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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세력이 5.18왜곡주장이 틀린이유(네이버 블로그에서 퍼옴)

ㅁㅁ |2013.02.24 20:13
조회 176 |추천 3
극우세력의 주장 1. 5.18은 김대중 정권때부터 민주화운동으로 불
리게 되었다?

● 5.18은 1988년에 가동된「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거치면서 노
태우 정부 때 처음「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공식 인정 받았
다. 1988년 국회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를 구성하여 진상규명에 나섰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
&sid1=102&oid=001&aid=0003438896

● 1993년 5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5.13 담화, 1995년 12월 5.18
특별법 제정, 1997년 4월 12.12 5.18 사건 신군부 유죄판결 확정,
1997년 5월 정부의 5·18민주화운동기념일 제정을 통해 민주화운
동이란 평가가 확고해졌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
209892&mobile&categoryId=200000431

극우세력의 주장 2. 5.18 최초 사망자는 20일 저녁 사망한 경찰이
다?

● 5.18 최초 사망자는 1980년 5월19일 오전 3시 사망한 청각장애
인 김경철이다.

● 5월 18일 희생된 김경철씨는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
압 사례였다. 청각장애로 인해 말까지 할 수 없었던 김씨는 친구들
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
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
&sid1=100&oid=001&aid=0001705981

●김경철씨 사망자 조서
http://i49.tinypic.com/32zkyh1.jpg
http://i46.tinypic.com/2v9x0u1.png

●19일에는 김경철씨 이외에도 김안부씨도 공수부대로부터 구타당
해 사망했다.
http://i47.tinypic.com/6tjy2w.png

극우세력의 주장 3. 광주시민이 먼저 무장해서 계엄군에 발포했다?

●1995년 검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엄
군이 시민보다 먼저 발포했다. 계엄군은 1980년 5월 19일 오후 5시
광주고 부근, 5월 20일 밤 11시 광주역 일대, 5월 21일 오후 1시 전
남도청에서 발포했으며, 시민이 본격적으로 무장에 나선 시점은 전
남도청 발포가 발생한 다음으로, 21일 오후 2시부터다.

●(1995년 7월 검찰발표)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는 5월 19일 오후
5시께 광주고 부근에서 있었던 바 (중략) 20일 밤11시께 3공수여단
이 광주역 일대에서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
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
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중략) 시위대가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
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
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
했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
&sid1=102&oid=001&aid=0003902648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위)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은 각 대대
에 M16소총 실탄을 배부해 장착토록 지시했다. 당시 광주역에 투입
됐던 이모 하사는 과거사위와의 면담에서 "지원 병력을 막아선 시위
대를 향해 발포가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오후 1시경 비극의 전남도
청 앞 발포가 자행됐다. 계엄군이 시위대에 밀리자 공수부대 중대장
이상 및 일부 하사관들에게 실탄이 분배됐고, 시위대가 밀고 들어는
장갑차에 11공수여단 무전병이 사망하자 집중 사격이 시작됐다. 당
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계엄군 중 일부는 위협사격을 가
했지만 일부는 조준사격을 했고, 특히 인근 광주관광호텔 옥상 등
주변 건물에 저격병이 배치돼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과
거사위는 "계엄군 사상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총상에 의한 부상자나 사망자는 없었다"고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
&sid1=102&oid=002&aid=0000034698

극우세력의 주장 4. 5.18 당시 시위대원이 장갑차를 조종했는데, 일
반인이 어떻게 장갑차 조종을 할 수 있나?

●광주 시민이 조종했던 장갑차는 KM900(CM6614)이다. KM900
은 궤도장갑차가 아니라 차륜식장갑차이며, 핸들이 달려있어 조종
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당시 버스기사, 트럭기사도 시위에 많이
참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광주 시민의 KM900 장갑차 운전이 불
가능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수구세력의 주장 5. 5.18 당시 광주교도소가 습격당했다고 하던데?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있으며, 두
도로의 옆에 바로 붙어있는 통행이 빈번한 교통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
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
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
전을 수행했다. 21일부터 3공수여단은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담양
도로 사이에 위치한, 광주교도소를 주둔지로 삼아 도로를 봉쇄했다.
제3공수여단은 교도소 주변 500m~1km 떨어진 도로 위에 바리케
이드 설치하고, 무장여부와 관계없이 통행하는 차량에 무차별 발포
했다. 정리하면, 제3공수여단이 도로를 타고 외부로 빠져나가려는
차량에 발포한 것이지, 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한게 아니다.

http://i50.tinypic.com/2ms2h3d.jpg (가운데 운동장이 보이는
건물이 광주교도소)

●(광주교도소장 한도희) 시민군이 80년 당시 광주교도소를 습격했
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
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는가
.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
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
&sid1=102&oid=001&aid=0003964241

●(1995년 12월 검찰 현장조사 결과)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간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위치, 시외곽으로 빠져나가려던 시민
군과 계엄군 사이에 다수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이 도로를 지나다 매복병사들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
95122900329101009&edtNo=40&printCount=1&publishDate
=1995-12-29&officeId=00032&pageNo=1&printNo=15638&p
ublishType=00010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위) 외곽도로 봉쇄작전 중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
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극우세력의 주장 6. 꼭꼭 숨겨져 있던 무기고에서 어떻게 무기를 탈
취할 수 있었나?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
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와 파출서의 예비군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무기고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극우세력의 주장 7. 시위대가 쓰던 카빈에 맞은 사망자가 계엄군이
쓰던 M16에 맞은 사망자보다 많다?

●제5공화국의 국방부는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88명이 폭도 자신
들의 난동으로 죽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제5공화국 국방부는 뒷
받침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현존하는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자료는 보안사가 작성한 "광주
사태 검시참여보고", 광주지검이 작성한 "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
용" , 광주시청에서 작성한 "광주소요사태 사망자 조서"로 3가지가
있다. 카빈 사망자만을 따져보자면, 보안사 검시 자료는 카빈 사망
자 21명, 광주지검의 검시 자료는 26명, 광주시청 검시 자료는 12명
이다. 세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카빈에 의한 총상으로 분류된 사망자
는 8명이다.
(1)보안사 검시자료 -
(2) 광주시청 검시자료 -
(3) 광주지검 검시자료 -

극우세력의 주장 8.1991년 윤기권의 월북은 북한이 배후조종했다
는 근거다? (화려한 휴가의 주인공이 월북했다고 왜곡하기도 함)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80년 광주 대동고등학
교 학생이었다. 5.18의 충격과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1년 3월 월북했다.

●윤기권은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었으므로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윤기권이 5.18에서 대단한 역할
을 맡은 것도 아니다. 5.18 주역들의 집단 월북도 아니고,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에 참여한 시민 전체를 매도할 수 없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
?id=ja_05&no=290
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
?id=ja_05&no=289

극우세력의 주장 9. 북한이 5.18을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고, 매년
5.18 기념식을 여는게 의심스럽다.

●북한은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
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을 모두 기념한다.(괄호
안은 북한에서 부르는 명칭)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
&sid1=100&oid=038&aid=000206500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
&sid1=102&oid=001&aid=0003232746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이라고 왜곡하여 북한 주민
에 대한 선전수단으로 삼는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등 남한의 민주
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
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http://www.rfa.org/korean/in_focus/nk_518-051820091348
16.html

극우세력의 주장 10. 5.18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을 주장하는 임
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의 증언이 있다.

●5.18 당시 광주에 침투했다는 북한군의 숫자, 침투경로, 퇴각경로
, 귀환인원이 매번 달라지고 일관성이 없다.

●임천용은 2006년 8월 한국논단과 인터뷰에서 서해안 쪽으로 45
0명이 침투하고, 3분의 1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특히 절반은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절반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했다고 말했
다.

●2006년 12월 기자회견에서는 1개 대대가 침투해서, 3분의 2가
귀환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2008년 임천용은 뉴스한국과 인터뷰에서 서해안과 동해안으로
각각 1개 대대씩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참고: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는 300명으로 구성됨)
1. 한국논단 인터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
N_CD=A0000368300
2. 2006년 기자회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
&sid1=102&oid=119&aid=0000017557
3. 뉴스한국 인터뷰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
o=k2007021120301185542

극우세력의 주장 11. 탈북자 단체의 5.18 증언집 "5.18 화려한 사기
극의 실체"는 신빙성이 있나?

●탈북자들이 북한에 있을 때 5.18 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봤다는 증
언이 이 책의 포인트다.

●탈북자가 북한에서 5.18 당시 광주 상황을 TV를 통해 생중계로
봤다는 주장 : 1980년 당시 기술로 송신소, 중계소 하나없이 광주에
서 수 백km 떨어진 평양에 생중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탈북자가 북한 TV에서 여자만 골라 도끼, 칼로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는 주장 : 5.18 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한 여자는 11명
에 불과하며, 모두 M16 총에 맞아 사망했다.

●탈북자가 북한 TV에서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는 주장 :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검
시기록은 없다.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 시신 사진을 왜곡한 것
이다.

극우세력의 주장 12. 5.18 당시 북한군이 활동했다는 것은 북한 사
람, 탈북자 사이에서 상식이다?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인 탈북군인협회 회장은 5.18 북한군 침
투설을 주장하는 자유북한군인연합에 대해 "탈북군인협회와 자유
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
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
다."고 비판한 바 있다.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
num=53887

극우세력의 주장 13.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을 기리는 비
석이 북한에 있다?

●뉴데일리는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 사진을 게재하고,
김주호 박사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해 비석이 5.18과 관련있다고 보
도했다. 사진 속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은 우리나라
의 현충탑처럼 북한에서 시군마다 하나씩은 있는 흔한 비석이다. 북
한의 노동신문은 "김정일이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
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
민군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했다"고 보
도한 적이 있다. 6.25전쟁, 베트남전쟁 등 다른 사건에서 사망한 인
민군과 관련된 비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
&sid1=100&oid=079&aid=0002355393

●김주호는 어떤 문건과 비석의 명단에 있는 사망자 명단을 비교해
서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주장
하는데, 정작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비석과 5.18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하기 위
해서는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을 공개해야 한다.

●비석 사진에 5.18과 관련있는 문구가 없으며, 비석과 5.18과 관
련성을 밝혀준다는 문건의 존재도 불확실하다. 따라서 김주호는 북
한의 아무 비석 사진을 가지고 5.18과 관련있다고 왜곡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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