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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25.무신정권과 민중의 저항

개마기사단 |2011.10.11 12:08
조회 374 |추천 0

무신정권(武臣政權) 성립 이전 불교계의 주류로 황실 및 귀족세력과 밀착되어 있었던 교종(敎宗)은 무신정권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1174년 귀법사(歸法寺) 승려들의 봉기는 무신정권에 대한 교종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최씨(崔氏) 무신정권은 교종의 반발에 강력하게 대응하는 한편, 선종(禪宗)을 육성해 불교계의 주류를 교체하려 했다. 고려 중기 조계종(曹溪宗)의 등장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한편 무신들의 집권은 신분제에 대한 각성의 계기가 되어 농민(農民), 천민(賤民)의 봉기가 잇달았다. 농장의 확대로 유민화한 농민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민란(民亂)을 일으켰던 것이다.

● 무신정권과 불교

무신정권 성립 이전 불교계를 주도한 종파는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등 교종 계통이었다. 경인무신정변(庚寅武臣政變)의 당사자 의종(毅宗)은 그 어느 제왕보다 사원 행차를 많이 했는데, 그때마다 무수히 많은 재물이 소비되었다. 일례로 재위 14년 1월에만도 네차례에 걸쳐 사찰에 행차했다. 이는 비단 이 시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의종의 전 재위기간에 걸쳐 일반화할 수 있는 행사였다. 그해 10월에는 보현사(普賢寺)에 행차해 승려들에게 음식을 먹이면서, 30근짜리 은병(銀甁) 10개에다 다섯가지 향(香)과 다섯가지 약(藥)을 담아 시주했으며, 구정(毬庭)에서 승려 3만명에게 3일 동안 음식을 공양하기도 했다.

고려 중기 교종은 이처럼 황실이나 문신(文臣)귀족들과 밀착되어 있었다. 그러던 이들에게 무신정권의 성립은 곧 비호세력의 몰락을 의미했다.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교종세력은 문신귀족들과 결탁해 무신정권에 대한 실력 항쟁에 나섰다. 무신정권에 대한 위로부터의 저항이었다.

명종(明宗) 재위 4년(서기 1174년) 정월 귀법사의 승려 100여명이 봉기한 사건은 교종세력의 무신정권에 대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귀법사 승려 1백여명이 성 북문으로 침입해 선유승록 언선(彦宣)을 살해했다. 이의방(李義方)이 군사 1천여명을 거느리고 나가 승려 수십명을 죽이자,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갔으나 군사들 중에서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그 다음 날에는 중광사(重光寺), 홍호사(弘護寺), 귀법사(歸法寺), 홍화사(弘化寺) 등 여러 절의 승려 2천여명이 성동문 밖에 집결했다. 이에 성문을 닫았으나 그들은 성 밖 인가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로 숭인문(崇仁門)까지 태운 후 돌입해서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했다. 이의방이 이것을 알고 부병(府兵)을 징집해 그들을 쫓아 승려 1백여명을 죽였으나, 부병 또한 많이 죽었다. 이의방은 부병을 풀어 각 성문을 수비하게 하고 승려의 출입을 일체 금지했다.

고려사(高麗史) 이의방전(李義方傳)'

이의방은 나아가 부병을 모아 봉기에 가담한 중광사, 홍호사, 귀법사, 용흥사, 묘지사, 복흥사 등의 사찰을 파괴하고 기명을 약탈했는데, 이 과정에서 부병과 승려 쌍방간에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부병과 승려들이 정면충돌한 이 사건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무신정권에 대한 불교계의 조직적인 반발이었다.

최충헌(崔忠獻)은 집권 후 불교계 정비에 나섰다. 즉 명종의 승려가 된 아들들이 황궁에 머물면서 정사(政事)에 가담하는 일이 그르다면서 왕자 홍기(洪機), 홍추(洪樞) 등 7명을 본사(本寺)로 돌려보냈으며, 황제의 총애를 받던 승려 운미(雲美)와 존도(存道)도 쫓아냈다.

승려들은 이에 무력(武力)으로 저항했다. 1217년 거란군이 개경 가까이 접근해 왔을 때의 일이다. 최충헌은 개경 주변의 사찰 승려들을 승군으로 선발해 보냈다. 그러나 이 중 흥왕사, 홍원사, 경복사 등의 승려들이 패잔병으로 가장하고 새벽녘에 선의문으로 와서 거란병이 들이닥쳤다며 문을 열라고 요구했다. 이상히 여긴 수비병들이 거절하자 승군은 수비병 5, 6명을 죽이고 성 안으로 난입했다. 그들은 최충헌의 측근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 김덕명(金德明)을 죽이고 곧바로 최충헌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순검군의 역습을 받아 신창관(新倉館)까지 쫓겨갔고 이 곳에서 최충헌의 가병(家兵)과 맞섰다. 그리고 순검군과 최충헌 가병들의 협공에 승려 지휘자는 화살에 맞아서 쓰러지고 나머지는 도망쳤다. 최충헌은 이들의 뒤를 쫓아 3백여명의 승군을 죽였다. 이 사건을 고려사(高麗史)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튿날 최충헌은 성문을 닫고 도망간 승려들을 수색해서 모두 죽였다. 때마침 큰 비가 내려 피가 개울물처럼 흘렀으며 또 남계천(南溪川)가에서 승려 3백여명을 죽여서 전후 거의 8백여명의 승려들을 죽였으므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몇달 동안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못했다.

고려사(高麗史) 최충헌전(崔忠獻傳)

최충헌은 이후 교종 승려들에 대한 경비를 강화했지만 불교국가 고려에서 불교계 자체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최충헌 등 무신 집권자들이 교종을 대체할 종단으로 선종을 주목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무신정권과 선종은 서로 목적은 달랐지만 불교계의 개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이것이 무신 집권기에 선종인 조계종(曹溪宗)이 번창하는 배경이다.

최충헌은 정화택주(靜和宅主)가 낳은 둘째 아들을 조계종에 출가시켰는데 이는 최충헌이 불교계 장악에 얼마나 관심을 쏟았는지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조계종은 지눌(知訥)과 그 뒤를 이은 혜심(慧諶) 등 강력한 불교 개혁의지를 지닌 뛰어난 선사들의 노력과 최씨 정권의 후원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교종을 누르고 고려의 지배적인 종단으로 발돋음했다. 선종이 불교계의 주류가 되면서 무신정권에 반발하는 승려들의 조직적 저항도 줄어들었고, 불교계는 무신정권과 함께 안정을 구가하게 되었다.

● 농민에 대한 수탈과 자각

무신정권 시기는 한국 역사에서 신라 말기, 조선 말기와 더불어 민란의 시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의 민란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중첩된 모순이 폭발해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불씨는 무신정권 이전부터 잠재해 있었다. 다음 기록을 보자

'지금의 수령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이익으로 삼는 자가 많고 근면과 검소함으로 무민(憮民)하는 자가 적어 창고가 비고 백성들이 궁핍하다. 여기에 역역(力役)이 더해지니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되어 일어나 함께 도적이 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식화(式和) 2편, 인종(仁宗) 재위 6년(서기 1128년) 3월 조

이는 지방관들의 백성 수탈이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 고려사의 예종(睿宗) 즉위년(1105년) 12월 조에 이미 "유망이 연이어 열집 가운데 아홉집이 비게 되었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은 무신정권 이전에 이미 농민층이 해체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지방관의 수탈과 더불어 권세가들의 토지탈점에 의한 농민의 전호화(佃戶化)도 농민층 해체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권세가들의 토지탈점으로 토지의 사유화가 늘어나면서 수조권(收租權)에 기반한 전시과(田柴科)체제가 붕괴되어 갔다. 전시과체제의 붕괴는 권세가의 사유지인 농장(農蔣)의 확대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는 바로 농민생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생활 기반이 붕괴된 농민들은 유망하거나 도적이 되거나 집단적으로 봉기하는 것으로 지배계급에 저항했다. 현종(顯宗) 재위 20년(서기 1029년) 광주(廣州)에서 무장한 도적들이 봉기하자 용호군(龍虎軍)이 진압한 것이나, 문종(文宗) 6년(서기 1052년) 전국 각지에서 굶주려 유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발생하자 의창(義倉)을 열어 진휼을 시행한 것, 예종(睿宗) 1년(서기 1106년) 서해도(西海道)의 유주(儒州) 등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유민이 발생하자 감무관(監務官)을 파견하여 정착시킨 것이나, 인종(仁宗) 6년(서기 1128년) 합주(陜州) 삼기현(三岐縣) 등에 천민 마을을 설치하고 이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 등은 이 당시 농민층의 붕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의종(毅宗)은 백성 생활의 안정에 힘을 쏟아야 했으나 경인정변(庚寅政變) 발발 이전의 그의 재위기간에는 농민생활이 더욱 피폐해져 봉기가 잇달았다. 1162년 이천(伊川), 안협(安峽), 동주(東州), 평강(平康), 영풍(永豊), 의주(宜州), 곡주(谷州) 등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자 병부낭중 김장(金莊) 등을 파견하여 진압하도록 한 것, 같은 해 개경에서 폭동이 일어나 30여명이 영평문(永平門)을 파괴한 것 등이 이를 말해준다.

의종은 이런 상황에서도 경인정변이 발생하는 재위 24년까지 향락만을 일삼았다. 경인정변의 성공은 무신들의 불만뿐만 아니라 고려 중기 문신 지배체제의 수탈에 신음하던 농민 등의 광범위한 불만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신들은 막상 정권 장악에 성공하자 고려 중기 이래의 사회 모순 해결에 주력하기보다 '의종의 사저(私邸) 셋을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가 다 나누어 가졌다.'는 고려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신들의 사익 추구를 앞세웠다. 염신약(廉信若)의 토지를 정중부가 빼앗았다는 기록이나 '이의민(李義旼)이 백성들이 사는 집을 많이 점령해 큰 집을 짓고 남의 토지를 빼앗아 마음대로 탐학하니 중외가 함께 진노하고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판대부사(判大府事)를 역임한 염신약까지 초지를 빼앗길 정도였다면 힘없는 일반 백성의 경우에는 말할 나위도 없다. '각처의 부강한 양반이 빈약한 백성이 빌린 것을 갚지 못하면 예부터 내려오던 정전(丁田)을 빼앗으므로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더욱 가난해졌다.'는 기록에는 일반 백성들이 자신의 토지에서 강제로 축출되는 상황이 드러나고 있다. 같은 기록은 또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양반의 가전(家田)과 군인들의 영업전(永業田)까지 권세가들이 빼앗았다고 전해주고 있다. 경인정변이 발생하자 농민들은 이런 잘못이 바로 잡히기를 바랐으나, 집권 무신들 역시 사익 추구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한편 무신들의 집권은 농민, 천민들로 하여금 신분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고려 사회는 양반, 중간층, 양민, 천민의 신분이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으나 경인정변으로 신분제보다는 실력이 우선하는 풍토가 조성되면서 농민, 천민들은 신분제가 하늘의 법칙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3품 병부상서를 지낸 이영진(李英搢)과 종2품 지문하성사를 지낸 백임지(白任至) 등의 사례나, 어머니가 관기였던 천인 출신 조원정(曺元正)이 정3품 추밀원지사를 지낸 것이나, 미천한 신분으로 창고 부근에서 쌀을 주워 먹으며 살았던 석린(石鱗)이 정3품 상장군에까지 오른 것, 심지어 어머니가 옥령사(玉靈寺)의 여종이었던 천민 이의민이 무신정권의 최고 집정자가 된 사실은, 권세가의 탈법에 시달리던 농민, 천민들을 크게 각성시켰다. 무신정권 때 잇달았던 농민, 천민의 반란은 이런 사실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 농민의 봉기

무신정권에 대항해 가장 먼저 일어난 봉기는 1174년 서북면병마사 조위총이 서북의 40여성과 함께 일으킨 반란이었다. 살해된 의종(毅宗)을 장사 지내지 않는 정중부, 이의방 타도를 주창하며 일어난 이 봉기는 1176년에 진압되었으나, 몇 개월 후인 이듬해 4월 그 잔존 세력과 서북민들이 합세해 정주(靜州), 의주(義州)에서 다시 봉기했으며, 다음 달에는 서경에서 이에 동조해 봉기했다. 이 서북민의 봉기는 당초 조위총 등 벼슬아치의 주도로 시작되었으나, 조위총이 사망하고 난 후에는 사진(思進), 김보(金甫) 등 농민층이 주도했다. 조위총의 반란이 발생했을 때 명종(明宗)은 "여러 고을에서 백성들과 근심을 나누어야 할 지방관들이 오히려 백성들을 해함으로써 그들이 유리하여 살 곳을 잃어버리게 하지 말라."면서 봉기 발생의 원인이 지방관의 탐학에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막상 조위총의 반란이 진압되자 도주했던 사람들을 역적이라고 부르면서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산을 강탈해 이에 분개한 서북민들이 재차 봉기한 것이다. 이 봉기는 명종 재위 8년 10월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전국적인 농민, 천민의 봉기에 효시가 되었다.

북쪽에서 서북민들의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명종 재위 6년(서기 1176)년 정월,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다. 이 시기 공주를 비롯해 한반도 남부에서 발생한 여러 농민봉기세력을 남적(南賊)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연합적인 성격을 띠면서 정권을 위협하기도 했다. 망이, 망소이의 반란은 천민집단인 소(所)에서 발생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소는 금, 은, 동, 자기 등 특수 공물을 생산하던 특수지역이었다. 고려는 현종(顯宗)대 이후에는 거란족의 요나라에, 인종(仁宗)대 이후에는 여진족의 금나라에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는데 여기 소요되는 금은 세공품 등은 모두 이런 소의 몫이어서 국가의 끝없는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명종(明宗) 재위 6년 정월 망이, 망소이는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스스로 일컫고 공주(公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으로 반란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에 놀란 명종은 신중원(神衆院)에 가서 분향을 한 후 지후(祗侯) 채원부(蔡元富)와 낭장(郎將) 박강수(朴剛壽) 등을 보내 달래게 했지만 망이, 망소이는 이를 거부했다. 조정에서는 대장군 정황재(丁黃載), 장군 장박인(張博仁) 등에게 장사 3천여명을 주어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그해 3월 남적집착(南賊執捉)병마사의 "적과의 싸움에서 실패하여 군사의 대부분을 상실했으니 승려들을 모아 군사의 수효를 보태게 해 달라."는 보고처럼 관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서북민의 봉기가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관군이 망이, 망소이의 남적에게 패배하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적극적인 회유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동년 6월에 망이의 고향인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하고, 내원승(內園丞) 양수탁(梁守鐸)을 현령으로, 내시(內侍) 김윤실(金允實)을 현위(縣慰)로 삼아 무마하게 하는 것이었다. 천민고을인 소를 양인고을인 현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천민인 소민들을 양민인 현민으로 승격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바로 그 달 조위총이 관군에게 패하여 전사했으나 남부에서는 또 다른 봉기군이 그 해 9월 예산현을 함락시키고 감무관(監務官)을 죽이면서 사태가 진정되기는커녕 확산되었다. 명학소의 봉기군이 충주를 점령하고 잠시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 지배층 내부에서 이에 동조하려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그해 11월 양온령동정(良蘊令同正) 노약순(盧若純) 등이 평장사(平章事) 이공승(李公升) 등을 사칭하며 망이에게 편지를 보내 제휴를 요청한 것이었다. 망이가 이 요청을 받아들였더라면 명학소의 민란은 천민의 봉기에서 지배층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연합봉기로 확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망이는 이들 지배층의 제휴 요청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편지를 가져온 사자(使者)를 붙잡아 조정 측의 안무별감(安憮別監) 노약충(盧若沖)에게 보냈다.

이는 망이가 지배층들에게 갖고 있는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조정의 충순현 승격 조치가 진심이라면 더 이상 진격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기도 했다. 서북면을 비롯한 여러곳의 봉기를 진압해야 하는 조정이 망이의 이런 행위를 고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은 물론이다. 고려사(高麗史)는 '명종(明宗) 7년 정월에 망이, 망소이 등이 항복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조정 측의 자리에서 서술된 것이고 사실은 양측의 협의 결과 강화(講和)를 맺었음을 의미한다. 감찰어사 김덕강(金德剛)이 그들을 고향으로 호송했다는 기록은 강화의 결과 안전을 보장한 후속 조치일 것이다.

그러나 강화는 불과 두달이 채 못되어 깨지고 말았다. 다시 봉기한 명학소민들은 가야사를 함락시키고 여주와 진천까지 쳐들어갔으며 1177년 3월 죽주(竹州)의 홍경원(弘慶院)을 불지르고 승려 100여명을 살해했다. 그러고는 주지승을 위협해 개경에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에 "우리 향리를 현으로 승격시키고 수령을 두어 안무케 하더니, 다시 되돌려 군사를 보내 토벌해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가두니 그 뜻하는 바가 어디 있느냐?"라는 대목이 바로 재봉기의 이유였다. 앞서 동년 2월 조정은 또 다른 남적이었던 가야산의 적괴 손청(孫淸)을 참살했는데 관군이 그 여세를 몰아 망이, 망소이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가두는 등 그들을 압박해 왔던 것이다. 이에 분개한 이들은 "차라리 창, 칼 아래 죽을지언정 끝까지 항복한 포로는 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서울에 이르고 말겠다."라는 결사항전(決死抗戰)의 결의를 보였다.

반란군은 이후 더욱 기세를 올려 아주(牙州)를 함락시켰다. "이때 청주목 관하의 군현들이 모두 함락되었으나 청주만은 굳게 지키고 있었다."는 기록처럼 청주를 제외한 충청도 전역이 모두 망이, 망소이의 반란군에게 장악된 것이었다.

더 이상의 회유가 통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무신정권은 선지사(宣旨使)를 파견해 병마사 등의 전공을 심사해 관군의 사기를 앙양하는 한편, 충순현의 현호를 삭제하고 다시 소로 강등시켰다. 1177년 7월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밀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망이, 망소이가 병마사 정세유(鄭世猷) 등에게 체포되어 청주 감옥에 갇힘으로써 1년 반 동안 지속된 망이, 망소이의 반란은 끝나고 말았다.

이처럼 망이, 망소이의 반란은 천민마을인 소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전개 과정에서 충청도 전역으로 급속히 확대되어 갔다. 천민반란이 천민, 농민반란으로 발전한 것은 천민뿐만 아니라 농민들도 지배체제에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일반 백성들을 진무하기 위해 각지에 찰방사를 보내 지방관의 탐학 여부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체제 자체의 문제점은 그대로 둔 채 지방관의 탐학에만 원인을 국한시키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했으며 더구나 찰방사가 압송해온 장리(臟吏) 35명을 즉석에서 풀어주었다는 기록은, 당시 무신정권의 체제로는 농민, 천민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었다.

명학소의 민란이 진압된 후 일단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명종 재위 12년(서기 1182년) 무렵부터 각지에서 다시 농민들이 봉기하기 사작했다. 명종 재위 12년 2월에는 관성(管城) 백성들이 탐학한 현령을 잡아가두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같은 달 부성(富城)에서는 백성들이 현위(縣尉)의 관리와 노비까지 죽이고 현령과 현위의 아문을 폐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다음 달인 명종 12년 3월 전주에서 다시 대규모 농민봉기가 발생하게 된다.

그 계기는 백성들에 대한 과도한 역역(力役)이 문제였다.

'진주사록(司祿) 진대유(陳大有)가 자신의 청렴고결함을 자부해 사소한 일에도 백성들에게 형벌을 혹독하게 하니, 백성들이 심히 괴로워했다. 국가에서 정용군(精勇軍)과 보승군(保勝軍)을 보내 관선(官船)을 만들게 하자 진대유는 상호장(上戶長) 이택민(李澤民) 등과 함께 역사(役事)를 감독하면서 매우 까다롭게 굴었다. 기두(旗頭) 죽동(竹同) 등 6명이 관노(官奴)와 불평자들을 불러모아 난(亂)을 일으켜 진대유를 산중의 절로 쫓아내고 이택민 등 10여인의 집을 불태우니 이속(吏屬)들이 모두 도망쳤다.

고려사(高麗史) 명종(明宗) 재위 12년 3월 조'

경인무신정변(庚寅武臣政變)으로 전통 질서의 붕괴를 경험한 농민들은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지 봉기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신분제가 하늘의 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속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농민들은 청렴한 인물이었던 진대유가 국가의 명에 따라 엄격하게 집행하던 역역에 대해서조차 불만을 갖고 항거하기에 이르렀다. 즉 국가 자체가 지배층을 위한 도구임을 깨닫고 국가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전주의 경우 농민들이 판관(判官) 고효승(高孝升)에게 압력을 가해 주(州)의 관리를 바꾸었는데, 고려사(高麗史)는 "고효승은 다만 도장을 찍어줄 따름이었다."고 적어 농민들의 저항에 의해 국가의 공적 체계가 붕괴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조정에서는 안찰사 박유보(朴惟甫)를 보내 이를 진압하게 했다. 농민들은 군진(軍鎭)을 베풀어 저항 의사를 보이는 한편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안찰사 박유보는 어쩔 수 없이 전주의 소요를 무마시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진대유를 개경으로 압송하고 농민들을 설득했다. 물론 농민들은 듣지 않았다. 박유보가 도내(道內)의 군졸을 동원해 토벌하려 하자 농민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이때 "안찰사가 보낸 군사가 성을 공격한 지가 40여일이나 되었으나 항복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에서처럼 농민군은 완강히 저항했다. 결국 성에 들어간 합문지후 배공숙(裵公淑)이 일품군(一品軍) 대정(隊正)을 회유해 승려들과 함께 죽동 등 주모자 10여인을 죽인 다음에야 겨우 평정될 수 있었다. 약 두달간 계속되던 전주 농민들의 봉기는 내부 분열의 결과 지도부가 암살되면서 와해되고 말았다.

이처럼 천민, 농민의 봉기가 잇따르는 상황은 무신정권에게 일대 내정 쇄신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현상 유지에 만족한 채 문제가 발생하면 회유와 진압을 번갈아 사용하며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일관했고, 그 결과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명종(明宗) 재위 14년(서기 1184년) 이의민(李義旼)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농민, 천민들의 봉기는 끊이지 않았다. 명종 재위 16년 7월 진주수령 김광윤(金光允)과 안동수령 이광실(李光實)이 욕심이 많아 가혹하게 재물을 긁어모으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반역을 모의했고, 명종 20년(서기 1190년)에는 동경(東京)에서 부사 주유저(周惟低)가 농민봉기군을 습격하다가 오히려 반격을 받고 많은 군사가 살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동경은 최고 집권자 이의민의 고향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이의민의 정치적 기반을 흔들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농민들은 천인 출신으로 최고 집권자가 된 이의민이라면, 백성들에 대해 전향적인 시책을 펼칠 것이라 기대했으나, 그런 기대가 무산되자 봉기에 나섰던 것이다.

명종 재위 23년 7월에는 운문(雲門)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의 효심(孝心)이 대규모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운문은 현재 경북 청도, 초전은 성주(星州) 혹은 울산, 밀양 등으로 추측되는데 이들은 망명한 무리를 불러모아 여러 주현(州縣)을 장악했다. 명종은 이 사태를 우려하며 대장군 김존걸(金存傑), 이지순(李至純) 등을 보내어 진압하게 했으나, 오히려 관군은 농민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대장군 김존걸은 농민군 진압에 실패한 후 기양현(基陽縣)에서 자결하고 만다. 이는 농민군이 경상도 대부분을 장악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같은해 8월 이공정(李公靖) 등은 전열을 수습해 농민군과 싸웠으나 관군은 다시 패배하고 만다. 조정에서는 다시 대장군 최인(崔仁)을 남로착적(南路捉賊)병마사로 삼아 진압하라고 명령했고, 이때 관군은 세갈래로 나뉘어 농민군을 공격한다. 최인은 강릉으로 나갔고, 우도병마사 사량주(史良柱)는 운문으로, 남로병마사 고용지(高湧之)는 밀양에서 농민군과 대치했던 것이다.

이는 경상도뿐만 아니라 강원도까지 농민항쟁의 와중에 휩쓸린 것을 의미한다. 농민군은 명종 재위 24년 2월에 김사미가 스스로 행영(行營)에 와서 투항한 것을 계기로 그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해 같은 해 4월 남로병마사에게 밀성(密城) 저전촌에서 무려 7천여명이 전사하는 타격을 입고, 같은 수의 무기와 우마를 빼앗기는 패배를 당한다. 이로써 이때의 농민봉기도 실패로 끝난다. 운문, 초전에서 시작된 농민봉기는 비록 실패했지만, 이전의 고립적인 봉기에서 벗어나 경상도와 강원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전개되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지 못했고 각 지역을 아우르는 통합적 지도체 구성에도 실패함으로써 관군에게 궤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 최씨 정권 아래서의 농민, 천민봉기

앞서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崔忠獻)은 황제에게 '봉사(封事) 10조'를 올려 고려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당시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또한 무력(武力)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임금까지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하극상이 계속되다 보니, 일반 양인이나 천민들도 기존 질서에 순응하기보다는 기회만 있으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최충헌 정권에 대한 최초의 저항이 최충헌의 사노(私奴) 만적(萬積)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은 무신정권기의 이런 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려사(高麗史)에서 그 모의 과정을 살펴보자

'신종(神宗) 원년(서기 1198년) 사동(私憧) 만적(萬積) 등 6인이 북산에서 나무하다가 공(公), 사(私) 노비들을 불러 모의하기를, "나라에서 경인(庚寅), 계사(癸巳)의 역(逆) 이후로 높은 벼슬이 천민과 노비에게서 많이 나왔다. 공경장상(公卿將相)이 어찌 씨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만 왜 근육과 뼈를 괴롭게 하며 채찍 밑에 곤욕당해야 하겠는가."라고 말하자 여러 노비가 모두 그렇게 여겼다.

이에 누런 종이 수천장을 잘라 모두 '정(丁)'자를 새겨 묘식으로 삼고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흥국사(興國寺) 복도에서부터 구정(毬庭)까지 한꺼번에 모여들어 북을 치고 고함치면 대궐 안에 내수(內竪)들도 반드시 내응할 것이니 관노(官奴)들은 대궐 안에서 죽일 놈들을 베어 없애고, 우리는 성 안에서 봉기해 가장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이고, 이어서 각자 자기 주인을 쳐서 죽이고 노비문서를 불살라 버리자. 이로써 우리 나라에 천인이 없게 하면 공경장상을 우리가 모두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고려사(高麗史) 최충헌열전(崔忠獻列傳)

천인들이 신분제의 장벽을 뛰어넘어 최고 집권자까지 되는 것을 본 노비들은 더 이상 신분제를 하늘의 질서로 생각하지 않았다. 만적의 연설은 신분제 철폐와 천인들의 정권 장악이라는 뚜렷한 지향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막상 거사날인 갑인일이 되자 모이기로 한 수천명 중에 수백명밖에 모이지 못하면서 거사는 위기에 봉착했다. 일단 거사를 연기한 노비들은 보제사(普濟寺)에 다시 모이기로 약속하면서 비밀엄수를 약속했으나 율학박사(律學搏士) 한충유(韓忠兪)의 가노(家奴) 순정(順貞)이 주인에게 변란을 고하는 바람에 모의사실이 발각되었다. 고려사는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충헌이 '만적 등 1백여명을 잡아 강에 던지고, 한충유에게는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제수하고 순정에게는 80냥을 하사하고 양민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만적의 나머지 무리는 모두 벨 수 없으므로 조서로써 죄를 묻지 않도록 했는데 이는 이 사건에 가담한 노비들을 모두 처벌할 경우 노비 경제체제가 붕괴될 지경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이 시기 대다수의 노비들은 신분제 철폐라는 뚜렷한 지향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살아 남은 노비들은 다시 기회를 엿보았다. 신종(神宗) 재위 6년(서기 1203년) 4월, 개경의 가동들이 나무와 풀을 베는 척 하다가 개경 동쪽 교외에 모여 대(隊)를 나누어 전투 연습을 하는 것이 발각되었다. 최충헌이 체포하게 했으나 대부분이 도망가고 50명만이 체포되어 강에 던져졌다. 이처럼 한번 터지기 시작한 신분해방운동(身分解放運動)의 불길은 꺼질 줄을 몰랐다.

제주도[耽羅]에서 발생한 민중봉기는 지역의 자치를 지키기 위한 것이란 점에 특징이 있다. 제주도는 삼국시대 이래 성주(星主)의 왕자를 중심으로 다스리는 사실상의 자치지역이었다. 그런데 고려 성종(成宗) 때에 구당사(勾當使)를 파견하고, 현종(顯宗) 때 고려의 군현임을 표시하는 주기(朱記)를 내리는 등 차차 고려 조정의 영향력이 강화되다가 숙종(肅宗) 재위 10년(서기 1105년)에 이르러 고려의 군현(郡縣)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자치의 뿌리가 워낙 깊다보니 성주와 왕자를 중심으로 다스리는 지배 형태는 상당부분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이런 자치권을 부정하면서 탐라 주민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야기되었다. 의종(毅宗) 재위 22년경 양수(良守) 등의 주도로 민란이 발생했는데, 그간 지역민들과 잘 융합했던 탐라현령 최척경(崔陟卿)의 후임으로 탐관(貪官)들이 부임해 온 것이 계기였다. 전라안찰사가 "탐라 사람들이 현령과 현위의 포악에 시달려 변란을 일으켰다."며 "만약 최척경을 현령으로 삼는다면 당장 무기를 버리겠다고 한다."라고 보고한 것은, 항쟁의 가장 큰 원인이 지방관의 탐학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최척경의 재부인으로 민란은 종결되고 제주민들의 자치권은 다시 상당부분 인정되었다.

그러나 명종(明宗) 재위 16년(서기 1186년) 7월 어떤 사람이 탐라가 반역했다고 고하니 황제가 안무사와 탐라현령을 새로 파견했다는 기록이나 신종 재위 5년 10월의 "탐라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소부소감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 이당적(李唐積)을 보내 안무하게 했다."는 기록은, 그 후로도 지역 자치권을 둘러싼 마찰이 끊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 신종 5년 12월 "탐라안무사 장윤문과 이당적이 적의 우두머리 번석(燔石), 번수(燔守) 등을 모두 처형했다고 아뢰었다."는 기록은 제주민이 끝가지 저항하다가 끝내 진압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제주민의 자치권은 상당한 제약을 받았는데, 제주민들은 조정의 출륙환도(出陸還都)에 반대하는 삼별초(三別抄)를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경주 지역은 최충헌의 가장 큰 반대 지역이었다. 최충헌은 집권 후 경주에 살던 이의민의 친족들을 제거하려 했는데 이에 이의민의 친족들이 반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아래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경주부유수(慶州副留守) 방응교(房應僑)를 파면하고 낭중(郎中) 위곤겸(魏滾謙)으로 대신하게 했다. 처음 최충헌이 이의민의 친족을 처다할 때 경주별장(慶州別將) 최무(崔茂)가 경주 관리의 명을 받들어 이의민의 친족인 사경(思敬) 등 여러 사람을 잡아서 형벌을 내렸다. 이에 사경의 친족인 백유(佰瑜), 직재(直才) 등이 원망하며 응교에게 "무가 난(亂)을 일으키려고 합니다."라고 호소했다. 방응교가 이 말을 듣고 최무를 가두었더니 백유, 직재가 밤에 옥에 들어가서 그를 죽였다. 그런데 응교가 함부로 살해한 죄는 묻지 않고 도리어 최무의 족인인 용웅(用雄), 대의(大義) 등을 잡아 죽이려고 하자 경주인들이 분노하고 원망했다. 얼마 후에 용웅, 대의가 백유, 직재를 죽였지만 용웅 또한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대의 등이 주(州)의 무뢰배를 모아 횡포한 짓을 함부로 했는데, 응교 또한 제어하지 못했다.

고려사(高麗史) 신종(神宗) 재위 3년 12월조'

이의민의 친족 백유 등이 최무를 죽였음에도 방응교가 오히려 최무의 친족을 제거하려고 한 것은 방응교가 이의민의 지지 세력임을 의미한다. 이의민 정권 때 경주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의민의 세력들은 최충헌이 자신들을 제거하려 하자 반발했던 것이다.

최충헌 집권기의 경주는 중앙의 힘이 미치지 않는 무법천지였다. 신종 재위 5년(서기 1202년) 8월 최충헌이 문무관리들과 경주의 일을 의논했다는 기록은 이때까지 경주가 계속 소요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신종 5년 10월에는 경주별초군(慶州別抄軍)이 운문과 부인사. 동화사의 승도들을 끌어모아 영주(永州)를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경주의 토호들이 조직적으로 경상도 일대를 장악하려 했음을 뜻한다. 경주인들은 이런 여세를 몰아 최충헌 집권기 신라 부흥까지 꾀했다.

'경주인이 반란을 도모하여 비밀리에 낭장동정(郎將同正) 배원우(裵元祐)를 전장군 석성주(石成柱)가 귀양 가 있는 고부군에 보내어, "고려의 왕업은 거의 다 쇠진했으니 신라가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공을 군왕으로 삼아 사평도(沙平渡)를 경계로 삼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설득하니 석성주가 거짓으로 기뻐하며 배원우를 집에 머물게 하고는 은밀히 군수 유정(惟貞)에게 가서 고했다. 유정이 배원우를 잡아 안찰사에게 보내니 안찰사가 중앙에 알린 후 죽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종(神宗) 재위 5년 11월조

경주인들에 의해 주도된 신라 부흥계획은 국왕 추대 건의를 받은 당사자 석성주의 거부로 좌절되었지만 소요는 계속되었다. 신종 5년 12월에 발생한 이비(利備), 패좌(悖佐)의 반란이 그것이다. 이비는 경주도령(慶州都領)이었다는 점에서 경주 토호였다고 보여지는데 패좌는 동경야별초(東京夜別抄)를 역임한 무인이었다. 두 세력이 연합해 일어나자 최충헌은 대장군 김척후(金陟侯)를 초토처치병마중도사(招討處置兵馬中道使)로 삼아 최광의(崔匡義), 강순의(康純義), 이유성(李維城) 등과 함께 삼군(三軍)을 이끌고 토벌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경주인들은 운문(雲門), 울진(蔚珍), 초전(草田) 등에서 동조 세력들을 모아 관군에 맞섰다. 관군은 3군으로 나누어 김척후는 운문, 강순의와 이유성은 기계(己溪), 최광의 등은 기양(基陽) 지역을 공격했다. 운문에서의 전투는 결국 관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관군 측 사상자도 적지 않았다.

관군이 반란군을 진압하기는커녕 수비에만 급급하다는 이유로 대장군 김척후가 중도에 소환되어 파직당하고 정언진(丁彦眞)으로 교체된 것은 관군의 진압 과정이 그리 수월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반란군에도 위기가 닥쳤다. 이비 부자가 관군의 눈을 피해 밤에 기도하러 가다가 정언진의 사주를 받은 무당의 꾐에 빠져 사로잡혔던 것이다. 이비 부자가 체포되면서 전열은 급속하게 붕괴되었고, 패좌는 남은 군사를 수습해 운문산에 은거했다. 정언진이 대정(隊正) 함연수(咸延壽)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자 패좌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으나 자신의 부장(副將)이 이미 매수된 뒤여서 그 역시 허무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남은 반란군은 다시 운문산에 은거했으나 산각(山角), 득광(得光) 등이 항복하면서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최충헌은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안찰사 박인석(朴仁碩)에게 경병(京兵) 2백명을 주어 남은 무리를 소탕하게 했다. 그리하여 신종 재위 7년(서기 1204년) 5월 박인석이 김순(金順) 등 20여명을 사로잡는 것으로 경주인의 항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외세의 침략과 농민, 천민봉기

무신정권 수립 후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무신정권의 집정자들은 자신들의 이권 확보에만 전력을 기울일 뿐 농민들은 수탈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 여기에 고종(高宗) 무렵부터는 거란(契丹), 몽고(蒙古) 등 외세(外勢)의 침략까지 더해져 백성들의 고통이 가중되었다. 백성들은 국내 권세가의 탐학 아래 외세의 압박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런 고통 속에서 백성들은 외세와 조정 모두를 반대하기도 했고, 때로는 외세와 손잡고 조정을 압박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시기별 특징을 드러내기도 한다. 13세기 초의 민중봉기가 반몽(反蒙), 반정(反廷)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면 13세기 말의 민중봉기는 항몽투쟁(抗蒙鬪爭)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고종(高宗) 재위 3년 8월 거란군 수만명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오자 고려 조정은 삼군을 출동시켜 맞서 싸우게 했는데, 이때 양수척이 반기를 들고 거란군에 투항해 길잡이가 된 것이 바로 천민들이 외세와 손잡고 국내 지배층에 반발한 사건의 예라 할 수 있다.

'양수척(揚水尺) 등이 익명으로 첩(帖)에 써서 이르기를, "우리가 고의로 반역한 것이 아니라 기생가(妓生家)의 침탈을 견딜 수 없어서 거란족(契丹族)에게 항복해 향도(嚮導)가 된 것이니, 만약 조정(朝廷)에서 이 기생들과 순천사(順天寺) 주지를 죽이면, 창을 거꾸로 돌려들고 나라를 돕겠다."고 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종(高宗) 재위 4년 3월 조'

양수척(揚水尺)은 수초(水草)를 따라 옮겨 살며 유기장(柳器匠), 육상(肉商) 등을 하는 천민계급으로서, 따로 관적(貫籍)과 부역(賦役)이 없었다. 그런데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삭주분도장군으로 있으면서 이들을 그의 애기(愛妓) 자운선(紫雲仙)에게 소속시켜 공물을 징수한 이래, 이를 견디지 못한 양수척이 거란에 투항해 거란의 향도가 되었던 것이다. 천민 신분에 과도한 공물까지 보과받게 되자 국가 자체를 부인하고 거란족 편에 선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충헌이 자운선과 상림홍(上林紅) 등 기생들을 고향에 돌려보냈고, 순천사 주지는 도망가 버렸다.

거란군을 쫓아내기 위해 징발한 군사들이 봉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거란은 고종 재위 3년 10월 앵주(楊州) 사현포(沙峴浦)까지 내려 왔는데 이를 격퇴시키기 위해 남부의 군사들을 징발하자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라초군별감 홍부(洪簿)는 고종 3년 12월 조정의 명령으로 전주군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이 군사들이 5일만에 전주로 되돌아와 주의 장리(長吏)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평소 장리의 억압에 고통을 느끼던 주현군이 외세 방어에 우선해 내부의 장리를 먼저 살해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나주의 군사마저 출동시킬 수 없게 된 조정은 장군 기윤위(奇允偉)로 하여금 본령군(本領軍)과 신기군(神騎軍)의 두 반을 거느리고 진압하게 했다.

그러나 반란은 곧 진위현(振威縣)으로 확대되었다.

'진위현 사람 영동정(令同正) 이장태(李將太)와 직장동정(直長同正) 이당필(李唐必)이 국가에 사단이 있는 틈을 타서, 같은 현 사람 별장동정(別將同正) 김예(金禮) 등과 더불어 반란을 꾀하여 무리를 모아 현령(縣令)의 병부(兵簿)와 인(印)을 겁탈하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촌락에 나누어주니, 주린 백성이 많이 따랐다. 나아가 이웃 고을에 통지하되, 자칭 정국병마사(靖國兵馬使)라 하고, 그 군사를 의병(義兵)이라고 이름 붙였다. 행군하여 종덕(宗德), 하양(河陽)의 두 창(倉)에 이르러 곡식을 풀어서 군사를 먹이고, 제멋대로 꾸며서 장차 광주(廣州)를 침범하려 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종(高宗) 4년 정월'

'정국(靖國)'은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이니 이들 반란군은 외세와 싸우는 것보다 국내 백성들 생활의 안정이 더 시급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고려 조정 또한 외세 극복보다 내부 봉기 진압에 더 주력해 낭장(郎將) 권득재(權得材), 산원(散員) 김광계(金光啓) 등을 보내 안찰사 최박(崔博)과 함께 광주와 수주(水州) 두 고을의 군사를 보내 토벌하게 했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자 다시 충주, 청주, 양주도(楊州道)의 군사를 징발해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고종(高宗) 재위 4년(서기 1217년) 5월에 조정은 위기에 빠져 있는 중앙군을 구원하기 위해 서경의 군사를 징발해 보냈다. 그 중 기두(旗頭) 최광수(崔光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일개 군졸의 선동에 다른 병사들이 대거 가담해 서경으로 돌아갔는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은 이 때 "서경병마사 최유공(崔愉恭)이 창황(蒼黃)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판관 김성(金成)은 술에 취해 드러누워 일어나지도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기록은 "최유공이 사졸을 등쳐먹기를 좋아하여 결국 그들로 하여금 원망하고 반역하게 했다."고 책임을 최유공에게 돌리고 있으나, 일개 군졸의 반란에 서경 백성들이 대거 호응해 서경성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의 불만이 단순한 개인 차원의 비리가 아니라 체제의 문제에 가 닿아 있음을 말해준다.

서경성을 점령한 최광수는 스스로를 고구려흥복병마사(高句麗興復兵馬使) 금오위섭상장군(金吾衛攝上將軍)이라 일컫고 고구려의 부흥을 내세우면서 서벽계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동조를 요청했다.

비록 이 봉기는 최광수 등 주도자 8명이 조정의 간자(間者) 정준유(鄭俊儒)에게 암살당하는 바람에 끝나고 말았지만 고구려의 부흥을 주창하며 개국한 고려에서 고구려의 부활을 외치자 수많은 서경민이 호응했던 점은 일반 백성들의 심중에 고려는 이미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음을 알려준다.

고종 6년 정월 여몽연합군(麗夢聯合軍)에 의해 거란족이 은거한 강동성이 함락됨으로써 고려는 표면상 안정을 되찾았지만 그 해 10월 의주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소요가 그치지 않았다. 의주의 수졸(戍卒) 출신 한순(韓恂)과 다지(多智)의 봉기에 여러 성이 호응한 것인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의 정도를 잘 보여준다.

여몽전쟁(麗蒙戰爭) 기간에는 민중의 항쟁이 수그러들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고종 19년 정월에는 대몽항전(對蒙抗戰)에 나섰던 노비들이 봉기했다. 몽고군이 침공하자 충주판관 유홍익(庾洪翼)과 충주부사 우종주(于宗柱) 그리고 양반 별초들은 모두 달아났으나, 노군(奴軍), 잡류(雜類)들만은 남아서 치열한 투쟁 끝에 몽고군을 물리쳤다. 그 후 살아서 돌아온 부사 우종주 등이 은그릇 숫자를 점검하자 노군은 몽고군이 약탈해 갔다고 말했으나, 우종주 등은 이를 믿지 않고 노군을 죽이려 했다. 이에 충주 관노들이 봉기한 것이다. 관노들은 "몽고 군사들이 오면 다 달아나 숨어 성은 지키기 않다가 이제는 몽고군이 약탈한 것까지 우리에게 덮어씌우려 하니, 우리가 어찌 먼저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봉기했다.

이에 당황한 최우가 안무별감을 파견하여 회유하고 노군도령인 영사(令使) 지광수(池光守)를 교위에, 승려 주본(朱本)을 충주 대원사(大院寺) 주지로 임명하자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승려 주본은 최씨 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자 대원사의 승도와 관노를 규합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휘하 노군의 배반으로 살해되었고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정의 강화도 천도에 대한 반발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고종 재위 19년 7월에 고종이 개경을 떠나 강화도로 들어가자 어사대의 조례(早隷) 이통(李通)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강화도로 도망간 조정은 급히 삼군을 편성해 진압에 나서 승천부(昇天府)의 동쪽 교외에서 농민군을 격파했다. 그 사이 몽고군 원수 살례탑(撒禮塔)이 처인성에서 전사하자, 몽고군은 고종 19년 12월에 철수했다. 그런데 그 다음달 용문창(龍門倉)에서 거복(居卜)과 왕심(往心)의 주도로 봉기가 발생한 데 이어 경주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했다. 특히 경주의 봉기는 그 수가 수만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이 두 지역의 봉기는 조정에서 보낸 이자성(李子晟)에 의해 진압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서경에서 홍복원(洪福源) 등의 주도로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이번 봉기는 강화도로 천도한 조정에서 고려에 주재하는 몽고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살해하려는 조치에 반발해 일어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앞서 고종 18년 11월 몽고의 첫번째 침입 때 평주(平州)에서 몽고군의 첩자를 가두었다가 몽고의 보복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당시 주민은 물론 개나 닭 한마리조차 남지 않았었다. 서경민들은 이때의 예를 들면서 "만일 그렇게 한다면(다루가치를 살해한다면), 우리 서경이 광주처럼 몽고 군사들에게 전멸을 당할 것이다."라며 봉기한 것이었다.

최우는 가병 3천명을 보내 이를 진압한 후 몽고로 도망간 홍복원을 제외한 주모자 모두를 죽이고 남은 백성들은 다 귀양을 보내 서경을 폐허로 만들었다. 후에 서경민이 몽고에 투항해 서경 이북에 동녕부가 설치된 것은 이런 억압을 겪은 서경민들이 몽고와 고려의 차별성을 느끼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

몽고의 세번째 침입으로 전 국토가 유린되던 1237년 봄, 전라도에서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연년 형제는 원율(原栗), 담양(潭陽) 등 여러 고을의 유이민을 모아 반란군을 조직했다. 이연년은 백제도원수(百濟都元首)를 자청하며 백제 부흥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에 따르면, 이들이 나타나면 관리들이 숨거나 음식을 대접할 정도로 큰 기세를 이루었다고 한다.

조정에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한 인물은 전라도지휘사 김경손(金慶孫)이었다. 그러나 이영년은 귀주성전투(龜州城戰鬪)에서 전공(戰功)을 세운 용장인 김경손을 생포해 오히려 자신의 휘하에 두려고 했다. 이는 그가 반란을 넘어 국가 수립까지 꿈꾸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연년이 그 도당에게 "지휘사는 귀주성의 싸움에서 성공한 대장이다. 인망이 매우 중하니 내가 마땅히 산 채로 잡아서 도통(都統)을 삼을 것이니 활로 쏘지 마라."고 말했다. 이 날도 적(賊)은 경손이 흐르는 살에 맞게 될까 두려워해 모두 궁시(弓矢)를 갖지 않고 짧은 칼로 싸웠다. 전투가 시작되자 연년이 곧장 앞으로 나와 경손의 말고삐를 잡고 나가려고 했다. 경손이 칼을 빼어 싸움을 독려하자, (관군의) 별초들이 죽기로 싸워 연년을 베고 이긴 기세를 타 쫓으니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종(高宗) 재위 24년 조

이때의 반란은 이연년이 김경손을 생포해 도통으로 삼겠다는 과욕에서 지나치게 김경손의 안위를 염려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죽음으로써 무너졌지만, 이전에 김경손이 출전을 재촉하자 좌우에서 "오늘의 일은 우리 군사는 적고 적은 많으니, 청하건대 다른 주군(州郡)의 군사를 기다려 싸우게 하소서."라고 출전을 두려워해 김경손이 꾸짖었을 정도로, 반란군의 기세가 등등했던 것이다.

고려 조정은 몽고와 맞서 싸우기는 두려워하면서도 이처럼 농민봉기가 발생하면 반드시 군사를 보내 진압했다. 농민들은 이런 조정에 대해 몽고에 투항하는 것으로 저항하기도 한다.

앞서 최우는 자신의 두 아들 만종과 만전을 각각 경상도 진주의 단속사(斷俗寺)와 전라도 능성의 쌍봉사(雙峰寺)로 출가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그 곳에서 무뢰배를 불러모아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를 실시했다. 이때 모은 곡식이 경상도에서만 50만석이 넘을 정도였다. 탐학이 10년 이상 계속되자 형부상서 박훤(朴暄)이 고종 34년에 이들의 비행을 열거하며 "만약 적의 군대가 이르면 모두 반역해 투항할 우려가 있다."고 간언했으나, 최우는 오히려 박훤을 흑산도로 귀양 보내고 만전을 후계자로 삼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고종 40년 8월에는 동주산성(東州山城)의 백성들이 몽고군에 집단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동주방호별감 백돈명(白敦明)은 몽고가 침입하자 백성을 산성에 들어오게 하고 출입을 금했다. 몽고군이 아직 동주에 이르지 않았으므로 고을 아전이 곡식을 수확하기를 청했는데, 백돈명은 아전을 죽이고 수확하자는 백성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분격한 백성들은 몽고가 침입해도 나가 싸우지 않아 동주가 함락되었다.

고려사(高麗史) 고종(高宗) 재위 40년 8월 조

전쟁 말기는 1258년과 1259년에는 백성들이 자진해서 몽고에 투항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1258년에는 박주(博州)와 광복산성(廣福山城)에 피신했던 이민(吏民)이 투항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인(定州人) 탁정(卓情) 등이 화주(和州) 이북을 들어 항복하는 등 동계(東界)의 화북 15주가 몽고에 항복해 쌍성총관부가 수립되기도 했다. 그 밖에 애도(艾島)와 갈도(葛島)의 역인(驛人)들이 투항하는 등 투항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몽고의 침략이 30년 넘게 계속되는데도 강화도라는 안전지대로 피신한 채 외세와 결사항전할 생각은 않고 농민과 천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만 민감한 조정에 대해 이제 백성들은 외세와 큰 차별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경인정변(庚寅政變)으로 크게 각성된 농민, 천민들은 신분제에 기초한 구질서와 토지독점 현상의 타파를 요구했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자신들의 기득권 확대에만 열을 올리자 농민, 천민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봉기했다. 이것이 12~13세기를 휩쓸었던 농민봉기의 본질이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은 그러나 조정의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농민, 천민들이 타파를 요구했던 문제들은 해결되기는커녕 계속 확대되면서 그 해결은 미래의 과제로 남았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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