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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언론에 대한 객관성의 부재를 말한다

참의부 |2012.09.11 13:09
조회 60 |추천 0

① 언어의 물타기, 언론의 상징 조작

 

6·25 남북전쟁 이후 한국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1997년 외환사변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외환사변 이후 한국에서는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졌고, ‘사오정’과 ‘이태백’이 속출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졌고 구한 일자리마저도 비정규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동안 삼성과 LG 등 대기업의 매출과 순이익은 큰 폭으로 증가했지만 오히려 중산층의 숫자는 줄어들었습니다. 빈부 격차는 가속화되었고, ‘구조조정’은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구조조정’에 익숙해졌습니다. 내 회사는 아니지만, 내 이웃의 회사는 ‘구조조정’이 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손가락질합니다. 우리는 괜찮지만 너희는 방만하다고 꾸짖습니다. 좀더 많은 사람을 자르는 것이 ‘선(善)’이 됐습니다. ‘쥐가 쥐를 물어뜯는’ 악순환에 빠진 것입니다.

 

‘구조조정’이란 단어에는 아픔이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인간적 고통이 없습니다. 해고의 좌절과 절망, 그리고 가장의 실직으로 인한 가족의 고통이 오히려 이 단어에 의해 희석됩니다. ‘구조조정’이 모호하게 만들어버린 구조조정의 본질은 ‘해고’와 ‘가난’입니다. 그것이 구조조정의 진짜 현실(진실)입니다. 그런데 왜 언론은 ‘대량 해고’ 또는 ‘대량 감원’·‘대규모 실직’이라는 단어 대신 ‘구조조정’을 선호하는 걸까요?

 

주가가 2퍼센트만 떨어지거나 올라도 폭락이니, 급등이니 하며 호돌갑을 떠는 것이 주특기인 언론이 직장인들의 대규모 해고 사태에는 왜 이렇게 ‘추상적이고 모호한’ 경영학의 학술 용어로 그 본질적 의미를 훼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대부분의 언론이 주로 정부나 대기업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고와 가난’이라는 가혹한 현실을 물타기하고 싶은 정부 또는 기업주들의 의도를 반영한 것입니다.

 

반면 ‘근로자, 노동자, 또는 직장인’이라는 또 다른 단어들이 있습니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입니다. 한국 언론에 따르면 ‘근로자, 노동자, 직장인’은 다룬 주체들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다릅니다. 여러분이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거나 파업을 하고 있다면 근로자나 직장인이 될 수 없습니다. 언론이 여러분을 그렇게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 언론은 파업하는 근로자나 직장인을 특별히 분류해 ‘노동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노동자’에게 ‘업무 방해, 폭력, 불법, 점거, 정치적, 좌경, 집단 이기’ 등의 상징을 덧칠합니다. 이른바 ‘상징 조작’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상징 조작은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서울 광화문을 지나다가 시위대 때문에 교통이 정체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노동자’를 생각하게 되지, 근로자나 직장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상징 조작에 취해 있는 대중이 시위대를 향해 짤막하게 “빨갱이 노동자 XX들”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들리지 “빨갱이 직장인 XX들”이라고 하는 것은 왠지 어색합니다. 지극히 객관적인 한국 언론 덕택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김춘수의 시「꽃」의 첫 구절처럼 언론과 대중의 관계는 여전히 일방적입니다. 말이 사물과 사람을 구분하는 사회에서 말에 대한 지배적 권한을 행사하는 언론은 사물과 사람의 실체적 의미마저 좌우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언론이 사물과 사람을 제멋대로 자신의 틀 안에 가두어 규정하는 데도 이를 묵인한다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스스로의 실체적 의미를 찾아내는 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로 물을 타면 단감도 떫을 수 있습니다.

 

언어로 물타기를 하는 것은 현대 언론의 장기입니다. 미국 국방부는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군이 고엽제와 레이팜탄으로 베트남 북부 지역의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양민까지 학살해버린 작전을 가리켜 ‘평화 정지작업(Pacifica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당시 미국 언론도 이 단어를 그대로 차용해 썼습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12월, 미국의〈CBS 저녁 종합 뉴스(Evening News)〉는 베트남전에서의 미국군의 평화 정지작업에 대한 보도를 주요 뉴스로 전했습니다. 메인 뉴스 시간에 무려 13분이나 할애해 보도했습니다만 당연히 그 시각은 미국 정부의 의제 설정 범위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당시〈CBS 저녁 종합 뉴스〉의 진행자였던 월터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사이공의 미국 정부 관리들이 ‘평화 정지작업’에 대한 낙관적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1700만명의 월남 주민들 가운데 4분의 3이 월남 정부에 의해 안전과 평화가 담보된 지역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요…… 오늘 우리는 우리 정부의 발표와는 전혀 다른 상황 가운데 하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월토 크롱카이트는 이미 그해 2월 자신이 직접 현지 취재한 베트남전쟁 종군 보도를 통해 전쟁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표출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베트남전쟁이 ‘미국과 미국 군인들에게’ 매우 위험한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베트남전쟁을 비판했을 뿐, ‘평화 정지작업’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베트남 시민들에 대한 미국군의 무차별 폭격과 학살을 비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68년 12월에 방송된 CBS의 보도도 미국군의 평화 정지작업이 미국군의 의도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주된 비판 내용이었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고 있다. 전쟁에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비판은 많았지만, ‘평화 정지작업’이라는 표현에 담긴 미국군의 편견과 오만, 폭력상을 파헤치는 보도는 미국 주류 언론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미국의 주류 언론인들은 베트남전쟁에서의 ‘평화 정지작업’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모순된 말이었는지를 당시에는 대부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 역시 정부가 정해준 언어의 틀 속에 갇혀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또 미국이나 한국이나 언론의 이런 경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부를 비판하고 감시해야 하는 언론인들마저 정부 또는 기득권이 던져주는 ‘사고의 틀’ 속에 갇혀버린 상황이라면, 그런 언론 환경에 둘러싸인 대중의 사고와 판단력이 제한되고 미숙할 것임은 불문가지입니다. 이런 언론 환경에서 대중이 현명하게 사고하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입니다. 그래서 2007년 대선 무렵 많은 유권자들이 ‘노무현만 없어지면 경제가 좋아질 것 같고, 경제만 좋아지면 모든 것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2008년 총선 즈음 많은 서울 사람들이 ‘뉴타운 공약으로 곧 내 집 가격이 폭등할 것’처럼 느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한국 언론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대선과 총선이 끝난 뒤 대중의 사람이 그들이 가졌던 환상만큼 나아졌던가요? 애당초 1970~80년대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재벌 그룹의 계열사 사장 출신이 민주적 마인드를 갖춘 경제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최소한의 의구심, 또 그의 경제 공약이었던 7-4-7이 이륙, 비상, 웅비를 암시하는 점보제트기를 연상시키기 위해 억지로 짜 맞춘 숫자는 아닌가 하는 상식적인 비판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던 언론 환경에서 대중이 그릇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200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지지했던 시민들조차 7-4-7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 다시 묻는다면 태반이 모른다고 답할 것이 분명합니다. 애당초 지킬 수 있는 공약이 아니었습니다. 7-4-7은 허상이었고 언론은 ‘바람잡이’였으며 대중은 그런 언론에 또 한 번 휘둘렸습니다.

 

물론 당시 이 7-4-7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던 관변 경제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이 배운 사람들이 무슨 논리인들 만들어내지 못하겠습니까? 허황된 주장을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하는 것이 관변학자들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진정성을 갖추지 못한 기회주의적인 지식인들의 논리는 말장난에 불과할 뿐입니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지도자의 혜안과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국민을 호도합니다. 성공하면 지도자의 위대한 업적이요, 실패하면 국민의 지지가 부족한 탓이라는 식이죠. 행여 언론이 추궁하면 적당히 변명하면 그만입니다.

 

사실 따져 물을 언론도 많지 않습니다. 정부나 기업 입장에서는 기회주의적 지식인과 언론인을 활용해 이미지 놀음에 열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1990년대 후반 주식 광풍에 일조했던 한 증권사의 표어 ‘바이 코리아’도 따지고 보면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탐욕과 애국주의(patriotism)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이미지 놀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2009년 봄, 이 통장만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집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 ‘만능통장’도 결코 만능과는 거리가 멉니다. 서울의 근로자가 몇 백만 원짜리 청약통장을 갖고 있다고 평(3.3제곱키터)당 2~3천만원짜리 아파트를 살 수는 없습니다. 입출금은 자유롭고, 고금리가 항상 보장될 것 같은, 뭔가 최첨단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증권사의 주식 통장 ‘CMA’도 그저 금리에 따라 연동되는 단기 자금용 자유입출식 통장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CMA’로 부자 되셨나요? 진짜 현실(진실)은 저 먼 곳에 있습니다만, 신기루는 눈앞에서 어른거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이 실체가 없는 허상일 개연성은 상존합니다. 

 

② 한국 언론이 말하는 ‘국익’은 부자와 권력자의 이익

 

프랭크 룬츠(Prank Luntz)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 홍모 전문가가 있습니다. 그는 줄리아니 뉴욕 시장, 뉴트 깅그리치 공화당 의원, 그리고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내각총리의 선거 전략가였습니다. 그는 항상 ‘어떤 정책을 어떤 단어로 포장해야 대중에게 가장 잘 팔 수 있느냐’를 고민하는 전문 정치 선전가입니다. 따라서 그의 관심 대상은 ‘대중이 어떤 정책의 현실과 본질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어떤 가상적 현실에 대중의 감정이 잘 반응할 것이냐’입니다. 룬츠는 대중은 이성적이 아니라 매우 감성적이라고 판단합니다. “우리 생활의 80퍼센트가 감성이고 20퍼센트가 이성”이라고 주장하는 룬츠는 그래서 대중의 감성을 잘 이용하면 충분히 그들을 현혹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책의 본질과 자신이 만든 그 정책의 이미지가 아무런 관련이 없더라도, 대중이 그 이미지를 정책의 본질로 믿는다면 룬츠 같은 홍보 전문가들에게는 ‘대박’입니다.

 

그의 ‘히트작’은 꽤 많습니다만 그중 백미는 역시 ‘사망세(death tax)’일 것입니다. 부시 행정부가 상속세율 인하를 추진하던 2003년, 룬츠는 부시 행정부에 상속세(estate tax)를 사망세로 바꾸어 부르도록 권고했습니다. 미국 정부와 공화당 의원들이 상속세를 사망세로 부르고, 언론이 이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사옥세를 반대하는 쪽으로 미국 여론을 몰고 갔습니다.

 

상속세를 의미하는 ‘유산(estate)’이라는 단어는 ‘부유함’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는 반면 사망세는 이와는 전혀 다른 어감을 풍깁니다. 상속세는 7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80억원이 넘는 자산을 상속하는 미국 최고 부유층에게만 과세하는 세금인데도 부시 행정부는 이 ‘명칭’을 사망세로 바꿈으로써 많은 미국 서민들이 “아니, 지금도 세금 내기 싫은데 죽으면서까지 세금을 내야 한단 말이야?” 하고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노무현 정권 시절 한국의 극우 신문들이 창조한 용어 ‘세금 폭탄’도 참 잘 먹혔습니다. 덕분에 종합부동산세 대상자뿐만 아니라 달랑 집 한 채 가진 일반 서민들도 세금이 폭탄처럼 투하될가 노심초사했습니다. 지금은 수구 정권으로 바뀌어 세금이 폭탄처럼 투하되지 않으니 참으로 편안하실 겁니다. 그런가요? 세금이 확 줄어서인가요, 아니면 세금 폭탄이라는 단어가 신문에서 사라져서인가요? 당시 여러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본질’이 세금 폭탄이었을까요, 아니면 세금 폭탄으로 한동안 지면을 도배했던 신문 기사였을까요?

 

노무현 정권 시절 곧잘 등장하던 ‘서민 경제 파탄’도 이명박 정권 들어서는 쏙 들어갔습니다. 걸핏하면 택시 회사와 재래시장을 탐방해 ‘르포 기사’를 쏟아내던 극우 신문들의 당시 의도는 택시 운전기사, 재래시장 상인으로 대표되는 서민 경제의 삶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 때문에 더욱더 곤궁해졌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촘촘해진 지하철망이나 급속도로 성장한 대형 할인마트 등은 그들 기사의 주제인 ‘서민 경제 파탄’의 주요 원인에서 제외됐습니다. 택시나 재래시장에 대한 강력한 대체재 또는 대체 서비스의 출현이 택시 운전기사나 재래시장 상인들의 소득 감소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충분히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도 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말을 함부로 하니 나라가 어지럽고 나라가 어지러우니 경제가 불안하고 경제가 불안하니 서민경제가 파탄 난다”는 단순하고 무식한 논리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단순 뮉한 논리가 허상(image)를 만드는 데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서민 경제 파탄’도 ‘세금 폭탄’처럼 실체는 모호하지만 이미지는 뚜렷했습니다.

 

기자가 쓰는 글은 함축적이면서도 ‘구체적(specific)’이어야 합니다. 기사와 다른 글을 구분하는 핵심적 요소는 ‘사실(fact)의 구체성’입니다. 만약 날씨를 보도하면서 방송기자가 “바람이 많이 부니 조심하세요”라고만 한다거나 “오늘 날씨는 괜찮을 듯”이라고 한다면 시청자의 항의가 빗발칠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무책임하고, 불투명하고 모호한 일상적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언론이 지양해야 할 언어를 한국 언론은 즐겨 씁니다. 특히 중요한 정치 경제적 사안이 닥치면 일부러 추상적이거나 애매모호한 단어를 선택합니다. 본질을 흐리기 위한 꼼수입니다. 본질 속에 숨어 있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한국 언론이 즐겨 쓰는 ‘국익’ ‘화합’ ‘안정’과 같은 애매모호한 추상적인 단어에는 그들이 보호해주고 싶은 사회 기득권의 이익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다원화된 이익사회입니다. 대기업, 중소기업, 자영업, 직장인의 이익이 모두 다르고 또 그 안에서도 개별적 이익이 갈라집니다. 정부의 정책에 따라 어떤 집단은 혜택을 받고 어떤 계층은 거꾸로 불이익을 받습니다. 정부가 대기업의 법인세를 감해주고, 부자들의 종합부동산세를 깎아주면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형태로든 그만큼의 세금을 더 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변호사와 의사, 자영업자와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관행적으로 탈세하는 부분을 직장인들이 대신 부담하고 있습니다. 고소득자들에게 못 걷은 세금은 당연히 소비세와 부가세 등 간접세를 통해 일반 서민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이치로 복지 예산이 삭감되면 저소득 계층의 아이들과 노인들이 가장 먼저 큰 피해를 입지만 전용된 예산으로 관급 건설 공사를 많이 벌인다면 건설사에게는 혜택입니다.

 

자본주의에 바탕한 민주공화국 사회는 이렇게 이익이 천차만별입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한국 언론이 말하는 ‘국익’은 기실 신기루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매 순간 갈등하고 타협합니다. 그 과정에 등장하는 ‘국익’이란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포장하기 위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의 이미지를 선점해 자신의 이익을 포장하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사회 경제적 강자는 ‘국익’이라는 말의 이미지를 자신들의 이익과 동일시하기를 원합니다. 논리를 계발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번번이 그 논리에 당하는 일반 서민들은 무언가 찜찜하지만 ‘국익’이라니 감히 따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국익’의 실체와 허상을 구별하는 데는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실체와 허상을 구별하고 이를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 곳이 언론입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오히려 ‘국익’의 이름으로 사회 경제적 강자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공고히 하는 데 충실합니다. 정부가 ‘4대강 정비사업’이라고 하면 그 실체가 설령 ‘대운하’라고 할지라도 언론은 이를 ‘4대강 정비사업’이라고 부릅니다. 정부가 자신들을 ‘실용정부’라고 칭하면 설령 그 본질이 ‘권위주의적 기득권 옹호 집단’에 가깝더라도 언론은 그저 ‘실용정부’라고 표기합니다. 한국의 주류 언론에서 재벌이라는 말 대신 대기업이라는 단어가 쓰이게 된 것도 한국의 재벌이 그렇게 불리길 원했고 또 언론이 그 요구에 순응했기 때문입니다. 재벌 오너가 대기업 회장이 되고 사장이 CEO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실체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차명으로 내무자 주식 거래를 하고, 또 세법을 악용해 수조 원을 탈루하는 재벌과 강남 뒷골목에서 작전을 하면서 코스닥 기업을 말아먹는 일명 ‘부티크(Boutique)’들과의 행태적 차이점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딱히 꼽으라면 ‘사이즈’가 다를 뿐입니다.

 

일방적인 입장에서 일방적인 주장을 담은 언어로 아무리 객관적인 척 보도한들 그런 언론의 행태를 객관적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물과 사람의 실체를 비틀어버리는 왜곡된 언어를 통해 대중의 의식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정부와 기업은, 그리고 언론의 의도는 애당초 ‘국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한국의 주류 언론은 원래 국익의 편이 아니라 강자의 편이었습니다.

 

③ 한쪽만 편드는 전문가들이 객관적이라고?

 

2009년 미국 퓰리처상(Pulitzer Prize) 탐사보도 부문 수상자는《뉴욕타임스》의 데이빗 바스토우(David Barstow) 기자였습니다. 바스토우 기자는 그의 기사 “TV 애널리스트의 이면, 국방부의 검은 손(Behind TV Analysts, Pentagon's, Pentagon's Hidden Hand)”을 통해, TV에 객관적인 군사평론가로 소개되는 퇴역 장성 수십여명이 사실은 이라크전으로 인해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군수산업체의 임원이거나 하청업체 사장, 또는 로비스트 들이라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바스토우는 또 이들이 CNN, MSNBC, POX 등 미국의 케이블 뉴스 채널에 등장해 이라크전을 옹호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길 수 있도록 지원한 곳이 다름 아닌 미국 국방부였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가령 미국 국방부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벌어진 이라크전 포로에 대한 잔혹 행위가 유엔 등의 인권 기구에 의해 국제 문제로 비화하자 이 TV 애널리스트들을 딕 체니 당시 부통령의 전용기에 태워 관타나모 수용소를 둘러보도록 했습니다. 사전에 짠 각본대로 시설을 돌아보고 관계자들을 면담한 TV 애널리스트들이 이후 방송에 출연해 관타나모 수용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TV의 군사평론가들과 미국 국방부 관료, 그리고 군수산업체 관계자들 사이에는 염화시중의 미소가 오갔겠지만 당시 시청자들은 방송을 통해 그 사악한 미소의 한 자락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바스토우 기자의 탐사보도는 TV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의 ‘객관적 논리’ 속에 사실은 그들의 ‘사적 이익’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한국에 TV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은 어떻습니까? 또 이른바 ‘사회 원로’들은 또 어떤가요? 그들은 객관적입니까? 그들은 객관적인 인생을 살았거나 살고 있나요? 그들은 객관적으로 현상을 판단하고 분석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과연 객관적으로 한국 국민들에게 조언할 만한 처지입니까?

 

미국은 전문가들의 이해상충이 일탈적이고 병리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은 일상적이고 구조적입니다. 한국의 기자들이 바스토우 기자처럼 탐사보도를 한다면 퓰리처상을 수십 개를 타고도 남을 만한 소재들이 한국에는 널려 있습니다.

 

한국 언론에 등장하는 민간 부동산 컨설팅 업체의 임직원들은 ‘모두’ 부동산 업황의 이해 당사자들입니다. TV 또는 신문에 등장하는 상당수 부동산 관련학 교수들도 간접적으로 시행사 또는 부동산 컨설팅 회사에 연관돼 있습니다. 심지어 언론에 등장하는 부동산 관련학 교수들 가운데 일부는 아예 직접 부동산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거나 심지어는 땅 장사, 빌딩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003년《KBS 특별기획 한국 사회를 말한다》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부동산 시장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 소재의 명문대학 교수 3, 4명이 주요 주주로 참여한 한 부동산 컨설팅 회사에서는 부유층을 대상으로 은밀히 자신들만의 잡지를 발행했습니다. 그것은 일반 서민이 서점에서 살 수 있는 잡지가 아니었습니다. 이 월간지에서 교수들은 건설사와 시행사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며 자신들의 부동산 투자 계획을 한국의 최상위 부유층에게 선전했고, 또 당시 노무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을 원색적으로 비난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시장주의였습니다. 좋습니다. 이들이 시장만능주의에 기초해서 자신의 주장을 편다는 데야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들이 자신의 논리를 설파함에 있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고 강변할 수도 있습니다.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잘나 교수도 하고 사업도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전문가’ 또는 ‘학자나 교수’로 공공 매체인 언론에 등장할 때는 최소한 자신들이 현재 부동산 투자 사업과 컨설팅을 부업 또는 본업으로 하고 있음을 명백히 밝혀야 합니다. 또 언론은 전문가를 필진이나 토론 패널로 쓰기 전에, 이력을 철저히 검증해서 꼭 ‘제2의 명함’을 독자와 시청자에게 공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독자나 시청자는 ‘제2의 명함’을 통해 그 ‘전문가나 교수’가 객관적인 입장을 취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어 그들의 말을 가감해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언론이 독자나 시청자에게 하는 공익적 서비스입니다. 수용자가 사물, 사람, 사회 현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언론과 전문가는 대중이 사물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고 하기보다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객관적인 것처럼 보일까?’ 하는 데 더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당연히 위선적 행태가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위선이 반복되어 대중이 이를 인지하게 되면 사회적 불신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대중이 이른바 ‘사회 지도층’을 믿지 못하게 된 원인은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위선적 태도로 일관해온 ‘사회 지도층’과 언론에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분야의 전문가, 교수들은 이렇듯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재정, 금융 관련학 교수들 상당수가 보험, 은행협회 등에서 한 자리씩을 차지했거나 차지하고 있고, 정부의 용역이 사업의 대부분인 국책연구소의 학자들은 집권 여당이나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으니까요. 심지어는 가장 중립적이어야 할 과학자들까지도 용역의 잠재적 발주처인 기업과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 또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TV나 신문에 등장하는 교수가 자신 또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익’을 외면하고 객관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요? 한국의 전문가들이 과연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뼈를 깎는 도덕적 노력을 경주할까요, 아니면 ‘좋은 것이 좋은 거’라는 세속적 철학으로 적당히 임기응변할까요? 자신의 사회적 이해관계나 이익보다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대학 교수들이 우리 사회에 과연 얼마나 존재합니까?

 

그런데도 교수나 전문가들이 TV나 신문에 나오면 그들의 말은 자연스럽게 ‘객관’이 됩니다. 이른바 ‘객관적 전문가’들은 ‘국익’ ‘화합’ 그리고 ‘이해의 조정’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종종 한쪽의 폐해를 부풀리거나 한쪽의 이익을 무시합니다. ‘국익’을 위해서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이익을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다가도 ‘국익’을 위해 기업주의 희생이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국가의 이익’인가요? 대기업의 사주나 집권 여당의 이익이 항상 국가의 이익과 등치 관계인가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는 항상 국익을 저해하나요? 그럼 1987년 6월 항쟁 역시 국익에 반했던 것이고 그로 인한 대통령 직접 선거권 쟁취도 국익에 치명타였겠군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의 ‘사회적 원로’와 점잖은 ‘교수님들’, 그리고 이른바 ‘전문가’들은 무엇을 했나요? 군부 독재정권의 앞잡이들이 나이만 들면 사회적 원로가 되고, 교수 직함만 달면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인가요?

 

한국의 상당수 경제 전문가들에게 파업은 항상 국가 경제에 치명타이지만, ‘구조조정’ 즉 대량 해고는 기업의 희생과 국가 경제 회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조조정을 하면 주가가 오르지만 반면 파업을 하면 일주일에 손실액이 수조 원에 이르러 국가 경제에 심각한 내상을 입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삼성과 현대그룹의 총수 이건희나 정몽구 씨가 수조 원을 탈루하고 탈세와 배임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게 되면 ‘전문가들’의 논리는 정반대가 됩니다. ‘주인 없는’ 삼성과 현대의 경영을 걱정하며 국가 경제가 추락할 위험에 처했다고 엄살을 부립니다. 직장인은 종종 수천명 정도씩은 잘려줘야 국가 경제가 살아나고, 반대로 수천억 원을 탈세한 사람은 대충 재판 받고, 빨리 사면 받아 경영 일선으로 복귀해야 국가 경제가 살아난다? 그 논리대로 설사 대기업이 살아난다고 한들 그 기업들이 생산하는 제품을 사줄 소비자들이 모두 잘렸는데 어떻게 기업이 유지된다는 말입니까?

 

이들의 논리는 다시 말하면 직장인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쥐어짜고 기업주는 배가 터지도록 호강해야 ‘국익’이 유지된다는 말인가요?

 

이건희나 정몽구 씨가 삼성과 현대에 물질적으로 입힌 손해, 그리고 해당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추락시키고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림으로써 입힌 손실을 극우 신문들의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파업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처럼 계산한다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족히 수십조 원에 육박할 것입니다.

 

삼성과 현대, 그리고 대한민국의 이미지에 ‘자유로운 개인, 깨끗하고 투명한 기업, 도덕적인 정부’라는 선진국의 세련된 느낌 대신 제3세계 국가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부정과 부패, 배임과 탈세 그리고 반칙과 위선’을 덧씌웠으니 당연히 그 국가적 손실은 계산하기조차 힘들지요.

 

만약 애플의 아이폰이 중남미의 부패한 개발도상국가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렇게 많이 팔릴 수 있었을까요? 애플이 손쉽게 ‘자유와 혁신’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가 자유롭고 혁신적이기 때문입니다. ‘구리고, 답답하고, 가부장적이며, 권위적인, 게다가 때때로 부패와 불투명의 이미지를 살포시 덮어주는’ 나라에서, 아무리 좋은 핸드폰을 만든들 누가 그 핸드폰을 ‘자유와 혁신’의 상징으로 보겠습니까?

 

비 오는 날 메케한 냄새가 진동하는 만원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과, 고급 승용차에서 빗소리를 음악처럼 음미하며 서울의 거리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가끔이라도 비 오는 날 만원버스를 타고 서울의 거리를 바라보는 대학 교수나 전문가가 우리 나라 사회에 많습니까?        

 

▶ 최경영 KBS 기자 저술『9시의 거짓말』「워렌 버핏의 눈으로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말하다」〈제1장 한국 언론의 몰상식 ⑴ “우리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만 한다”〉시사IN Book 편찬(2012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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