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경제성장에 집착한 나머지 당장 눈앞의 실적에만 급급해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과도하게 개발·성장만을 밀어붙여 전국토를 파헤쳐 전국 지가를 올렸으며, 돈을 마구 찍어내 성장만을 높이려 했기에 그 후유증으로 물가가 폭등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임기 중 성장률은 높였으나 그 후유증은 두고 두고 후대의 경제성장을 어렵게 만들었다.
☞ 이정우 경북대학교 교수 겸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선거 중앙대책위원회 경제민주화위원장
1. 경제학자의 책임이 크다
20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가 동양 평화를 지키기 위해 만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응징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이고,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이 유신독재체제의 종결을 위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저격한 지 정확히 3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 두 사건이 같은 날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나 공교로운 일이라서 만일 ‘역사의 신‘이 있다면 우리에게 뭔가 암시를 주려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안중근 의사는 조국이 독립되고 나면 자신의 유해를 조국에 옮겨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어언 100년이 흘렀고, 조국이 독립된 지 64년이 지났건만 아직 의사의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김재규는 정치민주화를 이룩하려던 뜻이 여전히 국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채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는 국장으로 후히 장사지냈으나 안 의사와 김재규의 혼은 영원한 안식의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구천을 맴돌고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이 세 번 변하는 세월이 흘렀지만 박정희의 인기는 여전히 하늘을 찌른다. ‘박정희 신드롬’의 원동력은 그가 비록 독재는 했지만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세간의 평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민주주의보다는 경제성장이 더 중요하다는 사람들의 인식은 위험천만이고, 문제가 많지만 그것이 우리 나라 국민 다수의 생각이라면 어쩔 수 없다. 이런 인식을 바꿔나가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이 글은 박정희가 이룬 경제성장이 잘되었다는 세간의 인식이 틀렸음을 보이려 한다. 일반 시민들이 경제성장률을 단순비교해서 맹목적인 성장지상주의를 신봉하도록 무비판적으로 방치해온 경제학자들의 책임도 크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우리 나라와 같은 수출 주도형 국가에서는 지가(地價)와 물가(物價)가 경제의 사활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는 점, 그리고 한국의 지가·물가가 우리의 소득수준에 걸맞지 않게 세계 최고 수준에 가깝다는 점을 서술하고, 이렇게 세계 최고의 지가·물가를 갖게 된 원인 제공자가 과연 누구인지를 밝히려 한다. 지가와 물가 상승을 분석해보면 그 대부분이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지고, 결국 두 명의 독재자가 과욕을 부려 무리하게 경제를 운용한 탓에 후대에 오래오래 남을 부담을 안겼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특히 박정희는 우리나라의 지가·물가 양등 책임의 절반을 혼자 고스란히 져야 할 정도로 압도적 책임이 있음이 드러났다. 이렇다면 결코 경제를 살렸다고 평가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부지런히 일하긴 했지만 자신의 임기 중 실적 올리기에만 급급해서 국가의 먼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경제를 운용했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우리가 경제성장률이란 껍데기만 보고 정권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단견(短見)인가!
독재정권과는 반대로 뒤에 오는 민주정권들은 훨씬 책임감 있고 정직하게 경제를 운용했음도 밝혀졌다. 민주정권 시기에 오면 지가·물가상승률은 현저히 낮아져 앞의 시기와는 비교가 안 된다. 천양지차(天壤之差)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이런 분석에서 우리가 얻는 결론은 무엇인가? 결국 독재정권은 과욕으로 인해 경제도 무리하게 운용한다는 점, 그리하여 눈앞에서는 성과를 올리는 듯하지만 두고두고 부담을 남기고 후대에 경제성장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는 점, 그 반면 민주정권은 그런 경향과 정반대로 정직한 경제운용을 한다는 점이다. 독재정권은 경제를 살리는 듯하지만, 결국 망치고, 민주정권은 일견 경제에 무능해 보이지만 실은 훨씬 더 유능하다. 이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2. 한국의 지가(地價)는 왜 이렇게 높은가?
우리나라의 지가 총액은 최근 공시지가로 2천 2백조원 정도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한국의 땅값은 총액으로 따져서 아마 일본·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일 것이다. 올림픽에서 종합 3위라면 자랑스럽겠지만 토지 종목의 3위는 자랑은커녕 우리 나라 경제의 목을 조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각한 장애요인이라고 봐야 한다.
외국의 자료와 비교해볼 때 한국의 지가는 국제적으로 거의 최고 수준임에 틀림없다. 대략적으로 이야기해서 1990년대 한국·미국·일본의 지가 총액은 1:2:3이었는데, 그 뒤 일본의 장기적 지가 폭락으로 인해 1, 2위는 역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은 지가가 별로 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3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 땅을 팔면 저 넓은 캐나다를 6번 살 수 있고, 프랑스를 8번 살 수 있으니 놀랍지 않은가(세계 주요국의 영토 면적을 보면 한국은 남·북한 합쳐서 22만 제곱킬로미터이고, 남한=10만, 캐나다=998만, 미국=981만, 프랑스=55만, 일본=38만 제곱킬로미터이다)?
지가 총액으로 한국의 땅값은 세계 3위이지만 아마 평당 가격으로 따지면 세계 1위에 가까울 것이다. 과거에는 일본 땅값이 평당 가격으로 세계 최고였으나 20년 가까이 일본 땅값이 하락한 지금은 한국이 1위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가 총액을 국가의 경제 규모에 대비시켜 보면 역시 한국이 세계 1위일 것이다. 한국감정원의 자료인『Peter Boone』의 도표「각국의 지가 총액(地價總額)/GNP 비율의 장기추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의 지가 총액은 국민소득(GNP) 대비 국제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있다. 이 값을 지가소득비율(地價所得比率)이라고 부른다면 선진국 대부분은 이 값이 1내외인데 비해서 일본과 한국은 훨씬 높은 값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일본은 최근 토지 거품의 붕괴로 지가소득비율이 거의 정상 범위 부근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이나 한국은 아직도 2를 넘는 높은 값을 유지하고 있다.
도표「각국의 지가 총액/GNP 비율의 장기추세」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선진국에서도 과거 한때는 땅값이 대단히 비싼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낮아졌다는 점, 그리고 우리나라도 1970년대 이전까지는 지가가 지금처럼 심각하게 높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즉, 나라에 따라 땅값은 큰 차이가 있고, 그 나라의 토지정책 여하에 따라서 지가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싼 지가가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구태여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일상생활을 통해 피부로 느끼고 있는 바다. 이를 증명하는 데는 몇 가지 정황 증거만으로도 충분하다. 예를 들어 한국의 공장부지 가격을 국제적으로 비교할 때, 중국이나 동남아 등 후진국은 물론이고 미국·영국 등 선진국보다도 비싸다는 점, 지가가 워낙 비싸서 도로증설 비용의 대부분이 토지보상에 들어가므로 도로를 늘리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점, 따라서 교통체증이 심하고 한국이 물류비용도 국제적으로 높다는 점, 지가가 비싸니 주거비도 비싸서 서민·중산층의 가계에 대한 압박이 클 뿐 아니라, 이것이 매년 임금협상에서 노조로 하여금 높은 임금인상을 요구하게 함으로써 수출 중심인 한국 경제의 국제경쟁력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점 등, 높은 지가의 후유증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높은 지가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해왔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왜 한국의 지가는 이렇게 높을까? 지가가 높아진 것은 언제부터이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우리는 아래의 분석을 통해서 지가 양등이 주로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에 일어났으며, 전국토를 파헤치는 거대한 개발주의의 후유증을 밝히게 될 것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의 지가동향을 보기 위해서는 건설부 자료를 보아야 한다. 건설부에서 매년 지가동향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 1975년부터이며, 그 전의 시기에 대해서는 체계적 통계가 드물지만 현재 구할 수 있는 약간의 자료를 모아 정리해보면 한국감정원의『전국주요도시 지가지수』중「박정희 군사독재시대의 지가 상승 추세」라는 도표와 같으며, 우리는 이 표를 통해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의 지가 양등 추세를 대략 파악할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1963년의 전국 주요 도시의 땅값을 기준(=100)으로 할 때, 매년 땅값은 엄청난 비율로 상승해왔다. 1963년~79년의 17년 중에서 지가상승률이 한자리 숫자에 그친 해는 두 해뿐이며, 50%를 넘은 해가 4년이나 있었다. 특히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후반의 상승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리하여 17년만에 땅값은 무려 180배 이상 상승했다. 이 시기에 자산가치가 180배로 늘어난 자산은 토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예를 들어 서민들이 애용하는 은행 예금과 비교해보자. 은행에 예금했다면 1979년에 1천 760원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돈 100원으로 땅을 샀다면 1979년에 1만 8천 7백원의 가치가 있으니 은행 예금에 비해 무려 10배다.
한국의 땅값은 가히 천문학적 비율로 상승해왔고 거기서 발생한 불로소득은 기존의 소득 통계를 압도하는 규모다. 통화량·물가·소득·임금 등 어떤 장기 지표와 비교하더라도 땅값은 훨씬 빠른 속도로 상승해왔다. 토지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은 부유층의 수중에 독점되었음에 틀림없고,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소득분배를 크게 악화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정부 발표로 파악된 한국의 소득분배는 국제적으로 별로 나쁘지 않으나 이런 천문학적인 불로소득을 감안하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토지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은 우리나라 부유층의 판도라의 상자인데, 이 상자는 가끔 고위직 인사청문회 같은 데서 추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땅을 사둘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아주 쉽다. 부자와 권력층이다. 특히 개발 정보를 미리 입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 특정 지역의 땅을 미리 사두었을 것이다. 이 대열에 돈과 정보를 가진 재벌이 빠질 리 없다. 재벌 문제를 연구한 김석기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박사학위논문에서 인터뷰 결과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인터뷰한 자료는 재벌의 자산구성에서 부동산이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주었다. 부동산 사업은 도박과 비슷하다. 적은 돈으로는 판을 주무를 수 없지만 큰돈으로는 그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특히 1960년대에) 정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에 고속도로나 정부 빌딩을 건설한다는 발표가 나가면 하룻밤 사이에 가격이 10배 이상 폭등하곤 했다. 재벌들은 우수한 자금력과 정보력을 이용하여 급등하는 부동산 가격의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부동산은 은행 대출시 담보로도 이용할 수 있었다. 여기에 구체적 정보를 밝힐 수는 없지만 내가 인터뷰한 자료를 보면 재벌들-특히 거대 재벌들-은 막대한 양의 부동산(그중 상당량은 비업무용 부동산)을 보유해왔다. 많은 경우 재벌들의 공장 건설 결정은 생산의 최적화보다는 지가 상승 전망에 더 큰 영향을 받아왔다.”
개발독재기간에 전국은 걷잡을 수 없는 개발 열기에 휩싸엿는데, 이 과정에서 정부가 적절한 토지정책을 세우지 않고 등한히 함으로써 지가 폭등을 방치했다. 그 결과 가진 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자산 증가와 불로소득을 거두어들인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이익에서 일절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 임대료에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3. 박정희 군사독재시대 지가 100배나 뛰었다.
역대 정부의 경제 성적, 특히 경제성장·고용·물가·국제수지 등 표준적인 성과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국에서 특히 중요한 경제적·사회적 의미를 갖는 토지 가격을 갖고 역대 정권의 성과를 평가한 경우는 아직 없다. 한국에서는 지가가 경제운용의 기본 파라미터(parameter)이고 국가경쟁력의 기초일 뿐 아니라 서민 살림살이의 기본 지표라는 점에서 이런 비교 평가는 가치가 있다. 토지 통계는 어느 나라나 부실하고, 한국의 통계도 완벽하지 못해서 시계열 자료를 작성하는 데 약간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다행히 안국에는 개략적인 경향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장기 시계열 자료가 있다.
한국은행이 작성한〈경제통계연보〉에 포함된 도표「역대 정권의 지가 추이」는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해방 직후에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있었기 때문에 지가도 많이 올랐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아쉽게도 지가 통계가 없다. 전국 지가 통계는 1953년 이후 얻을 수 있는데, 이때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 정권 아래서 지가는 크게 올랐다. 연평균 21.6%의 지가 상승이라면 대단히 빠른 속도이며, 만일 요즘 이런 속도로 지가가 오른다면 정권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가 추세를 국민소득과 비교함으로써 역대 정권의 토지정책 비교가 가능하다. 이 도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3인의 행정부에서 지가 폭등이 있었던 반면 문민정권인 김영삼·김대중·노무현 행정부에서는 지가가 크게 안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의 네 정권은 독재정권 혹은 군사정부(혹은 장군 출신이 대통령인 정권)이고, 뒤에 오는 세 행정부는 문민정권인데, 양자 사이의 대비는 너무나 뚜렷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가가 압도적으로 폭등한 시기는 박정희 군사독재시대다. 박정희의 집권기인 1963년~79년의 16년을 보면 전국의 지가 총액이 3.4조에서 329조로 폭등함으로써 무려 100배의 상승을 보였다. 이는 연평균 33%의 상승률에 해당한다. 1953년에서 2007년까지 54년 동안 한국의 지가 총액은 1만배 넘게 폭등했다. 그 결과가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우리나라의 지가가 세계 최고라는 조금도 달갑지 않은 현상이다. 이와 같은 엄청난 지가 양등에 대해서 어느 정권에서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를 가릴 필요가 있다. 지가 1만배 상승을 각 정권별로 분해해본 결과가 도표「역대 정권의 지가 추이」의 칼럼 ⑺에 나와 있다. 전체 상승 중 절반 이상(50.5%)은 박정희 정권의 책임이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1961년~63년의 자료를 얻을 수 없는데, 2년의 자료를 구해서 덧붙인다면 실제로 박정희 정권의 책임은 더 높아질 것이고, 아마 전체의 55%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다른 모든 대통령을 다 합해도 박정희 1인의 책임보다는 적다.
박정희 다음으로 두 번째 책임은 이승만 정권으로서 14.7%이다. 통계 자료가 1948년~53년 사이에 누락되어 있으므로 이 시기 자료가 있다면 이승만의 책임은 분명히 늘어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전두환·노태우 정권은 7~8% 수준으로서 상당한 책임이 있긴 하나 이승만·박정희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낮은 수준이다. 그 반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지가 양등과 거의 무관하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지난 노무현 행정부 때 부동산 문제를 들어 집중적으로 정부를 성토했는데, 아마 이 도표를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독재정권과 부동산 투기 사이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독재정권의 저돌적 목표달성주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장지상주의, 실적주의가 개발 위주의 정책으로 나타나고, 그 결과 고성장이 실현되지만 그와 더불어 지가 폭등이란 괴물이 쌍둥이처럼 태어났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런 성장은 액면 그대로 인정해줄 수 없다.
도표「역대 정권의 지가 추이」칼럼 ⑸는 지가 양등으로 인한 불로소득(지가 차익)을 같은 기간 발생한 생산소득과 비교한 것이다. 이승만에서 노태우에 이르는 독재정권 아래서 불로소득이 창궐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배(생산소득)보다 배꼽(불로소득)이 2배 반(248.8%)이나 될 정도로 거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거품경제의 온상’이라고 비난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에는 정부가 앞장서서 강남개발 등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정책을 많이 썼고, 그것을 통해서 고도성장을 달성한 면이 부각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현저한 부익부분익빈의 진행, 서민의 고통, 졸부의 탄생, 노동의욕의 저해, 부의 사회적 정당성 상실, 사회기강 와해 등 심대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많은 국민들이 경제를 살린 대통령이라며 박정희를 존경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때의 경제성장 성적은 외견상은 화려해 보이지만 그 시기 상상을 초월하는 부동산 광풍이 거듭된 것을 생각한다면 그 성장은 크게 낮추어 봐야 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성장을 미리 당겨 쓴 ‘외상 경제운용’이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민주주의·인권·역사적 정통성·남북관계 등에서 역사를 크게 후퇴시킨 박정희 정권이 그래도 내세울 게 있다면 경제 하나뿐인데, 그 경제라는 것도 전국의 땅을 파헤치는 과욕에 의한 거품경제가 그 본질이었다면, 그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보다 냉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와서 부동산 광풍의 강도는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에 비하면 다소 가라앉았으나 기본적으로 연평균 두자릿수의 가격 상승, 대대적인 불로소득의 발생은 여전했다. 전두환 정권 때는 생산소득의 3분의 2 정도의 불로소득이 발생했고, 노태우 정권 때는 그 비율이 거의 100%에 달할 정도로 다시 높아졌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4인은 3저호황과 88올림픽, 주택 2백만호 건설계획 등을 전후해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렸고, 그 결과 투기억제책 없이는 정권 유지가 어려울 정도의 비상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상당히 개혁적인 토지 공개념 3법이 1989년 말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즉, 토지공개념 3법이 입법된 것도 이승만 정권 이후 역대 비민주정권 아래서 부동산 투기가 극에 달해 더 이상 정권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기 상황이 도래했다는 점, 그런 배경에서 위기 극복을 위한 비상대책으로서 비로소 토지공개념 입법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토지공개념은 개혁의지에 의해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위기 처방으로서 불가피했고, 그 원인 제공을 비민주정권들이 했기 때문에 개혁이라기보다는 병 주고 약 준 성격이 강하다.
그에 비해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의 문민정권에 오면 과도한 개발이 자제되고, 부동산 투기에 대한 억제정책이 비로소 힘을 얻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다만, 김영삼 정권 시기에 부동산 가격이 지극히 안정된 것은 정권의 부동산 투기 억제정책만이 효과라기보다는 노태우 정권 때 마련한 토지공개념 3법의 음덕을 톡톡히 입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김영삼 행정부가 정권 초기 경제 살리기 100일 계획 등 단기실적주의의 유혹에 빠지는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임기 5년 동안 부동산을 통한 경기부양이라는 역대 정부의 단골 메뉴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 뒤 토지공개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나? 다 알다시피 1990년대 이후 토지공개념 3법은 하나씩 위헌 판결을 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토지공개념 3법을 위헌·헌법불합치란 이유로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헌법불합치의 이유가 법의 근본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행정적 미비 때문이었다는 점, 그리고 3법이 있었기에 노태우 정권 시기의 부동산 투기 광풍이 가라읹았고, 3법 이후 10년간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장기간의 부동산 안정이 찾아왔다는 점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권 때 부동산 가격 안정은 상당 부분 1998년 외환위기 초기에 부동산 가격이 13%나 폭락한 점과 후반기의 인위적인 부동산 경제 살리기의 결과가 상쇄되어 나타난 것이다. 김대중 정권은 IMF 구제금융체제 조기졸업을 선언한 뒤 경기가 살아나지 않자 초조한 나머지 토지공개념 3법 폐기, 그린벨트 해제 등 전방위적 부동산 규제 완화를 추진함으로써 10년간 잠자던 부동산 투기라는 맹수를 우리에서 탈출시켰다. 이는 단기적 경기부양에 집착해 국가의 장기적 기초를 파괴한 중대한 실책이었다. 부동산 규제를 완화한 후유증은 당장이 아니라 몇 년 뒤 노무현 정권에서 나타났다. 참여정부가 국민에게서 가장 비난받은 점이 부동산 가격 양등이었는데, 그 원인 제공은 사실 김대중 정권이 한 셈이다. 국민들이 이 사실을 잘 모르므로 모든 비난은 우직할 정도로 토지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했던 노무현 정권에게 향했던 것이다.
독재정권과 민주정권의 토지 성적표의 차이는 인상적이다. 한국에서 독재정권은 민주주의를 억압하긴 했으나 경제성장에는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민주화 투사들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신장에는 기여했으나 일단 정권을 잡은 뒤에는 경제성장을 가져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통상의 해석이다. 그러고는 은연중에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느냐?”는 식으로 민주주의를 깎아내리면서 ‘뭐니 뭐니 해도 경제성장이 제일’이라는 식으로 성장지상주의를 신주단지처럼 받들어 모시는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이 논리의 최종 결론은 민주화 투사들을 국가경영 능력이 부족하다고 비방하면서 역시 도덕보다는 경륜이 최고라는 식의 왜곡된 역사인식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되면 도덕과 양심이 빛을 잃고, 정의와 불의의 경계선이 희미해진다.
이런 사고방식은 부지불식간에 경제 우선, 민주주의 경시, 독재 합리화로 귀착하는 위험천만한 사고방식인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는 이런 경박한 사고방식이 지배적인 것이 현실이다. 1930년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도 모두 극단적 통제경제정책을 통해서 고도성장을 가져왔지만 이제는 아무도 더 이상 그들을 존경하지 않는데, 왜 우리나라는 여전히 파쇼를 존경하는 사람이 많은가? 결국 국민에게 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잘못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모르는 국민은 등불 없이 밤길을 가는 것처럼 위험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경제성장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보자. 경제성장률의 수준만을 놓고 본다면 군사정부가 더 좋은 성적표를 보인다는 것은 도표「역대 정권의 지가 추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9.1%), 전두환 정권(8.7%), 노태우 정권(8.3%)는 확실히 김영삼 정권(7.1%), 김대중 정권(4.2%), 노무현 정권(4.3%)보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실현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앞의 세 정권이 뒤의 세 정권보다 경제적으로 나은 성적을 올렸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어느 나라든 소득수준이 낮은 단계에서는 높은 성장률을 보인다는 점이다. 현재 중국의 연평균 10%의 성장률을 보라. 한 나라 안에서도 앞에 오는 정권이 뒤의 정권보다 높은 성장률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둘째, 세계 전체의 경제성장률이 과거에는 현재보다 높았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처럼 수출 주도형 성장을 하는 나라에서는 세계경제의 성장률이 우리의 성장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이 점은 더욱 중요하다. 세계 전체의 경제성장률은 1970년대에 5.5%, 1980년대에 2.3%, 1990년대에는 1.5%로 떨어졌는데, 세계적으로 성장이 둔화하는 환경에서는 수출 주도형의 한국 경제도 분명히 불리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최근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떨어진 것을 두고 큰 위기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의 성장률은 세계 평균보다 몇% 포인트 정도 꾸준히 높다는 밝은 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셋째 요인이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행정부 세 군사정권은 물불 가리지 않는 무조건적인 개발주의에 심취해 전국의 땅을 파헤치고, 길을 닦고, 시멘트를 들이부어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킨 책임이 있다. 미국 연방하원의 매코맥 의원은 일본을 가리켜 토건국가(土建國家)라 명명하고, 정경유착의 부패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는데, 한국도 이 비판에서 비켜나기는 어렵다. GDP 대비 건설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OECD 국가 평균 13%인데, 일본은 17%, 한국은 18%다. 또한 건설업의 부패구조도 일본과 흡사한 점이 많다. 경기불황의 조짐만 보여도 건설경기를 불쏘시개로 쓰자고 건설족(建設族)들이 안달을 하는 점도 두 나라가 흡사하다.
토건국가는 당장의 성장률을 높일 수는 있으나 지가를 올려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고, 결국은 뒤에 오는 정권에게 두고두고 큰 짐을 지우게 된다는 점을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그런 경제적 성공은 반짝 성공에 불과한 것으로 자기패배적이며, 오늘의 성공은 내일의 실패를 가져오게 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일본이 1990년대 이후 거품경제의 붕괴로 인해 10년 이상 장기불황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데, 그 이유 중 상당히 큰 부분으로 토지 투기로 인한 거품경제의 붕괴를 들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제도 이런 면에서 일본과 흡사하고, 자칫하면 일본의 전철을 밟을 위험이 있다.
다음에는 경제성장의 열매를 누가 거두었나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박정희 정권 기간 연평균 9.1%의 고도성장을 구가했지만 그 열매는 주로 소수의 부유층에 집중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간 소득의 성장 속도는 매우 빨랐지만 그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지가가 폭등함으로써 막대한 불로소득이 발생했는바, 후자의 규모는 전자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1963년~79년 동안 국내총생산이 경상가격으로 131조 발생했는데, 같은 기간에 지가 상승으로 인한 불로소득은 그 2배 반인 326조나 발생했다. 불로소득이 없다면 생산소득에 대한 청구권은 생산에 참가한 각 경제 주체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생산 현장에서 131조의 소득이 발생하는 동안 부동산 시장에서 326조의 불로소득이 자산증가란 형태로 발생했고, 자산의 보유자는 필요한 경우 자산처분을 통해서 역시 소득에 대한 청구권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 생산소득에 대한 무토지 서민의 청구권은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연평균 9.1%의 경제성장률은 평균일 뿐이고, 이 시기에 토지·주택을 갖지 못한 서민들의 생산소득에 대한 청구권은 크게 할인해서 볼 수밖에 없다. 그 대신 땅과 집을 가진 부자들은 생산소독+불로소득(=자산가치 증식)이란 형태로 훨씬 높은 소득 성장을 실현했음에 틀림없다.
박정희 정권 시절 토지·주택의 소유 현황은 자료가 없어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2005년에 행정자치부가 발표한 토지 보유 현황은 우리에게 힌트를 준다. 2005년 7월 16일자 조선일보·중앙일보·서울신문·한겨레신문·매일경제신문 등의 보도 자료에 의하면 2004년 말 현재 전국의 지가 총액은 1천 771조원이고, 그중 사유지의 가치는 1천 145조원이다. 상위 1%, 5%, 10%가 보유하고 있는 사유지의 가액은 각각 433조원(37.8%), 777조원(67.9%), 945조원(82.5%)이다. 우리나라 총인구 4천 871만명 중 토지보유자는 28.7%인 1천 397만명이다. 또 그로부터 한달 뒤 행자부가 발표한 전국 주택 보유 현황을 보면 전국 1천 777만 가구 중 절반에 가까운 45.5%인 806만 가구는 무주택자로 나타났다. 30년~40년 전의 상황은 잘 알 수 없으나 현재와 같은 부동산 보유의 편중 현상은 그때도 크게 달랐을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 기간 발생한 천문학적인 불로소득은 5%~10%의 상류층에 집중되었을 것이고, 하위 50%의 중산층, 서민들에게는 국물이 떨어진 게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9%의 경제성장률은 중산층·서민들에게는 과대평가된 것이며, 우리가 만일 집도 땅도 없는 중산층·서민에게만 해당하는 서민경제성장률(庶民經濟成長率)이란 개념을 생각한다면 그 값은 9%보다 훨씬 낮아질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자산가치 증식을 그대로 실현된 소득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진상을 알려면 자산가치 증식으로 인한 잠재적 소득보다는 자산 매각을 통해 실현된 불로소득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자료를 입수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잠재적 불로소득의 규모를 계산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필자가 1988년 한 해 동안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인해 실현된 불로소득을 계산해본 결과, 그해 노동자 전체가 일해서 번 소득인 피용자보수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부동산 매매차익이 실현되어 소수의 부자들의 주머니에 굴러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의 부동산 보유도 2004년 자료와 비슷하게 편중되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경제성장의 열매가 소수의 부동산 부자들에게 편중되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절반의 집 없는 서민들의 경우에는 경제성장이 과대평가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고,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서민경제성장률이란 개념을 상정해본다면 그 값은 3차례의 군사정부 아래서는 경제성장률보다 상당히 낮아질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 대신 민주화 이후 정부의 경우에는 거품경제가 훨씬 축소했으므로 경제성장률을 할인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불로소득을 감안하여 할인한 서민경제성장률을 비교한다면 군사정부의 경제성적표가 민주화 이후 정부에 비해 크게 나을 이유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군부독재를 옹호·합리화하는 “그래도 그때는 경제는 잘 돌아갔다”는 식의 통속적 평가는 대폭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민주정부 아래서 부동산 고질병의 증세가 덜하므로 서민들의 삶의 질은 훨씬 높아진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독재정권이 눈앞의 실적 올리기에만 급급해 후대에 오래 남는 주름살을 깊이 새겨놓았다는 점은 결코 가벼이 봐서는 안 된다. 단기실적주의·인기영합주의·개발지상주의는 경제운용의 최대 적인데, 군사정부는 눈앞의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이들 유혹에 너무나 쉽게 넘어갔으며, 당시로는 높은 성장률을 자랑했으나 그것은 뒤에 오는 정권에 두고두고 부담을 주는 자기패배적 성장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GDP 성장률에 국한하여 한 정권의 경제실적을 평가하는 것은 자칫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독재정권은 눈앞의 실적 올리기에 급급해 무책임하게 경제를 운용하는 반면 민주정부는 훨씬 책임감 있고 정직하게 경제를 운용해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독재정치는 경제를 망치고, 민주주의가 경제를 살린다는 점을 특히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파쇼를 지지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우리나라의 우울한 현실에서 결국 진실만이 어리석은 국민들을 각성시킬 것이다.
4. 물가(物價) 수준으로는 이미 선진국
한국의 소비자물가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나라도 이제는 외국 여행이 봇물을 이루어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온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서 흥미를 끄는 부분은 각국의 소비자물가의 차이다. 어떤 나라의 음식 값은 어떻고, 또 어떤 나라의 택시 요금은 어떻고, 이런 것은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흥미를 끌 만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우리나라 통계청은 매년 물가상승률만 열심히 조사하고 있는데, 더 관심이 있는 주제는 사실 물가 수준이며, 특히 국제 비교는 더 흥미롭다. 물가 수준에 관한 자료, 더구나 국제 비교는 아주 희박한데, 지금까지 나온 몇 가지 단편적 자료를 종합하건대 한국의 소비자물가는 외국에 비해 꽤 높은 것으로 보인다.
국제 컨설팅 업체인 머서(Mercer)사가 2006년 3월 세계 주요 도시 144개의 소비자물가를 비교했더니 서울은 모스크바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3위는 도쿄, 4위가 홍콩, 5위가 런던이었다. 뉴욕(10위), 파리(15위)가 서울보다 낮다는 점이 참으로 믿기 어렵다. 스위스의 금융그룹 UBS가 2006년 4월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서울은 세계 대도시 71곳 중에서 소비자물가 수준이 24위로 나타났다. 그러나 조사 항목에 임대료를 추가하면 서울의 순위는 16위로 높아졌다. 2006년 12월 UN이 세계 각국에 파견하는 직원의 소비지출을 반영해 물가지수를 조사했는데, 서울은 세계 173개 도시 중 20위로 물가가 비싼 곳으로 나타났다.
2007년 비즈니스 트래블 뉴스(Business Travel News)에서 ‘경영자 여행 지수’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서울은 세계 100대 도시 중 8위를 차지했다. 모스크바가 1위, 런던이 2위, 파리가 3위, 물가가 비싸기로 소문났던 도쿄가 서울보다 훨씬 낮게 25위로 나타난 점은 특기할 만하다.
2008년 7월 소비자 시민 모임과 KBS-1TV〈시사기획 ‘쌈’〉제작진은 공동으로 한국·영국·미국·일본·대만 5개국의 백화점, 슈퍼에서 파는 생활필수품 52개 품목의 가격을 비교하는 조사를 했다. 그 결과 한국은 쇠고기에서 2등, 분유·화장품·포도주·청바지 등에서 1등을 했고, 종합적으로 5개국 중 2위를 했다.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소비자물가가 더 비싸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MBC-TV〈불만제로〉팀이 2007년 10월 세계 143개국의 물가를 비교했는데, 모스크바가 1위, 런던이 2위, 서울이 3위로 나타났다. 서울은 뉴욕보다 22%나 물가가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조사와는 반대로 한국의 소비자물가가 별로 비싸지 않다고 주장하는 조사도 있다. OECD에서 42개국의 물가를 조사했더니 한국은 평균보다 낮아서 23위로 나타났다. 전국경제인연합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2008년 9월 조사한 것을 보면 서울은 세계 82개 도시 중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사에서도 의류·식품·가사용품 등 생필품 가격은 서울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맥도널드에서 파는 빅맥이 국제적으로 표준적인 상품이라는 데 착안해 각국의 물가 수준, 그리고 환율의 적정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 만든 빅맥지수(Big Mac Index)라는 게 있다. 빅맥지수 조사에서 한국의 등수는 큰 변동을 보인다. 2001년 조사에서는 한국은 세계 8위로 나타났고, 2003년에는 7위, 2007년에는 16위, 그리고 2009년에는 32위로 낮아졌다. 8년 동안 한국의 빅맥 가격은 크게 변동이 없었던 반면 다른 나라에서는 빅맥 가격이 많이 오른 바람에 한국의 순위가 뒤로 밀린 셈이다.
이상의 몇 가지 조사는 모두 단편적이고 조사방법도 단순해서 크게 신뢰할 만한 수준은 못 된다. 그런데 이 문제는 꽤 중요하므로 앞으로 이런 조사는 더 많아지고 조사방법도 개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나온 조사 결과들을 종합하건대 한국의 소비자물가는 국제적으로 꽤 높은 수준인 것으로 판단된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물가 수준이 높은 것이 당연한데, 한국의 소득수준은 선진국 수준이 못 되면서 소비자물가 수준, 특히 생필품 가격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다.
왜 한국의 물가는 이렇게 비쌀까? 이 문제는 앞에서 살펴본 지가 문제와 더불어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소비자물가는 그 자체로서 소비자들의 후생 수준에 영향을 주는 변수일뿐더러 특히 한국과 같은 수출 주도형 경제에서 소비자물가 수준은 해외시장에서의 우리 상품의 수출 경쟁력을 좌우하는 변수이므로 경제성장과 직결되는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매년 물가상승률만 열심히 조사하고, 물가 수준 자체는 경시하며 조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 비교에도 무심했던 것은 반성할 필요가 있다.
5. 물가상승 책임에서도 박정희는 금메달
변형윤(邊衡尹)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쓴『한국경제론』제3판, 제15장,「물가」편에 게재된 통계청 자료「소비자 물가지수」의 도표〈역대 정권의 소비자물가 추이〉를 살펴보면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 변동 추이를 각 정권별로 분해한 결과가 요약되어 있다. 이 도표는 앞에서 본 토지가격 추이를 분석한 도표〈역대 정권의 지가 추이〉와 대칭을 이룬다. 2005년을 기준년도(=100)로 할 때 1953년 우리나라의 물가 수준은 0.43으로 나타난다.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소비자물가는 1965년 이전 값이 없다. 시계열을 연장하기 위해서 그 이전 시기에 대해서는 서울 소비자물가 자료를 이용했다. 전국과 서울의 소비자물가 변동률에 큰 차이가 없다고 가장한다면 우리는 1953년까지 거술러 올라가서 소비자물가 통계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게산하니 1953년에서 2007년까지 54년간 소비자물가는 258배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에 지가가 1만배 상승한 것과 비교하면 훨씬 낮은 상승률이지만 물가 역시 상당히 많이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이 도표의 칼럼 ⑶에는 각 정권의 초기에 비해 말기에 소비자물가가 몇 배 상승했는가를 비교하고 있다. 소비자물가는 이승만·박정희 치하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올랐음이 드러난다. 이승만 정권 때(1953년~60년) 물가는 3.8배 올랐고, 박정희 정권 때(1961년~79년)는 11.8배 올랐다. 나머지 정권은 모두 1.5배 미만으로 오르는 데 그쳤다. 그리고 각 정권에서 연평균 물가상승률을 계산한 것이 칼럼 ⑷에 표시되어 있다. 역시 이승만·박정희 집권기에 각각 연평균 21.2%, 14.7% 오른데 비해서 그 뒤의 정권에서는 한자릿수 인상에 그쳤고, 뒤에 오는 민주정권일수록 물가상승률이 낮아지고 있다.
흔히 “전두환 정권이 비록 폭정을 했지만 물가는 잡았다”는 속설이 있는데, 전두환 정권 때 연평균 물가상승률이 5.9%로 낮아진 것이 사실이고, 그 전의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 두자릿수 인상이 30년간 계속된 사실과 대비해보면 전두환 정권 때 물가안정이 실현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는데, 하나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거의 전권을 위임받았던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줄기차게 경제안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 그리고 세계적으로 1980년대라는 시기가 1979년의 제2차 석유파동으로 폭등했던 물가가 다시 안정으로 접어든 시기였다는 점, 이 두 가지가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도표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특징은 독재정권은 물가를 많이 올리는 데 비해, 민주정권은 물가를 안정시킨다는 점이다. 그것은 물사상승 배율, 연평균 물가상승률에서 분명히 드러나지만 책임소재를 좀 더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앞의 도표〈역대 정권의 소비자물가 추이〉에서 사용했던 분해 방법을 여기서도 써보자, 그러면 54년간의 258배 물가 상승이 어느 정권에서 얼마나 일어났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그 계산이 칼럼 ⑸에 나와 있다. 258배 물가 상승의 책임은 주로 이승만(24.2%)과 박정희(44.5%)에게 돌아간다. 통계가 1953년 이후에만 나와 있으므로 만일 1948년 정부 수립 시기까지 통계를 연장할 수 있다면 이승만의 책임은 상당히 더 커지게 될 것이며, 특히 해방 이후 일종의 초인플레이션에 가까운 물가 폭등이 있었다는 기존의 여러 연구 결과를 고려하면 이승만의 책임은 이 도표보다 훨씬 크게 나타날 것이다. 아마 책임의 30% 정도까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이승만·박정희 두 사람의 책임의 합이 전체 물가 양등 책임의 3분의 2가 넘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이승만·박정희는 집권 기간이 길어서 그렇게 된 것인데 책임을 많이 돌리면 억울하지 않느냐고. 누가 그렇게 오래 집권하라고 했나? 대통령 임기를 엄연히 정해놓은 헌법을 반칙에 반칙을 거듭해 수도 없이 고쳐 거의 누더기 수준으로 전락시키면서까지 자신의 권력욕을 채웠던 이승만·박정희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국민들이 대통령 더 하라고 해도 스스로 물러났던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과 구태여 비교하지 않더라도 이승만·박정희의 권력욕은 하늘을 찔렀고, 이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개인적 욕심을 채운 것은 어떤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오래 집권해서 책임이 많이 돌아왔다면 그것은 본인들이 자초한 것이니 그걸로 책임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백보 양보해서 그들이 장기집권한 것을 좀 고려해주기로 하자. 즉, 각 정권이 집권 시기에 모두 똑같은 비율로 물가를 올렸다고 하면 각 정권의 책임분은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을 해보자. 그 답은 각 정권의 기간을 54년으로 나누어주면 나오는데, 예를 들면 박정희는 18년 집권했으니 18/54=1/3의 책임이 돌아올 것이다. 그 값이 칼럼 ⑹에 33.3%로 표시되어 있다. 박정희는 집권 기간은 33.3%인데, 물가는 44.5% 올렸으니 물가 상승의 책임이 비례 이상으로 크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즉, 집권 기간이 길다는 점을 감안해주더라도 이승만·박정희는 물가를 많이 올렸다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 반면 나머지 대통령들은 모두 자기 몫(9.3%)보다 훨씬 낮은 책임이 있는 것으로 나오므로 적어도 물가상승에 관한 한 책임이 적다고 봐도 좋다.
6. 성장 집착과 과욕이 키운 화근
진보진영의 대표적 원로학자로 존경받는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2005년 계간〈창작과비평〉에「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글을 실었다. 그는 이 글에서 “민주화 진영이 (……) 박정희 개인이나 그 시대 경제 분야에 대해 소흘한 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한국 경제가 박정희 시대에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에 대해, 그리고 전제적이며 포악했지만 유능하고 그 나름으로 헌신적이었던 ‘주식회사 한국’의 최고경영자(CEO) 박정희에 대해 충분히 인정을 안 해준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보수진영이야 원래 박정희를 존경하고 숭상하니 이런 긍정적 평가를 해도 놀라울 게 없다. 그러나 역사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할 진보진영조차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의 젊은 시절 친일행각과 좌우파를 넘나드는 기회주의적 행동, 동지 배신 등은 옛날 일이니 일단 덮어두더라도 멀쩡한 민주정권을 뒤엎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다가 결국은 쿠데타로 목적을 달성했고, 유신독재로 민주주의를 압살했으며, 헌법을 누더기로 만들면서까지 종신집권을 노렸던 무한 권력욕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박정희의 실체를 모르고 존경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우리가 국민에게 현대사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이 역사를 잘 모르니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흑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민족반역자와 애국자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민족반역자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반면 독립운동가 후손은 3대째 집안이 망하는 해괴한 결과가 빚어진 것이 아닌가? 우리 현대사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한 굴절된 역사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백낙청 교수의 말대로 박정희는 ‘전제적이고 포악’햇으나 과연 경제에서는 유능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지금까지 박정희가 평가를 받아온 게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경제개발이다. 18년 집권 동안 박정희는 ‘잘 살아보세’를 구호로 경제성장에만 집착했다. 자신의 여러 약점을 덮기 위해서였는지 모르나 지나칠 정도로 경제에 매달린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결국은 무리를 가져왔다. 전국의 땅을 파헤치면서 개발 또 개발에만 매진했다. 앞뒤 가리지 않는 무조건적 개발·성장으로 인해 우리가 잃은 것이 너무 많다. 분배·복지가 무시됐고, 환경이 파괴됐다. 박정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선성장후분배(先成長後分配)’·‘선성장후환경(先成長後環境)’을 외쳤는데, 이만큼 성장했으니 이제는 분배·환경도 생각할 만한데, 그런 시절은 언제 오는 걸까? 소득 2만 달러를 초과한 지금도 분배·복지를 이야기하면 좌파니 빨갱이니 공산주의자로 모는 보수언론을 보라. 성장을 중시하고 분배를 무시하는 사고방식은 우리들 뼛속까지 스며들어서 관료들뿐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까지 성장지상주의가 우리나라의 국가철학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러니 아직도 서구식 복지국가는 우리에게 요원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경제성장률만 놓고 박정희를 높이 평가해왔다. 그러나 경제성장률만으로 위정자를 평가한다면 무솔리니·히틀러·히데키는 어떤가? 왜 그런 독재자들은 모두 엄정한 비판을 받고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는데, 유독 한국에서는 박정희의 망령이 아직 살아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가? 이는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나라의 비극이다.
박정희가 남긴 부정적 유산은 너무나 크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파괴한 결과 사회 구석구석에 여전히 독재의 잔재가 남아 있고, 조직민주주의는 요원하다. 노조를 적대시하고 탄압해서 한국의 노사관계는 여전히 대립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박정희식 기회주의가 사회 도처에 퍼져 반칙하는 사람이 유능한 인재로 대접받고, 양심적인 사람은 무능한 쓰레기로 도태되어버린다. 금전만능주의와 불신사회가 우리나라의 상표처럼 되어버려 국제사회에서 어깨를 펼 수가 없다. 부정부패는 사회 구석구석에 독버섯처럼 퍼져 줄어들 줄 모른다.
이상은 익히 알려진 사실들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가 발견한 새로운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박정희는 경제성장에 집착한 나머지 당장 눈앞의 실적에만 급급해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도하게 개발·성장만을 밀어붙여 전국토를 파헤쳐 전국 지가를 올렸고, 돈을 마구 찍어내 성장만을 높이려 했기 때문에 그 후유증으로 물가가 폭등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임기 중 성장률은 높였으나 그 후유증은 두고두고 후대의 경제성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가·물가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은 수출 주도형 국가인 한국에 치명적인 약점이다. 비싼 땅값은 세계 최고의 공장부지 가격을 의미하며, 주택난을 의미하고, 노조의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를 가져오며, 더 이상의 도로 건설이 불가능할 정도로 땅값이 비싸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출로 먹고살아야 할 한국이 국제경영에 나가면서 고지가, 고물가라는 두 개의 커다란 쇠뭉치를 발에 달고 달리기를 하는 형국이다. 그러니 국제경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 수밖에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지가·물가는 결국 성장에 대한 박정희의 집착과 과욕이 불러일으킨 것이니 우리는 여기서 엄중한 교훈을 얻게 된다. 좀 천천히 가도 좋으니 정도를 걸었어야 했다. 조급하게 과도한 성장을 노린 것이 두고두고 우리에게 후회를 남긴다. 국민들이 ‘빨리빨리 병’에 중독된 한국에서 ‘느림의 미학’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독재는 단기적으로는 경제를 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경제를 망친다는 점을 새겨야 한다. 이승만·박정희는 종신집권을 위해 헌법을 누더기로 만든 독재자들인데, 이들은 결국 정치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후퇴시켰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과욕을 부려 크나큰 부담을 후대에 남겼다는 점을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결과는 결국은 과욕에서 빚어진 일이다. 과욕은 독재를 낳고, 경제도 망친다는 점, 그리고 경제를 살리는 것은 결국 민주주의라는 점이 이번 연구가 주는 교훈이다.
겸손은 개인적·정치적 미덕일 뿐 아니라 경제에도 미덕이 된다.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정신으로 천천히 가더라도 반칙하지 않고, 후대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경제성장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독재는 정치적으로도 해악이 크지만 결국은 경제에도 오래오래 주름살을 남긴다는 점을 깨달아 우리 국민이 ‘독재가 경제에 좋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무리는 결국 무리를 낳는 법, 민주주의와 정도를 걸어야 경제도 살아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 가슴에 새기자. 이것이 하얼빈의거[哈爾賓義擧] 1백주년·궁정동 총격 사건(宮井洞銃擊事件) 30주년의 날에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교훈이 아닐까?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