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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대 : 과메기의 꿈 님 >
21화-결정
이사라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주변정리부터 시작해서 짐정리까지 손이 안 가는 일이 하나 없는 대형 일거리다.
하지만 그 어떤 이사라도, 가는길에 가족들을 죽이려는 것들과 마주치게 되는 이사는 없다.
우리는 그런 일에 착수했고, 다행히도 아무 희생자도 없이 해내었다.
재복이가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싸움 이후 녹초가 된 우리는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겨우 편의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골목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깨끗했지만, 방심했던 채 건물에 들어섰다가 좀비견과 맞딱트렸던 경험을 살려
나는 최대한 긴장하며 편의점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후아아.. 덥다."
원채 돌로 된 건물인데다 바닥까지 타일로 덮혀있어 안은 제법 시원했다.
놈들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코트나 긴팔 웃도리를 입고 있던 일행들은
다들 옷을 벗어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도 당장에 옷을 벗어던지고 냉장고에 등을 붙이고 싶었지만 나라를 업고 있는 처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내신 난 신발을 벗은 채 시원한 타일 위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으음.. 시원하군.
"도와줄게."
태완이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계산대 안쪽으로 들어간 뒤 태완이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내려놓았다.
녀석은 우리가 팔을 잡고 내려놓을 때 잠깐 눈을 뜨고 끙끙거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규칙적으로 내쉬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팔자도 좋지.
나는 내 코트를 녀석에게 덮어줄까 했으나,
내 손에 들린 겉옷의 꼴이 눈에 들어오자 그런 생각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코트가 피로 떡칠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업혀있었을 때야 몰랐겠지만 뭐, 굳이 누워있을 때 까지 이런 꼬질꼬질한 코트의 덕을 보긴 싫을 것이다. 냄
새도 나고.
가만, 냄새라..
나는 카운터에 몸을 기댄 채 모두를 돌아보았다.
일행들은 각자 짐을 정리하고 목마름을 해결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대로, 모두의 몰골은 정말이지 꼬질꼬질 그 자체였다.
후방에 있었던 여자들의 옷조차 핏자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 식량은 문제없다. 하지만 세탁이 문제다.
세탁이라 함은 비단 옷 뿐만의 문제가 아니다.
몸도 닦아야 하고, 그 이외에 불가피하게 청결함이 요구될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
씻는거야 뭐 한달만 버티면 되니까 세면대에서 나오는 것으로 어떻게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이 요구될 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내 시야에 들어오는 타일의 수를 세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올려
물건들이 올려져있는 선반을 보았다.
순간 내 눈에 익숙치 않은 물건이 들어왔다. 저게 뭐지? 기저귀같은..
"..아!"
나는 다음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리고 짧게 탄성을 지르다가 입을 가렸다.
그래, 생리! 여자들은 한 달에 한번씩 그걸 하지!
그렇게 된다면 다시 한 번 몸을 씻어야 한다는 문제가 부각되는데..
생리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순간 나는 온갖 야리꾸리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 이 며칠동안 정말 너무도 어이없는 일들이 일어나서 까먹고 있었지만,
나는 이제 스물이 되는 건강한 청년이다.
그건 다른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고.. 이런 극한상황에서, 밀실에서, 여자들과 갇혀있는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하지?
거기다 흥분. 피를 볼 때의 그 흥분.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니 벌어질 법한 될 대로 되라의 상황. 누가 누구를 덮친다던가, 혹은 죽인다던가.
나는 냉장고를 손으로 지탱하며 반쯤 일어나 일행을 둘러보았다.
지친 듯한 모습으로 가방 옆에 쪼그려앉아있는 아름이와 나영누님의 가슴께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그리고 먼지와 피로 더러워진 엉덩이 부근, 찢어진 교복 사이로 보이는 속살..
나는 순간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하기만 동시에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 주저앉아 불미스러운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나는 선천적으로 앞에 나서거나 책임을 지는 일을 싫어한다.
때문에 학창시절, 사소한 놀이에서도 리더라는 자리엔 앉아 본 기억이 매우 드물다.
하지만 이번만은 다르다.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내가 이 그룹의 중심이다.
한 순간만 정신을 차리지 않아도 저 밖에 들끓는 괴물들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길텐데,
앞서서 여자랑 허리나 흔들어댈 생각을 하는 거냐 지금!
나는 손바닥을 냉장고의 차가운 유리문에 갖다댄 뒤 힘을 주어 손가락을 천천히 오므렸다.
삐빅거리는 소리가 편의점 안에 울려퍼졌지만 나는 아랑곳않고 주먹이 만들어질 때 까지 손가락을 오므린 뒤,
그 손을 얼굴에 갖다대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차갑다.
"야."
가만히 타일을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윤호였다.
녀석은 아이스크림을 하나 입에 물고 있었다.
녀석은 내게도 하나를 내밀었다.
"혼자 왜 청승떨고 있어."
"으응."
나는 의미없는 대답을 하며 아이스크림의 껍질을 까서 입에 물었다. 뭐지 이거. 이름도 확인 안 했네..
윤호는 내가 멍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쪽쪽 빠는 걸 바라보고 있더니,
내 옆으로 와서 나와 나란히 쭈그려 앉았다.
"뭔 생각했어?"
"별로."
"별로라니? 뭔 소리야 그게."
윤호는 내 대답을 듣고 눈을 찌푸리더니,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물고 와구와구 씹어 삼킨 뒤에 그 나머지 조각을 입에 털어넣었다.
"짜식. 솔직히 말해. 야한 생각 하고 있었지? 응? 응?"
윤호는 키득거리면서 나를 팔꿈치로 찔렀다.
나는 녀석의 팔을 잡아서 꺾어버린 뒤에, 나영누님과 아름이를 한 번 다시 바라보고는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응."
"뭐?"
나에게 팔이 꺾여서 등을 돌린 채 아야야거리고 있던 윤호는 내 대답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녀석을 풀어주고 아이스크림을 끝장내고 있는데 태완이가 다가와 앉았다.
평소에 군것질을 즐기지 않는 태완이지만 지금만큼은 허기가 진 모양이다.
녀석은 육포를 입에 문 채 나에게 말했다.
"어때, 생각해봤어?"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건 이 문제밖에 없다.
뜬금없이 내게 다시 물음을 던진 태완이었지만 나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했다.
"..응. 아직 확실히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가능하다면 올라가는 것이 나을 거라고 봐."
"뭐? 뭔 소리야?"
"이유는?"
수색조가 아니었던 윤호는, 비록 우리가 집에 돌아간 이후 정보를 전해주었지만 아직 잘 모를 것이다.
태완이가 윤호의 물음을 무시한 채 내게 재차 묻자 나는 금방까지 생각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번째, 식량 이외의 보급품에 대한 문제. 계속 구하러다니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커. 차라리 박차고
떠나느니만 못하지."
박차고 떠났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나는 다시 한 번 진열되어 있는 생리대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두번째, 여자들과의 관계. 이런 데 안에 멀쩡한 남녀가 몇 명이나 있는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곤 장담할 수 없어."
"에잉? 뭔 소리냐니까?"
윤호가 내 어깨를 잡아채며 물었지만 나는 윤호의 말을 무시하며 태완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세 번째.. 우리 그룹의 가족들 생사유무 확인과 다른 친구들을 확인하기 위해."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태완이는,
세 번째 이유를 듣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을 하며 나를 마주보았다.
물론 우리가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과제인 것은 변함이 없다.
일행의 가족들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일단 살아남은 뒤에 가족들을 찾아나서면 돼..
라는 식의 생각을 할 정도로 우리들은 융통성있지 않다.
아니, 않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가족들의 안전을 백 퍼센트 장담하지 못한다.
지금까지야 바빠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겠지만 이렇게 숨어지내는 공백기간이 길어질 경우
반드시 지인에 대한 걱정에 의해 패닉에 빠지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그것을 예방하기도 해야 하거니와, 그 전에 모두의 가족을 진심으로 걱정하기에 내건 이유이기도 하다.
이쯤 되자 윤호도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 윤호는 부모님과 여자친구 모두 연락이 되지 않는다.
사실 이 과제에 제일 집착이 있는 건 윤호일 것이다.
"..휴전선으로 올라간다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호는 나와 태완이를 번갈아 보며 쳐다보더니 말했다.
"미쳤어.. 여기서 가만 있으면 살 것을 왜?"
"넌 여친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내가 정곡을 찌르자 윤호는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물론 궁금할 것이다.
그것도 죽을 정도로.
녀석은 아이스크림의 겉껍질을 힘껏 구기면서 이를 악물었다.
나는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확실히, 박혀 있으면 살게 될 보금자리를 얻었으면서 굳이 밖으로 나간다는 건 미친 짓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짓을 하기 위해 그저 핑계를 대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내 가족이 한국에 있고, 나와 떨어져 있다면, 나는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다른 이들 역시,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을 지는 몰라도 가족에 대한 걱정만큼은
누구나 대단히 클 것이다.
그들을 위해 손을 빌려주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무모해도 상관없다.
윤호의 전에없이 심각한 표정을 보며 나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반드시 찾아낸다. 염려마. 물론 너도 같이지만."
윤호는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어쩌겠다고? 차라도 있어?"
"찾으러 가야지."
태완이가 당연하단 듯이 말했다.
그래, 그것이 우리의 지상과제다.
이동수단을 찾는 것.
단순히 좀비에게서 빨리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전에 나라를 구했을 때 처럼 생존자를 만난다던가,
쓸만한 물자를 얻는다던가 할 때 차가 없다면 정말 불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태완이가 뭔가를 더 말하려는데 녀석이 등지고 있던 선반 너머에서 수정형이 머리를 내밀며 말했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
큭, 키 큰 자의 특권이군.
형이 과자를 한아름 들고 와 우리 옆에 걸터앉자 나와 태완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수색조가 먼저 편의점에 들렀을 때 수정형은 태완이와 같은 의견을 피력했었던지라
우리가 하는 말에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내가 내건 마지막 이유에는 수정형도 생각해보지 못한 듯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진환아,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알아요. 찾으러 나간다는 거는 모두한테 물어보고 시작할 거니까 안심해요."
수정형은 그래도 조금 안 내킨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형도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가족이 보고 싶을 것이다.
나는 과자를 하나 집어먹으면서 다시 한번 일행을 둘러보았다.
모두 간식을 먹거나 곤한 잠에 빠져잇는 등 오랜만에 찾아온 달콤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젠장, 박혀있을 곳 하나 찾았나 했더니 결국은 다시 나가야 할 것 같군.
알아 볼 것인가, 알아보지 않을 것인가.
알아본다면 죽을 위험이 크고, 알아보지 않는다면 그 위험이 줄어든다.
하지만 위험이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가야지.
그게 나고, 우리다.
최후의 생존까지, 28일-
혹은, 사흘!
22화-앞으로?
지금 우리 그룹의 인원수는 아홉.
나, 윤호, 태완이, 수정형, 재복이, 서영이, 아름이, 나영누님, 그리고 꼬맹이 나라.
인원수가 많을 경우, 한 가지의 결정을 하기 위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은 과반수.
일단 휴전선으로 올라가는 것에 대해 찬성한 건 네 명 뿐이다
(라기보단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이 4명 뿐이다).
과반수를 달성하기 위해선 적어도 한 명의 동의가 더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앞서서 행동해왔다 하더라도 무조건 밀어붙힐 수는 없는 일이니까.
우리는 잠시의 휴식을 취한 뒤,
어스름하게 밤이 다가오고 공기가 조용해질 무렵 자리를 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인없는 편의점에서 마구마구 퍼다쓰기를 반복하며 행복해하고 있던 여성분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엄청나게 놀란 듯 했다.
"왜?!"
서영이의 일갈. 왜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이 아니라,
우리는 충분한 의논 끝에 도출해낸 결과라 할 말이 없을 리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힘들거야. 여기 있으면. 꺼림칙한 문제들이 너무도 많아. 무엇보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밀실에서 한 달이나
뭉쳐있어야 한다는 거. 우린 일주일 전만 해도 남남이었어. 이런 상황에서 오랫동안 서로를 해치지 않고
참아낼 수 있을거라곤 생각 안 하는데. 뭐 한 달동안 씻지도 않고 섹스도 안 할거면 남아도 좋아."
내가 그 단어를 꺼내자 모두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남자들은 연달아 헛기침을 하고 여자들은 옷매무새를 다듬는 게 보였다.
나는 잠깐 분위기가 썰렁해진 틈을 타 냉장고에서 병콜라를 하나 꺼내 뚜껑을 땄다.
..뭐 내가 조금 더 빨리 이성적으로 대처했을 뿐이지, 조금만 있으면 모두들 인지할 만한 문제다.
내 말을 듣고 귀까지 빨개진 나영누님이 말했다.
"지, 진환아 아무리 그래도 말을 그렇게.."
"어쩔 수가 없어요. 이제 오늘 밤이 지나면 밖으로 나다닐 수 있는 기간은 단지 이틀. 시간이 너무도 촉박한데
팀 내에서 이렇게 큰 문제를 가지고 우왕좌왕하다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한 달이라는
기간이라 말해두는건데, 생리에 대한 것도 빼놓을 수 없잖아요? 아까 말했던 문제랑 겹치는 거잖아요. 또.."
나는 문명에 파묻혀 편하게 살아갈 때는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여러가지 더러운 이야기들을 쏟아놓으려다가, 십분 쯤 전에 일어나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나라를 발견한 뒤 헛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
애가 있는데 굳이 신랄하게 다 털어놓을 건 없지.
"..뭐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 그래도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친구들을 위해 내가 간략하게 설명할게. 여기서
머무른다 한들 반드시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없어. 게다가 우리가 남아있어야 하는 기간은 자그마치 한 달.
아까 말했듯이 식량 이외에 다른 보급에 대해 굉장히 힘든 이런 상태에서, 라디오에서 전해준 감염확산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그 여파가 생각보다 크다면 우린 살아남기 힘들 거야. 아마도."
나는 잠시 이야기를 끊고 콜라를 마셨다.
아직 안정을 취하기 위해 서영이에게 앉은 채 안겨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복이가 말했다.
"근데.. 만약 그 여파가 크지 않다면? 물론 네 말대로 될 수도 있지만 굳이 밖으로 나갈 건 없잖아. 괜히 나서서
독박을 쏘는 걸지도.."
"봐봐. 들어봐."
나는 콜라를 급히 입에서 떼고 쿨럭거리면서 재복이를 막았다.
"내 말대로 한다고 치자구. 그럼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건 차야. 튼튼한 봉고차 같은 거. 그게 없으면 이 계획은
애초에 깨지는 거지. 하지만 만약 우리가 차를 얻게 된다고 치자? 교통수단이 있는데 안전지역까지 올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그 차를 얻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모험이잖아!"
서영이가 외쳤다. 재복이를 꼭 끌어안은 채 소리치는 양을 보니 아까 재복이가 죽었다
살아난 걸 본 뒤로 상당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뭐 맞는 말이긴 하다.
나는 수정형을 한 번 돌아본 뒤 다시 서영이를 마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가는 것도 가는 거지만.. 교통수단을 얻는 데엔 다른 이유가 있어."
"뭔데?"
"식구들이나 친구들의 상태를 알아보러 간다. 남은 이틀동안.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순간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친구들 모두의 눈이 커졌다.
모두들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가족조차 생각하지 못 할 만큼 벅찬 나날들이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아름이는 놀람과 기쁨이 반씩 섞인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정말요? 정말로.. 우리 집까지 같이 가 줄 거예요?"
"차를 찾으면 말이지만."
나는 콜라를 마시고 있다가 아름이의 말을 듣고 콜라를 입에서 뗀 뒤 뚜껑을 닫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있는 윤호, 태완이, 수정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나만 가는 게 아냐. 우리 넷은 이미 이 계획에 찬성이다."
"..뭐야, 너희 넷은 그럼 벌써 엉큼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거야? 한 달동안 버티지 못하겠다, 그런 거야?"
서영이가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얘기가 그렇게 되나?
잠깐 이야기가 끊긴 채 서영이가 우리 넷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자 수정형이 머쓱한지 헛기침을 했다.
잠시 뒤 풍선껌을 불고 있던 윤호가 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깐깐하게 나오지 말고, 찬성인지 반대인지나 말해. 진환이 말마따나 시간이 없으니까."
윤호의 말을 들은 서영이는 움찔 하며 대답을 망설였다.
확실히 겁을 먹고 있는 듯 했다.
서영이가 어느샌가 품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재복이를 바라보며 대답을 미루고 있는데
나영누님이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찬성이야."
"나도요."
아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둘의 눈을 바라보니 서영이처럼 그리 심각하게 목숨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허나 동시에 내비치고 있는 것은,
친지들을 만나고 싶다는 확고한 의지와 나를 포함한 전투조에 대한 신뢰.. 겠지?
그런 걸 눈빛으로 읽을 수 있으면 난 이미 구름타고 휴전선으로 떠났을 거다. 내가 신선이냐?
하지만,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팀원과 있으면 살아남을 확률은 더욱 커진다라는 건 극한상황에서의 황금율.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과반수는 넘겼군- 이라고 생각하며 다시금 콜라를 마시는데 재복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찬성이야."
"자기야! 무슨.."
서영이가 갑자기 들려온 재복이의 말에 놀라서 외치자 재복이가 서영이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서영아.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 친구들은 믿을 만 하니까. 다같이 살아남을 거야."
"하지만.."
"신서영!"
서영이가 다시 뭐라고 반박하려 하자 재복이는 되려 정색을 하며 외쳤다.
깜짝 놀란 서영이의 눈을 재복이가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아? 나는 우리 가족 모두와 함께 살아남고 싶어!"
재복이의 짧고 굵은 한마디에 서영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서영이에게 재복이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너무 자기 생각만 해도 안 돼. 내가 위험했을 때 진환이가 구해줬잖아? 모두를 믿어야 해. 모두들 각자
최선을 다해 싸웠기 때문에 우린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어. 이 편의점같은 아지트도 찾을 수 있었고.
지금은 모두와 힘을 합쳐서 움직일 때라고 생각해."
재복이의 진지한 설득에 서영이는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한숨을 폭 쉬며 말했다.
"응.. 알았어."
이로써 만장일치인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무슨 말이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라였다.
녀석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땅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자기 간식이 저렇게 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던 것 같다.
때마침 나라의 옆에 있던 아름이가 재빨리 녀석의 곁으로 다가가 아이스크림을 든 손을 올려주면서 말했다.
"오빠들이 다같이 나라의 부모님을 찾아주러 간대."
"와아! 진짜? 언제? 지금?"
"으응, 지금은 아니고. 내일이나 모레."
"우웅.. 나라는 지금 엄마 보고 싶어."
"조금만 참아."
아름이가 나라의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닦아주며 녀석을 달래고 있는 사이,
나는 제각기 떨어져 있는 일행을 한자리로 불러모았다.
수건돌리기를 할 때 처럼 원형을 그린 채 앉은 일행들에게 내가 말했다.
"밖은 벌써 어두워. 그리고 우린 남은 체력도 없고. 오늘로써 벌써 귀중한 하루를 또 써 버렸어. 남은 이틀간은
타이트하게 움직여야 할 거야."
"질문."
수정형이 손을 들며 말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형을 바라보았다.
"차는 구할 수 있다고 치고.. 구한다 해도 어떻게 거기까지 올라갈건데?"
"맞아. 휴전선까지라고 했지? 길 다 알어 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길은 모르지만, 이 동네에 서점이 있단 말씀. 여기랑 반대방향에 있는데다, 작은 서점이지만 거기 가면 지도책
정도야 있을거야. 그 다음부턴 수정형의 운전실력에.."
"아."
마치 내 말을 끊는 것 같은 재복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이번엔 재복이를 쳐다보았다.
재복이는 손을 턱에 갖다대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싶더니,
여기 도착했을 때 모두가 짐을 내려놓은 장소로 걸어가 자기 짐을 챙겨왔다.
"뭐 하냐?"
윤호가 묻자 재복이는 잠깐 기다리라는 듯한 손동작을 하면서 일행이
그리고 있는 원진 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뒤적거렸다.
녀석은 가방 안에 코를 박고 뭔가를 찾는 듯 하더니 이윽고 커다란 책을 두 권 꺼내었다.
그 책은 다름아닌 '전국 고속국도 안내책자' 였다!
다른 하나의 책 역시 수도권 지도가 상세히 있을 법한 두꺼운 지도책이었다.
나는 마을 뒤쪽에 가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퀘스트를 찾으려다 잘못해서 다른 마을까지 갈 뻔했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손쉽게 문제를 해결한 듯한 기분이 되어 외쳤다.
"뭐.. 뭐야? 니가 그 책을 왜 들고있어?"
"니가 가져온 거야."
"뭐?"
재복이의 알수없는 한마디에 내가 묻자 녀석은 그 책들을 땅에 내려놓고 말했다.
"나 서점에 있었잖아. 주인도 없겠다, 바깥도 난리겠다 뭔가 심상치 않아서 쓸만한 책들을 모아놨었어. 근데
거기서 나왔을 때 까먹었었는데 니가 들고 나왔었잖아."
그러고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아마도 그 감염된 커플을 처리한 뒤에 들고 왔던 흰색 가방이었지?
재복이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다른 책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고속국도 책 이외에도 지리책, 공작책 등
나름대로 고립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골라놓은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심심풀이로도 딱이다.
"어..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와 신발 그립다! 핫핫!"
윤호놈이 덩달아서 재복이의 가방을 마구 뒤지다가 꺼낸 무인도에서 살아남기라는 책에
일행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조금 어렸을 때 대유행이었지, 저런 생존류의 책이.
수정형은 웃어서 생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하하.. 그래 그럼 지도는 됐고. 남은 건 차네."
"네."
나는 고속국도 책자를 집어들고 말했다.
"아무리 지금 사람들이 파난을 갔다고 한들, 차 한 두대는 반드시 남아있을 거예요. 저번에 형이 타고온 것
처럼. 뭐 평생가도 못해볼 불법차량절도 한 번 해 보죠."
"핫핫! gta냐?"
오랜만에 생겨난 유쾌한 분위기에 뭍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시험볼 때 문제를 찍으면, 분명 아무 근거도 없이 찍는 거면서 우린 '이거 혹시 올백나오는 거 아냐?'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우린 앞으로 닥칠 절망스러운 현실을 예측하지 못한 채,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심정으로
웃고 떠들며 공짜 간식을 즐겼다.
자동차 한 대면 친구도 구하고 부모님도 다 만나서 휴전선으로 올라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거야
- 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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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환 일행이 편의점으로 이사를 할 때 지나온 하나의 벽돌집.
그 집 안에는 더럽게 물든 자켓과 야구방망이 등을 지닌 남자 셋이 앉아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방 가운데에 소주와 육포를 수북히 쌓아놓고 있었다.
아마 그것으로 식량을 대신하고 있는 듯 했다.
그들 중 남자 한 명이 창문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들추며 말했다.
"야.. 진짜 아까 지나간 자식들, 그 편의점으로 들어간 거 맞냐?"
"맞어. 여자도 셋이나 있었다고."
"우우~ 좋은데."
척 보기에도 질 낮은 억양을 구사하는 그들은 음흉한 웃음을 띄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진환이 수색대로 먼저 정찰을 나왔을 때 갈림길에 있는 집 안에서 숨어있던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그 행위는 그들 나름의 정찰이었던 듯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담배를 빼무는 순간 방 한구석에 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아랫도리에 옷을 걸치지 않은
남자 한 명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왔다.
"아아.. 시원하다. 다음사람 들어가."
담배를 빼물은 남자는 그의 말을 듣더니, 곧바로 담배를 바닥에 지져 끄면서 방 쪽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방 안에는 여자로 보이는 사람 한 명이 덜덜 떨며 울고 있었다.
"흑! 흑.. 제발 그만해요.. 그만해요!"
"입닥쳐 썅년아. 확 죽여버리기전에 너도 그냥 즐기라구."
담배남은 거친 말을 내뱉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윽고 방 안에선 그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여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있던 남자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낄낄거렸다.
"야아.. 대한민국이 이렇게 되니까 너무 살기 좋지 않냐."
"그래. 하고싶은거 다 하고. 저 년은 그 구멍가게에 알바로 들어온 뒤로 내가 먹을라고 몇달 전부터 벼르고
있었는데 운좋게도 이 나라가 이렇게 됐지 뭐냐."
"난 지금 안 한다. 그 편의점에 들어간 영계년들 다 먹어버릴꺼야."
그가 혁대 근처를 만지작거리며 말하자 창가쪽에 서 있던 떡대좋은 남자가 말했다.
"다른 사내놈들은?"
"몰라. 싸가지없게 굴면 그냥 죽여버리고, 맹한 놈들이면 시다바리로 쓰는거지 뭐."
"킥킥킥."
그들은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술과 안주를 먹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데 아직 행동을 개시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당장은 일을 결행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아직도 바지와 속옷을 입지 않은 채 돌아다니던 남자는 방의 한 구석에 세워져있는 야구방망이나
작대기 등의 무기를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오늘 밤?"
"오늘 밤이다. 킬킬.."
"졸라 기다려지네. 신발."
23화-폭주
잠깐 퀴즈 하나.
빨리 가라면 늦게 가고, 늦게 가라면 빨리 가는 것은?
정답은 누구나 안다. 시간이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이제 남은 시간은 이틀 하고 반.
그나마 그 반은 지금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틀. 시험공부하기엔 충분하지만 목숨을 건 레이스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마치기엔 조금 촉박한 시간.
여름의 밤은 늦게 오지만, 그 늦게 오는 밤도 왜 이리 빠르게 느껴지는 건지..
순조로운 건지 안 순조로운 건지 모를 회의를 끝마친 우리는,
저번 폭격 이후로 망가졌던 우리 집에서처럼 뚫린 부분으로 적이 침투해온다던가 하는,
신경을 곤두세울 일이 없어 제각기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잘 사람은 자고 말 사람은 말고. 참고로 나는 조금 있다가 자기로 했다.
아직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3분 미트볼을 데운 것을 들고 가만히 옥상으로 올라갔다.
'Employee Only' 라고 쓰여진 방 안으로 들어가니 태완이가 다시 라디오 앞에 서서 저주파 방송을
찾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태완이가 나를 쳐다보자 나는 한 번 피식 웃고 녀석의 등을 친 뒤 계단을 올랐다.
마음에 걸리는 일 하나, 편의점의 정문이 유리라는 것.
정면이 튼튼하지 않은 요새가 오래 갔다는 이야기는 책에서 읽어본 적이 없다.
이틀만 머물 곳이라고 해도 여기가 우리의 최후의 보루라는 것엔 변함이 없으니 보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문 뿐이 아니라 정면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유리다.
이걸 다 갈아치울 수는 없는 일이고..
뭐 워낙 인적이.. 아니, 인적이 아니지. 좀비적..?
하여간 좀비가 거의 보이지 않는 곳이니 미리부터 이런 걱정을 할 필요야 없겠지만,
적어도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유리창 이쪽에 녀석들이 걸려 넘어질 물건 정도는 놔두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일부러 방어선을 이쪽에 만들기보다,
아예 이 앞의 길목에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쌓아두는 것도 좋겠지.
마음에 걸리는 일 둘, 옥상에서부터의 침투.
우리 수색조가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수정형과 내가 내려왔던 건물의 옥상에서 좀비가 떨어질 확률이 있다.
목표물을 향해 움직이기만 하는 놈들이라 해도 편의점의 옥상이 예의 그 건물의 옥상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있는 이상, 우리를 향해 뚝 떨어지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번에 수정형과 부리나케 도망쳐나오느라 체크를 못 했었지만 그 좀비견이 나왔던 건물 안에
다른 좀비가 있으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 옥상으로 나오는 문을 막아버리는 것이 바람직하겠지.
마음에 걸리는 일 셋,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사실 이게 제일 크다.
만약 우리가 차를 찾지 못하면?
만약 군대가 더 늦게 온다면?
만약 내일이라도 감염확산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친다면?
만약 우리가 생존자들로 구성된 떼강도를 만난다면?
만약 좀비무리에 의해 편의점 유리가 뚫린다면?
만약.. 만약.. 만약..
이 세상은 확률의 연속.
이세상 60억 그 누구에게도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없기에, 조금 뒤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만약을 연발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좀비사태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 만화책을 빌리러 잠옷만 입은 채 슬리퍼를 질질 끌며 엠피를
귀에 꽂고 흥얼거리면서 길을 가고 있다가 '만약 지금 내 위로 벼락이 떨어진다면?' 이라고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전 내가 나열한 모든 경우의 수는 충분히 일어날 만 한 일이다.
벼락에 때려맞는 것에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일들이면서 말이다.
나는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즉석 미트볼을 하나 집어먹었다.
"후하.. 뜨거 뜨거."
예전에 이거랑 밥이랑 자주 먹곤 했었다.
부모님과 동생은 미국서 본고장 고기음식들 먹으면서 잘 지내고 있으려나?
한국이 이렇게 되었다는걸 알고 어떻게 하고 있을까?
"음?"
미트볼을 세 개나 입에 우겨넣고 씹어먹고 있으려니, 한 방향으로만 뚫려있는 이쪽 골목의 출구 부분에서
하나의 인영이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미트볼 그릇을 땅에 내려놓고 식칼창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밑으로 뛰어내려가 친구들에게 알릴 수 있게 태세를 취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림자가 휘청휘청거리는 걸 보아하니 좀비인 듯 했다.
순간 어쩌지? 라고 생각했으나 놈들은 기척을 느끼고 움직이므로 창 안쪽에 있는 우리로선 가만히만
있으면 괜찮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것의 뒤로 서너명의 사람들이 나타나 놈을 마구 두들겨 패는 것이 아닌가!
"어.. 어?"
먼 거리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비척거리는 놈의 뒤로 갑자기 사람 하나가 나타나 몽둥이 같은 것으로 놈을 때려날려 넘어뜨린 후,
비슷한 무기를 든 세 명이 더 나타나 쓰러진 좀비인지 뭔지를 마구 찜질했다.
분명 생존자들일 것이다.
나는 반가운 김에 마구 소리를 지르려다 리스너(Listener)의 존재를 떠올리고 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있으면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저 사람들이 우리와 합류하게 되면 그 일에 차질이 생길 수가 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그들이 바로 우리 편의점의 앞까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이! 안에 누구 있어?"
나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옥상의 난간 아래에 엎드려서 혼자 생각을 하고 있다가 아래에서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내밀고 밑을 쳐다보았다.
투박한 옷차림의 남자들 넷이 어느샌가 앞까지 다가와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 역시 기본적인 정보는 알고 있는지 긴 팔이나 재킷을 일부러 껴입은 모습이었고,
깡마른 스킨헤드의 남자 하나와 평범한 아저씨처럼 보이는 남자 하나, 나머지 둘은 비슷한 옷차림에
덩치가 꽤 커 보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폭같아 보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경계심이 일었으나, 이런 상황에선 서로가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 고개를 흔들어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생존잡니까?"
그들은 소리를 친 뒤 편의점에서 살짝 떨어져 창 안쪽을 기웃거리다가 내 말을 듣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밤중의 가로등 불빛에 눈이 부셔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그들 중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안녕 학생! 우리들, 운좋게 살아남았다가 편의점 불빛을 보고 여기까지 왔어! 괜찮으면 식량이랑 좀 도와줄
수 있겠나?"
"물론이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들인가 보다.
나는 그들의 웃는 얼굴에 안심하고는 반가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나는듯한 걸음으로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만에 보는 사람들이냐!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저 사람들의 외침을 모두가 들었는지 각자 잠을 자거나 쉬고 있거나 하던 일행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수정형이 한쪽 손에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책을 든 채 내게 말했다.
"진환아, 뭐야?"
"생존자예요! 식량을 좀 나눠달라는데, 이야기도 들을 겸 잘됐죠!"
"근데 저 사람들 생긴게 좀.."
나는 서영이의 말을 무시하고 앞으로 내달려 문을 열어주었다.
네 사람은 빙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각자 각목과 나무로 된 기다란 자루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무
기인 모양이었다. 우리들이 채 인사를 하기 전에 그들이 입을 열었다.
"야아~ 좋은 곳에 있네. 운 좋은데? 너희들."
"여자들도 있고. 짜식들 응큼하기는."
한순간에 바뀐 말투에 나는 조금 놀랐다.
뭔가가 살짝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대로 내쫓아버릴 수도 없거니와, 이미 늦었다.
그리고 뭐, 실제로 나쁘지 않은 사람들일 수도 있고.
나는 카운터에 걸터앉아서 말했다.
"소개할게요. 우리 일행들. 아홉명이고, 여기부터 윤호, 재복이.."
"통성명같은 건 됐어. 너네 술 있냐?"
깡마른 남자가 말했다.
내 말을 의도적으로 씹어버리려는 의도가 묻어나와 대단히 기분이 나빴지만 그렇다고 연장자한테
한순간에 태도를 바꿀 수야 없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윤호가 말했다.
"맥주같은 건 있을거예요. 편의점이니까. 저흰 술 안 먹거든요."
"그야 그렇겠지.. 흠."
그들 중 덩치가 제일 큰 한 사람이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 나영누나에게 다가갔다.
그는 누나 앞으로 다가가 이상한 눈빛으로 누나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희롱하려는 의도가 짙게 묻어나왔다.
나영누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가리며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누님 좋은데. 우리랑 가지?"
"네?"
"아~ 거 말귀 못 알아듣네. 이런 애새끼들이랑 있지 말고 우리랑 가자구. 한국이 이렇게 되고 나서 아무것도
못 했을 거 아냐, 응? 욕구불만 아니었어? 응?"
그는 입가를 실룩거리더니 엄지손가락을 검지와 중지에 끼고 비비적거리면서 누나에게 치근댔다.
순간 우려가 확신으로 바뀌면서 편의점 안의 공기가 확 바뀌었다.
"허허. 이놈들 인상쓰는 거 보게."
"떽기. 어른들한테 그러면 못 써요."
실수다. 실수다.
엄청난 실수다.
이런 상황이라고 사람을 무턱대고 믿는 게 아니었어.
이런 상황이니까 더욱 더 의심해야 하는 거였는데!
조근조근한 말투와는 다르게 무기를 든 손에 힘을 주는 그들을 보며 뒤쪽에 있던 재복이와 수정형이
무기 쪽으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나는 식칼창을 라디오 있던 방에 두고 온 채라 당장 손에 집히는 게 없다. 하지만 무기가 있다 한들,
이 사람들과 싸워야 하나? 정말로?
뭉쳐야 하는 이 상황에서 꼭 같은 인간들끼리 피터지게 싸워야 하는 건가?
더군다나 우리가 가진 무기들은 대 인간용이 아니라 대 좀비용 살상무기다.
날이 달리거나 한 위험한 무기들을 이 사람들한테 휘둘러야 한다고?
"이 새끼들 안 되겠구만. 가만히 여자들 내 주고 술만 주면 될것을."
나영누님 앞에 서 있던 덩치가 머리를 긁적이며 얘기하더니,
갑자기 내 옆에 서 있던 태완이에게 확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앗..!"
빡
우리들 중 가장 체격이 작은 태완이는 무방비 상태에서의 일격에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
사람을 때리는 폼이 딱 사람 칠 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뭐, 뭐야? 뭐예요 아저씨들!"
나가떨어져 멍한 얼굴로 상처부위를 만지고 있는 태완이를 윤호가 잡아 일으켰다.
콰장창
"히잇..!"
그 덩치의 옆에 서 있던 다른 덩치가 선반 하나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자 옆에 있던 아름이가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가 말했다.
"새끼들아 잘 들어! 지금 여자들 다 내 주고 우리가 꼴리는 대로 먹을 거 가져갈 때 까지 가만 있으면 살려준다!
가만 안 있으면 어디 하나씩 병신 만들어 줄 테니까 알아서들 해!"
"나한테 걸리는 새끼는 거시기 병신 만든다."
옆에 있던 깡마른 남자가 말했다.
태완이도 나가떨어지고, 갑작스레 일어난 사태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앞에 서 있던 덩치가 나영누나의 옷을 거의 찢어질 정도로 휘어잡으며 끌고가기 시작하자 수정형이 나섰다.
"잠깐만요!"
"하아.."
나영누님을 끌고가던 그 남자는 형의 말을 듣고 고개를 팍 떨구며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뒤로 확 돌면서 수정형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다행히도 형은 예상했다는 듯 옆으로 확 빠지며 주먹을 피했다.
덩치는 재밌다는 듯 말했다.
"허허, 피해?"
"우리 대화로 하죠. 왜 이러는 겁니까? 지금은 서로 힘을 합쳐서 군대가 내려올 때 까지 버텨야 할.."
퍼억
"악!"
순간 수정형의 뒤로 돌아간 깡마른 남자가 형의 등에 몽둥이를 휘둘렀다.
형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아까 형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남자가 형에게 다가가 발길질을 했다.
형이 얻어맞는 걸 보며 깡마른 남자가 얘기했다.
"애기야. 피하면 더 다친다는 걸 선생님한테 안 배웠나봐?"
"그러지 마요! 왜 이러는 거예요!"
나영누나가 울먹이면서 덩치에게 매달리자 그는 누나를 밀어내며 말했다.
"아이구, 알았어. 이놈 그만 때리면 누님이 우리랑 같이 가 줄거야?"
"그.. 그건.."
누나가 대답을 망설이자 그는 다시 인상을 구기며 외쳤다.
"그럼 이렇게 해야지!"
터억
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발길질을 가했지만, 그의 다리는 차마 형의 몸통까지 닿지 못했다.
물론 내 제지 때문이었다. 아까 누나와 이 아저씨가 이야기할 때 내가 미리 튀어나갔었다.
반 위협용이라 그의 발차기는 그리 묵직하지 않았다.
"그만 하세요."
몸을 숙인 채 그의 다리를 막고 있는 나를 보며 덩치가 말했다.
"이것들이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만. 도대체.. 흑!"
그는 방금 전 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쪽 다리로 나를 걷어차려 했다.
나는 그의 발이 나오기 전에 몸을 그의 사타구니에 밀어붙혀 그를 제지한 뒤, 수정형을 끌고나왔다.
내 뒤에 선 채라 언제든지 나를 칠 수 있었던 깡마른 남자가 작대기를 흔들며 말했다.
"이새끼들 웃기네? 너희들 자꾸 그러다 아저씨들 화난다."
"가만있어. 저새끼 내가 조진다. 좀만한게 까불어?"
작대기를 까딱거리면서 내게 다가오던 깡마른 남자를 제지한 뒤, 덩치가 겉옷을 벗으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무섭다.
내가 저런 건달들을 이길 수 있을까?
내가 쿨럭거리고 있는 수정형을 바로 눕힌 뒤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덩치를 노려보자
깡마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얼씨구 얼씨구.. 새끼 자세잡는 거 봐라?"
"새꺄!"
화악
욕과 함께 터져나온 내려찍는 주먹.
주비하고 있었기에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 하고 그만 둘 아저씨가 아니다.
그는 계속 욕을 내뱉으며 내게 양 손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세 번쯤을 피한 나는 벽에 몰려 결국 한 대를 얻어맞았다.
퍽
"컥!"
눈앞이 번쩍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뭐야 이거, 학교도 아닌데 다른 사람이랑 싸우는 거야?
퍼억
"쿨럭!"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복부로 들어오는 극심한 통증.
발로 걷어찬 것 같다.
내가 쿨럭거리면서 자리에 주저앉자 덩치는 내게 달려들어 무차별로 나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새꺄! 뒤져! 씹새꺄! 강아지! 좀만한! 새끼가! 어디서! 개겨! 씹새끼!"
퍽 퍽 퍽 퍽
어디를 맞는지도 모르겠다. 제길, 나는 운동을 왜 배운거야? 이런 상황에 쓰라고 배운 거 아닌가?
배에 맞은 이후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기에 그닥 큰 피해는 없었지만,
나는 땅에 엎어진 채 잔뜩 쫄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열 몇 댄가를 얻어맞았을까,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어왔다.
신나게 얻어맞으며 온 몸에서 울리고 있는 소리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큰 비명소리라,
나와 나를 구타하고 있던 덩치는 동시에 비명소리가 난 쪽을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저편을 보니 카운터 근처에서 다른 덩치 한 명이 서영이에게 달려들어 옷을 찢어발기려 하고 있었다.
"헤헤헤! 가만 있어봐 좀 신발!"
"꺄아아아악! 자기야!!"
아마도 한 명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흥분상태에 빠져 난리를 치기 시작한 것 같다.
서영이의 비명소리를 들은 재복이가 저편에서 달려와 그 덩치에게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으아아! 떨어져 강아지야!!"
퍽 퍽
"컥! 야 가만있어봐 이.. 푸컥!"
갑작스런 주먹질에 당황한 그 덩치는 뒤로 주춤주춤 밀리다가 땅에 엎어졌다.
그 위로 올라타 주먹질을 하려는 재복이를, 그들 무리에서 제일 평범해 보이는 한 남자가 확 잡아챘다.
재복이보다 별로 덩치도 커 보이지 않는 그 아저씨는 재복이의 뒷덜미를 잡고 직 끌고가더니 다리춤에
딴지를 걸며 녀석을 자빠뜨려 버렸다.
쿵 하는 소리가 나며 땅에 내려쳐진 재복이가 쿨럭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복이의 복부를
두 번쯤 짓밟았다.
"어린 새끼가.."
콱
"쿨럭!"
"꺄악! 자기야!!"
재복이가 다시 한 번 밟히자 서영이가 달려가 재복이 위에 누웠다.
그 남자는 다시 한번 재복이를 밟으려다 말고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야 야.. 드라마 찍지 말고 나와라. 나 여자라고 안 봐주는 사람이야. 어이 괜찮아?"
그가 다리를 내리며 재복이에게 맞아 넘어진 덩치에게 말했다. 덩치는 볼을 살살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어~ 새끼, 주먹 단단하네. 지 여친 건드린다고 흥분했나봐? 꼴갖잖은 게.. 가만있어봐, 나 때린 게 오른쪽 팔이냐, 왼쪽 팔이냐? 분질러버려야지."
"야 야, 애들인데 그러지 마라."
그들은 완전히 우리를 쫄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웃으면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확실히 그랬다.
수정형과 나, 태완이와 재복이는 얻어맞아 쓰러져 있고, 남은 것은 윤호 혼자지만 녀석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녀석은 태완이를 부축하고 있는 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그들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내가 이를 악물면서 일어나려는 찰나, 엎어져 있던 내 시야에 재복이의 움직임이 보였다.
녀석은 엎어진 채로 한쪽 손을 뻗어 가방 옆에 놓인 서바이벌 나이프를 집어들고 있었다.
저자식 설마..
"이.. 이재.."
내가 소리쳐 녀석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재복이는 나이프가 손에 집히기 무섭게 괴성을 지르며 서영이에게 수작을 걸었던 덩치에게 달려들었다.
재복이를 넘어뜨린 남자가 녀석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파악
"..."
재복이는 험악한 표정을 한 채 말이 없었고, 덩치는 재복이가 달라붙은 자신의 옆구리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수 초 뒤, 그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우.. 아악..!!"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자리에 무너졌다.
서걱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리며 재복이가 칼을 거두었다.
녀석은 창백한 얼굴로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재복이의 행동에 깜짝 놀랐는지, 깡마른 남자가 말을 더듬으며 외쳤다.
"어, 어! 찔렀어? 저 새끼가 사람을 찔렀어?"
"이야아아아!"
"어?"
당황하고 있는 그의 뒤로 윤호가 달려들었다.
너무 놀라서 잠깐 사고가 굳었는지, 그는 '기습 할 때는 소리없이' 라는 불문율을 깨고 자신의 행동을
온 몸으로 알려주는 커다란 괴성을 외치며 달려드는 윤호를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윤호는 두 세 걸음을 내달아 알미늄 배트를 그에게 크게 휘둘렀다.
빠각
"우아아아아아악!!"
굉장한 소리가 나면서, 그 깡마른 남자는 윤호에게 얻어맞은 손에 들고 있던 각목을 떨어뜨리고
자리에 쓰러졌다.
방금 울린 소리는 뼈가 부러진 소리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소리치고 있는 그의 뒤로 윤호의 방망이가 다시 날아들었다.
뻑
"쿠악! 으아악! 기다려! 팔이! 팔이 부러졌단 말야!"
그는 덜렁거리는 팔을 뒤로하고 손을 내밀어 자비를 구했지만 윤호는 이미 스위치가 나갔는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오오오!"
뻐어억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깡마른 남자는 비명과 함께 땅에 엎어졌다.
윤호가 본능적으로 그의 머리에 배트를 휘둘렀지만, 그는 어깨를 들어 간신히 받아낸 듯 했다.
그러나 이미 묵직한 쇠빳다로 몇 대를 얻어맞은 그는 전투불능 상태에 빠져 자리에서 꿈틀거렸다.
윤호가 정신이 나갔다.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지금 저 녀석이 보여주고 있는 움직임은 완전 좀비를 죽일 때와 판박이다.
말인즉슨, 녀석은 저 남자를 진짜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도 눈이 돌아가려 했다. 이들은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려 한다.
그럼 좀비나 마찬가지 아닌가?
..죽여도 되는 건가?
이미 재복이 때문에 피를 본 데다 윤호의 미쳐가는 모습을 본 나 역시 머리가 엄청나게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온 몸에 열이 오르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지금 할 일은 일단 이 인간들을 우리 그룹에서 빠져나가게 하는 거야! 한국은 이미 미쳐돌아가니까,
지금은 경찰들도 없고, 그래, 찔러도 되는 건가?
나는 벽을 집고 빠르게 일어났다.
나를 구타하던 덩치는 동료가 순식간에 둘이나 당하자 얼이 빠진 듯 했다.
그는 내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상황을 계산하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크아아아!!"
나는 가래끓는 소리를 내며 그의 등에 달라붙었다.
그는 갑작스런 사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 뭐야 이 신발새끼! 아직도 이럴 기운이 남았나?!"
퍽 퍽 퍽
그는 내 옆구리에 사정없이 팔꿈치를 쳐넣었다.
그러나 무게중심 때문에 양 팔을 사용하지는 못했다.
나는 왼쪽 팔로 그의 팔꿈치를 막으려 노력했다.
그는 마구 소리를 지르며 몸을 흔들어대었다.
"떨어져! 떨어져!"
"닥쳐.. 닥쳐! 크으으.."
왼쪽 팔로 옆구리를 완전히 가리게 되자, 나는 오른쪽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타고올라가 얼굴에 손을 붙혔다.
그의 입과 코를 가리자 그가 쿨럭거리며 욕을 내뱉었다.
"카학! 이 자식이 뭐 하는.."
나는 손가락을 마치 지네다리의 그것처럼 꾸물럭거리며 그의 이목구비를 확인한 뒤,
한 손가락을 그의 왼쪽 눈에 집어넣었다.
"끄아아아아아!! 이 미친놈아! 놔! 놔!!"
"크으윽!"
뭉클
"아아아아악!!"
포화상태의 풍선이 터질 때의 느낌같이, 뭔가가 꿀럭 하며 뭉개지는 느낌이 내 손가락부터 뒷골까지 퍼져나갔다.
나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에게 당한 덩치는 단말마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 오른손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나는 손톱을 세워 그의 얼굴을 좍 긁으며
다시 한 번 그를 붙잡고 있는 다리에 한 층 더 힘을 가했다.
그리고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덩치는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마구 고개를 흔들면서
허리를 흔들어대었다.
"안돼.. 안돼! 뭐 하려는 거야! 안 돼! 용서해줘! 제발!! 으아아아!! 하지 마!!"
나도 내 눈에 힘을 주고 있어서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갔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거지? 손이 미끌거린다.
아 그래, 이 자식의 눈깔을 후벼파고 있었지.
관장님이 그랬지, 적을 죽일 때는 확실하게 하라고.
솔직히 한 쪽 눈만 그러면 좀 아쉽잖아.
마저 끝내줘야지.. 응.
내 손이 피의 길을 타고 그의 얼굴 반대편으로 꾸물꾸물 이동하자 그는 고개를 흔들다가 안되겠는지
나를 매단 채 음료수 냉장고로 돌진했다.
"미친새끼! 미친새꺄!! 우아아아!!"
콰장창
"크학!"
무아지경에 빠져 그의 다른 쪽 눈마저 뭉개버리려던 나는 날카로운 고통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매달려있던 덩치와 함께 땅에 자빠진 나는 곧바로 몸을 굴려 일어났다.
잠시 숨을 고르며 정신을 차리던 나는 퍼뜩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시큰거림을 느꼈다.
유리조각이 박힌건가?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내 오른손을 확인했다.
투명한 색의 무언가가 검붉은 피와 함께 엉겨 손가락을 감싼 채 적시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그제서야 나는 알아챘다. 내가 그를 애꾸로 만들었다는 걸.
나는 숨을 한 번 헉 하고 들이키며 나를 구타했던 덩치를 쳐다보았다.
그는 온몸에 유리조각을 붙히고 무릎을 꿇은 채 한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내 눈! 내 눈이..! 으아아아.."
와장창
나는 내 손가락과 무릎꿇은 채 비명을 지르고 있는 그 남자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다가
갑자기 들려온 소음에 뒤편을 쳐다보았다.
깡마른 남자를 구타하던 윤호는 다른 남자에게 제지당했는지 반쯤 일어나있는 태완이와 함께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재복이는 나이프를 쥔 손을 덜덜 떨며 서영이를 지키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이게 다 저 인간들 탓인가?
이 미친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하지?!
24화-종결
"움직이지 마 이 새끼들아아아!!"
내가 혼란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괴성.
나는 다친 이들을 번갈아가며 살펴보다가 소리를 친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까 재복이를 잡아챘던 남자였다.
그는 언제 지니고 있었는지 기다란 회칼을 손에 들고 있었다.
젠장.. 진짜 조폭이나 그런 거였나보다.
품속에서 나온 회칼이라니 무슨 영화 찍냐?
나는 내 앞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덩치가 행여나 빡돌아서 이상한 짓을 할까 주의하며
소리치고 있는 남자를 주시했다.
"어린 새끼들이라 적당히 하려고 했더니! 다 죽여버린다!"
그는 회칼을 앞으로 드리우고 휙휙 휘두르며 우리 일행에게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칼 휘두르는 폼을 보니 한두번 꺼내 본 것은 아닐 듯 했다.
적은 세 명이나 쓰러진 상태이고, 우리 역시 피해가 커서 잠시 분위기가 식어있던 터라
우리들은 그의 행동에 뭐라 반박하지도 못했다.
그는 예상외로 우리가 당황하지 않자 씩씩거리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나영누나가 뒤쪽으로 뛰어가 태완이와 윤호의 뒤쪽에 서 있던
나라를 끌어안고 그를 노려보았다.
원래부터 나라를 노렸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라가 우리 일행들에 의해 가려지자 그는 침을 한번 뱉더니 이번엔 아름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아름이에게 초점을 맞추기 직전, 재복이가 잰걸음으로 아름이에게 다가가
팔을 끌어서 녀석을 서영이와 함께 자기 뒤에 두었다.
정말로 인질을 잡을 생각이었는지, 제일 약해 보이는 둘이 일행들에 의해 가려지자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이.. 망할 새끼들.."
그는 중얼거리며 이번엔 자기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재복이에게 찔린 남자는 아직도 옆구리를 잡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윤호에게 얻어맞은 남자는 부러진 팔을 감싼 채 반쯤 일어나 앉아있었지만 더이상 싸울 의사는 없어 보였다.
내게 당한 남자는 자기가 깨뜨린 음료수 냉장고의 옆에 기대고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그는 혼자다. 자기도 알았는지 그가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이 새끼들아! 애새끼들한테 이게 뭔 꼴이야! 안 일어나?"
"니가 눈깔 후벼파이고 그딴 소리 하나 볼까 신발?!"
내게 당한 남자가 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회칼을 들고 설치던 그는 움찔하며 말을 멈추었다.
눈을 막고있는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자신의 친구를 보며,
그는 어떤 식으로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칼끝을 움찔거렸다.
수 초간의 정적.
"으.. 크으으.."
어린 자식들에게 지긴 싫다. 시비를 건 쪽도 자기들이다.
하지만 승산은 없다.
지금 그의 내면을 표현하자면 대충 이럴 것이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며 끙끙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쳤다.
"제기랄! 그렇다면 그냥 다 죽여버리겠어!"
그는 영점 몇초동안 한 바퀴를 돌아보며 타겟을 잡는가 싶더니,
갑자기 칼을 들고 아름이와 서영이를 지키고 있는 재복이에게로 돌진했다.
그가 마구 주변을 둘러볼 때 우리들은 그의 의도를 알아챘으나 생각보다 그의 행동이 너무 빨랐다.
재복이는 놀랄 틈도 없이 흠칫 하며 반사적으로 칼을 내질렀다.
"우아앗!"
카가각
너무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쇠끼리 긁히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나더니 칼을 들고 부딫힌 둘이 크게 휘청였다.
그리고 동시에 주르륵 하며 재복이의 오른쪽 팔뚝에서 피가 쏟아져나왔다.
처음 잠시동안은 자기 상처를 알아채지 못하던 재복이는,
피가 땅에 떨어지며 팔뚝의 옷이 빨갛게 물들어가자 괴로운 듯 표정을 찡그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우..!"
운이 나빴다. 조폭이 칼을 휘두르거나 내리찍거나 했다면 막아내었을 때 다치지 않았었겠지만,
서로 칼날을 앞으로 드리운 채 부딫혔으니 칼날이 짧은 재복이가 다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꺄아아악!!"
"자기야! 괜찮아? 지금 약 가져올게? 응?"
회칼에 갈라진 상처가 마데카솔 따위로 낳을 리가 없었지만 서영이는 완전히 정신이 나갔는지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아!' 를 연발하며 가방들이 쌓여져 있는 장소로 펄쩍 뛰어나갔다.
아름이는 비명을 지르며 한발짝 뒤로 물러섰고,
나영누님 역시 안색이 하얘지더니 품에 안고 있던 나라의 눈을 가리고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게 해 주었다.
조폭은 기회를 잡았다 싶었는지 잠깐 자신이 입은 상처가 없나 체크하다가, 입술을 물고 자신의 옷으로
피를 막고 있는 재복이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완전히 누구 한 명 정도는 죽이려는 결심을 한 듯 했다. 반쯤은 미친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를 제지해보려 달려나가려 했다.
칼을 든 상대에게 뒤에서 맨손으로 달려들다니,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한 미친 짓이지만
내가 무슨 무림 고수도 아니고, 친구가 열 개도 아닌 단 하나의 목숨을 잃기 직전인데 딱히
다른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순간 내 눈 앞으로 뭔가가 지나갔다.
까아앙
그저 칼끼리 긁힌 소리 정도가 아니라 서양 전쟁영화에서나 들었을 법한,
두 개의 칼이 부딫혔을 때의 커다란 금속음.
그런 소리가 울려퍼지며 조폭의 회칼은 현관문 바깥으로 날아갔다.
조폭은 전력으로 칼을 휘두르다가 그 칼이 손에서 강제로 빠져나가자 상당한 타격을 입은 듯 했다.
그가 손을 붙잡고 인상을 쓴 채 옆을 바라보자, 그곳엔 몸을 앞으로 한껏 숙인채 칼을 빼들고 있는,
아직도 볼어 얻어맞은 자국이 남아있는 태완이가 있었다.
상대가 무기를 들자 마음을 굳히고 달려나온 듯 했다.
어디 서너 군데쯤을 크게 베일 각오를 하고 있던 나는 반색을 하며 외쳤다.
"김태완!"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녀석은 날을 집어넣지 않은 채 그에게 말했다.
"그만하죠."
"이이익!!"
그만 하란다고 그만 하는 바보는 없다.
그는 완전 폭발직전인 표정을 하고 태완이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한순간 태완이가 휘두른 검에 꿰뚫려 컥컥거리며 입에서 피를 뿜는 조폭의 모습을 상상했으나,
다행히 태완이는 한 걸음을 먼저 내달려 맨손의 조폭에게 몸을 밀착시킨 뒤 그를 손잡이 부분으로
밀어냈을 뿐이었다.
턱 하는 소리가 났을 뿐이지만 꽤나 아플 터였다.
그는 가슴께를 붙잡고 뒤로 몇 걸음을 밀려나더니 꼴사납게 자빠졌다.
"이.. 쓰에키.."
조폭은 한순간 패닉에 빠져 욕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바로 옆에 서 있는 재복이가
그런 그를 놔둘 리가 없었다.
달려들 여유가 없었는지, 녀석은 피를 닦던 겉옷을 조폭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조폭이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걸 보는 순간,
그의 바로 뒤에 서 있던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누워있는 그에게 달려들어 번개같이
그의 몸을 뒤집으며 턱을 붙잡아 당겼다.
"크커커컥! 컥커컥!"
경추가 역으로 꺾여 거의 뒤통수와 허리가 조우할 지경이 되자,
그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양 팔을 휘적거렸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도 없다.
말 그대로 진짜 숨 넘어가기 직전이니.. 내가 여기서 힘을 조금만 더 주면 그를 평생 불구로 만들거나,
맘만 먹으면 죽일 수도 있다.
단련을 괜히 한 게 아니니까 말이다.
장난칠 때나 쓰던 레슬링 기술로 우리를 죽이려던 자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나는 한순간 어딘가에서 보았던, 엘리베이터에 들어온 소매치기인지 치한인지를 백드롭으로 박아버리는
한 여자의 비디오 클립을 떠올리며 그를 더욱 압박했다.
"카각칵하가각 어커걱.."
내가 이걸 어떻게 하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정말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는 듯한 소리를 내며 한쪽
손으로 내 팔목을 두드렸다.
탭 한건가 지금?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놓아버렸다가 엇 하며 다시 그의 목을 꺾으려 했다.
젠장 이놈의 버릇! 지금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데 탭은 무슨 탭!
하지만 다행히도 다시 힘을 쓸 일은 없을 듯 했다.
그는 완전히 지쳤는지 내 몸 아래 엎드려 깔린 채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렇다고 이 자를 가만히 둘 수는 없다.
나는 그의 두 팔을 등 뒤로 올려꺾으며 재복이가 내던진 겉옷으로 그의 팔목을 묶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마."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묶어보느라 낑낑거리고 있는 나를 도와주려 응급처치를 마친 재복이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찰나, 우리의 뒤에서 수정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폭 아저씨를 찍어누른 채 뒤를 돌아보니 형이 차가운 눈으로 내게 당해 애꾸가 된 덩치를 총으로
조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덩치를 보니 그는 한 손으로는 눈을 가린 채 다른 손으로 맥주병 하나를 쥐고 있었다.
충격이 좀 가시자 그것을 무기삼아 어떻게 해보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총을 보고 움찔하더니 곧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깝치지 마라. 너같은 애새끼한테 진짜 총이 있을.."
타앙
형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애꾸 덩치가 총알을 보았을 리 만무하지만, 적어도 방금 전 자신의 얼굴 바로 옆으로 총탄이 지나갔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덩치는 완전히 식겁한 표정으로 방금 얘기를 꺼내던 모습 그대로 몇 초간 굳어있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 있던 벽에는 물론 굵직한 탄흔이 하나 벽을 가르며 새겨져 있었다.
그는 다시 천천히 앞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수정형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서.. 설마, 지.. 진짜.."
"진짜인지 가짜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보시지. 물론 그럴 용기가 있다면."
형은 아까 좋게 나가다가 신나게 얻어맞은 뒤라 꽤나 열받아 있는 듯 했다.
아까 잘 쓰던 존댓말까지 내던진 걸 보면 말이다.
어쩔 줄 몰라하는 덩치를 마주본 채 수정형이 총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맥주병 버리시지."
수정형에게 명령을 받은 덩치는 군말없이 맥주병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자연스럽게 양 손을 위로 올렸다.
한 번도 총을 든 상대와 대치해본 적 없는 나같은 일반인으로선 꽤나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물론 총을 들고 협박하고 있는 상대에게 항복이라는 의사표현을 위해 만세를 하는 건 기본상식이지만,
실제로 해 본 적은 한번도 없으니 아마 나 같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저 덩치는 조폭이나 그런 거였을 테니, 뭐 경찰에게 당해 봤거나 그랬겠지.
만세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리게 되자 계속 가리고 있던 그의 다친 눈가가
훤히 드러났다.
다행히 뭐 눈알이 비어져나왔다던가 하지는 않았지만, 눈가가 퉁퉁 부어오른 데다 배어나온 피가
그의 손자국을 따라 말라붙어있어 충분히 아파 보였다.
보고 있는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형은 다시 총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친구들 데리고 카운터 안에 서."
그는 만세를 한 채로 잠깐 형을 쳐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걸어가서 자기 동료들을 일으켜세우기 시작했다.
그가 깡마른 남자를 부축해 카운터로 끌고오는 걸 본 나는 올라타고 있던 조폭 아저씨의 등에서 떨어졌다.
여기저기가 부러져 절뚝거리며 거의 기다시피 하는 깡마른 남자를 카운터 안에 눕힌 뒤,
애꾸 덩치는 나를 노려보며 내가 구속시킨 조폭을 부축하기 위해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옆으로 슬금슬금 빠졌다.
조금 무섭군.
그가 손이 묶인 조폭을 끌고가 다시 카운터 안에 앉히자 그를 따라 재복이에게 찔린 덩치가 절뚝거리며
상처부위를 붙잡고 우리 앞을 지나갔다.
알아서 잘 걸어가는 게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재복이가 식칼이나 큰 칼 같은 걸 들고 있었으면 그는 지금 걷지도 못했을 것이지만,
그리 크지 않은 서바이벌 나이프(서바이벌 나이프 중에도 삼림용은 날이 대단히 크다)로 찔린 덕에
상처가 저 정도에서 그친 것이다.
참,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만.. 저 나이프 쇠봉에 묶어서 좀비 밀어나는 데 썼던 거 아닌가? 그렇담 저 사람 감염..
나는 순간 섬찟한 느낌이 들어 재복이가 아직도 들고 있는 칼을 쳐다보았지만,
다행히 그 칼은 가방 옆에만 매달아두었던 것이었다.
뭐 우리 적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해서 내가 무서워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멀쩡한 사람을 감염시킨다는 건 좀 싫다.
아무리 저들이 우릴 죽이려 했다 해도 말이다.
옹기종기 카운터 안에 모여서 끙끙거리고 있는 조폭들을 앞에 두고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앞에 진을 쳤다.
카운터 입구 쪽에는 태완이가, 밖에는 수정형이 총을 겨누고 있으니 아무리 우리가 만만하게 보여도
이제 그들은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서로 대치한 채로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우리들을 보며 눈을 다친 덩치가 말했다.
"그래서.. 어떨 건데? 우릴 이렇게 두고 뭐 하려고 그래."
그건 그렇다. 모아놓고 죽일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놔주기도 그렇다.
그럼 우리랑 같이 행동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는 곁눈질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시 뒤 태완이가 입을 열었다.
"물론.. 아저씨들을 죽이거나 할 순 없어요. 하지만 그냥 놔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럼 어쩌라고?"
그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글쎄, 당장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가 그래도 아무 조건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자 그가 말했다.
"그냥 놔주지 그래? 다시는 너희들 안 건드릴 테니.."
"그걸 누가 믿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영이가 빽 소리를 지르자 그는 깜짝 놀라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서영이는 아직도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였다.
하기야, 우리야 그렇더라도 여자들은 바로 조금 전에 놈들에게 당할 뻔 했는데 지금와서
그냥 놔달라는 그들의 요구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나라도 펄쩍 뛸 것이다.. 가 아니라.
뭔 소리야, 게이 성폭력범을 만난 적도 없는 주제에.
재복이 역시 서영이의 말을 듣더니 화가 확 치미는 듯 했다.
녀석의 표정이 험악해짐과 동시에 서영이가 외쳤다.
"너네들, 싸그리 좀비 밥으로 줄거야! 수정오빠! 저 새끼들 옷 다 벗겨서 밖에 전봇대에다가 묶어놔요! 못
도망가게 다리 힘줄을 끊어놓.."
조폭들의 얼굴이 하얘지는 걸 보며, 나는 서영이의 말을 듣다가 깜짝 놀라 녀석을 제지하며 말했다.
"워, 워, 워! 진정해 신서영. 그런 생각은 인간으로서 하는 게 아니다."
"그럼 어쩌라고! 저 새끼들을 그냥 놔주라고? 특히 저, 옆구리에 칼 박힌 돼지새끼가 나를, 나를.. 아우,
소름끼쳐! 강아지들!"
서영이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했다.
이대로 날뛰는 걸 냅두다간 누군가의 무기를 뺏어서 저 인간들에게 달려들 것 같아 나는 재복이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쟤 좀 말려보라는 식으로 눈치를 주었다.
내 말을 들은 재복이가 녀석에게 걸어가 조용히 상처에 붕대나 좀 감아달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서영이는
재복이와 함께 구석으로 이동해 조용해졌다.
재복이의 상처를 보자 갑자기 내가 얻어맞은 상처도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놀고 있는 손으로 얼굴에 난 상처들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래, 적어도 저들은 우리들의 동료를 빼앗고 해하려 했다. 그대로 두면 안 되지.
동시에 나는 웃으며 대했던 우리들에게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무작정 주먹질을 시작하고 여자들에게
희롱을 했던 순간이 기억나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서로 지쳐서 그새 까먹고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진 못 할 일이다.
"그냥.. 팔 한 쪽씩 부러뜨리고 놔줄까."
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조폭들과 동료들이 동시에 나를 놀란 듯 쳐다보았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눈빛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그럼 어쩌냐는 식으로 외쳤다.
"조금 잔인하긴 해도 어쩔 수 없잖아? 그럼 재복이 팔에 생긴 상처랑 우리가 얻어맞고 아지트가 지랄난건
어떻게 보상받을 건데? 저 사람들이 지금 다친 것 만으로도 쌤쌤으로 친다 해도, 난 저 인간들 못 믿어.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아?"
"자.. 잠깐! 이 자식아! 멀쩡한 인간을 애꾸로 만들어 놓고 그런.."
"입 닥치지? 당신 말대꾸 들어줄 생각 없으니까."
열이 오른 김에 그의 말을 듣고 내가 바로 쏘아붙이자 그는 움찔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려 한 이들에게 동정을 베풀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가 인간으로서 너무도 잔혹한 짓을 하기가 싫은 것이다.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아까의 난리를 떠올려 억누르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생으로 사람 팔을 부러뜨려 본 적은 없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그런 것 보다, 그냥 한 사람 인질로 잡아놓고 다른 물품같은 거 가져오게 하는 게 어떨까? 옷같은거나 공구
같은 거. 편의점에서도 구할 수 없는 거 많잖아?"
태완이가 말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 인간들은 동료를 버리고도 남아."
수정형이 차갑게 말했다. 내 말이 그거다.
"하지만 저 칼맞은 사람은 치료도 해야 하잖아요? 그럼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을 인질로 잡으면.."
태완이는 자기 생각이 꽤나 맘에 들었는지 그 해결책으로 어떻게든 답을 보려는 듯 했다.
수정형과 태완이가 말싸움을 하는 동안, 나는 뭔가 아주 중요한 걸 빼먹은 것 같아 잠깐 생각에 빠져들었다.
다른 물품.. 다른 물품.. 우리한테 필요한 다른..
"아. 그렇지."
이제 기억났다.
자동차! 어른이 넷이라면 이동수단이 있을 법도 하다.
나는 태완이를 막으며 애꾸 덩치에게 말했다.
"아저씨. 차 있어?"
그는 '왜 또 이 새끼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차? ..있지."
빙고.
25화-그들...
"도대체 왜 우리 차를 먹으려는 거야?"
"알 필요 없으니까 잠자코 걷기나 하시지."
애꾸 덩치의 말에 수정형이 대답했다.
그는 이제 눈 가리기를 포기했는지 얼굴의 한 쪽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놓은 채 투덜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차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뒤, 늦은 밤이었지만 우린 지체할 것 없이 그들의 아지트로 향했다.
차를 회수하는 데는 그닥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그들과 함께 밖으로 나선 건 나, 윤호, 수정형 셋.
더군다나 꽤 큰 상처를 입은 재복이는 안정이 필요하고, 늦은 밤이라 꼬맹이 나라는 끌고가기가 버겁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수정형이 비척비척 걷고 있는 조폭들의 뒤를 맡은 채 우리가 뒤를 따라가고 있는데 윤호가 대뜸 내게 물었다.
"야 김진환. 너 재복이 상처 꼬맨거 잘 한 거 맞어?"
"몰라. 그냥 한거야."
조폭들을 진압한 뒤 그들에게서 아지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 약을 바르고 붕대로 팔을 감았지만
안색이 하얘진 채 서영이에게 부축되어 있는 재복이를 발견한 나는 녀석의 환부를 관찰해 보았었다.
내가 의사도 아니고 녀석의 상처를 본다고 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딱 보았을 때 약 바르고 붕대를 감는다고 끝날 일은 아닐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었다.
체육관에 있었을 때, 해병대 수색대 출신에 별 희한한 경험을 다 해본 관장님께 내가 언젠가
"칼에 베이면 어떻게 해요?" 라는 질문을 했었는데, 관장님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종이에 베인 것과 칼로 베인 것은 달라. 피부를 가르고 조직까지 들어간 상처는 꼬매지 않으면 썩어들어가기
시작해서 작은 상처라도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지. 비단 칼뿐만이 아니라, 뭔가에 다쳐 피부가 갈라졌다면
꼬매는 것이 바람직해. 특히 더러운 것에 다쳤다면 소독하는 것은 필수고 말이지. 만약 소독약이 없으면,
영화에서 본 것처럼 부지깽이나 나이프 등 쇠를 달궈서 상처를 익혀버리는 것도 방법이야. 상상도 못 하게
아프겠지만.."
그래서 내가 "그럼 꼬매는 건 어떻게 해요? 병원해서 하는 거 아녜요?" 라고 했더니,
관장님은 "실이랑 바늘만 있으면 꼬맬 수 있어. 옷 꼬매듯이. 갈라진 조직의 접합부를 붙혀 이물질의 침투를
방지하고 회복속도를 극대화시키는 게 목적이니까..
아 너한테 이런 얘기 해도 모르겠네." 라고 말했었다. 뒤는 사족이었습니다요 관장님.
여하튼 그 때 나는 관장님의 말을 들으며, 영화 람보에서 봤던 것 처럼 갈라진 상처에 달군 나이프를
대 비명을 지르며 소독을 한 뒤 바늘과 실로 상처를 꼬매는 나를 상상하며 이를 갈았던 적이 있어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싸웠을 때 목격했던 재복이의 출혈량으로 보아 녀석의 상처는 꼬매지 않으면 상처가 덧나 정말 큰 일이
날 수가 있기에 나는 해 본 적은 없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재복이의 동의 하에 녀석의 상처를
꼬매버렸다. 언젠가 우리가 밖으로 나가 생필품을 챙겼을 때 윤호가 챙겼던 구급상자가 큰 도움이 되었다.
과산화수소수가 없었더라면 정말로 달군 쇳덩이로 녀석의 팔을 지져버려야 했을 테니까.
소독하지 않은 치료는 상처를 더 아프게만 할 뿐, 치료가 아니다.
나는 검은 실이 달린 얇은 바늘로 재복이의 피부를 뚫고들어갈 때의 느낌이 기억나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젠 별 경험을 다 해 보는군.
그리고 서영이 걔는 내가 지 남친 살리겠다고 교과서에서도 안 가르쳐 준 짓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왜 그리 난리야 난리가..
꽤나 아팠겠지만 별로 난리 칠 기운도 없었는지 재복이는 의외로 담담했었다.
혹시 그 조용했던 것이 출혈 때문에 기운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어떻게 돌아갈 때
과일이나 채소 등을 가져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닥 익숙하지 않은 이쪽 지형을 머릿속에 그리며
채소 등을 구비해놓을 만한 냉장고가 있는 마트들의 위치를 생각해보았다.
싱싱한 음식을 먹어야 제대로 비타민 등이 공급이 되어 회복을 하지, 그런 상처를 입고 약도 못 먹고
라면만 먹는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
정말 별 생각을 다 하는군. 나도 주책이다. 나 의사 해도 되는거 아닌가 몰라?
..뭐가 어쨌건 간에, 녀석이 하루빨리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하려면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다.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야 의사든 뭐든 만날테니까 말이다.
나는 재복이의 상처를 다시 떠올리며 이번엔 우리 앞에 서서 걷고 있는 칼에 찔린 조폭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통을 벗은 채 거의 복대 비슷할 정도로 아랫배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재복이를 치료하다보니 다친 조폭들이 눈에 밟혀 그들에게도 치료약을 주며 알아서 응급치료를 하라고 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끙끙 앓고 있는 사람들을 그냥 둘 수야 없는 일이니 말이다.
만약 그들에게 아무조치도 취해놓지 않은 채 우리의 안내를 맡으라고 했다가 좀비를 만나면,
그들은 백발백중 아무런 대처도 취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눈앞에서 생사람이 괴물들에게 뜯어먹히게 할 수는 없으니..
그들은 싸움질만 하고 살아서인지 치료에 대해서도 상당히 익숙한 듯 했다.
특히 윤호 때문에 팔이 부러진깡마른 남자의 골절치료를 할 때, 부러진 팔을 능숙하게 맞추는 그들을 보고
나는 꽤나 놀랐었다.
나머지 조폭들도 서로서로 파스를 바른다던가 약을 바르고 닦은 뒤 붕대를 두른다던가 해서 지금 저렇게
걸어다닐 수가 있는 것이다.
적이고 우리고 치료하느라 바빠 안 그래도 좁은 딱 하나의 편의점 화장실은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지금 우리 애들이 닦고 있겠지, 아마.
애꾸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집은 여기서 고작 5분 거리.
하지만 우리 앞에 선 조폭들 역시 하나같이 다친 터라 꽤나 걸음이 느렸다.
편의점에서 나선 지 벌써 5분이 지났지만 우린 아직 그들의 집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다.
나는 순간 이들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들이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도 보지 못했고, 정말 일행이 더 있다면 그들이 꽤 긴 시간동안 연락이 없는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진작에 이들의 목적은 약탈이었으니 이들과 발을 함께한 더러운 인간이라면 노획물의 정보에 굶주려
금새 연락을 취했거나 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동네가 이런 마당에 건장한 남자들이 넷보다 더 모여앉아 있었다면 아무런 마찰도 없을 리가 없다.
위급시일 수록 서로 대장을 하려고 나서거나 몸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조건을 제치고라도 일행이 있다 한들 많아봐야 하나 둘.
허나 백번 양보해도 총이 있는 우리들이 동료가 떡이 되어 돌아온 것을 보고 사기가 꺾인 남자 한둘에게
당할 리는 없다.
나는 그제서야 안심하고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하며 근처에 좀비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저번에 폭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동네 쪽은 전기가 끊기지 않은 상태다.
물론 어느 곳은 전기가 나간 듯 했으나 적어도 요 나흘간 우리의 행로 중에 불이 꺼진 가로등은 보이지
않았었다.
나는 먼 곳에 있는 가로등을 살펴보며 만약 무기도 없는 부상당한 조폭들을 앞에 세운 이런 상태에 좀비가
앞으로부터 걸어온다면 과연 이들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순간, 내가 바라보고 있던 가로등의 전구에서 파지직 하는 소리가 나며 불똥이 떨어졌다.
우리 앞에 서 있던 애꾸도 그걸 보았는지 중얼거렸다.
"저거 뭐.."
푹
"어?"
"뭐야?"
"제기랄! 전기가.."
..말하기가 무섭군.
애꾸가 뭐라고 불평을 내뱉는 순간 온 사방의 전기가 일제히 나가버렸다.
달빛도 흐린 서울의 밤하늘 아래 전깃불에 의지해 걷고 있던 우리는 물론 순간적으로 모든 시야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한 사람이 된 듯 숨을 죽이며 눈이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다.
진작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어도 전혀 이상할 일이 없지만, 하필이면 한밤중에 이동하는 도중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이건 신의 농간이 아닐까?
어둠은 공포를 터무니없이 극대화시킨다.
금방 전까지만 해도 분명 사방에 그 어떤 좀비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었지만,
나는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자리에 몸을 도사리고 선 채 혹시라도 내게 다가올 미지의 생명체에 대비해
식칼창을 앞으로 드리우고 천천히 흔들었다.
완전한 침묵.
십 초 가량이 지나자 어렴풋이 눈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일곱이나 되는 인원이 괴물들 틈새를 비집고 지나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야다.
다들 나와 비슷한 시점에서 눈이 보이기 시작했는지 일행들 틈에서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도 잠시 뒤, 말 그대로 어렴풋이 보이는 시야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던 우리의 머리 위에 달빛이
비쳐오기 시작했다.
구름이 걷힌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세상이 이 꼴이 되고 나서부터 문명의 힘과 고마움을 너무도 절실하게 느낀다.
슬슬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골목 너머의 기척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시야가 확보되자 수정형이 말했다.
"빨리 가자구. 이대로는 위험해."
"그래."
수정형이 재촉하자 그들 역시 동의했다.
한발짝만 잘못 나서도 나를 먹겠다고 달려들 괴물들이 판치는 곳에서 시야까지 잃는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그 때문에 아까 전기가 나갔을 때도 그들이 우리에게서 도망치지 않은 것이겠지.
일행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좁은 골목 안에서 울려퍼지는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느껴졌다.
오감 중 어느 감각이 차단되면 나머지 감각들이 예민해진다더니, 이게 그건가.
"이제 다 왔.. 잠깐만."
선두에 서 있던, 내게 양 손이 묶였던(지금은 풀어주었다) 조폭이 입을 열며 자리에 멈추자, 그
의 뒤를 따르고 있던 다친 둘이 그의 등에 부딫혔다. 옆구리에 바람구멍이 난 덩치는 숨을 힉 하고 내쉬며
얼굴을 찡그렸을 뿐이지만, 윤호에게 쇠몽둥이 찜질을 당해 죽다 살아난 깡마른 남자는 멈추었다 걸었다
하는 정도도 힘이 드는지 욕설을 내뱉으며 그에게 불만을 토해내었다.
"또 뭐야.. 빨리 가. 팔 아파 뒤지겠구만. 누워있고 싶다고."
그가 투덜거리며 내 앞에서 멈춘 덕분에 그의 온 몸에서 피어오르는 파스향이 내 코를 찔러 내가 킁 하고
숨을 한번 내뱉으며 코를 막는데 일행을 멈춘 조폭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그거 아니냐?"
순간 모두의 긴장의 실이 팍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달빛에 빛나는 인영은 과연 좀비였다.
회사원이었는지, 놈은 마른 골격에 흰 와이셔츠, 파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심지어 머리 스타일까지 깔끔했다.
하지만 그에 대조되는 잔인한 상처.. 그것은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흰색 와이셔츠라 더욱이 부각되는 붉게 물든 이빨자국, 그리고 구멍.
먹히다 만 상처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놈의 그 상처에선 순대 한 가락이 배어나와
땅이 질질 끌리고 있었다.
꼭 묶이다 만 벨트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그 내장은, 달빛을 받아 야릇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행히 그 좀비는 골목을 빠져나와 길이 퍼져나가는 부분에 서 있었다. 내가 조용히 말했다.
"그냥 빠져나가도 될 것 같은데."
"응."
내 말을 들은 우리 그룹의 셋은 주저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봐서, 애매한 곳에서 서성이고 있는 좀비는 피할 수 있을 때 확실하게 피해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망설이는 동안 움직여서 진로를 막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쳇.. 그게 아니야."
깡마른 남자가 갑자기 우리를 제지했다.
우리가 그를 돌아보자 그는 그 좀비가 서 있는 바로 옆의 이층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우리 집이란 말이야. 그 앞에 있으니까 이러는 거지."
그의 말에 우리는 그가 가리킨 벽돌집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이층짜리 벽돌집이었다.
차가 앞에 한 대 서 있는걸로 봐서 그의 말이 맞는 듯 했다.
나는 순간 저 집이 왠지 낯익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집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그리고 내가 기억 속에서 이 집을 떠올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 여기 거기잖아? 우리 처음에 여기 왔을때 누가 커튼에서 빼꼼 보고 속으로 도망쳤던 데!"
"어.. 진짜다."
수정형도 기억난다는 듯 말했다.
윤호는 물론 무슨 소리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우리가 정찰 나갔을 때의 일이란 걸 기억해내고
아무 토도 달지 않았다.
나는 앞에 있는 좀비는 잠깐 잊어버리고 앞에 선 조폭들에게 말했다.
"맞지? 아저씨들 저번에 우리 지나가는 거 보고 모른 척 했지?"
"..모르겠는데."
"난 모른다."
조폭들은 내 말을 듣고 딴청을 부렸다.
지나간 일이니 뭐 지금와서 화날 것도 없지만(화내봤자 나오는 것도 없다),
그래도 당사자들을 이렇게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냥 넘어가기는 좀 그랬다.
"아니.. 내 생각엔 그게 정찰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수정형의 한마디.
"에이, 뭔 상관이야 새끼들아! 그냥 들어가자고. 차 키 줄테니까 먹고 떨어져. 어차피 우린 다쳤으니까 몰
수도 없을테고,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보상금같은 거라도 나오겠지. 한달만 버티면 될 테니.."
"그럼 저게 당신들 차?"
수정형이 집 앞에 서 있는 초록색 봉고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꽤 낡아보였지만 그렇다고 아주 막 굴린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 니들이 강탈하려고 하는 내 애마다."
애꾸는 투덜거리면서 집 쪽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흠칫 하며 좀비의 존재를 알아챘다.
행동하는 양을 보니 그들도 내가 말했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듯 했다.
금방 보았던 좀비의 존재를 우리와 얘기하는 동안 까먹은 것을 봐서는 거의 틀림없다.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야 미친놈. 쟤 좀 어떻게 해 봐라. 우린 무기 없잖아."
미친놈이라니..
나는 자기가 터뜨린 일의 반작용으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놓고 이제와서 내게 미친놈이라고 하는
그의 태도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내가 그를 애꾸로 만들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다 그들 책임 아닌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린 차키만 받아서 나가면 되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시든가."
"뭐야? 그럼 우리한테 무기라도 줘."
"알바 아니지. 당신들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냉정하게 쏘아붙히자 그들은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제 난 이런 인종에 대해 더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기에 그들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목숨 이상의 자비는 베풀지 않으리라 생각한지 오래니까.
저 인간들 우리 아지트에 처음 쳐들어왔을 때 했던 꼴로 봐서, 살아오면서 여럿 무고한 사람들에게
여러번 피눈물을 흘리게 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그 일들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면, 또는 우리 일행들이 그랬다면, 이들은 이미 좀비를 상대할때
썼었던 흉기들에 꿰뚫려 지금쯤 저기 골목에서 의미불명의 신음소리를 내며 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나는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먼저들 가시지. 따라 들어갈테니까."
"빌어먹을 꼬맹이 자식."
그는 투덜거리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 일행들이 그의 뒤를 쭐래쭐래 따라가자 대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던 좀비놈이
움직임을 뚝 멈추는 것이 보였다.
뭔가 낌새를 느낀 듯 했다.
이제 확실하게 기척이 느껴지면 이쪽으로 다가오겠지.
..혹은 달려오거나.
결단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함은 아니지만, 좀비들의 행동을 예측하기는 불가능하기에
나는 자기방어를 위해 식칼창을 드리우고 녀석에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수정형 역시 지금만큼은 조폭들이 아닌 녀석에게 총을 겨누었고,
조폭들은 다친데다 무기까지 없는 상태라 더더욱 쫄은 듯 했다.
문 앞에 세워져있는 차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좀비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되자 우리의 긴장도는 더욱 높아졌다.
"후우.."
불과 문을 1미터 앞두고 굼벵이처럼 움직이고 있는 우리를 쳐다보던 윤호는,
한숨을 폭 쉬더니 좀비와 우리 사이에 몽둥이를 드리우고 서며 말했다.
"먼저들 들어가요. 내가 볼테니까."
"야.."
"너도 빨리 들어가. 더이상 시간 지체하기 싫으니까. 다들 쉬어야지."
나는 윤호의 사서고생에 불만이 생겨 뭐라고 하려 했으나, 조폭들은 기회라는 듯 대문 안으로 뽀르르
기어들어갔다. 침입에 대한 겁이 없는건지 그들은 대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윤호에게 하려던 말을 채 시작도 못한 나는 입맛을 다시며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갈 뿐이었다.
내 뒤로 수정형이 들어오고, 뒤따라 윤호가 들어와 조용히 대문을 닫을 때 까지 좀비는 우리를 알아채지
못했다. 우리가 대문을 닫고 계단을 천천히 올라오는 걸 지켜보고 있던 애꾸가 문을 열며 말했다.
"니들 차 운전이나 할줄 알면서 이러는 거냐?"
"대답은 같습니다요. 알바 아니니까 차키나 내놓으시지."
"..너희들 한국 정리되고 나서 보자."
"나중에 보자는 사람 하나도 안 무섭더라."
착한 사람이 화가 나면 더 악랄해진다더니 수정형이 딱 그건가보다.
조폭의 협박에 입을 이죽거리면서 대꾸하는 형의 모습은 완전 불량배 그 자체였다.
으음, 칼 든 태완이가 저렇게 화나면 더 무서울라나?
양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 퀴퀴한 냄새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독한 술냄새와 짙은 담배 냄새. 어두컴컴한 이들의 방 안쪽을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어떻게 살아왔을지 충분히 상상이 간다.
"환기나 좀 하지.."
윤호가 코를 잡고 투덜거리는 걸 들으며 나는 수정형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전기가 나간 덕에 현관 근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베란다에서 쏟아져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가늠해 본 이 집의 내부는 꽤나 간단해 보였다.
짧은 복도가 신발 놓는 자리 앞으로 나 있고, 그 복도 양옆에 방이 하나씩..
아마도 그 중 하나는 화장실이겠지.
복도의 끝엔 베란다가 딸린 마루가 있고..
마루로 들어가자 한 가운데에 술병과 먹을 것,
그리고 담배꽁초가 가득 담긴 재떨이로 보이는 무더기들이 보였고,
그 가득 찬 재떨이가 무색할 정도로 마루엔 구겨진 꽁초들이 득시글거렸다.
달빛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게 이 정돈데 안이 환하게 보이면 과연 얼마나 지저분할까?
"좀 잘 안 보이는군."
그들은 집에 왔다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애꾸가 중얼거리며 커튼을 완전히 걷자 마루가 꽤 훤하게 보였다.
예상대로 마루에 가득찬 쓰레기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음?"
나는 깡마른 남자가 애꾸의 말에 따라 자기 짐들을 뒤지며 차키를 찾는 동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다가
마루에 딸리 또 하나의 문을 발견했다.
"방이 하나 더 있네?"
내가 중얼거리자 조폭들이 일제히 움찔 하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뭔가 있는 건가?
그들은 자기들이 지나치게 놀랐다는 것을 숨기기라도 하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셋이 차 키를 찾는 동안, 재복이에게 찔렸던 뚱땡이가 슬그머니 그 방문 앞에 가 앉는 것을 보고
내 추측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나는 이렇게 된 김에 그들에게 방 안에 뭐가 있는지 다그쳐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우리도 피곤한데 빨리 끝내고 가야지.. 기껏해야 약이나 그런 거겠지 뭐.
이윽고 차키를 찾아낸 애꾸가 수정형에게 물건을 내밀며 말했다.
"자, 차 키 여기있다. 먹고 꺼져."
"당신들이 자초한 일이야."
수정형이 차 키를 낚아채며 말하자 그는 얼굴을 실룩거리더니 갑자기 나를 쳐다보았다.
험악하게 쳐다보는 꼴이 한국이 안정되고 나서 절대로 만나선 안 될 것 같았다.
"빨리 꺼져라. 우리도 좀 쉬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유."
깡마른 남자가 소주병을 하나 집어들며 말하자 내가 대꾸했다.
수정형이 앞장서서 복도에 들어서자 나는 윤호의 등을 툭 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순간 우리의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 우우.. 우.."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소리.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라며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이게 뭔 소리야?"
금방 집을 나가려던 우리 일행의 가장 뒤에 서 있던 나는 소리를 가장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몸을 돌리며 그들에게 묻자 그들은 모른다는 듯 말했다.
"몰라. 뭔 소리야? 우린 아무 소리도.."
"우.. 우우우우~"
다시 한번 들려온 소리. 난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소리는 지금 이 방 안에서 들려오고 있다.
더 확실한 것은, 이 소리는 여자의 신음소리다.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방에 숨기고 있는 것이 무기나 약이었다면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사람이었다면 무조건 구해야 한다.
이 개같은 자식들, 약탈을 넘어서 감금까지 하고 있었던 말인가?
나는 뻔뻔하게 방문 앞에 앉아있는 뚱땡이 앞에 서서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비켜."
"엉?"
그는 아직도 딴청을 부렸다.
나는 수그러들어가던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며 식칼창을 치켜들고 말했다.
"비키라고요.. 돼지새꺄. 사람 숨기고 있는 거잖아!!"
내가 갑자기 꽥 소리를 지르자 그들은 깜짝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앞에 있는 돼지는 순간 자신이 애한테 쫄았다는 사실에 열받았는지 배를 붙잡고 벌떡 일어나
방문을 확 열면서 외쳤다.
"그래 새꺄! 이 안에 창년 하나 있다 왜!"
내 요청에 따라 돼지가 문을 열었으나, 나는 그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느라 방 안을 쳐다보지 못했다.
"야.. 야! 창훈아!"
"왜?"
나와 돼지가 씩씩거리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데 깡마른 남자가 방 안을 가리키며 외쳤다.
나와 돼지는 동시에 방 안을 쳐다보았다.
콰작
"아아아악!!"
"우.. 우아아아!!"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막지 못했다.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딱 1초만에 한마음이 되어 현관 쪽으로 뛰쳐나갔다.
방 안에서 나온 무언가가 돼지를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내 예상을 뒤엎고 방문 안에서 걸어나온 것은, 다름아닌 찢어진 옷을 걸친 여자 좀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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