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구도를 빠져나온 고구려의 노장(老將)인 대사자(大使者) 아불파연(阿佛破然)은 1백여척의 군선을 거느리고 혈구도와 석모도 사이의 협류를 지나 북쪽 해안에 도착했다. 아불파연은 섬 그림자 속에 배들을 숨긴 후에 백제의 함선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관미성에서 봉화가 올랐으니 달을참의 수군이 움직일테고, 그들은 가장 빠른 항로인 이곳 협류를 택할 터였다. 아불파연의 함대는 사냥에 나선 맹수처럼 기척을 숨기고 먹잇감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날이 저물 무렵, 해류가 급격히 역류하는 듯싶더니 백제의 함선 1백여척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나타났다. 백제의 함선들은 해양제국으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원앙항해에도 무리가 없는 대형 첨저선(尖底船)이었다. 이 배는 먼 바다의 거센 물결을 견딜 수 있을뿐 아니라 견고함으로 인해 상대 함선과 충돌할 때 항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아불파연은 막상 백제의 대규모 선단이 나타나자 잔뜩 긴장했다. 비록 여러 해 동안 해상전투를 준비했다고는 하나 백제 수군을 맞상대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백제 수군이 이곳을 통과한다면 혈구도에 상륙한 고구려 군사들의 안위가 크게 위협받게 될 것이었다. 아불파연으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든 그들을 막아야 했다. 아불파연이 심사숙고하여 선택한 전술은 유인책과 기습 공격이었다.
달을참의 수군주(水軍主)인 은솔(恩率) 귀실수곤(鬼實秀困)은 고구려의 수군을 얕잡아보았다. 그래서 별다른 경계 없이 협류에 접어들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고구려 군사들의 배후를 쳐서 전공을 세울 생각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아무리 대적할 만한 적수가 없는 강군(强軍)이라고 할지라도 방심하면 패배를 당하기 마련이다. 귀실수곤은 이 단순한 전략을 간과하고 있었다.
백제의 선단이 혈구해협에 접어들자 섬 그림자에 숨어 있던 고구려의 함선들이 일제히 몰려나왔다. 아불파연이 통솔하는 함선들은 20여명 정도의 군사를 싣는 작은 배들이어서 백제의 커다란 배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었다.
백제의 대함(大艦)으로 접근한 고구려의 군선들에서 불화살이 날아올랐다. 하지만 백제 수군은 수많은 실전과 훈련을 통해서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을 키워두고 있었기에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백제 수군은 일제히 방패를 들어 불화살을 차단하고는 대함을 움직여 안익진(雁翼陳)으로 벌려 섰다. 그리고는 석모도 포구 쪽으로 고구려의 군선들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백제의 함선들이 점점 간격을 좁혀오자 고구려의 군선들은 마치 그물에 걸린 형국이 되어버렸다. 승세를 탄 백제의 함선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낮은 위치에 놓인 고구려의 군선들은 쏟아지는 화살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방패로 막기는 했지만 이곳저곳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다급해진 고구려 수군은 너나 할 것 없이 석모도 해안으로 배를 몰았다. 석모도 해안에 도착하자 그들은 배에서 뛰어내려 뭍으로 도망쳤다.
해전은 백제군의 완벽한 승리로 기우는 듯했다.
기습공격을 해온 고구려 수군이 맥을 못추고 달아나자 귀실수곤은 우쭐해서 배의 난간을 두들기며 기염을 토했다.
“고구려의 군사들이 육전에서는 천하무적일지 모르겠지만 해전에서만큼은 우리 백제의 수군을 당해낼 수 없다. 더욱 더 밀어부쳐라! 한 놈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엇인가 날아와 백제의 함선으로 떨어졌다. 섬에서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나뭇가지 등으로 숨겨두었던 투석기(投石器)를 이용해 섬에 가까이 접근한 백제 함선들에게 바윗덩어리를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백제의 함선들은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맞아 갑판이 부서지거나 측면에 구멍이 뚫려 물이 스며들었다. 백제 군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염초와 건초를 잔뜩 실은 조각배들이 나타나더니 백제의 함선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석모도에 딸린 조그만 섬 뒤에 숨어있던 고구려 수군의 배들이었다. 조각배를 몰고 백제의 함선에 가까이 접근한 고구려 수군은 배 위에 쌓여있는 건초더미에 불을 붙이고 백제 함선의 밑부분으로 뛰어들었다.
불덩어리로 변한 조각배는 백제의 함선에 가서 부딪쳤다. 불길이 순식간에 옮겨붙었다. 포위망을 좁히기 위해 가깝게 다가서 있던 함선들이 방향을 잃으며 서로 충돌했다. 그 와중에 불길은 다른 배로 옮겨갔다.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던 불길은 서서히 그 몸집을 키우더니 여러 척의 배를 삼켜버렸다. 암흑천지였던 혈구도 해협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화염이 배를 집어삼키자 백제 군사들은 살기 위해 제각기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들 역시 고구려 군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백제 수군의 지휘관인 귀실수곤은 난전 중 화살을 맞고 바닷물에 떨어져 수장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백제 함선은 불에 타서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
귀실수곤이 이끄는 달을참의 백제 수군이 참패한 이유는 지나친 자만심 때문이었다. 아불파연은 백제 수군의 기세를 한껏 살려주면서 서서히 백제의 함선들을 섬에 배치해 둔 석포(石砲)의 사정거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백제의 함선들이 서로 가까이 다가가도록 유도한 후 화공전(火攻戰)을 펼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파의의 벌판에는 기치창검(旗幟槍劍)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서로 대치한 고구려군과 백제군은 각기 상대방의 형세를 탐색하며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가모의 부대와 합세한 진사왕의 백제군은 수효가 5만에 육박하는 대군으로 불어나 있었다. 우나굴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수효는 겨우 2만으로 백제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진사왕은 고구려 군사들의 수효가 적은 것을 보고 우습게 여겼다.
“주저할 필요가 없다. 당장 적장의 목을 짐에게 가져오라.”
진무가 간했다.
“고구려군을 얕잡아 보아서는 아니 되옵니다. 소장이 알기로 고구려의 개마기사단(鎧馬騎士團)은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한 전투력을 과시하고 있사옵니다. 지난날 전선에서 패배한 원인도 고구려군의 주력인 개마기사단을 제대로 막지 못했기 때문이었사옵니다. 좀 더 신중하셔야 하옵니다.”
진사왕은 묵살했다.
“저들에게 개마기사단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오룡기(五龍旗)가 있지 않느냐? 저들은 철갑(鐵甲)으로 무장하여 견고하기는 하다만 그만큼 둔하기 때문에 빠르게 운직이는 우리의 오룡기를 대적할 수 없다.”
오룡기란 근구수왕(近仇首王) 때부터 조직된 백제 어림군(御臨軍)의 핵심 전력인 경기병대였다. 기마술과 창술, 궁술에 능한 장정들을 선발하여 조직한 백제의 최정예부대로 진사왕이 가장 신뢰하는 용사들이었다. 각기 1천명씩 5개의 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방(五方)을 나타내는 다섯가지 색인 황(黃)·청(靑)·백(白)·홍(紅)·흑(黑)으로 이를 구별했다. 깃발에 그들의 용맹을 나타내는 용(龍)이 그려져 있었으므로 이들을 일컬어 오룡기(五龍旗)라 불렀다.
진가모가 간교한 웃음을 지었다.
“고구려의 개마기사단이 제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우리 백제의 오룡기에 당적하겠사옵니까? 오룡기의 빠른 공격으로 철기병을 무력화시킨 후 전군을 움직여 일거에 밀어붙인다면 고구려군은 칼 한번 휘두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항복할 것이옵니다.”
“그대야말로 전세를 명확히 꿰뚫고 있으니 이번 전투에서 선봉에 서도록 하라.”
진가모는 진무 쪽을 넌지시 보았다. 진무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진가모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 전투에서 고구려 군사들을 물리친다면 국왕의 총애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향할 터였다. 더 이상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상대는 없었다.
진가모는 오룡기의 병력을 지휘하여 고구려군의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좌우에 청룡기와 백룡기를 배치하여 고구려 군사들의 측면을 쳐서 교란시키고, 흑룡기와 황룡기를 중앙에 세워 전면에 배치된 고구려의 중장기병들을 상대하도록 했다. 자신은 흑룡기를 이끌고 이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오룡기는 주어진 임무에 따라 빠르게 벌판을 달려나갔다. 오색 물결이 벌판을 수놓으면서 퍼져나갔다. 오룡기는 꽃을 낯아 날아드는 오색의 나비떼처럼 화려한 펄럭임을 자랑하며 고구려군의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우나굴은 재빨리 진형을 평진(平陳)에서 방진(方陳)으로 전환한 후, 궁수들을 전면에 내세워 활을 쏘아 백제군의 접근을 막도록 했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던 백제군의 흑룡기와 황룡기가 고구려군의 화살 공격으로 인해 주춤하자, 좌우에 위치했던 청룡기와 백룡기가 활을 쏘며 고구려군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청룡기와 백룡기는 오룡기를 대표하는 기마병단으로 마상기술(馬上騎術)에 뛰어난 군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면서도 목표물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백제 기병들의 신기(神氣)에 가까운 궁사(弓射)에 대열의 측면에 위치했던 고구려의 보병과 경기병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기세가 오른 청룡기와 백룡기의 백제 군사들은 드러난 틈을 집요하게 공략하여 고구려군의 전열을 흩뜨려 놓았다.
측방의 병력이 백제 기병들의 빠른 공격에 고전하자 우나굴은 전면에 위치한 궁수들을 측면으로 보내는 한편, 장창병(長槍兵)들을 동원하여 백제군 청룡기와 백룡기의 공격에 응수하도록 했다. 측면의 수비를 보강한 우나굴은 최강의 중장기병(重裝騎兵)들인 개마기사단(鎧馬騎士團)에 군령을 내려 백제의 경기병(輕騎兵)들과 맞서 싸우게 했다.
개마기사단은 온몸에 편린으로 된 두터운 철갑을 두리고 얼굴 가리개를 했을 뿐 아니라 군마(軍馬)까지도 온통 철갑을 휘감고 있었다. 웬만한 화살로는 타격을 입히기 어려웠다. 이들이 대열을 이루고 나아가면 마치 거대한 무쇠산이 움직이는 듯했다. 담력이 약한 사람은 미처 부딪쳐 싸우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