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터넷의 동영상에서 오프라윈프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침례교회 목사님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하나님은 편재-어디든 계심-하시고, 전능하시고, ... 그런데 하나님은 질투를 하신다고? 질투? ... 하나님이 나 때문에 질투를 하신다고? ... 내가 아는 하나님은 사랑으로 충만하시고 ... 그 때부터 다른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몸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된다고요? ...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먼저 ‘죽고 나면, 아무 생각도 없다’는 말에 대하여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엔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심판은 있습니다.
심판이 없고,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할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란 것은 성경이 이르는 진리의 빛이 비춰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하여서 눈 감을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를 인정하고 잘 사는 것과 죽음 이후를 인정하지 않고 잘 사는 것엔 극한 차이가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심판이 없는 상태의 세상의 법들은, 비양심과 배도를 야기하기 충분합니다.
1.일단. 죽음 이후의 심판과 천국과 지옥은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거짓이며, 거짓은 사탄의 것이고, 사탄의 것으로 들어갈 때 전체적인 양심의 문제와 정결함의 문제에 이상이 옵니다.
2.하나님의 나라의 능력과 관련된 가치는 영원한 세계에 대한 희망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영원한 세계가 분명코 존재한다고 믿을 때에 이 땅에서도 시행하며 열심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영원한 나라가 없다고 믿으면서 이 땅에서 하늘에 상급을 쌓을만한 일을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양심 심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옛적 예수를 몰랐던 사람들이, 예수를 몰랐어도 옳은 길을 가고 선한 삶을 산 경우 구원을 주시는 길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베드로전서 3:18,19
하늘엔 그들을 위한 대기 장소가 있는데, 감옥은 아니라고 합니다. 윗 성경 구절에 대하여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하신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과 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전도하셨고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었기에 몇 년, 몇 십년이 걸려도 변화되지 않는 어떤 사람들과 달리 곧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게 되어 천국으로 들여주셨다는 것이지요.
대다수의 기독교회는 그 목사님을 이단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목사님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정통 교단이 이단시 하는 어떤 교회나 목사님들에겐 수많은 기적와 이적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1
물론, 사탄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신명기 13:1-5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대한 기존교회의 설명은 이와 같습니다.
[설명] 우리말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읽어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직후에 영으로 연옥이나 지옥 어디에 내려가서 노아 당시의 구원받지 못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옥"은 어디인가? 감시를 통하여 행동을 속박 받는다는 뜻의 ’감옥’을 의미한다. ’옥에 있는 영들’이란 히브리서 12장 23절의 ’의인의 영들’이나, 히브리서 12장 9절의 ’모든 영의 아버지’ 또는 민수기 16장 22절이나 27장 16절의 "모든 육체의 생명이신 하나님"에 나타난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을 선악간에 하나님과 연관된 영적인 존재로 표현할 때 사용하는 성경적 용법이다.
진술된 ’영’이나 ’생명’ 모두 하나님의 생기나 성령을 뜻히는 헬라어의 "프뉴마"이거나 히브리어의 "루아흐"이다. 이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같은 본문의 다음절에 분명히 설명되어 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벧전 3 :20)이다.
그리하여 본문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죄악의 속박을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일은 과거 노아의 때에 일이었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또한 펑행절인 베드로전서 4장 6절에서도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재확인하고 있다.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변명의 여지가 있겠지만(행 17 :3O,31), 이토록 구원의 복음을 듣고도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벤전 3 :20)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적용되는 것이다(벤전 4 :5,6; 벧후 2 :5-10).
그 목사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사실대로 믿는 것이 옳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거짓말이고, 거짓은 곧 사탄의 것이며, 그것을 인정하거나 신뢰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 전체에 균열을 일으켜 의와 불의에 대한 감각을 손상시킬 수가 있다고 봅니다.
신학은 변증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이단들의 미혹과 잘못된 복음으로부터 신자들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서, 이단에게 대응하고 옳은 바를 설명하기 위하여서 만들어진 것이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복음 안에 살며 행하는 것’에 대하여서 부족한 면이 있을 수도 있고, 실제로 ‘언어로 다 표현키 어려운 하나님의 진리를 언어로 표현해낸 것’인만큼 그 부분 부분들엔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완전함”에 대비하여서 ‘인간적 관점의 해석’에 그치는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교회엔 많은 지체가 있지만, 각자 역할이 차이가 있습니다. 눈, 코, 귀, 입, 손, 발... 모두 역할이 다르지만 필요한 몸의 부분이듯 말입니다.
제 생각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유일성을 강조하며 확고히 하지 않으면 그것에 대하여서 인간적 변론의 틈을 벌리고 제2, 제3의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그것을 믿어버릴 사람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확실하게 강론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성경은 민족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또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유대인에겐 좋은 가르침이 되지만, 이방인에겐 더 강권적인 가르침이 필요한 항목이 있다고 봅니다.
어느 유대인 랍비가 생각하는 것처럼, ‘음욕을 품었다고 해서 간음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라든가 ‘돈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도구이다, 다만 돈 위에 사람이 있어서 돈을 다스려야 한다’ 라는 정도의 말로써는 ‘간음 죄에 빠지고’ ‘돈을 사랑함에 빠져 범죄하는 경우’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특별하게 하나님의 다루심을 입은 민족이며 지금도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구약성경과 철저한 율법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유대인의 교육이 유대인으로 만든다’ 라는 말이 알맞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양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위하여서 친히 ‘질투’하시고 징벌과 회복을 근실히 해오셨습니다.
사람은 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은 다 똑같지 않습니다.
사람의 소유물에 따라서도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지만, 소유물을 제외한 사람 자체를 생각해 봐도 각 사람들에겐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현대 사회 속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늘 동등하게 친절하여야 한다’는 것은 기억할 필요가 있지만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대하든지, 그것은 나의 일이고,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바뀔 수도 없는 기정 사실인 것입니다. 바뀔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유대민족들을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시며, 유대인들이 얻은 인격과 신앙적 순수성과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정도는 분명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신명기 4:23,24
고대 사회에선 ‘다신교’의 영향 사이에서 ‘확고하게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었지요.
성적인 농담을 하는 유대인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전혀 사실적이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적인 농담을 하는 미국인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할 땐, 오프라 윈프리는 미국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어릴 적에 임신까지 했던 일이 있습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음란이란 우상숭배 못지않게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반하는 행위이고, 그것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맹렬한 진노’를 받아 ‘징벌’되고 ‘멸망’되어야 하는 그런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프라 윈프리와 같은 사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와 형벌’로서 그렇게 대하여 다루신다면 과연 하나님께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나아갈 수 있을까요?
또,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그녀만을 향한 개인적인 뜻’이 과연 ‘유대인들을 다루시듯’ 진노하시고 형벌 주시는 것일까요?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야고보서 4:4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우상숭배는 곧 하나님의 은혜 베풀지 않으심의 증거입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복음이지요.
그러나 이런 말들 앞에 어떤 사람들은 회개치 않는 악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지만, 사실과 달리 어쨋튼 돌이킬 수 있는 사랑의 증거들을 통하여서 구원하려’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 원로 조용기 목사와 같은 사람도, 한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실제로 역사하는 계획’과 ‘성경에 기록된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와 의 차이점에 대하여서 인지하고서 지혜롭게 대처하여서 목회에 성공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떤 예언가는 ‘하늘나라엔 경제 계획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조용기 목사의 목회나, 그 초기 사역의 방향들, 여러 교회들의 성경을 넘나드는 사역들과 발언들은 ‘의를 이루기 위한 어떤 나름의 과정들’로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우상숭배는 곧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이유가 되며 인간의 우상숭배는 곧 하나님의 형벌과 치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목적은 ‘돌이키려 함’이거나 ‘강퍅케 하려 함’이거나, 어쨋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진실 아닌 상황논리에 맞는 타협된 내용”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선택이지만, “진실” 앞에서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것도 각 사람 자신의 선택인 것입니다.
무엇이 성경적인 것인지는 당연히 “진실”을 말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연약합니다. 자기 자신의 노력과 책략과 계략으로 바꿀 수 없고, 자기 힘으로 악을 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에 대하여서 끊어내지 않는 교만은 곧 패망의 이유가 되는 것이지요. 부정직에 대하여서 허용하거나 발을 들여놓는 일 자체가 오만한 일이며 방심하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야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진리 안에 있어야 진리로 말미암은 영계의 법적 보호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가 거짓을 발판 삼고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길이시며 생명이십니다.
유대인들에겐 늘 징계와 형벌의 역사가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고,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하나님의 다루심의 역사 속에서도 언제나 가장 최선의 위치에 하나님을 두고 섬겼습니다.
보통의 이방인들과 같은 그런 배경과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약의 이러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야고보서 4:5
물론 그녀는 지금 그 모든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훌륭한 TV쇼 진행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지요.
“하나님이 바다와 같다면 나는 한 컵의 물과 같다”
그러니까, ‘보편적으로 선포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시 외에, ‘실제로 개인적으로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대하여서 확실하게 깨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그녀의 위치가 어떠하며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는데 효과적인가를 깨우쳐 따라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론 그녀 스스로 순간적으로 내적인 낙심을 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질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녀의 삶, 그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다루심에 대한 두려움, 혹은 내적 갈등.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파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아모스 5:18-20
또한 그녀는 많은 대중을 상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롭게 처신한 것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말씀드리자면,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까지,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좀 더 시도해 볼 수 있는 부분까지만 발언을 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7:6
오늘날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있다고 말하는 국가들 가운데서도 죄악과 악행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도 교회의 직분을 맡길 때,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를 세울 것을 말씀하고 있지만, 오늘날 그렇지 못한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유대인들만큼은 믿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 중 상당수는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요.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하여서, 보통의 이방인 불신자를 생각하듯 한다면, 그것은 불신자들이 ‘천국과 심판’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과 기독교인을 업신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리라고 봅니다. 유대인에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하심의 은혜와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 이방인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서 ‘진실’을 인식하고 지혜로워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한다는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 라고 말하면서 참으로 가치가 없는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법칙과 심판을 면할 길을 알았다면 그 길을 택하여서 따라가면 되지, 왜 해답을 앞에 두고 죄 가운데 망하려 하는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멍청이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지옥에 간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둘 중의 하나겠지요. 지옥이 정말 어떤 곳인지를 인식을 못하고 있거나(하나님께서는 ‘보호’를 위하여서 인간에게 ‘두려움’이란 인지를 선물하셨다고 생각합니다만), 강퍅하기 때문이지요.
사실 완악하기 때문이지만 완악하다는 표현을 그들에게 쓰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신은 완악합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완악함으로부터의 해결, 즉 구원’을 보기 위한 ‘과정 안의 정죄’입니다. (죄를 질병처럼 취급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죄는 질병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지요. 치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되고 심판되어야할 악이란 뜻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불의함 가운데 타락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죄를 해결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이의 은혜를 거역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 불의한 자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서 하나님께서는 눈과 귀를 가리우고 우둔함 가운데 버려두시는것 아닐까요?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브리서 9:14
어떤 사람들은 굳이 ‘우리 민족’ ‘자기 나라’를 ‘과대포장’하고 싶어하고 ‘우월성을 입증’하고 싶어하지만,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잘 믿는 태도가 아닌가 합니다.
‘내가 누군가?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것에 대하여서 ‘환상’이 아니라 ‘옳은 것’을 믿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역할에 차이가 있듯이 말입니다.
막내가 부모님께 “왜 나는 맏아들이 아니냐, 나는 막내인 것을 인정할 수 없으므로 나는 당신을 부모로 볼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다 각자의 역할과 위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엔 유대 민족들에게 가르쳐 인지시킬 수 있는 진리와 이방 민족들을 바르게 양육하기 위하여서 가르치는 내용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에 대하여서는 이방인이 생각할 땐 가혹하리만치 질투하시고 그 영혼들과 환경들을 다루심으로서 악과 사탄의 세력들로부터 보호하시는 일들을 하시고 지금도 지키고 계시지만, 이방인에 대하여서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은혜의 논리에 따라서 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게 대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많이 파괴당할수록 하나님의 의안에 완전하게 된다.” 제가 만든 말이지만.
그래서 한편으론, 각 사람들의 차이대로 가르침과 강조점의 정도가 다르게 적용됨으로서 야기되는 교단, 교회, 사역자들 사이의 가르침의 차이도 인정할만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기독교회도 옳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