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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알아볼까요?
한국전쟁(6.25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비로서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되었지만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각각 미국과 소련이 진주함에 따라 국토가 분단되는 비참한
운명을 겪게되었습니다.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므로 기세등등 남하해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게 됩니다.
9일후 평양에 자리를 잡았는데 미군은 인천에 상륙해 이틀뒤 서울에 도달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남북간의 왕래를 단절시킴으로 경계선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공산화통일되지 않는 통일을 반대하였고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했습니다.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해서 한반도 통일독립문제는 매우 어려웠고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소련의 억지 때문에!!!!!!
저희는 북한과 휴전을 한것입니다 ..전쟁은 잠시 대기라는거에요
언제든 반발 할수 있다는 겁니다 ..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발발하여 3년 1개월간 계속된 한국의 전쟁. 해방 후 5년 만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민족통일을 표방한 전쟁이었으나,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체제를 강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배경좌익은 물론 중도세력과 우익세력 일부의 반대 아래 성립된 이승만정권은 초기부터 여러 가지 불안 요인을 안고 있었다.
첫째, 미군정이 유지시켰던 친일세력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비호함으로써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국가로서의 명분을 세울 수 없었다. 친일파 처단을 위해 설치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이승만정권의 탄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던 사실은 그 두드러진 예다.
둘째, 군부의 반란과 민중들의 저항이 고양되고 있었다. 해방 후 드높아진 민중운동은 5·10총선을 앞두고 선거반대투쟁, 2·7구국투쟁 등으로 한층 치열해졌으며, 여수·순천사건 때는 지리산 일대가 반란군 세력하에 들어갔고, 대구에서도 제6연대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들은 산악지대로 들어가 유격대화하여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했다.
셋째, 이승만 정권은 극심한 정치·경제적 불안을 맞고 있었다. 1949년의 경우 정부세출 60%가 적자세출이었고 통화량 팽창으로 물가가 2배로 뛰었으며, 공업생산은 44년의 18.6%에 불과했다. 50년 5·30선거 결과, 이승만 지지세력은 총 210석 중 30여 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승만은 취약한 지지기반과 심각한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의 원조를 유도하는 한편, 북진통일을 공공연히 주장,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호언했다. 실제로 전쟁발발 1년 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간의 소규모 무력충돌이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를 태평양 지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하는가 하면,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게 되면 모든 원조를 제공」한다고 약속하는 등 한반도정책의 불확실성을 드러냈다. 이같은 이승만정권의 불안정성과는 달리 북한은 통치체제를 안정시키고 남한해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경 38선 여러 지역에서 북한의 공세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의 과정은 대체로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북한 인민군이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 만에 대구·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한 시기다. 인민군은 점령지역에서 당과 인민위원회를 재건, 토지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그러자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 국제연합군 참가를 결의케 했다. 이로써 전쟁은 국제전화되었다. 당시 안전보장이사회에는 소련이 중국문제로 불참중이었으므로, 거부권 행사 없이 미국안이 통과되었다. 당시 미지상군은 이미 한국전선에 투입되어 있었다.
제2단계는 미군을 주로 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50. 9. 15), 서울을 탈환하고(9. 28),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했으며(10. 13), 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10. 26)한 시기다. 전쟁의 고비는 38도선 이북으로의 진격문제에 있었다. 이승만은 북진을 주장했고, 미국 역시 북진이 유리하다고 판단, 38도선을 넘었다. 미국의 영향하에 있던 유엔은 총회에서 38도선 이북 진격을 승인하고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설치했다.
3단계는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공군의 개입(10. 25)으로 전세가 역전, 한국군이 오산 부근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8도선을 넘어(51. 3. 24) 철원·금화 일대까지 진출하고(6. 11), 소련이 휴전을 제의(6. 23), 휴전교섭에 들어간 시기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새 국면에 접어들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만주를 폭격하고 중화민국의 장개석 군을 동원, 중국 남부지방에 제2전선을 설정할 것을 주장했다. 맥아더의 전쟁확대론은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우려한 미국정부에 의해 저지되었고, 맥아더는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4. 11).
제4단계는 휴전회담 진행과 휴전협정의 성립기이다.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즉각 받아들여 15일 만에 개성에서 예비회담이 개최되고(7. 8), 이어 본회의가 열렸다(7. 10). 주요문제는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경계선 설정, 휴전 감시기관 구성, 포로교환 등이었다.
휴전회담은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승만은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회담을 위기에 빠뜨렸다. 이에 미국은 한미상호안전보장조약 체결·경제원조·한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이승만을 무마시키고, 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마침내 전쟁은 끝나고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휴전협정에 의거, 한반도 장래문제를 논의하는 정치회의가 4월 26일 제네바에서 열렸으나, 아무 성과없이 결렬되었다.
한국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냈고,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다. 특히 폭격으로 인한 북한지역의 피해는 극심하여, 미군지휘관이 「더 이상 목표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공언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남북의 적대감이 극도로 심화되어 민족분단 체제가 더욱 굳어졌으며 남한의 경우 반공 이데올로기가 초법적 권위를 지니고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동서냉전을 격화시키는 고비가 되었고, 미·일 안전보장체제를 재촉, 일본의 재군비강화와 전쟁경기를 통한 고도성장의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참전국
국명
계
전사/사망
부상
실종
포로
미국
137,250
36,940
92,134
3,737
4,439
영국
4,908
1,078
2,674
179
977
오스트레일리아
1,584
339
1,216
3
26
네덜란드
768
120
645
-
3
캐나다
1,557
312
1,212
1
32
뉴질랜드
103
23
79
1
-
프랑스
1,289
262
1,008
7
12
필리핀
398
112
229
16
41
터키
3,216
741
2,068
163
244
타이
1,273
129
1,139
5
-
그리스
738
192
543
-
3
남아프리카공화국
43
34
-
-
9
벨기에
440
99
336
4
1
룩셈부르크
15
2
13
-
-
콜롬비아
639
163
448
-
28
에티오피아
657
121
536
-
-
노르웨이
3
3
-
-
-이건 지원국 규모입니다
미국
1,789,000
보병사단 8
해병사단 1
연대전투단 2
병력 302,483명
극동 해군
미 제7함대
극동 공군
영국
56,000
보병여단 2
해병특공대 1
병력 14,198명
함정 17척
(항모 1척 포함)
-
보병대대 2
병력 2,282명
항공모함 1척
구축함 2척
프리킷함 1척
전투비행대대 1
수송기편대 1
네덜란드 5,322
보병대대 1
병력 819명
구축함 1척
-
보병여단 1
병력 6,146명
구축함 3척
수송기대대 1
뉴질랜드 3,794
포병대대 1
병력 1,389명
프리킷함 1척
-
보병대대 1
병력 1,119명(1,185)
구축함 1척
-
보병대대 1
병력 1,496명
-
-
보병여단 1
병력 5,455명
-
-
보병대대 1
병력 1,294명(2,274)
프리킷함 7척
수송선 1척
수송기편대 1
그리스 4,992
보병대대 1
병력 1,263명
-
남아프리카공화국 826
-
-
벨기에 3,498
보병대대 1
병력 900명
-
-
보병소대 1
병력 44명(48)
-
-
보병대대 1
병력 1,068명
프리킷함 1척
-
3,518
보병대대 1
병력 1,271명
-
-
국명 참전연인원(명) 참전규모 근무인원(명)
지원부대 및 시설
스웨덴 160 154(162)적십자병원
인도 627 70(333)제60야전병원
덴마크 630 100병원선
노르웨이 623 105(109)이동외과병원
이탈리아 128 72제68적십자병원
이건 의료지원및 파견국입니다
교전국 국제 연합: UN
대한민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터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벨기에
에티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필리핀
남아프리카 공화국
타이
비공식 지원국
일본
중화민국
의료지원국
인도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비공식 지원군
소비에트 연방(소련)
의료지원국
체코슬로바키아
한국
이승만
정일권
백선엽
미국
타흐신 야즈즈
더글러스 맥아더
매슈 리지웨이
마크 웨인 클라크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엘피디오 퀴리니오
피델 V.라모스
북한
김일성
최용건
김책
중화 인민공화국
마오 쩌둥
펑더화이
소비에트 연방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말렌코프
대한민국 590,911명
미국 178만 9000명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캐나다 2만 5687명
뉴질랜드 3794명
영국 5만 6000명
필리핀 7420명
터키 1만 4936명
네덜란드 3522명
룩셈부르크 44명
콜롬비아 1,068명
벨기에 900명
에티오피아 1,271명
프랑스 1,119명
그리스 1,263명
남아프리카 공화국 826명
타이 1,294명
총: 933,845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260,000명
중화인민공화국(중국) 780,000명
소비에트 연방(소련) 26,000명
총: 1,066,000
군인
14만 9005명 전사
71만 783명 부상
13만 2256명 실종
민간인
37만 3599명 사망
22만 9625명 부상
30만 3212명 행방불명
총계
52만 2604명 사망
94만 408명 부상
43만 5468명 실종
총계 189만 8480명 사상
![]()
3만 6940명 전사
9만 2134명 부상
3737명 실종
4439명 포로
총계 13만 7250명![]()
339명 전사
1216명 부상
3명 실종
26명 포로
총계 1584명![]()
312명 전사
1212명 부상
1명 실종
32명 포로
총계 1557명![]()
1078명 전사
2674명 부상
179명 실종
997명 포로
총계 4908명![]()
23명 전사
79명 부상
1명 실종
총계 103명![]()
112명 전사
229명 부상
16명 실종
41명 포로
총계 398명![]()
741명 전사
2068명 부상
163명 실종
244명 포로
총계 3216명![]()
120명 전사
645명 부상
3명 포로
총계 768명
총계: 474,000명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