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웃대 삶이무의미함 님 -
“...니까?”
“..씨?”
꿈틀.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소음 소리에 눈과 귀가 번쩍 떠진다. 따가운 눈알을 좌우로 굴려가며 현실을 서서히 파악한다. 그러자 나를 깨웠던 예의 소리가 귀로 명확하게 들려왔다.
“00제약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한다. 아니, 일단 일어나야겠다.
“....”
그러자 어제의 일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금색의 고급스런 종이가 힘 없이 가랑이 사이로 떨어진다. 아, 조심스레 종이를 들고 내용을 살핀다. 어제.. 그랬었군. 쿵. 쿵. 쿵. 노크 소리가 점차 커져간다. 그제야 완전히 정신이 든다. 얼른 일어나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삐빅-
낡은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리며 검은 색과 회색 정장을 말끔히 차려 입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두 남자가 나를 보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살아 생전 남이 내 집에 온 적은 처음이었기에 둘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준비가 되시는대로 나와주셨으면 합니다.”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를 보며 무미건조하게 말하며 계단을 내려간다. 그 옆의 남자도 나를 힐끗 보고는 따라 나선다. 잠시 멍하니 둘을 바라보다가 대충 세면을하고서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삐리리리-
집을 나서자마자 울리는 전화 소리. 액정에 뜨는 번호를 가만히 본다.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등록시키며 생활하던 적이 없는 나에게는 또 하나의 과제일 수 밖에 없다. 삐리리리- 소리가 정말 요란하군. 어쩔 수 없이 받아보도록 한다.
“예.”
“어, 오늘은 쉬는건가?”
이 목소리는.. 체육관에서 일하고 있는지 관리를 하고 있는지 모를 중년인이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제의 일을 사실대로 털어 놓고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할까? ..아니다. 괜히 사소한 일까지 말해서 무얼하겠는가.
“이제 못 나갑니다.”
“못 나가다니?”
“대충.. 그렇게 되었습니다.”
“잠깐.. 보수가 적은가?”
“....”
일년 가까이 보면서 중년인이 이렇게 당황했던 목소리를 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내 존재가 큰 건가. 하지만 이어지는 소리에 나는 망설임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아, 자네가 워낙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아 보수를 남들보다는 적게 줬긴 하지만.. 솔직히 말야. 자네 외관이 뭐.. 어디 특출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외모로 어디서 돈을 버는...”
개소리. 어차피 나를 이용해먹으려는 속셈이었나. 통화 시간을 나타내는 얄궂은 액정을 가만히 보다가 2층에서 고개를 쑤욱 내미는 검은 정장 남자 때문에 정신이 확 들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아닙니다.”
길게 망설이지 않고 남자를 따른다. 2층. 1층. 짧디 짧은 계단들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좁아터진 골목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고급스러운 세단이 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정장 남자는 뒷좌석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주고서 나를 보며 손짓했다. 살아생전에 이런 차를 타는 일도 생기는군. 느릿하게 걸어 뒷좌석에 몸을 맡긴다.
“....”
버스와는 다르게 편안하게 안락한 의자에 다시 한 번 놀란다. 거기에 내 신장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 천장까지.. 칙칙한 곰팡이 냄새가 나던 계단이나 집에서 나던 기분 나쁜 냄새가 나지 않는다.
“....”
과연 2억이라는 액수를 지불할만큼의 기관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턱. 부드럽게 닫히는 문과 곧 출발하는 세단. 좁고 더러운 골목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꼴이란.. 왠지 모르게 씁쓸해진다.
몇 분 만에 골목길을 벗어난 세단은 이제 큰 길로 접어들어 내가 그동안 다니지 않았던 곳으로 미끄러지듯 도로를 활보하기 시작한다. 편안한 승차감과 밖에 보이는 새로운 풍경에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만 한다. 궁금한 점? 있다고 한들 내가 실험대에 오르는 쥐와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살아나면 그만이다. 여지껏 몸으로 살아오고 경험했던 나날들. 그리고 나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해준 고마운 몸뚱아리다. 어떻게든 잘 버텨줄 것이다.
“?”
얼마나 갔을까.. 번쩍 눈이 떠진다. 너무 낯선 공간에서 쉽게 잠을 자지 않는 성격이지만 세단 내에서 느껴지는 편안함 때문에 무기력하고 바보처럼 잔 것 같다. 그러자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여긴..?”
“다 왔습니다. 내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커다랗고 견고해 보이는 백색의 건물과 그 옆으로 푸르디 푸른 잔디만이 전부인 낯선 공간이다. 슬쩍 밴을 내려다본다. 시동이 꺼진지가 좀 된 것 같은데.. 나를 기다려준것인가.
“이쪽으로.”
두 남자는 자연스럽게 나를 인도하며 백색 건물로 걸어간다. 넓은 출입구로 되어 있는 안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유리. 그런 부자연스러운 구조 정면에 눈에 띄는 회전문. 남자 둘은 나를 슬쩍 보고서는 회전문을 가리켰다. 나를 저 문으로 들어가게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인 것 같다.
둘을 잠시 본다. 역시나 아무런 표정이 없는 무감각한 얼굴이다. 그들의 곁을 지나친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괜한 미련에 뒤를 돌아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담아낸다. 검은 색과 회색의 두 정장. 커다랗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세단. 수평선처럼 주욱 이어진 푸른 잔디들. 자, 여지껏 버텨 준 몸아.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버텨다오.
“안녕히..”
회전문을 통과하기 직전 그렇게 들렸던 것 같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살아 돌아올 것이다. 살아서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며 부모에게 다시 돌아가는거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안녕하십니까. 이 곳 연구의 담당자 송병헌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문을 통과하자 보이는 것은 둘 째치고 익숙한 목소리가 내 시선을 끌었다. 180은 족히 넘어보이는 건장한 체구. 어울리지 않는 백색의 가운을 걸친 남자다. 송병헌이라고 한 남자는 곧 내게로 다가와 한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하하하. 이거 원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재주도 있군요.”
남자는 보기 좋은 미소를 보이며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나를 다른 쪽으로 안내한다. 남자의 뒤를 따르며 주위를 가볍게 훑어본다. 백색의 타일과 견고해 보이는 기둥 여러 개. 좌우로 뻗은 기다란 통로와 중앙에 위치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엘리베이터 두 대.
남자는 기다란 통로 중 왼쪽으로 나를 안내했고 여러 개의 방문 중 두 번째 방문을 열었다. ‘고급스러운’이라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그런 사무적인 공간에서 나를 소파에 앉힌 남자는 곧 파일 철을 들고 내게 내밀었다. ‘계약서.’라고 써져 있는 내용이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유독 내 눈을 번뜩이게 한 것은 2억이라는 엄청난 배상금이었다. 그런 내 눈빛을 읽었는지 남자가 칠흑 같은 색을 띄고 있는 펜을 건넸다.
“거기에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
남자의 눈과 칠흑의 펜이 뱀의 ‘그것’과 같아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예.”
길게 망설이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내 목적은 단 하나. 얇은 펜을 쥐고 서툴게 내 이름 석자를 써간다. 살아오면서 펜을 잡아본 일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10여년 만에 처음 잡아보는 펜의 감촉이 한 없이 낯설기만하다. 역시 나에게는.. 축축하고 눅눅한 보호구들이 어울린다.
“예. 감사합니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파일 철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하시는 일이 어떻게..?”
“체육관에서 스파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아.. 그럼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겠군요.”
“몸으로 해 온 일이라면 뭐든 상관없습니다만..”
남자는 양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그게 아닙니다. 이번 실험을 임하는데 있어서 00씨의 몸을 최적의 상태로 이끌어내서 약의 작용을 보고 싶은 것뿐입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십시오.”
“....”
“그럼 간단한 테스트를 거치고 방으로 안내해드리지요. 자, 따라오십시오.”
가벼운 몸놀림으로 일어난 남자는 다른 공간으로 나를 안내했다. 기다란 백색의 통로 안을 묵묵히 걷는 남자와 나. 딱히 남자에게 할 말은 없다. 그저 내 존재가 이곳에 맞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온통 백색인 공간을 내가 더럽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은 왜일까.
“자, 안으로 드시지요.”
예의 같은 문이 열리며 남자가 나를 안내한다. 여러 가지 신체를 측정하는 기계로 보이는 것들이 즐비한 공간. 그 가운데서 남자는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서서히 발걸음을 뗀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을 때마다 남자의 몸이 유독 크게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