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그저 평범한 스물 아홉의 여성입니다.
조금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 부족함없이 공부했고 제가 입사하고 싶었던 회사에 입사해, 회사 생활도
열심히 잘 하고 있는 그저 그런 아가씨죠ㅎ..
하지만 결혼을 앞두게 된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워, 이렇게 익명의 힘을 빌려 글을 써봅니다..
어느정도 읽으시는 분들은 다 예상하시겠죠..
제가 현재 만나고 있는 분이 종손입니다.
이 정도는 이년의 시간동안 만나면서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두살 연상이라 다정다감하고 참 사람 좋다, 반듯하게 구김없이 자랐구나, 나와 비슷하게 자란 사람인
것 같다 라는 느낌에 기분 좋게 연애를 시작했고 또 서로 고향이 같은 경상도라 잘 맞았습니다.
만난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어렴풋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서 '나한테 시집오면 좀 힘들거야... 네가
이해해 줄 수 있지? 라고 묻길래 당연히 저는 '괜찮아요, 오빠. 그런 것 가지고 뭘... 그냥 오빠가 살면서
나한테 잘 해주면 되는 거에요ㅎ'라고 말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장남이거나 종손이라서 부담을 느끼진 않았습니다.
저희 집은 좀 가부장적이라 시집가면 힘들어도, 그 집 제사는 지내주는 게 예의고 어느 정도의 선을 벗어난 게
아니면 그 집을 이해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 장남이라서 또 종손이라서 저 사람이 저러는 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힘들게 제사를 지내거나 맏며느리로써 해야 할 집안의 일들을 말하는 거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결혼이야기가 나오고... 오빠가 저희 집에 먼저 인사를 드렸고
그 다음 제가 오빠네 집으로 인사를 갔습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겁니다... 차를 몰고 가는데 어렸을 적 한 두어번 와 본적이 있는 옛 가옥 마을(이 지역은
꽤나 유명해서...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시리라 생각됩니다..)쪽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 순간부터 무척 당황했습니다.
아, 오빠가 말하는 종손이라는 게 정말 소위 말하는 '종갓집 종손'을 말하는 거구나...
오빠는 자기도 크고 나서는 명절이랑 일년에 주요 제사 몇 번해서 스무번 안팎으로 내려온다고 하더군요.
저는 당황해서 솔직히 이런 집일 줄 몰랐어요, 라고 대답하는데 얼굴도 빨개지고 여하튼 정말 놀랐습니다.
하지만 일단 인사 드리러 온 거 집으로 들어갔죠...
옛 가옥에서 예비시부모님하고 어르신들이 한복을 입고 웃으면서 맞이해 주셨습니다.
어머님은 스물넷에 시집오셨다고 하더군요.
사람도 좋아보이셨고 성품도 온화해 보이셨습니다.
저보고는 애기가 나이가 좀 있다고 들었는데 생긴 건 어려보인다 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셨습니다.
스물 아홉이 많은 나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종갓집에서는 일찍 시집와 일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셨데요.
정성스레 차려놓으신 음식을 보면서 가뜩이나 자리도 어려운데 집안 분위기도 그런지라
계속 긴장을 하게 되더군요. 식후에 차를 마시며 어르신들 물음에 답하는데 점점 얼굴이 굳어갔습니다.
인사를 다 드리고 나가는데 어머님, 아버님이 이렇게 와줘서 고맙다고, 솔직히 당신도 시집와서 정말 고달
펐다, 요즘 애들답지 않게 어려운 결정 내려줘서 고맙다, 라고 하셨습니다.
집에 가면서 오빠한테 어떻게 이런 중요한 일을 얘기 안 할 수가 있냐고, 떨리는 목소리로 화를 냈습니다.
오빠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제가 떠날가봐 말을 안했답니다. 미안하지만 결혼 후에 늦으면 5,6년 후 아예
고향으로 내려가서 살거랍니다. 종손이라 직장을 안 다녀도 되고(아마 일가 어르신, 친척 분들이 도움을 주
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평생 그 가옥에서 집안 제사를 지내면서 사는 거겠죠..) 결혼하면 항상 너에
게 빚 갚는 마음으로 살겠다라며 저에게 사정사정합니다. 오늘처럼 중요한 날 아니면 한복도 안 입고 그냥
남들처럼 사는 모습은 똑같답니다.
하지만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을 좀 갖자고 말 한 후 일단 지금은 연락도 안
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하는 직장일도 그만둔채 그렇게 살아야 할 자신이 저에겐 없나봅니다. 오빠는 휴대
폰으로 실망했다는 둥, 그런 여자로 안 봤다는 둥 별의별 말을 보내지만 정리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비겁한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