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런 호족 융합정책의 성공에 힘입어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와 일전을 겨룰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다.

● 고구려 재건의 이상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고구려 재건이라는 웅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즉위년 9월에 "평양(平壤) 고도(古都)가 황폐한 지 오래 되었어도 그 터전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한 것은 그가 고구려 재건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제271권에는 왕건이 즉위해 '개주(開州)로 동경(東京)을 삼고 평양으로 서경(西京)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왕건이 즉위 초 개경뿐만 아니라 서경까지 수도로 삼는 양경제(兩京制)를 운영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왕건은 즉위 후 폐허나 마찬가지였던 평양을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삼고 사촌 아우인 왕식렴(王式廉)을 보내 지키게 했다. 이 때 자신의 세력 기반이던 황주(黃州), 해주(海州) 등의 민가를 옮겨 살게 했다. 932년 5월에는 "요즈음 서경을 온전히 증축해 민가를 옮기고 충실하 한 것은 그 지방이 지닌 힘에 기대어 삼한을 평정하기 위함이다. 장차 거기에 도읍하고자 한다."라고 말하면서 서경천도(西京遷都) 의사를 강력히 피력하기도 했다.

후백제와 전쟁 중인 긴박한 상황이었음에도 고려가 서경 개척에 큰 힘을 쏟은 것은, 왕건 자신이 후삼국 통일 후 평양을 국도로 삼아 북진을 단행해 고구려의 광대했던 옛 강역을 수복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위 26년 임종을 앞두고 내린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해마다 2, 5, 8, 11월에 임금이 직접 서경에 행차해 100일 이상 머물 것을 유언하고 있는 것 또한 자신이 못 이룬 꿈을 후대 국왕들이 이루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5조는 "짐이 삼한 산천 지리의 도움을 힘입어 대업을 성취했다.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 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 되니 마땅히 사시(四時)의 중월(仲月)에는 행차하여 백일이 넘도록 머물러 나라의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 조

왕건이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契丹)에 적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왕건은 재위 9년(서기 926년) 발해가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하자 황족과 관료 등 고구려 계통의 지배계급과 백성들을 대폭 받아들였다. 태조(太祖) 재위 8년 9월 발해의 장수 신덕(申德) 등 500여명을 비롯해 같은 해 12월에는 좌수위소장(左首衛少將) 모두간(冒豆干) 등이 백성 1천여호를 거느리고 오는 등 발해 유민의 남하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태조 재위 17년(서기 934년) 7월에는 발해의 황태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명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귀순해 왔다. 왕건은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하사하고 종적(宗籍)에 올리는 한편, 원보(元補)라는 관품을 주고 백주(白州)를 지키며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942년에는 거란에서 낙타 50필을 선물했으나,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화친했으면서도 맹서(盟誓)를 배반하고 이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한 짓이다."라며 사신 일행 30여명을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 붙들어 매어 모두 굶어 죽게 만들기도 했다.

● 왕건의 이상과 현실

고구려 재건에 대한 왕건의 열망은 그러나 그가 처한 현실과 그가 걸었던 현실주의적 노선 때문에 말 그대로 이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태조(太祖)는 천수(天授)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황제국을 건설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한편,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등 중원 대륙에서 강자로 등장하는 국가들의 연호를 차례로 따라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순응하는 모습도 보였다. 후량 등의 연호를 따른 것은 물론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인정한 왕건의 현실주의 노선의 단면이었다.

왕건은 재위 6년(서기 923년) 복부경(福府卿) 윤질(尹質)을 후량에 사신으로 보낸 것을 비롯해, 재위 9년에는 후당에 장빈(張彬)을 사신으로 보내는 등 여러 차례 후량과 후당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 결과 재위 16년(933년)에는 후당에서 태복경(太僕卿) 왕경(王瓊) 등이 사신으로 와서 태조를 고려국왕(高麗國王)에 책봉했다.

앞서 후백제의 견훤도 925년 후당에 사신을 보낸 일이 있었다. 왕건과 견훤이 모두 사신을 보낸 상황에서 후당(後唐) 장종(蔣宗)이 결국 견훤이 아닌 왕건을 국왕으로 책봉한 것은 왕건의 외교적인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내적으로는 천자(天子)를 자처했지만 외적으로는 중국의 승인 획득이라는 현실적인 외교정책 노선을 걸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승인 획득이 최고 결과물이 제후책봉(諸侯冊封)이라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는 없다.

지향점은 높이 두면서도 실제로는 가장 현실적인 길을 선택했던 왕건의 여러 정책들은 결국 그를 지향점과는 모순된 상황에 처하게 했다. 중폐비사(重幣卑辭)의 결과 그가 갖게 된 것은 29명의 부인과 25남 9녀에 이르는 많은 수의 자식들만이 아니었다. 20여명의 장인들은 각자 자신의 독립된 세력을 갖고 있는 각지의 유력한 호족들이었다. 이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딸이 낳은 왕자가 왕건의 뒤를 잇기를 바라는 야심가들이었다. 왕건 사후 이들 호족들과 연결된 궁중세력 사이에 왕권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벌어질 것임은 왕건 자신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왕건은 이를 막기 위해 자녀들 사이 극도의 近親婚을 선택했다. 심지어 제3비인 신명순성황후(神明順成皇后) 유씨와 제6비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 소생들을 서로 바꾸어 결혼시켰다. 동부이복(同父異腹) 남매들끼리의 결혼이었다. 왕건에게 이들 남매는 아들이자 사위이며 딸이자 며느리였고, 두 왕후는 서로 바꾼 왕자에 대해서는 장모이면서 공주에 대해서는 시어머니라는 중첩된 혈연, 혼인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이런 예는 고려 초에 드물지 않다.

왕건이 이처럼 이복남매끼리도 결혼을 시킨 이유는, 신라 왕실이 즐겨 사용했던 족내혼(族內婚)의 유풍이기는 하지만 왕자와 공주들이 다른 유력 호족들과 결혼했을 경우 그 호족의 세력이 강대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왕건은 이미 망해버린 신라의 경순왕에게는 두 딸을 서슴없이 시집보내 신라의 정통성을 계승받는 계기로 이용했지만 다른 공주들의 경우는 여타 호족에게 시집보내기를 꺼렸던 것이다. 자신의 자녀들이 다른 유력 호족들과 결혼했을 경우 파생될 강력한 외척의 등장과 왕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피하기 위한 교육지책이기도 했다. 그는 후비 소생의 자녀들을 중첩되는 결혼을 통해 혈연, 혼인으로 묶어둠으로써 왕실의 가족적 유대관계가 여타 호족들과는 다른, 배타적 동질성으로 나타나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의도는 동질성의 중심이자 핵인 왕건이 생존해 있을 때에나 먹혀들 수 있었다. 중심이 사라진 동질성은 권력 다툼에 의해 붕괴되게 되어 있었다.

● 혜종(惠宗)의 즉위와 호족들의 반발

고려의 두번째 임금 혜종(惠宗)은 태조(太祖)의 제2비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 소생이다. 흔히 나주 오씨라고 불리는 장화왕후는 태조의 29명에 달하는 부인들 중 성씨가 알려지지 않은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과 함께 정치적 이해관계로 맺어지지 않은 극히 드문 경우였다. 혜종은 왕건이 궁예 휘하에 있을 때 나주를 정벌한 후 냇가에서 발래하고 있던 오씨를 만나 관계를 맺고 낳은 아이로서 어릴 때 이름은 무(武)였다. 고려사(高麗史)에는 태조가 그녀의 가문이 측미(側微)한 것을 꺼려서 성교 후 정액을 자리에 배설했으나 오씨가 얼른 그 정액을 흡수해 아이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녀의 가문은 한미했다.

912년에 태어난 무는 왕건의 장남이었으나 오씨의 가문이 측미하기 때문에 태자로 책봉될 수 없었다. 그래서 태조는 자황포(紫黃袍)를 상자에 담아 자신의 마음은 무에게 있으나 현실상 어렵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오씨가 이 자황포를 이용해 군사적 기반이 있는 박술희(朴述熙)를 끌어들임으로써 그의 후원을 얻어 921년 무를 태자로 책봉할 수 있었고 태조 사후 즉위할 수 있었다.

혜종은 측미한 외가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로 부왕처럼 결혼을 이용했다. 그는 4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제1비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의 아버지 임희(林噫)는 진천(鎭川) 출신의 호족으로 태조 즉위 직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된 군사통이었다. 혜종의 제2비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 왕씨는 대광(大匡) 왕규(王規)의 딸이었는데, 왕규는 이미 두 딸을 태조에게 시집 보낸 바 있는 광주(廣州)의 유력한 호족이었다. 혜종의 제3비인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 김씨는 청주의 호족 김긍률(金兢律)의 딸이었다.

외가가 측미한 혜종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처럼 왕건이 진천, 광주, 청주 등지 호족들의 딸과 결혼동맹을 맺도록 허락한 데 더해, 군사적 기반이 있는 박술희의 후원까지 획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동맹들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태조의 후견이 있을 때에 한해서였다. 태조가 재위 26년만에 승하하고 혜종이 즉위했으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강력한 도전 세력은 태조의 제3비 신명순성황후(神明順成皇后) 유씨 세력이었다. 신명순성황후는 충주 지역의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로서 5남 2녀를 낳았다. 충주 유씨가문의 유권설(劉權說)은 왕건 즉위와 동시에 순군낭중(徇軍郎中)에 임명되었는데 이 자리는 병권을 관할하는 자리였다. 태조가 유긍달의 딸을 제3비로 맞아들인 것은 충주 유씨 세력의 지원에 힘입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들 충주 유씨 세력은 측미한 가문 출신인 무의 태자책봉을 반대했으나 태조는 군사 실력자인 박술희의 도움을 얻어 무의 태자책봉을 강행했던 것이다.

혜종의 장인 왕규와 무장 박술희가 개경파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혜종의 즉위는 개경파의 승리를 의미했다. 개경파는 서경파의 도전을 받고 있었는데, 개경파가 왕규를 지지하자 신명순성황후 소생의 요(堯)와 소(昭)를 중심으로 한 충주 유씨는 서경파에 가담했다. 이미 혜종이 궁인 애이주(哀伊主)에게서 태자 제(濟)를 낳고 의화왕후 임씨에게서 흥화군(興化君)을 낳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혜종의 후사를 노리는 충주 유씨는 다급해졌다. 충주 유씨는 혜종이 태자 제나 흥화군에게 후사를 넘겨줄 것이 명백하다고 보고, 혜종과의 정면승부를 결심했다.

이런 움직임에 정면대응을 주장한 인물은 혜종의 장인 왕규였다. 945년 왕규는 요와 소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고 혜종에게 밀계(密啓)했다. 그러나 혜종은 왕규의 밀계에 '대답도, 그렇다고 문책도 않는' 반응을 보였다. 이는 혜종이 왕규의 밀계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혜종은 요, 소를 문책하기보다는 회유하는 방법을 택했다. 혜종이 자신의 딸을 소와 결혼시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런 조치에 왕규는 큰 불만을 갖게 되었다. 자칫하면 요, 소에게 자신이 제거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유부단한 혜종을 제거하고 자신의 딸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과 태조 사이에서 난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임금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이 부분에 대해 고려사는 시종일관 요, 소의 자리에서 기술하고 있다. 왕규가 혜종에게 요, 소를 참소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불만을 품고 반역의 길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훗날 왕위에 오른 요와 소가 자신들의 행적을 합리화하려는 의도로 기술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왕규는 어느 날 밤 혜종이 잠든 틈을 타서 자신의 도당(徒黨)을 침실 안으로 들여보내 혜종을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침입한 왕규의 도당을 처치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혜종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른 날 왕규는 다시 사람을 시켜 벽에 구멍을 둟고 혜종의 침실에 들어가도록 했으나 혜종은 사천공봉(司天供奉) 최지몽(崔知夢)이 사전에 반적(叛賊)이 있을 것임을 알려주어 피한 뒤였다. 그 후 최지몽을 만난 왕규는 그의 목에 칼을 겨누고 혜종에게 침실을 옮기도록 한 것을 힐책했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종이 왕규를 처벌하지 못했다는 기록들은 너무 비상식적이어서 그 진실성을 의심하게 한다. 하지만 진실이 어느 쪽이든 이는 혜종의 왕권이 극도로 미약했음을 말해준다.

혜종은 이런 상황에서 병석에 누웠지만 후사를 결정하지 않았다. 임종이 가까워졌는데도 군신(群臣)들은 들어가 보지 못하고 '향리(鄕里)의 소인(小人)'들만 병석을 지키고 있었고, 혜종은 끝내 후사를 결정하지 못한 채 죽고 만다. 아들 흥화군도, 그렇다고 이복동생 요도 지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혜종은 세상을 떠났다. 이런 와중에 개경파에 대한 서경파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된다. 개경파의 두 핵심인물인 박술희와 왕규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박술희와 왕규의 죽음에는 의혹이 많다. 우선 박술희의 죽음과 관련해서 고려사 제92권 박술희전(朴述熙傳)에는 '혜종이 병이 들자 박술희는 왕규와 사이가 나빠 군사 1백여명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정종은 그가 반란의 뜻을 품고 있는 것으로 의심해 갑곶(甲串)에 유배 보냈다. 왕규가 이 틈을 타서 황명이라고 위조해 그를 죽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 제127년 반역(叛逆) 조의 왕규전(王規傳)에는 왕규가 박술희를 증오하다가 혜종이 죽자 정종의 명령을 위조해 그를 죽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박술희전은 박술희가 혜종이 병들었을 때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왕규전은 박술희가 정종 때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왕규가 박술희를 죽였다는 점은 같다.

왕규의 죽음에 대한 기록도 석연치 않다. 위의 고려사(高麗史) 왕규전(王規傳)에는 혜종(惠宗)이 위독하자 정종(定宗)은 미리 서경의 왕식렴(王式廉)에게 연락해 반란에 대비하게 한 다음, 실제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왕식렴으로 하여금 평양에서 군대를 끌고 와 제압하게 했다. 정종은 왕규를 갑곶으로 귀양 보낸 후 뒤에 사자(使者)를 보내 목을 베도록 하고 그 도당 300여명을 처단했다고 한다. 고려사 제92권 왕식렴전(王式廉傳)에는 "왕식렴이 평양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서 국왕을 보위하니 왕규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이에 왕규 등 3백여명을 처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규를 귀양 보내 죽였다는 부분이 빠져 있다.

정종의 자리에서 쓰여진 고려사(高麗史)는 왕규가 박술희를 죽였고, 왕규는 반역을 꾀하다 정종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이 주내용이다. 기록에 다라 약간은 내용을 달리하지만 중요한 줄거리는 결국, 혜종을 지탱하던 두 기둥인 박술희와 왕규가 혜종의 죽음과 더불어 살해되었다는 내용이다. 혜종과 그의 두 기둥이 거의 동시에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혜종의 죽음에 커다란 의혹이 있음을 보여준다. 기록은 혜종을 보좌한 박술희를 죽인 사람은 정종이 아니라 왕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점 역시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재위 2년 4개월만인 945년 9월 승하한 혜종(惠宗)의 뒤를 이어 정종(定宗)이 즉위했다. 고려사는 그의 즉위를 군신들의 추대에 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 서경파 군신들에 의한 추대였다. 반면 개경파들은 광범위하게 숙청되었다.

정종은 즉위 후 왕권 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서경천도(西京遷都)를 계획한 것도 그 중 하나다. 정종은 고구려 고토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는 태조의 유훈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명분상 우위를 갖고 있었지만 개경파들은 그보다는 정종 자신의 지지 기반인 서경으로 천도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정종이 시중 권직(權直)에게 명해 서경 궁궐공사를 강행하자 이 역사(役事)에 동원된 백성들도 정종을 원망했다. 서경천도계획은 이렇듯 개경파와 백성들의 원성을 무릅쓰고 실행되어야 했으므로 쉬운 과업이 아니었다.

정종이 광군(光軍)을 조직한 이유 또한 왕권 강화에 있었다. 정종은 거란(契丹)에 포로로 잡혔었던 최광윤(崔光胤)이 거란이 내침계획을 갖고 있음을 보고하자 이를 계기로 예비군 성격의 광군 30만을 편성하고 광군사(光軍司)를 두어 통솔하게 했다. 정종은 광군사라는 중앙조직을 통해 군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경천도와 광군조직 등을 통한 왕권 강화 노력은 정종이 재위 3년(서기 948년)만에 병석에 누움으로써 결실을 맺지 못했다. 948년 9월 동여진(東女眞)이 소무개(蘇無蓋) 등을 사신으로 보내 말 7백필과 토산물 등을 조공으로 바치자 정종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와 이를 받는 도중에 벼락이 친 것이 와병(臥病)의 계기였다. 근신(近臣)이 부축해 중광전(重光殿)으로 피신했으나 정종은 이를 계기로 병이 들고 말았다. 불사리를 받들고 10리나 되는 개국사(開國寺)까지 걸어서 봉안할 정도로 불심이 돈독했던 정종으로서는 이 벼락을 자신의 즉위 과정에서 흘린 피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해석했을 수 있다. 정종은 이 병을 계기로 심신이 나약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재위 4년(서기 949년) 정월에는 정종의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왕식렴이 죽고 말았다. 이는 정종이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을 상실했음을 의미했다. 이에 더욱 상심한 때문인지 정종은 2개월 뒤인 3월에 동복동생 소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고 제석원(帝釋院)으로 옮긴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복형 혜종(惠宗)을 몰아내다시피 하고 즉위한 정종(定宗)은 서경천도와 광군조직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즉위 과정과 이후의 정책수행 과정에서 여러 세력들의 반발과 원망을 듣게 되었는데, 정종은 이런 반대를 무릅쓰지 못했다. 호족 연합정권의 한계를 왕권 강화로 돌파하려던 정종의 구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받아들였던 호족 연합체제의 유산은 그만큼 견고했던 것이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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