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李承萬) 독재체제와 사회, 경제적 혼란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은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이승만과 그 추종 세력에게는 집권 연장과 장기 독재를 도모하는 구실이 되었다. 6·25남북전쟁 직전에 실시된 5월 30일 총선거에서 이승만 지지 세력은 총의석의 210석 중 30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친일파 청산, 농지개혁 등을 소흘히 대함으로써 민심이 등을 돌린 것이다. 반면 무소속으로 당선된 126명은 이승만 경향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전쟁중에 발생한 국민방위군횡령사건(國民防衛軍橫領事件), 거창양민학살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 등은 정부와 국회의 대립을 촉발했다. 이승만은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유당(自由黨)을 결성하였다.
자유당은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이 제안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맞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내놓음으로써 집권 연장을 도모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중 임시 수도였던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백골단', '땃벌레' 등 정치적 폭력조직을 동원하여 국회를 위협하고, 야당 국회의원 50여명을 국제공산당의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를 씌워 헌병대로 연행하였으며 그 중 10명을 구속하였다. 국회의원들에 대한 폭력적 협박과 회유가 계속되는 가운데 1951년 7월 4일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토론 없이 불법적인 기립 표결을 통해 통과시켰다. 의회주의를 무시하고 헌정을 유린하면서 장기 독재를 위한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헌법에 규정된 '3선 금지' 조항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폐지한다는 내용의 개헌을 추진하였다.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도모한 것이다. 국회에서 의결 정족수에 1명이 부족한 135명의 찬성으로 개헌안의 부결이 선포되었으나 수학자들까지 동원한 4사5입의 억지 논리를 내세워 개헌안이 통과된 것으로 번복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4사5입개헌'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헌정사의 수치스러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두차례에 걸친 억지 개헌으로 이승만은 장기 독재의 틀을 마련하였지만 민심은 부정부패로 얼룩진 자유당을 떠났다. 야당인 신익희(申翼熙) 민주당 후보의 갑작스런 죽음 속에서 치러진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進步黨) 후보인 조봉암(曺奉岩)이 30% 이상을 득표하는 돌풍을 일으켰고, 부통령에는 민주당 후보 장면(張勉)이 자유당 후보 이기붕(李起鵬)을 따돌리고 당선되었다. 그러자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1956년 9월에는 장면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고, 1959년 7월에는 조봉암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이승만 행정부는 반공체제의 강화를 내세워 언론 규제를 골자로 하는 국가보안법을 강제로 통과시켰던 것이다.
한국은 광복 직후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경제적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 군정기와 정부 수립 초기에는 식료품을 비롯하여 의복, 의료품, 농업용품 등 소비재 원료가 주를 이루었다. 6·25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전쟁 피해 복구나 생산 시설 회복에 필요한 원조와 더불어 생활필수품과 밀, 면화, 설탕 등 소비재 산업의 원료 위주로 원조가 이루어졌다. 특히, 1956년부터 미국의 잉여 농산물 원조가 본격화되었는데, 무상으로 이루어지던 원조는 1957년 이후 미국의 국제수지 악화로 점차 유상차관으로 전환되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원조는 전후복구사업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고, 궁핍한 시기의 식량 부족을 해소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 원조는 이승만 행정부의 부정부패와 맞물리면서 한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잉여 농산물 원조는 일차적으로 자국의 장기적인 농업공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양이 국내 부족분을 크게 웃돌았다. 이처럼 농산물이 과잉 도입된 이유는 이승만 행정부의 재정 확보와 관련이 깊다. 원조된 잉여 농산물을 민간에 팔아 적립한 자금을 대충자금(對充資金)이라 하는데, 이승만 행정부는 그 중 10%~20%만 미국에 지불하고 나머지는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등 주로 국방 재정으로 사용하였다. 미국이 잉여 농산물의 처분과 무기 판매라는 이중의 이익을 얻은 반면, 그 부담은 한국의 농민과 소비자가 떠안은 셈이다. 또한, 잉여 농산물의 과잉 도입은 곡물 가격을 폭락시켜 농민의 생산 의욕을 떨어뜨리고 농민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밀과 면화 생산을 도태시키는 등 농업기반을 크게 파괴함으로써 한국이 만성적인 식량 수입국으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비재 위주로 이루어진 경제 원조로 삼백산업(三白産業)을 비롯한 소비재 공업은 크게 발달했지만, 생산재 공업의 발달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소비재 공업은 귀속재산의 불하 과정에서 특혜를 받아 등장한 대기업에 의해 독점되었다. 대기업들은 원료 제공과 금융, 재정상의 특혜를 받으며 성장하였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이승만 행정부의 권력 유지에 필요한 정치 자금을 제공하였다. 원조 경제 체제 아래에서 한국은 높은 대미의존도와 독점적 재벌기업의 성장이라는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부정부패의 온상인 정경유착(政經癒着)의 강한 고리가 형성되었다.
● 고달픈 민생, 춤추는 댄스홀
1959년에 발표된 이범선(李範宣)의 오발탄(誤發彈)은 6·25남북전쟁 이후 1950년대의 빈곤한 사회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소설이다. 실성한 어머니는 고향인 이북으로 가자고 외치고, 여동생은 미국 군인들에게 웃음을 파는 양공주이다. 전쟁으로 불구가 된 동생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권총 강도 행위를 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가던 날, 임신한 아내가 영양실조로 죽는다. 의사의 만류를 무릅쓰고 앓던 이를 뽑아 버린 가난한 가장은 돈 아까운 줄도 모르고 택시에 올라타서 해방촌에 있는 집으로, 아내가 있는 영안실로, 동생이 있는 경찰서로, 결국 아무데나 가자고 외친다.
소설처럼 1950년대 말기 대다수 사람들은 전쟁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 고향과 가족을 등진 북한 피난민들은 남쪽으로 몰려들었고, 미국 잉여 농산물의 무상 원조 덕에 몰락한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전쟁고아, 상이군인이 가득한 도시에는 일거리가 없었다. 고아만도 못한 아이들은 구두닦이나 껌팔이가 되어 댄스홀을 서성이며 미국 군인이나 양공주의 동정을 구걸해야 했다. 부패한 정치인과 모리배들이 원조 물자를 독점하고 가난을 등쳤기 때문이다.
정직한 사람들이 민생고에 시달릴 때 부정으로 치부한 사람들은 전쟁중에 흘러들어 온 미국 대중문화에 빠져 흥청거렸다. 이런 세태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 1954년에는 해군 장교를 사칭한 박인수가 댄스홀을 무대로 여대생 및 고위층 가정 여성 70여명을 농락하다가 검거되었다. 이 사건을 소재로 정비석(鄭飛石)은 신문에 소설 '자유부인'을 연재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극심한 가난과 피폐한 삶 속에서 민심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떠나고 있었지만 교육열만큼은 대단하였다. 각급 학생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대학생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그 결과 해방직후 77%에 달하던 문맹률은 27%로 낮아졌다. 문맹률이 낮아진다는 것은 독재정권에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똑똑해진 국민들이 독재정권의 부당함에 항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이승만 행정부는 반공교육의 강화를 통해 정권을 옹호하려는 공작을 펼쳤다. 좌익 교사 색출을 명분으로 반정부 성향의 교사를 퇴출시켰고, 학도호국단을 창설하였다. 그렇지만 학생들의 의식은 깨어나고 국민들의 비판 정신은 강해졌다. 대학 졸업생 4명 중 3명은 실업자였고, 뜻 있는 지식인은 분노했다. 하지만 이승만 행정부는 이러한 분노를 제대로 읽지 못하였다.
● 자유당도 놀란 3·15부정선거(三一五不正選擧)
1960년 3월 15일에 일정보다 앞당겨 실시된 선거에서 단독 출마하게 된 이승만의 당선은 뻔한 일이었다. 당시 선거법은 후보자가 사망할 경우 후보를 대체할 수 없었는데,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이 병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당은 이승만이 85세의 고령이라는 것이 고민되었다. 대통령이 죽으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계승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기붕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이미 야당의 장면에게 부통령 자리를 내주었던 경험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자유당은 3월 15일 선거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동원된 교사들은 마을 주민을 상대로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선거 홍보 활동을 하였다. 또한, 공무원들은 개표 결과에 따라 마을 처지가 바뀐다고 주민들을 협박하면서 자유당 지지를 강요하였다. 선거 당일에는 유권자 40%의 사전 선거가 이루어졌고, 3인조, 5인조의 조원 투표와 투표함 바꿔치기 등이 진행되었다. 드디어 투표함이 열리고 개표가 집계되자 자유당은 놀라 당황하였다.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자신들도 놀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개표 결과를 낮게 조작하여 발표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 피로 물든 거리, 타오르는 민중혁명의 불길
3·15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은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2월 28일 대구 학생들은 일요일 강제 등교에 저항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유세 현장에 학생들이 몰려갈까 봐 취해진 옹졸한 조치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선거 당일 마산에서는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부정선거를 폭로가고 선거 무효를 외치는 마산 학생과 시민들에게 경찰이 총격을 한 것이다. 이날 8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200여명이 연행되었다.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된 폭력시위였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였지만, 반정부시위는 부산과 서울로 확대되었다. 4월 11일에는 마산 앞바다에 김주열(金朱烈)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르자 분노한 시민들은 마산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하고 파출소에 불을 질렀다.
시위구호도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정권 타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4월 18일에는 '민주역적을 몰아내자!'는 현수막을 들고 국회 앞으로 진출했던 고려대학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던 중 동대문 부근에서 반공청년단에게 테러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분노한 대학생과 고등학생, 시민들은 다음날인 4월 19일 대통령 집무실인 경무대로 향했다. 이들에게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거리는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날 하루 동안 전국에서 2백여명이 사망하고 6천여명이 부상당했다.
사태가 심각해지가 부통령 당선자인 이기붕은 사퇴 입장을 밝혔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서울 지역의 대학 교육자 258명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시민과 초등학생까지 가세한 시위는 4월 25일 밤을 넘겨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탑골 공원에 세워졌던 이승만 동상이 파괴될 무렵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라고 밝혔다. 4월 26일 국회는 '대통령의 하야', '정, 부통령 선거 재실시', '내각책임제 개헌'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4월 27일 오후 2시 이승만의 대통령 사임서가 국회에 수리됨으로써 12년간 지속되었던 이승만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 기회주의적 지식인과 구태의연한 정치인
이승만의 반민족적인 역사적 과오는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민족분단의 국내 책임자이며, 민주 정치에 독재의 싹을 심었고, 친일파와 결탁하여 민족정기를 오염시킨 민족사의 죄인이다.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라는 냉전체제 속에서 이루어진 분단이지만 이승만은 민족분단을 국내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한 인물이다. 또한, 그가 심은 독재의 싹은 50년이 넘도록 우리의 민주 정치를 왜곡시켜 왔다. 그의 가장 큰 과오는 민족정기를 오염시켰다는 사실이다. 그 해악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이승만의 독재권력을 지탱한 친일 관료, 경찰, 군인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승만의 적극적인 비호 속에 친일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받은 친일 지식인, 자본가, 언론인들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2005년 친일 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파 명단에는 언론계의 방응모(方應謨), 김성수(金性洙), 홍진기(洪璡基) 등과 교육계의 백낙준(白樂濬), 유진오(兪鎭午), 김활란(金活蘭) 등과 예술, 문학계의 현제명(玄濟明), 모윤숙(毛允淑), 주요한(朱耀翰) 등이 포함되어 있다. 광복 이후 이들은 각계의 주요 인사가 되거나 정치인으로 거듭 태어났다. 게다가 이들의 후손과 수제자들의 일부는 '보수'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잘못된 역사의 과오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우리 역사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기회주의적 지식인과 정치 세력을 양산하였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이승만에 대한 비판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국가 기강을 흔드는 행위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건국자가 아니다. 독재에 맞서 싸우며, 피와 땀을 흘리며 가꾸어 온 우리 국민들이 바로 대한민국을 건국한 주역이기 때문이다.
● 혁명의 기대를 저버린 장면 내각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헌법에 따라 수석 국무위원인 허정(許政)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 허정의 과도정부는 4·19민중혁명의 요구를 수용하여 3·15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 축재자를 처벌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야 할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과도정부는 혁명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사태를 무마하려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3·15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 축재자 등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태도는 야당인 민주당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혹시라도 혁명의 급진적 열기가 친일 경력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자신들의 입지를 위협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과도정부 아래서 국회를 주도한 민주당은 1960년 6월 15일 새 행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내각책임제는 민의원과 참의원의 상, 하 양원제로 의회를 구성하고, 의회는 대통령을 선출하고,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지명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새 헌법에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서 유보되고 억압되었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사전 허가나 검열 제도를 철폐하였다.
새 헌법에 의한 7월 29일 선거에서 자금과 조직이 월득한 민주당은 상, 하 양원에서 206석을 얻었다. 한편, 농촌을 중심으로 부정선거에 책임이 있는 자유당 관계자들이 60석 이상을 확보하였다. 민주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 유권자들의 의식 수준이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던 결과였다.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은 대통령에 구파인 윤보선(尹潽善)을 선출하였다. 윤보선 대통령은 역시 구파인 김도연(金度演)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였으나, 신파의 저항에 굴복하여 장면(張勉)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였다. 내각책임제의 실권자인 장면 국무총리가 신파들로 내각을 구성하자, 구파는 민주당을 이탈하여 신민당을 결성하였다. 신민당의 견제를 받는 장면 내각은 통치력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4·19민중혁명 결과 탄생한 장면 내각은 허정 과도정부가 수행하지 못한 개혁을 단행해야만 했다. 내각 수립 직후 장면 국무총리는 첫째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및 UN감시하의 남북한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 달성, 둘째 관료 제도의 합리화와 공무원 재산 등록 및 경찰 중립화를 통한 민주주의의 구현, 셋째 외자 도입과 경제 원조 확대를 통한 경제개발계획 추진, 군비 축소와 군대의 정예화 추진을 통한 국방력 강화 및 군대의 정치적 중립 확보 등의 시정 방침을 밝혔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보상 문제로 국교 단절 상태였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는 북한, 중국, 소련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미국, 한국, 일본의 방위체제를 구성하려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었다.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 방안은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에 의해 억압되었던 국민들의 평화적 통일 욕구를 수용한 것이었다. 두번째와 세번째 항목은 4·19민중혁명에 의해 수립된 장면 내각이 당연히 수행해야 할 과업이었다.
그러나 친일파, 대지주, 기업인들을 주축으로 형성된 보수 정당인 민주당은 적극적인 통일 의지가 없었으며, 3·15부정선거 책임자 및 부정 축재자 처벌에 대해서도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관료 제도의 합리화를 위해서 공무원을 공채로 선발하였고, 경찰 중립화를 위해서 경찰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肅正)과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장면 내각이 가장 주력한 사업은 '경제개발을 위한 5개 년 계획안' 마련이었다.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군비를 축소하고 외자를 도입할 계획이었으나, 군비 축소에 위기감을 느낀 군인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행되지 못했다.
결국 4·19민중혁명의 기대를 가득 안고 태어난 장면 내각은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갈등 속에 5·16군사정변(五一六軍事政變)으로 막을 내렸다. 집권 기간이 짧은 탓도 있지만 보수 정권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기에 4·19민중혁명의 기대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4·19민중혁명은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된 반독재투쟁(反獨裁鬪爭),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인 동시에 자주평화통일운동(自主平和統一運動)이었다. 12년간의 이승만 독재체제가 무너지자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한 민주적 요구가 분출되었다. 비록 의회 진출은 8석에 불과했지만 혁신정당이 출범하였고, 진보적인 노조결성운동도 진행되었다. 특히 독재정권을 찬양하거나 분단교육에 동원되었던 교사들이 교육의 독립성을 주장하면서 결성한 교원노조는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장면 내각이 통일운동의 열기를 억압하기 위해 제정을 서두른 반공법과 집회, 시위 규제법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대중의 호응을 얻으면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학생과 혁신세력들이 중심이 된 통일운동도 점차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무렵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와 같은 자주적 통일 구호와 남과 북의 경제 교류를 촉구하는 '이남 전기, 이북 쌀' 같은 구호들이 등장했다. 이처럼 국내의 통일 열기가 거세지는 속에 UN총회에서 북한도 조건부로 초청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북한은 UN의 조건부 초청을 거부했지만, 놀란 장면 국무총리는 북한을 인정하는 통일이라면 차라리 분단이 좋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UN 결의안에 고무된 학생들은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고 혁신정당과 단체들은 남북정당과 사회단체의 정치협상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주평화통일운동은 혁명 1년여만에 일어난 5·16정변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다. 민주화를 향한 아름다운 노력들도 서슬 시퍼런 군화발에 짓밟혔다. 유보된 민주주의와 자주평화통일을 향한 완성되지 못한 혁명은 더욱 줄기찬 투쟁을 숙제로 남겨 놓게 되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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