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2월 21일 북풍이 휘몰아치는 여순(旅順) 감옥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홀로 고난에 찬 일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의 나이 쉰일곱이었다. 조국해방의 날을 준비하러 중국에 망명한 지 26년, 10년형의 감옥생활을 한 지 8년, 출옥을 1년 8개월 남겨둔 채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 외아들 신수범(申秀凡)과 몇몇 친지들이 임종을 지키러 먼길을 찾아갔으나 일제(日帝) 당국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단재는 평소 가까운 사람들에게 “생전에 조국의 광복을 못 볼진대 왜놈들의 발끝에 차이지 않게 유골을 화장하여 바다에 띄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과 동지들이 의논하여 후일 자손을 위해서라도 유골을 국내로 모셔와야 한다고 결정해서 그의 유해는 여순에서 화장한 다음 고국으로 봉안되었다.
단재의 유해가 일본 헌병대의 감시 아래 서울역에 들어왔을 때 역에는 생전 고인(故人)과 가깝게 지내던 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홍명희(洪命熹)·원세훈(元世勳)·여운형(呂運亨) 등이 나와 통곡을 하며 유해를 맞았다. 그러나 단재는 민적(民績)이 없어서 유해의 매장허가조차 받을 수 없는 형편이라 암매장할 수밖에 없는 기막힌 처지였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의 그 황량함이 죽어서 묻힐 한 평 땅조차 없었던 쓰라린 아픔으로 이어졌으니, 단재의 넋이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에서 얼마나 해매었을까?
◆ 반일(反日)의 매운 필봉(筆奉) 휘두른 언론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1880년 충남 대덕군(大德郡) 산내면(山內面) 어남리(於南里) 도림(桃林) 마을에서 빈한한 선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는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했으며, 아버지 신광식(申光植)은 단재가 8세 되던 해에 가난 속에서 허덕이다가 젊은 나이로 작고했다. 그 후 단재는 할아버지를 따라 청원군(淸原郡) 낭성면(浪城面) 귀래리(歸來里) 고두미마을로 옮겨가 서당훈장을 하던 할아버지 슬하에서 한문과 유교경전 등을 공부했다.
단재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18세 때에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을 지낸 신기선(申箕善)을 만나 많은 장서를 빌려 읽었으며, 이듬해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해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의 국권회복운동과 민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며,《독립신문(獨立新聞)》·《황성신문(皇城新聞)》등이 발행되어 독립협회의 자주민권과 자강운동을 지원하면서 세계정세의 변화와 국내개혁의 필요성을 계몽하였다.
단재는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감지하고 국내 개화파들의 저술과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한 신서들을 탐독하면서 점차 나라의 앞날과 세계사의 조류에 대한 인식을 넓혔다. 한때 단재는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여 내무부와 문서부의 간부급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02년 정부가 일본에 마산항 일부를 조차지로 내놓자 조소앙(趙素昻)·남궁억(南宮檍) 등과 함께 성토문을 작성하여 정부에 항의한 일도 있었다. 이때에 성균관 재학생 중에는 조소앙 이외에 유인식(柳寅植)·변영만(卞榮晩)·김연성(金演性) 등 독립협회의 계몽운동이나 개화자강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있었다.
1904년 일본은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을 기습 격침한 뒤 러·일전쟁(露日戰爭)을 도발하고 조선에 불법 상륙하여 제1차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조인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 앞에서 나라의 국권이 가랑잎 같은 처지가 되었다. 단재는 성균관 박사가 된 직후인 1905년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을 받고《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기자로 들어갔다. 단재가 입사할 무렵《황성신문》에는 박은식(朴殷植)과 남궁억이 있었다. 안재홍은 당시 단재의 심경을 단재가 쓴『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서문에서 “누를 수 없는 북받치는 정열을 한 자루 붓에 맡겨 민족의 심장을 쳐 움직이는 논객의 길을 택한다”라고 전했다.
그러나《황성신문》에서 단재가 활동한 것은 1년이 채 안 되었다. 일제(日帝)가 그해 11월 이른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장지연이「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을 실어《황성신문》이 무기정간 처분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때마침《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총무인 양기탁(梁起鐸)의 요청으로 단재는 1905년부터 이 신문의 논설기자로 본격적인 언론활동에 들어갔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 베델(E.T.Bethell)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았다. 단재는 이제 자유롭게 필봉(筆奉)을 휘두를 수 있었다.《대한매일신보》에서 단재는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준열하게 꾸짖고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열정적인 논설을 쏟아냈다. 단재의 박력 있는 필치와 맥박치는 애국혼(愛國魂)은 독자들의 심장을 강타했으며, 단재는 당대의 애국계몽(愛國啓蒙)사상가로 이름을 떨쳤다.
단재는 1907년 양기탁·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이동휘(李東輝)·노백린(盧伯麟)·조성환(曺成煥)·백범(白凡) 김구(金九) 등이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자, 이에 참여하여《대한매일신보》에 신민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설을 쓰는 등 신민회의 비공식적 대변인 역할을 했다.
단재가 1906년~1910년 동안《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 논설은 매우 많았지만, 이 논설들을 관류하는 사상적 체계와 주장들은 한결같이 애국계몽사상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그의 애국계몽사상은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여 ‘입헌공화주의(立憲共和主義)’에 선 문명한 조국을 건설하는 데 목적을 두고, 국민 모두 실력을 배양해서 일제를 물리치고자 했다.
단재의 애국계몽사상은 민족주의사상의 일환이었다. 그의 애국계몽사상은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사상으로서, 사상이 운동과 직결되는 실천적 성격을 띠었다. 안재홍은 단재가 우리 나라의 봉건 말기에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국민주의의 “가장 총명하고 예민한 양심으로서 그 개척자적 임무”를 다했다고 평가했다. 안재홍은 또 단재가 “국민사상 개혁의 급선봉”이었다고 지적하면서, 단재의 선구적 부르주아 계몽사상은 역사적으로 뜻 깊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 근대 민족주의 사관 제시
단재는 이러한 논설 외에 1907년에는 양계초(梁啓超)의『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을 번역·간행하고, 한 걸음 나아가 한국 역사상의 3걸(傑)로 을지문덕(乙支文德)·이순신(李舜臣)·최영(崔瑩)을 꼽아 이들의 전기를 기술하였다. 우리 나라의 국민과 청소년이 이와 같은 인물들의 사적을 읽고 본받아 일제를 몰아내고 국권회복의 길에 영웅적으로 나서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근대 민족주의 사학(史學)의 성립과 관련하여 단재는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대한매일신보》에〈독사신론(讀史新論)〉이라는 사론을 발표하여 봉건적 국사관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독사신론〉을 통해 단재는 국사에서 존화사관(尊華史觀)과 사대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였으며, 그 대표로 김부식(金富軾)을 들어 통렬하게 질타했다.
단재는 또 왕조사 중심의 중세사학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왕실의 흥망이나 정통성이나 따졌지 민족의 발전과정이나 민족국가의 흥망성쇠의 인과도 밝히지 못하는 역사는 낡고 몰가치하다고 규정했다. 이제 역사서술상의 주체가 왕조 중심에서 ‘민족’ 중심으로 이동했다. 아울러 한국 역사에 대한 일본 역사서들의 왜곡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일본이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여 남쪽 땅을 지배했다는 학설과 신공왕후(神功王后)의 신라침공설 같은 터무너없는 학설날조를 비판하면서, 이러한 무설(誣設)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한국의 역사책들도 나쁜 역사책의 표본이라고 질타했다.
〈독사신론〉을 통해 단재는 확고한 근대 민족주의 사관을 제시했을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설을 제시함으로써 ‘신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부여·고구려 주족론(主族論), 단군-추장시대론, 만주영토설, 임나일본부설 부정, 삼국문화의 일본 유입설, 삼국통일 및 김춘추 비판론, 발해·신라 양국시대론과 그 밖에 다수의 학설을 내놓았다.
〈독사신론〉은 사평(史評) 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여기에 실린 글들을 통해 한국 근대사학의 구체적 방법론을 정교하게 제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사관의 측면에서는 한국 중세사학을 완전히 극복하고 근대 민족주의 사학을 처음으로 내세웠으며, 초기 식민주의 사관에 의한 한국사 왜곡을 학문적으로 비판·극복하고자 했다.
◆ ‘이상한 빛을 가진 눈’
1910년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병합될 위기에 빠지자, 단재는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안창호·이갑·이동휘·이동녕과 신채호가 그 일을 맡도록 했다. 이에 따라 1910년 4월 단재는 안창호·이갑 등과 함께 분산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단재는 신의주를 거쳐 만주·안동으로 간 후 거기서 다시 수로로 중국 청도(靑島)에 들어섰다. 청도에 모인 신민회 간부들은 독립군 기지 구축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으나, 독립군 조직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일행은 뿔뿔이 흩어졌다.
앞서 중국으로 가는 망명길에 단재는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정주(定州)에 세운 오산학교에 들렀다. 마침 이 학교에 교사로 있던 이광수(李光洙)가 처음 본 단재는 “풍채가 극히 초라한 샌님”이었고, 오직 비범한 것은 단재의 “이상한 빛을 가진 눈”뿐이었다. 이광수의 눈에는 단재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똑바로 서서 세수하는 습관이 기이하게 비쳤다. 아마도 누군가(日帝?)에게 고개를 굽히기가 싫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후에도 단재는 똑바로 서서 세수를 했다고 한다.
1910년 9월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단재 등 신민회 간부들은 한국이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로 병탄되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 1911년 12월 이상설(李相卨)·최재형(崔在亨)·이동휘·이종호(李鍾浩) 등이 중심이 되어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할 때 단재도 참여했고, 기관지《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필이 되어 논설을 책임졌다. 이듬해인 1912년에는 윤세복(尹世復)·이동휘·이갑 등과 함께 광복회(光復團)를 조직했다. 신민회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대종교(大倧敎)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합작하여 만든 광복회는 그 후 일제에 조직이 발각되어 1918년 사실상 붕괴될 때까지 3·1운동 이전까지의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13년 단재는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의 초청을 받아 상해로 가 동제사(同濟社)에서 활동하면서,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가르쳤다. 단재는 이러한 활동 외에 독립운동의 방략(方略)연구, 역사탐구, 서점순례, 영어공부 등에 매진하였다.
상해에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한 단재는 공부방식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많이 남겼다. 이광수에 따르면 단재는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발음은 쓸데없고 뜻만 필요하다고 하여 발음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변영만은《중앙(中央)》에서 단재가 가령 ‘이웃’이라는 뜻의 ‘neighbour’의 발음을 ‘네이버’라고 하지 않고 ‘네이 그후 바우어’라고 읽었다 한다. ‘네이버’는 영국인들의 발음법이니 자기가 그걸 꼭 따를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조광(朝光)』에 실린 이윤재(李允宰)의「북경시대의 단재」에 의하면 단재는 영문이나 한문이나 글은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영문을 읽을 때도 구절구절 ‘하여슬람’이라는 소리를 섞어가며 매우 느리가 한문 읽듯 읽었다 한다. 이러한 신채호식 영어로라도 칼라일의『영웅숭배론』이나 기번의『로마제국쇠망사』를 읽을 정도로 영어를 해독했다니, 뛰어난 재능의 일단을 알 수 있다.
1914년 단재는 대종교 계통의 독립운동가 윤세복의 초청으로 서간도(西間島)의 환인현(桓仁縣)에서 1년간 체류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동창학교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는 한편 교재로『조선사(朝鮮史)』를 집필했다.『조선사』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그 내용은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에 거의 흡수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서간도 체류기간중 단재가 크게 보람을 느낀 것은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한 것이다. 압록강 위쪽 집안현(輯安縣)에 남아 있는 제2 환도성(丸都城)의 유적과 광개토태왕릉(廣開土太王陵) 등 방대한 고구려 고분군을 답사한 것을 두고 단재는 “나의 일생에 기념할 만한 장관”이라면서, 그때의 답사공부의 가치에 대해 “집안현의 유적을 한 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고구려본기」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라고 감격해했다.
◆ ‘고집통에 괴벽’ 거슬리지 않아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단재의 역사연구가 유적답사와 문헌의 비교고찰에 의한 확고한 실증 위에 서 있다고 보았다. 김철준(金哲埈)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은 단재가 조선의 지리 경역(境域)에 관해 획기적인 새 발견과 학설을 제시한 것은 중세사학에 대한 그의 투철한 비판의식과 함께 유적답사를 통해서 문헌고증의 한계를 극복하고 실증을 구하는 탐구정신과 결부된 것으로 보았다.
1915년 단재는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권고로 북경으로 가서 3·1운동 때까지 약 4년 동안 머물렀다. 북경에서 그는《중화보(中華報)》·《북경일보(北京日報)》등에 논설을 집필하면서 북경 부근의 조선 고대사 유적을 답사하는 등 역사연구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 단재는 조선의 역사를「조선사통론」·「문화편」·「사상변천편」·「강역고(疆域考)」·「인물고」등 다섯 권으로 나누어 집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술회했다. 또한 1916년에는 자신의 독립사상을 소설형식으로 담은『꿈하늘』을 집필했다.
북경 체재 중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단재를 북경에서 만나보고 그의 인간상에 대한 회상기를 남겼다. 홍명희는 단재와 교류하던 중에 “단재가 고집 세고 괴벽스럽다고 흉보듯 변 보듯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나, 단재라는 인물을 잘 알면 고집이 마음에 거슬리지 않고 괴벽이 눈에 거슬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또 원세훈은 단재를 한결같이 ‘고집불통’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단재의 선견지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1919년 2월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했을 때, 북경에 체류하던 단재도 민족대표 39인의 일원으로 이 선언서에 서명했다. 1919년 3·1운동을 북경에서 맞은 단재는 ‘민중’이 직접 나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을 보고 민중이 바야흐로 역사의 주체로 떠올랐다고 인식, 크나큰 사상적 각성을 하게 되었다.
3·1운동 직후 단재는 상해로 가서 29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처음으로 조직한 데서 이름 붙인 ‘29명 모임’에 참가했다. 이들 29명으로 구성된 임시정부발기회의에서는 임시의정원을 출범하고, 임시의정원은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이어 의정원이 내각책임제하에서 국무총리로 이승만(李承晩)을 선출하자 신채호는 격분하여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이는 이승만이 1919년 2월 우리 나라의 완전독립을 포기하고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했기 때문이었다. 단재로서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이 아무리 일시적 전술이나 방편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매국적 행위였다. 단재가 퇴장한 뒤 임시의정원은 각 부의 총장과 차장을 선출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통과시켜 임시정부 조직을 끝낸 다음 4월 11일 오전 10시에 폐회했다.
비록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는 ‘퇴장’했으나 단재가 임시정부와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해 7월까지는 임시정부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7월의 의정원회의에서는 의정원의 전원(全員) 위원회 위원장과 충청도의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상해·노령·한성의 기관을 통합하는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한 새로운 내각을 출범시키자, 단재는 임시정부와 완전 결별했을 뿐만 아니라 맹렬하게 임시정부를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펼쳤다.
◆ 이승만 탄핵 강력 주장
그 후 단재는 이승만 선출을 반대하는 김두봉(金枓奉)·남형우(南亨祐) 등과 더불어《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일제의 한국침략에 대한 야만성,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안 제출, 독립운동 노선으로서의 외교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에서의 전투성 결핍 등을 맹공했다. 단재는 또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과 더불어 이승만에게 위임통치청원서를 취하하라는 편지를 두 번이나 발송했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자, 임시정부에 공공연히 이승만 탄핵파면을 요구했다.
1920년 임시정부의 압력 등으로《신대한》의 발행이 중단되자 단재는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옮겼다. 북경에서는 반(反)임시정부노선에 섰던 박용만(朴容萬) 등과 함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보합단(普合團)을 계승하는 무장조직의 구성을 위해 진력하여 같은 해 9월에 군사통일촉성회를 발기했다. 독립운동에서 임시정부보다 무장투쟁을 중요시해서 분산된 독립군 각 부대의 지휘계통을 통일하여 효과적인 항일전쟁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1921년 1월에는 심산 등의 지원을 받아《천고(天鼓)》라는 민족잡지를 창간하여 일제의 야만성, 일제의 동양평화 교란, 한국 독립의 필요성, 항일무장투쟁의 필요성, 한·중 항일연합전선의 필요성, 일본의 중·일 친선론과 한·일 친선론의 허구성, 일제 패망의 필연성 등을 주장했다.
심훈(沈熏)은 이 시기 신채호의 모습을「단재와 우당」이란 글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마침《천고》라는 잡지를 주간하였는데, 희미한 등하(燈下)에서 모필(毛筆)로 붉은 정간을 친 원고지에다 철야 집필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그 창간사인듯 “천고(天鼓), 천고여, 한 번 치매 무슨 소리가 나고, 두 번 두드리매 어디가 울린다”는 의미의 글인 듯이 몽롱하게 기억되는데, 한 구절 쓰고는 소리 높이 읊고, 몇 줄 또 써내려 가다가는 붓을 멈추고 무릎을 치며 위연(謂然)히 탄식하는 것이 마치 글에 실진(失眞)한 사람같이 보였다. …그러다 불시에 두 눈에 이상한 섬광이 지나가는 동시에, 수제(手製) 여송연(呂宋煙)을 아무 데나 내던지며 일변 붓에 먹을 찍는다.〃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미국에서 상해로 와서 임시정부의 내분을 수습하려 했으나, 이듬해 1월 24일 국무총리 이동휘가 노령으로 돌아가 버리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갔다. 이에 1921년 초 북경에서 박은식·원세훈·김창숙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통일되고 강력한정부의 재조직과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중지를 모아보자는 것이었다.
이들은 당시 상해임정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최고의 독립운동 기관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없으니 이를 전면 개편하고, 독립운동 전략으로는 독립군 부대의 통합과 군사지휘계통의 통일을 확립하여 무장투쟁 노선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재의 주장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 전투적인 방법의 독립운동 주장
이어서 1921년 4월 21일 북경에서 10개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이 모여들어 군사통일주비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상해의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를 부인한다고 결의하는 한편, 당시 제기되었던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지지하였으며, 군사지휘권 문제는 국민대표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군사통일주비회는 이에 따라 상해의 임시정부에 10개 단체의 명의로 불신임 결의문을 보내고 임시의정원 해산을 요구했다. 단재는 1921년 4월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매국적이라고 규탄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한 임시정부를 비판하는 ‘성토문’을 작성,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등의 서명을 받아 임시정부에 보내고 천하에 공표했다. 이승만과 임시정부는 이에 큰 타격을 받았다. 특히 이승만은 중국에 온 지 4개월 만에 미국으로 날아가 버렸다.
국민대표회의는 당초 개최전망이 확실하였다. 상해에서는 1921년 5월 19일 독립운동가 3백여명의 찬동으로 상해 국민대표회의 기성회를 조직하고,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등 20명을 위원으로 선정하여 회의개최에 박차를 가했다. 뒤이어 만주와 노령, 미주와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도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임시정부 개편과 독립운동 노선을 통일하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섰다. 1922년 4월 22일 마침내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도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가결하고, 5월 10일에는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발족 당시부터 끊임없이 내분에 휩싸였다. 망명정부의 주도권을 놓고 내홍이 일어났고, 임시정부의 정체(政體)를 놓고 공화파(共和派)와 복벽파(復辟派)로 갈리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방략을 놓고 무장투쟁론·외교론·실력양성론 등이 맞서는가 하면, 기호파·서북파 따위의 지방색에 따른 파쟁조차 끊일 새가 없었다. 여기에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서 건은 기름에 불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애당초 단재의 독립운동노선은 철저하게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폭력투쟁 한 길뿐이었다. 단재는 강도 국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려면 오직 무장투쟁이나 파괴·암살 등의 방법이 있을뿐, 외교론이나 문화계몽론 등 일제의 이성에 호소하는 따위의 소극적이고 온건한 방법은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로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진영의 강력한 통일체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무장투쟁노선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독립군 각 부대의 군사활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면서 군자금을 지원하는 데 모든희망을 걸고 그 활동에 적극 참가했다. 단재는 이 새로운 단계의 독립운동전선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죽음으로 일제를 대적하자고 결의했다.
◆ 민중 주체의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1922년 12월 단재는 의열단(義烈團)의 단장을 맡고 있는 약산으로부터 의열단의 철학과 행동지침이 될 역사적 선언문을 기초해 달라는 청을 받았다. 단재와 약산은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약산은 신민회의 이동녕·이회영 등이 세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했고, 단재는 신민회의 주요 회원으로 신흥무관학교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약산은 단재와 우당이 추진했던 북경 군사통일촉성회를 지지했고 언제나 무장투쟁 노선에 섰다. 또한 그는 단재의 ‘이승만 성토문’에 공동서명하는 등 임시정부 계열의 독립운동 방략에 반대했다.
요컨대 약산은 단재를 존경했고, 단재는 의열단의 폭력투쟁 방식에 일체감을 갖고 있었기에, 약산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단재는 무정부주의의 이론가 유자명(柳子明)의 도움을 받아 작업을 진행, 1923년 1월 전 5장 6천 4백여자에 이르는 저 유명한「조선혁명선언」을 완성했다.
「조선혁명선언」은 제1장에서 강도(强盜) 일본이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의 필요조건을 전부 박탈하여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있으므로 일제는 ‘조선민족 생존’의 ‘적(敵)’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혁명’으로 죽이고 없애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제2장에서는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완전 독립’과 ‘절대 독립’을 단념하고 대두한 자치론·내정독립론·참정권론 등 일제와의 타협에 관한 기만성과 매국성을 폭로하면서 이를 ‘적’으로 선언했다. 동시에 민족의 새존권 자체가 철저하게 부정된 판에 무슨 문화운동이냐면서 이광수와 최남선(崔南善) 등의 문화계몽론 또한 조선민족을 기만하는 ‘적’이라고 신랄하게 규탄했다.
제3장에서는 상해의 임시정부에서 주로 내걸었던 외교론과 준비론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즉,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외교론 또한 외세에 독립을 구걸하는 청원운동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안창호의 준비론 역시 고작 신문 한 군데, 학교 몇 군데, 군대 얼마로 대일항전을 벌이겠다는 것은 막연하고 기다릴 수 없는 세월을 허송하게 할 지 모른다고 꼬집었다.
제4장에서는 일제를 몰아내고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길밖에 없으며, 그 혁명은 ‘민중직접혁명’이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제5장에서 단재 신채호는 이족통치·특권계급·경제약탈적 제도·사회적 불평등·노예적 문화사상을 타파하고 고유한 조선의, 자유로운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역사적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인식이다. 이 시기 단재의 ‘민족’ 주체의 민족주의사상은 ‘민족’ 내부의 ‘민중’ 주체로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조선혁명선언」은 공표되자마자 의열단원들은 물론 독립운동가들과 한국 민족 전체에 상당한 폭발력을 보였다. 이 선언문은 당시까지 나온 반일선언문 가운데 가장 격렬하고 급진적인 선언으로, 1920년대의 민족독립사상과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을 만한 것이었다. 또한「조선혁명선언」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한국독립운동이 생산한 가장 귀중한 문헌 중 하나가 되었다.
◆ ‘역사란 무엇이뇨’
1923년 후반기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에게 실의와 좌절의 시기였다. 직접적으로는 단재가 큰 희망을 가졌던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난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 3일 상해에서 70여개 독립운동 단체 대표 124명이 모여 역사적 막이 올랐다. 국내와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광범하게 만난 최대의 모임이었다.
회의에서 임시정부 대통령 불신임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노령이나 만주에 ‘항일무장투쟁’을 목표로 하는 임시정부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이를 ‘개조’할 것인가를 두고 국민대표회의는 분열되어 회의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재는 창조파의 맹장으로서 기존의 상해 임정을 전면 부정하고 국내외 모든 독립운동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새로운 임정하에서 무장투쟁을 통해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국민대표회의가 분열하자 창조파는 그들만의 새로운 임시정부를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자 했으나, 소련 정부의 거부로 창조파만의 임시정부는 무산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환골탈태로 독립운동전선이 본격적인 항일투쟁 전열을 가다듬는 데 온갖 희망과 기대를 걸었던 단재는 깊은 실의와 좌절에 빠졌다. 1924년 봄에는 한때 승려가 되려고 북경 교외에 있는 관음사(觀音寺)란 절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에 의탁하여 주저앉아 버리기에는 단재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조선사 연구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뜨거웠다. 1924년 가을부터 단재는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사 연구에 침잠했다. 1910년대부터 틈틈이 써놓았던 국사관계의 초고를 수정하고 중국 측 문헌을 섭렵하여 연구작업을 계속했다. 이 시기에 양계초의《중국역사연구법》등을 통해 역사연구 방법론에 의한 공부와 탐구도 병행했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1924년에『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의 총론을 완성했다. 1908년의〈독사신론(讀史新論)〉이후 16년만에 이룬 국사연구상의 큰 업적이었다. 단재는「총론」에서 그의 유명한 민족주의 사관을 극명하게 펼쳤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여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인류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민족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이 무렵 단재는《동아일보(東亞日報)》편집국장이던 홍명희와《시대일보(時代日報)》편집국장인 한기악(韓基岳)을 통해〈평양 패수고(浿水考)〉·〈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조선역사상 1천년내 제1대사건〉등을 연속으로 발표했고, 이 논문들은 후에 단재가 투옥된 뒤 1930년에『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로 묶여서 간행되었다.
단재는『조선상고문화사』와『조선상고사』·『조선사연구초』에 실린 논문들과 그 밖의 시기에 쓴 국사연구논문을 통해〈독사신론〉에 실린 해석들을 더욱 과학적으로 심화·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고대사의 복원을 통해 한국사학을 근대 민족주의 사학으로 끌어올렸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사학이 주자학적 명분론, 정통론, 존화사대주의적 세계관, 순환사관 등 중세적 역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 합리주의, 근대적 세계관, 발전사관 등 근대적 역사관을 제시한 것을 말한다. 아울러 역사이론에서도 자료해석과 역사서술에서의 객관성·사실성·체계성·종합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사학을 근대사학으로 발전시켰다.
◆ 크로포트킨에 심취
그러나 단재는 역사연구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여전히 단재는 민족해방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1920년대 중반 이회영·유자명과 중국인 아나키스트 이석증(李石曾) 등과 접하면서 서서히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깊어갔다. 그때부터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바쿠닌과 프랑스의 프루동, 그리고 일본의 고토쿠 슈스이의 저작을 많이 접하였으나, 단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역시 크로포트킨이었다.
1925년에 쓴〈낭객(浪客)의 신년 만필(漫筆)〉에는 자유연합주의적 요소가 짙게 나타난다. 단재는 이 글에서 인류의 5대 사상가로 석가모니·공자·그리스도·마르크스 외에 크로포트킨을 들었다. 또《동아일보》의 독자들에게 크로포트킨의 저작을 읽도록 권고했으며, 1926년에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1927년 천진에서 중국·조선·일본·대만·안남·인도 등 6개국 민족대표가 결성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조선대표로 참여하는 등 아나키즘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이 무렵에 쓴 소설〈용(龍)과 용의 대격전〉등에는 단재의 자유연합주의사상이 잘 드러난다. 단재는 또 같은 해에 홍명희와 안재홍의 요청으로 국내에서 창립된 신간회(新幹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8년 4월 단재는 조선인이 중심이 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북경회의에도 적극 참여했다. 단재 등은 이 회의에서 결의된 선전기반 설립과 폭탄제조소 설치자금 마련을 위해 외국환을 위조하여 이를 일본·대만·조선 등 각지로 발송한 뒤 1928년 5월 대만으로 가서 이를 찾으려 하다가 일본 경찰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단재는 체포된 뒤 대련(大連)으로 호송되어 조사를 받고 7개월간 미결수로 있었다. 함께 잡혀간 대만인 임병문(林炳文)이 일본 경찰대의 고문으로 옥사한 것을 보면 단재에게 얼마나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미결감에 있던 시기에 신간회에서 이관용(李灌鎔)을 보내 면회했을 때, 단재는 이관용에게 웰스의《세계문화사》와『윤백호집(尹白湖集)』·《에스페란토 문전(文典)》의 차입을 요청했다. 앞의 두 책은 역사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주며,《에스페란토 문전》은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세계문자로서 공부하던 책이었다.
◆ 홍명희, ‘곡단재(哭丹齋)’ 쓰며 애통
1928년 12월부터 1930년 4월에 걸친 오랜 공판과정에서 단재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국제 위체(爲替)를 위조한 것은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현 제국주의 제도의 불평균과 약소민족의 미래”를 위해 아나키스트가 되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고 주장했다.
1930년 4월 28일의 언도공판에서 단재는 ‘치안유지법 위반’과 ‘유가증권 위조’ 등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단재의 당시 죄수번호는 411번, 감방은 중사상범으로 다루어져 독방으로 정해졌다.
지옥과 같은 옥살이가 시작되었다. 국내에서는 홍명희 등이 중심이 되어 1924년~1925년《동아일보》에 발표한 한국사 연구논문들을 묶어 1930년 6월『조선사연구초』를 간행했다. 안재홍 등은 옥중의 단재와 연락을 취하면서 그가 온축(蘊蓄)해둔 원고 중『조선사』를 1931년 6월부터 10월까지《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이어서『조선상고문화사』를 40회에 걸쳐 연재했다.
단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자기의 논문 중 일부는 불만이 많아 개고(改稿)하겠다고 하거나 출판중지를 요청했고, 어떤 논문에 대해서는 연구 자체가 만족스럽지 못하니 발표를 중지해 주면 출옥하고 정정해서 발표하겠다고 했다. 단재가 학문적으로 얼마나 성실하고 엄격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단재는 또 옥중에서도 틈만 나면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아꼈다.
옥중생활에서 가장 큰 고통은 추위였다. 원래 병약했던 단재에게는 북방의 겨울혹한이 견디기 어려웠다. 특히 여순감옥의 시멘트바닥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는 한계상황 그 자체였다. 1935년을 고비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단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마침내 1936년 2월 18일 뇌일혈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여순감옥 측에서는 “신채호 뇌일혈,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를 쳤다. 서울에서 아내 박자혜와 아들 신수범이 급히 감옥으로 갔으나 일제 당국은 임종조차 못 보게 하려는 듯 그들을 몰아냈다. 1936년 2월 21일 마침내 단재 신채호는 조국의 제단에서 순국했다. 향년 57세였다.
산채호가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홍명희는 거의 실성할 지경으로 상심했던 듯, 당시《조선일보(朝鮮日報)》에 발표한〈곡단재(哭丹齋)〉란 글에서 애통한 심경을 토로했다.
〃……죽지 못한다, 죽지 못한다! 나만 사람이라도 단재가 지기(知己)로 허(許)하고 사랑하는 터이니 죽지 못한다. 말리면 죽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죽다니 무슨 소린고? 세상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떠들더라도 나는 죽지 않았거니 믿고 싶다. 만나볼 수 있는 곳에 있었어도 보지 못하고 지냈으니, 만나볼 수 없는 곳으로 가서 다시 보지 못하리라 생각하면 고만이다. 신문의 보도와 수범의 통기(通寄)가 나에게는 다 부질없는 일이다. ……살아서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한데 단재는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한 줌 재가 되다니, 신체는 재가 되더라도 심장이야 철석과 같거니 재가 될 리 있을까? 그 기개와 그 학식을 무슨 불에 태워서 재가 될까? 모두가 거짓말 같고 참말 같지 아니하다. 단재더러 말 한마디 물어보았으면 내 속이 시원하겠다. 간 곳이 멀지 않거든 나의 부르는 소리를 들으라. 단재여!〃
◆ ‘껍데기는 가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민족주의사상가이자 역사학자이며, 민중혁명가였다. 딱히 어느 한 범주에 넣어 그를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모든 방면에서 전면적으로 그리고 치열하게 자신을 불사르면서 일제강점기를 살다가 조국의 제단에 백골까지 헌납한 인물이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6년 여순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선생은 털끝만큼의 타협도 없이 오로지 민족해방전선에서 전투적 독립운동 노선을 철저하고 꿋꿋하게 견지했다. 선생의 노선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간교한 침략정책하에서 어떤 타협주의도 배격한다. 선생은 민족해방전쟁에 어떤 외세의 힘도 빌려선 안된다고 하였거니와, 일정한 민족역량을 비축하기까지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유예하자는 부르주아적 교양주의도 단연 거부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가장 직접적이고 주체성 있는 민족운동 지도자 및 사상가를 든다면 선생이야말로 단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에게서 진정 ‘껍데기는 가라’였다.
선생이 1908년〈독사신론〉을 저술하여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사학을 성립한 이래 우리의 역사학에서 중세적 역사관이 극복되고 근대적 역사관이 뚜렷하게 수립됐으며,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에 대한 비판과 함께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사관이 정립되었다. 특히 그의『조선혁명선언』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할 정도로 격렬하면서도 논리정연한 혁명이론을 담은 당대의 명문이었다.『조선혁명선언』에서 더욱 주목할 것은 ‘민족’ 주체의 민족주의사상 속에서 ‘민중’ 주체의 민족주의사상으로 선생의 역사의식이 한 단계 뛰어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