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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여왕’ 연수영 」9제2차 여당전쟁과 연개소문의 사망 ⑴

개마기사단 |2011.10.16 23:27
조회 127 |추천 0

●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백제 침략과 황산벌전투(黃山筏戰鬪)

 

연수영(淵秀英)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고구려 수군의 약화를 불러왔고, 고구려 수군의 약화는 제해권의 상실로 이어졌으며, 제해권을 빼앗긴 고구려는 그때부터 망국의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요동선단은 자멸과 다름없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수군의 약화에 앞장선 것은 연수영의 후임으로 수군원수로 다시 부임한 연정토(淵淨土)였다.

 

연수영을 살해한 그 이듬해인 서기 654년 정월에 연정토는 연수영의 오른팔이었던 장운형(張熉炯)에게 상관을 잘못 보좌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워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죽기 전에 장운형은 아내와 어린 아들 호경(虎敬)을 평소 호형호제하던 건안성의 고원부(高元部)에게 보내 의탁하게 했다.

 

또한 그 해 3월에 안고(安固)는 수군에서 육군으로 전출시켜 비사성에서 추방했다. 안고는 10월에 신성의 군사와 말갈족 병사 8천여명을 거느리고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거느린 거란족 병사 6천명과 싸우다가 전사자 2천 5백여명, 부상자 4천여명의 인명피해를 보는 참패를 당했다. 이에 부기원(扶奇遠)·선도해(先道解) 등 조정의 중신들이 안고에게 책임을 물어 처벌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쳐, 안고는 보장태왕(寶藏太王)의 명령으로 사약(賜藥)을 받고 죽었다.

 

658년 6월에는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우령군 중낭장(右領軍中郎將)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군이 적봉진(赤烽鎭)을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측근인 두방루(豆方婁)에게 2만의 병력을 안겨 적봉진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출동시켰으나, 두방루는 2천 5백명의 군사를 잃는 패배를 당하고 퇴각하였다.

 

659년 11월에 설인귀가 거느린 당나라 군사 2만여명이 현도성(玄菟城)과 목저성(木底城)을 침공해왔는데, 온사문(溫沙門)이 기병 7천명과 보병 5천명을 거느리고 이에 맞섰다. 그러나 온사문은 횡산전투(橫山戰鬪)에서 패배하고 조정으로부터 문책을 받아 연진현(演眞縣)으로 유배를 갔다. 

 

요동선단에서 남은 연수영의 휘하 장수로는 담열(曇烈)이 유일했으나 그도 660년 6월에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이 되어 백제를 치려고 군사 13만명과 군선 3천여척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는 소정방(蘇定方)의 백제정벌군을 저지하려고 출전했다가 전사했다. 바다의 여왕 연수영이 없는 요동선단은 예전의 그 막강하던 고구려 수군이 아니었다.

 

마지막 낭자군 해란봉(解蘭峰)은 오래도록 연수영의 연락도 받지 못하고 그녀의 최후를 알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건안성에 남아서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연수영의 딸 양희를 키우며 돌보았다. 그녀는 건안성이 함락당할 때 고원부를 도와 끝까지 수성전(守城戰)을 벌이다가 함께 전사하게 된다.

 

고구려의 유일한 동맹국인 백제가 멸망한 것은 서기 660년 7월 18일.

 

신라와 당이 백제정벌군을 발진시킨 것은 5월 26일. 신라의 무열왕(武烈王)은 대장군 김유신과 더불어 5만 대군을 이끌고 서라벌을 떠났다. 이보다 앞서 신라에서는 654년 진덕여왕이 죽고 52세의 김춘추(金春秋)가 왕위에 올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된다.

 

당황(唐皇)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명령을 받은 소정방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13만 대군을 이끌고 산동반도 내주를 출발, 황해를 건너 6월 21일 덕물도에 상륙했다. 

 

당나라의 대군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바다를 건넌다는 급보를 받은 평양의 연개소문은 비사성에 급사(急使)를 보내 이를 반드시 바다에서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겁이 많은 연정토는 비사성에서 꼼짝도 않은 채 경험이 가장 많은 담열을 함대의 지휘관으로 삼아 출전하도록 했다. 담열은 군사 1만여명을 3백척의 전함에 나누어 싣고 출전했으나 요동선단은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았다. 이미 더는 막강한 무적함대가 아니었다.

 

장수들의 통솔력부터 맥이 빠졌으니 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기를 다해 싸울 턱이 없었다. 반면 당나라 수군은 전과 같이 무기력하지 않았다. 오랜 경험과 훈련으로 강군이 되어 있었다. 담열의 함대는 서전에 전멸하고 담열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연전연승하고 무적불패의 전과를 쌓았던 고구려 요동선단의 전설은 그렇게 무너져버렸다.

 

당나라의 대함대는 유유히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 상륙해서 전열을 정비했다. 당과 신라 양군은 수륙으로 진격해 7월 10일 백제의 도성 사비성(泗沘城)을 총공격하기로 했다.  

 

백제의 군주인 의자왕(義慈王)은 당나라마저 대군을 파견해 백제를 침략하자 남당에서 어전회의를 열어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백제의 대신들 가운데 가장 군사적 지략이 뛰어난 성충(成忠)은 일찍이 당나라가 신라를 도와 백제를 칠 것이라는 예언을 하면서 이에 대한 대비를 하자고 간언했으나 의자왕이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자,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임금이라고 비난하여 결국 의자왕의 분노를 사서 투옥되었다. 성충은 감옥에서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그 계책을 알려주는 상소문을 작성한 후 음독자살하였다. 따라서 지금 남당에서는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지 명확한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의자왕의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신라군과의 전투 경험이 많은 좌평 의직(義直)이 이렇게 말했다.

 

“당나라 군사들 중에는 물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이 많습니다. 먼 길을 항해해 왔다면 분명히 노독(路毒)이 쌓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피로가 풀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당군이 우리에게 패배하면 신라군 역시 겁을 집어먹고 함부로 진격해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당군과 먼저 승부를 결정지어야 하옵니다.”

 

그러자 달솔 상영(常永)이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군은 먼 길을 왔기 때문에 속히 싸우려 할 것입니다. 대군의 예봉을 막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패배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더 이상 대책이 없습니다. 그에 비해 신라는 이전에 우리와 싸워 여러 번 패배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아군의 위세를 보면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군사를 동원해 신라군을 쳐서 기세를 꺾어야 합니다. 연후에 기회를 보아 당군과 싸운다면 나라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펼쳤지만 쉽게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당의 침입이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한 의자왕은 좀처럼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당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쉽게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군사를 분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어떤 계책을 쓴다 해도 양쪽 모두를 막아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계백(階伯)이 유배형에 처해진 흥수(興首)의 의견을 물어보자고 했다.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귀양 가 있는 흥수에게 대책을 물어보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이 당시 흥수는 의자왕이 국정을 돌보지 않고 주색과 연회를 즐기며 향락에 빠져 타락한 생활을 일삼자 이를 충고하고 성충처럼 당나라의 침략을 예견하여 대비해야 한다는 극간을 하다가 임자(任子)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귀양을 가 있는 상태였다.

 

며칠 후, 고마미지현에 갔던 사자(使者)가 돌아와 기벌포(伎伐浦)와 탄현(炭峴)을 끝까지 사수하면 당군과 신라군을 격퇴할 수 있다는 흥수의 간언을 전했다. 이것은 성충이 죽기 전에 남겼던 유서 내용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임자를 비롯한 대신들은 흥수의 의견을 극렬히 반대했다.

 

“그 자는 죄인입니다. 어라하(於羅瑕)께 원망을 품고 있는 자의 말을 어찌 믿사옵니까? 이는 자신을 가둔 데 대한 복수로 우리를 사지(死地)로 몰아넣으려는 흉계입니다.”

 

이렇게 흥수를 매도하면서 임자는 대안을 내놓았다.

 

“우선 당군으로 하여금 기벌포를 지나게 하여 백강으로 유인해야 합니다. 백강 하구는 강폭이 좁고 물살이 빨라 두 척의 배가 한꺼번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탄현은 길이 협소하고 험해서 두 필의 말이 나란히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탄현을 넘으면 그들은 분명 대오가 흐트러질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새가 스스로 조롱(鳥籠)에 들어가는 것이며, 물고기가 자진하여 통발에 갇히는 격입니다. 이때, 우리가 저들을 친다면 쉽사리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의자왕은 임자의 말이 더 신뢰할 수 있다고 믿고 흥수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흥망의 갈림길에서 백제의 운명을 결정지을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었다.

 

의자왕이 병법의 기본도 모르는 임자의 우견(愚見)을 채택하자 계백은 속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 전쟁에서 백제가 패망할 것이 확실해졌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의자왕은 의직과 계백에게 각각 군사 1만씩 거느리고 당군과 신라군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군대를 책임지고 있는 다섯 군데의 방령들이 소집령에 응하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의직은 직접 사비성에서 가까운 액모리현으로 달려가 그곳의 군졸과 민병들까지 차출하여 간신히 8천여명의 전투병력을 구성하고 백강으로 달려갔다. 계백은 도성의 수비군 1만여명을 절반으로 나누어 5천여명의 군사로 결사대를 조직, 신라군과 싸우고 나머지 5천여명은 사비성을 지키게 했다.

 

계백은 출전에 앞서 집에 가서 직접 자신의 장검으로 아내와 두 딸을 베어 죽인 뒤 집은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나라가 망하고 도성이 점령되면 당나라의 군사들이 여자는 모두 능욕하고 사내와 어린이는 모두 잡아가 노예로 삼을 터이니 차라리 내 손으로 먼저 보내야겠다는 뜻이었다. 계백의 행위는 단순히 잔인한 처사가 아니라 당시의 윤리적 도덕관에 비춰본다면 차라리 인간적인 가족애의 발로였다.

 

황산(黃山) 아래 연산천을 따라 펼쳐진 벌판에서 계백은 좌우의 산자락에 의지해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세 개의 진영을 설치했다. 김유신은 5만의 신라군을 3개 부대로 나누어 네 차례에 걸쳐 백제군의 진영을 공격했지만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과 약조한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지만 신라군은 백제군보다 무려 열 배나 많은 병력인데도 황산벌을 통과하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자 김유신은 나이 어린 화랑을 희생시키는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난관을 타개하고자 했다.

 

김유신의 아우인 김흠순(金欽純)은 자신의 아들 반굴(盤屈)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신하 된 자로서 최고의 덕목(德目)은 충(忠)이며, 자식 된 자로서 최고의 덕목은 효(孝)이니라. 나라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목숨을 바친다면 충과 효, 모두를 갖추게 된다.”

 

반굴은 아버지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낭도 20여명과 함께 백제군의 진영으로 뛰어들어갔다. 반굴과 그의 낭도들은 갑옷조차 입지 않은 채 오로지 칼 한자루만 손에 쥐고 처절하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계백은 오랜 행군과 연이은 패전으로 인해 떨어진 신라 군사들의 사기를 분노의 힘으로 북돋기 위해 장수를 희생시킨 계책을 쓰고 있는 김유신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제 군사들에게 다시 신라의 장수가 나타나면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군 진영에서 또 다른 어린 소년이 단신으로 말을 타고 달려 나왔다. 역시 갑옷을 갖추지 않은 경장 차림으로 손에는 단창(單槍) 한 자루를 쥐고 있었다. 백제 군사들이 그 소년을 에워싸고 소용돌이치듯 매섭게 몰아쳤다. 소년은 단창을 꼬나잡고 백제 군사들을 찌르며 분전했지만 아직 무예가 서툴렀고 게다가 혼자서 많은 적병들을 감당해 내기는 어려웠다. 결국 신라의 소년은 백제 군사들에게 붙들려 계백 앞으로 끌려 왔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 살이냐?”

 

계백이 소년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신라의 화랑으로 품일(品日) 장군의 아들인 관창(官昌)이라 하며 올해 나이는 열 여덟이오! 나는 적장의 목을 베지 못하고 수치스럽게 적군의 포로가 되었으니, 그대가 진정한 장수라면 지금 당장 내 목을 베어 명예롭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 주기를 바라오.”

 

“너는 정녕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관창이라는 소년은 당돌하게 계백을 쏘아보며 외쳤다.

 

“나는 신라의 대장부이며 화랑으로서 어찌 전장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겠소? 잔말 말고 어서 내 목을 치시오!”

 

계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 적장 김유신은 참으로 잔인한 인물이로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이처럼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아이마저 희생양으로 삼다니…! 나는 결코 김유신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계백은 부하들에게 명령해 관창을 신라군의 진영으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자신을 살려보낸다는 말에 관창은 죽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버텼다. 백제 군사들은 관창을 말 안장에 앉혀 결박짓고 강제로 끌고 나갔다.

 

신라군 진영으로 돌아온 관창은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것은 장수로서 수치이며, 자신은 물론 가문마저도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무 말이 없는 아버지 품일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제가 적군에게 사로잡혔다 돌아온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기필코 적장 계백의 목을 베도록 하겠습니다.”

 

관창은 다시 군마에 올라 이번에는 결코 돌아오지 말아야 할 길이라고 여기며 주저 없이 백제군의 진영으로 달려들었다. 그에게는 죽음보다도 아버지가 실망하는 것이 더 두려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관창은 분전하였지만 또 다시 백제 군사들에게 사로잡혔다. 관창은 다시 계백의 앞으로 끌려갔다.

 

계백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관창을 쳐다보았다.

 

“너는 어찌 소중한 목숨을 돌보지 않는 게냐?”

 

“패장(敗將)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오. 더 이상 능욕하지 말고 죽이시오.”

 

관창은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계백은 여기서 관창을 다시 신라군의 진영으로 돌려보낸다면 역시 자신이 죽음을 당할 때까지 계속 혼자서 돌격해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관창을 처형하라 명했다. 부하 군졸들이 관창을 참수(斬首)하자 계백은 관창의 시신을 말안장에 매달아서 신라군의 진영으로 보내주도록 했다.

 

관창의 시신이 신라군의 진영에 당도하자, 아버지인 품일은 말안장에 걸린 아들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내 아들의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라 군사들은 소름이 돋고 가슴속에서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이들의 분노는 곧바로 백제군에 대한 적개심으로 표출되었다.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한 전고(戰鼓) 소리가 힘차게 울리자 신라군은 용기백배하여 일제히 황산벌을 가로질러 백제군의 영채를 덮쳤다. 피가 사방으로 튀는 공방전이 전개되다가 한순간에 목책이 무너지고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라군의 기세에 눌린 백제군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백제의 5천 결사대는 혼신의 힘을 쏟아 부으며 고군분투(孤軍奮鬪)했지만 분노의 힘을 폭발시키고 있는 신라 군사들을 막아내기 어려웠다.

 

계백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달았다. 목책이 무너진 마당에 신라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계백은 마상(馬上)에서 직창(直槍) 한 자루를 비껴들고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수많은 신라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였다. 그러나 신라군의 궁수들이 무수히 쏘아대는 화살에 치명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진 계백은 신라 군사들의 무자비한 창질과 칼부림을 맞고 숨이 끊어졌다. 백제의 남은 군사들도 끝까지 신라군을 물고 늘어지다가 계백을 따라 전몰(戰歿)하였다.

 

황산벌전투(黃山筏戰鬪)는 비록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의 승리였지만 의외로 패배자인 계백과 백제의 5천 결사대가 역사적인 평가에서 더 크게 부각된 싸움이었다.

 

한편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의 13만 대군은 좌평 의직이 거느린 백제 군사 8천여명을 격파하고 서부전선을 돌파하여 백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당군과 신라군이 합류한 것은 7월 11일이었는데, 소정방은 신라군이 기일을 어기고 늦게 당군과 합세했다는 이유로 독군(督軍) 김문영(金文永)을 참살하려 했으나 김유신이 강하게 반발하며 항의하니 소정방은 한풀 기세가 꺾여 김문영을 살려주었다.

 

당군과 신라군이 사비성을 포위했을 때, 의자왕은 태자인 부여효(扶餘孝)를 비롯한 근신들과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도피하였다. 의자왕의 둘째 아들인 부여태(扶餘泰)가 사비성에 남아 수성전(守城戰)을 펼쳤지만 결국 부여효의 아들인 문사(文思)의 배반으로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은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사비성의 궁녀들이 나당연합군을 피해 절벽 위로 올라 도망치다가 백강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낙화암(落花巖)의 전설은 이때에 생겨났다.

 

웅진성의 방령 예식(禰植)은 사비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웅진성으로 피난을 온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를 생포하여 당군 장수 소정방에게 투항했는데, 이때가 7월 18일이었다. 믿었던 신하의 배반으로 당군의 포로가 되어 사비성으로 끌려온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는 승전축하연을 벌이는 소정방과 무열왕에게 무릎을 꿇고 술잔을 채워야 하는 모욕을 당했다. 시조(始祖)인 온조왕(溫祚王) 이래 서쪽으로는 산동반도와 진평군을 경락하고 동남쪽으로는 탐라와 왜국을 속국으로 삼을 정도로 번성했던 백제가 31대 678년만에 멸망한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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