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웃대 삶이무의미함 님
체육관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기계들이나 생전 처음 보는 기계들 몇 개가 일렬로 주욱 배치되어 있다. 다룰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남자의 주도하에 검사를 시작한다. 정확한 신체와 몸무게를 재고 근육량, 골격량, 적혈구, 백혈구 등. 이런저런 검사를 하는데 1시간 정도가 지난 것 같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피곤하시죠? 기본적인 검사들은 끝났으니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남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본다. 연구만하는 사람치고는 신체 발달이 잘 되어 있다. 스파링을 오래 해오면서 상대들을 봐왔지만 저렇게 몸에 균형이 잘 잡힌 사람을 보는 일은 참 드문 일이다. 부드득. 문득 저 사람과 스파링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뒤에서 덮친다면 온전히 내 공격을 피해낼 수 있을까. 만약 저 사람을 해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쫓겨나는 것인가. 경찰에 잡혀가는 것인가.
“00씨?”
“예.”
마음 속에 작은 폭풍을 간신히 누그러뜨리며 남자를 따른다. 긴 통로를 지나 홀로와서 중앙에 위치한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3층이다. 1층. 2층. 바뀌어가는 숫자를 올려다보며 남자가 말한다.
“지내시는데 큰 불편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00씨만 지내는 생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양보하셔야 할 일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제 말 이해하시죠?”
“쓸데없는 소란은 피하라는 말입니까.”
내 말에 남자는 당혹스러운 듯 낮게 웃으며 말했다.
“00씨는 서두 없이 본론만 내뱉는 스타일이군요. 예. 그게 더 화끈하고 좋지요. 소란이라.. 왠만하면 조용히 지내주셨으면 합니다. 안그러면 실험 자격에서 ‘박탈’이 될지도 몰라요.”
다른 말보다 ‘박탈’이라는 단어가 나를 옥죄어 온다. 시작도 못해보고 여기서 물러나는 것은 사양이다. 기껏 멋을 부리며 알바를 관둔 마당에서 돌아간다고한들 나를 받아주는 이가 있기는 할까.
띵-동.
짧은 상념 끝에 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넓고 거대한 공터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좌우 벽에는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곳인지 백색의 문이 일정 간격으로 띄어져 있다. 공터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벤치들이나 인조 공원 등이 있었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편히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 모든 것들을 인조로 만들어낸 것인가.
“....”
과연 저들이 목숨을 걸고 2억이라는 거액을 따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란 말인가. 어떻게 저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거지? 곧 실험에 의해 죽어버릴지도 모르는데.
“00씨의 방은.. 어디보자.”
남자는 가운 주머니에서 네모난 기기를 꺼내 화면 여기저기를 터치하기 시작한다. 느리게 걸음을 옮기며 한 곳에 몰두해 있는 남자와 칙칙한 활동복차림의 내 모습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일까. 시선이 내게로 몰리는 것이 느껴진다.
“와~ 아저씨 크다.”
밝고 명랑한 소리. 왼쪽 허벅지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10살정도 되보일까.. 작고 연약해 보이는 여자 어린아이가 나를 올려다본다. 뭔가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보지만 난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너도..”
저런 아이도 이런 실험에 참가하는 것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핀다. 아직 10대로 보이는 청소년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20대의 청년들. 30대 이상의 중년 층들이 균형 있게 모여 있는 것이 보인다. 전부 나와 같은 심정인가. 죽어도 상관 없다는 것인가. 버틸 수 있는 몸을 가졌다는 것인가.
“저기가 좋겠군요. 이쪽으로..”
몰두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나를 안내했다. 뒤에서 종종 걸음으로 따라오는 꼬마를 힐끗 보고서는 빠른 걸음으로 남자를 따른다. 얼마가지 않아 꼬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다.
“이곳입니다. 115호. 잘 기억해두십시오. 모두 문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호수로 구별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115호입니다.”
남자는 전화 통하를 하던 사무적인 목소리와 톤으로 내게 일러두었다. 115호. 어렵지 않은 숫자다.
“체구에 맞게 다 세팅을 해두었으니 염려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검사 결과는 2~3일내에 나오니 그때까지 마음 편히 가지십시오.”
“예.”
사무적인 멘트를 마친 남자가 돌아가려는 찰나, 바로 앞 문. 114호가 조용히 열리며 흑색과 흰색의 조화가 잘 어우러지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나왔다. 그러자 남자는 이제껏 보여주지 않았던 가식 없는 미소로 여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은혜야. 잘 잤니?”
“....”
은혜라고 불린 여자아이는 생기가 없는 눈으로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은혜라고 부른 여자아이의 볼을 가볍게 두드리며 내게 말했다.
“요녀석은 정신지체아에요.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왔는지 원.. 00씨를 115호에 머물게 한 것도 그 이유입니다.”
“이유?”
“그게.. 청소년들은 모르겠는데 아저씨들끼리 작당을 하고 은혜를 성폭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 박탈처리가 되어 쫓겨났지만 은혜가 정신지체라는 것을 교묘히 이용해 성 욕구를 풀려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서..”
“저 아이를 지키라는 말입니까.”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여자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이내 내 존재감을 감지했는지 여자아이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무’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허망해져버리는 느낌이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혼이 나갈 수 있는 것인가.
“부탁합니다. 이러면 안되지만.. 어쩐지 이 녀석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군요. 00씨라면 은혜를 잘 지켜주실 것 같습니다.”
“만약 내가 그 아이를 범하려고 한다면?”
내 물음에 남자는 가만히 나를 보고서는 은혜라는 아이에게 보였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00씨는 그럴 분이 아닙니다. 제가 알아요.”
“....”
“그럼 부탁합니다. 은혜야 앞으로 이 아저씨를 잘 따라다녀야 해. 알았지?”
“....”
역시 아무 말이 없는 여자아이. 남자는 쓸쓸한 미소와 눈빛을 흘리며 내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버렸다. 점점 멀어지는 남자의 모습. 이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여자아이. 은혜는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
그 모습이 너무 가련하고 순결해 보여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작은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부드러웠다. 그동안 손을 통해 느껴진 감촉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아주 부드럽고 기분 좋은 감촉이다. 허나, 너무 오래 서있을 수도 없는 노릇. 연약해 보이는 은혜를 다시 114호로 강제로 넣다시피 한 후 115호의 문을 열었다.
스르륵. 부드럽게 문이 열리며 10평은 되어 보이는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왼쪽 끝에는 내 체구에 맞는 커다란 침대와 다른 끝 쪽에는 화장실로 보이는 공간. 그리고 가운데에는 조그만한 소파와 TV가 전부다. 내부도 깨끗한 편이어서 큰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온통 흰색이군.”
정말 이 건물 내부나 밖은 희다 못해 투명한 흰색이 전부다. 굳이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는 것인가. 스르륵. 문이 열리며 뭔가가 고개를 들이민다. 흑색의 머리카락이 윤기나게 반짝거리는 것이 아름답다.
“....”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은혜. 그 공허한 눈동자에 빨려들어 갈 것 같아 나는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하지만 평소에 TV를 보지 않는 나에게는 아무런 흥미를 끌지 못했다.
“....”
TV너머로 은혜의 존재가 확연히 느껴진다. 하지만 나에게는 저런 아이를 돌볼 만한 재주도 없거니와 그러고 싶지도 않다. 아무리 남자의 부탁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서로 부탁을 하고 들어줄만한 관계에 있는 것인가. 가만히 앉아 골몰히 생각해본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보지도 않고 있는 TV 프로가 끝난 후에 정신이 든 것 같다. 삐걱거리는 몸을 풀어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기계적으로 기지개를 핀다. 그리고 느껴지는 시선. 은혜다. 얼마나 지났는지 몰라도 그 자리에서 나무처럼 꿋꿋이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리 와.”
손짓을하며 은혜를 부른다. 하지만 반응이 없다. 얼마나 서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런 얇은 다리로 오래 서 있는다면 아프지 않을까. 은혜에게 다가가 얇은 손목을 잡는다. 그동안 거칠고 투박한 손을 잡았던 것과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오묘하다. 새삼 느끼는 감정이다.
“앉아.”
소파까지 은혜를 끌어 강제적으로 앉힌다. 그러자 멍한 눈으로 TV를 보는 은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오는 것이 힘들었던 것일까. 여지껏 살아오면서 여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 은혜는 완전히 다른 상식에 살고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허한 눈으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표출한다.
“....”
그런 은혜라는 존재가 영 나쁘지는 않다. 솔직히 끌리기 시작한다. 왠지 나라면 은혜를 온전히 지켜줄 수 있을 것만 같다. 가만히 서서 TV에 빠져든 은혜의 옆 얼굴을 내려다본다. 여지껏 살아오면서 이 몸을 누군가를 지키는데 쓴 적이 있던가.
“....”
TV에서 들려오는 잡음이 10평의 공간을 서서히 메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