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은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유관순 -
오늘은 3.1절.
우리나라 4대 국경일
에는 3월1일 삼일절, 7월17일 제헌절, 8월15일 광복절, 10월3일 개천철 이 있다.
4개국경일인 오늘.
과거의 오늘에 대해 다시금 되새기셨으면 하는 마음에 올립니다.
★3.1운동의 배경
국권을 침탈당한 이후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 은 일제의 혹독한 무단 통치 아래에서도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은 19세기 말 이후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개되었던 국권 수호 운동의 연장이였다.
개항 이후 근대 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은 여러 방향으로 민족 운동을 전개했지만,
민족의 역량을 한곳으로 모으지는 못했다.
그러나 국권을 침탈당한 후에는 독립을 되찾는 일이 민족의 공통 목표가 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에 보였던 민족 내부의 이해대립에서 벗어나 강력한 민족의 응집력을 나타낼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은 가혹한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독립의지가 더욱 강화되어
전민족적인 도립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갔다.
미국, 중국 등 해외에 있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단체는
민족 자결주의 제창 소식을 듣고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으며,
독립 운동 자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일본에 있던 한국 유학생들은 이렇게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독립 운동의 기회로 생각하여,
일본 도쿄에서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2.8 독립 선언 이다.(1919.2.8)
1. 본 단은 한일 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 의사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 민족의 생존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린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본 단은 일본 의회 및 정부에 조선 민족 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주기를 요구함.
3.본 단은 만국 평화 회의에 민족 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4.앞에서 요구한 내용이 실패할 때에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함.
이로써 발생하는 참회는 우리 민족이 그 책임을 지지 않음.
-조선 청년 독립단 대표.
★ 3.1운동의 전개
국내에서는 제 1차 세계 대전에 끝날무렵인 1918년 말부터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국내의 민족 지도자들이
세계 정세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학생 단체와 연결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초 을사조약에 끝까지 반대하였던 고종 황제가 서거 하였는데,
이것이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져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게다가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 소식이 전해지면서
독립 운동에 대한 민족의 열망은 더욱 높아져갔다.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한 끝에,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분명하게 밝히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여 비밀리에 각 지방에 배포하였다.
서울에서는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 대표 33인이
3월 1일 정오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같은 시각에 학생과 시민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지방 곳곳에서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독립만세 시위는 이후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우리 민족이 사는 해외 도처에서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일본 경찰과 군대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 만세를 부르는 시위대를
총검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이 때, 16세의 어린나이로 충청남도 천안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던
유관순은 구속되어옥중에서 순국하였고,
일본군은 화성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가둔 채 불을 지르고 총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수많은 민가와 학교 등도 일제의 만행에 의해 파괴되거나 불타버렸다.
★3.1운동의 의의
3.1운동은 그 동안 꾸준히 계속 되어 온 한민족의 민족 독립 운동을
하나로 묶어 거족적으로 전개한 최대 규모의 독립 운동이였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목표가 완전한 자주 독립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를 계기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더욱 다양하게 전개 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 전개한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므로
3.1운동은 일제 강점기는 물론, 광복 이후 민족이 분단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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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전 케이블 방송 <화성인 바이러스>에서 한국은 싫고 오로지 미국만이 좋다던 한 사람이 생각난다.
태극기엔 별이 없지만 성조기엔 별이 있어 좋다는 한 사람.
하지만 나는 한가지 말을 보태주고싶다.
"태극기엔 별이 없지만,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애절한
조상들의 피가, 눈물이, 목소리가 서려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태극기 다는거 잊지 말아요!!
펼침/접힘 단어 입력 : 태극기의 백과사전 의미는 요기를 클릭해주세요.(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1883년(고종 20) 조선의 국기채택되고, 1948년부터 대한민국 국기로 사용되고 있다.
국기 제정 논의가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1876년(고종 13) 1월이다.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한·일 간에 강화도조약 체결이 논의되는 동안 일본측은
"운요호에는 엄연히 일본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砲擊)을 가하였느냐?"
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조정의 인사들은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기 제정의 필요성이 활발하게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태극기의 효시에 대하여 종래에는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 겸 수신사(修信使)인 박영효(朴泳孝)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선박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도일할 때,
박영효가 태극사괘(太極四卦)를 창안하고 도안한 것이 정설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발행된 일간신문 《시사신보》에서 고종이 직접 도안을 하고 색깔까지 지정하였다는 보도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중국 청나라의 마건충(馬建忠)이 청나라의 국기를 본받아 조선의 국기를 만들 것을 강요하자,
이에 분개한 고종이 청나라의 국기를 따르지 않고 청색과 적색으로 이루어진 태극원과 사괘를 그려 국기로 정한다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박영효는 고종의 명을 받아 태극기를 그리는 역할을 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태극기는 흰색 바탕에 태극문양과 건곤리감(乾坤離坎)의 4괘로 이루어져 있다.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태극문양은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며,
우주만물이 상호작용에 의해 생성·발전하는 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발전하는 모습을 효(爻)의 조합을 통해 구체화한 것이다.
그 중 건은 우주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은 땅을, 감은 물을, 이는 불을 각각 상징한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태극기는 그 후 널리 보급되었으나 도형의 통일성이 없어서 사괘와 태극양의(太極兩儀)의 위치를 혼동하여 사용해오다가
1948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국기의 도안과 규격이 통일되었다.
국기의 제작·게양·관리 등에 관해서는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에 의거, 시행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