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웃대 삶이무의미함 님 -
은혜를 보호하겠다고 다짐한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 째. 매일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정확한 시간대에 나오는 식사. 한정적인 공간안에서 지낼 수 밖에 없는 지루한 면이 있다는 점을 빼고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제 하루 사이를 경계로 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띌 정도로 보이지가 않는다.
“....”
인조 공원에 인위적으로 배치된 벤치에 은혜와 앉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하루 사이에 20명 이상의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예삿일은 아니다. 남자의 말대로 임상실험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람의 ‘목숨’ 뿐이라는 것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은혜는 아직 데려가지 않은 상태다. 아마 내 검사 결과가 나오는대로 같이 데려갈지도 모른다.
띵-동.
어제와 비슷한 시간대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나를 안내해주던 남자와 2명의 연구원으로 보이는 호리한 체격의 남자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송병헌..이라고 했나. 남자는 처음 나를 맞아줄 때와는 다르게 우울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잠시 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
그 남자의 행동과 동시에 주변 공기마저도 멈춰버린 것 같다. 사람들은 불안한 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남자의 눈치를 살피기 바쁘다. 하루가 지나 임상실험에서 좋지 않은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낌새를 차린 것인가. 얼마가지 않아 남자는 크게 숨을 마시며 전에 나를 안내해줄 때 사용했던 작은 기기를 꺼내 이리저리 터치하기 시작한다.
삐- 삐비비- 삐.
작지만 날카로운 소리. 저 소리가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더한 심정인지 연신 마른침을 삼키는 이들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도저히 궁금함을 못 참겠는지 손을 들며 말했다.
“어제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 질문에 터치하던 손을 멈춘 남자는 침묵을 깬 남자를 슬쩍 보고는 다시 예의 동작을 시작한다.
“살아있습니다만..”
미묘한 뉘앙스에 사람들은 전혀 안심하지 못하는 눈치다. 웃기지 않는가. 모두 목숨 하나 버리면서까지 2억이라는 거액의 돈을 거머쥐러 온 것이 아니던가. 이제 와서 두려워하는 꼴이라니.. 죽으면 죽을 수도 있는거고 운이 좋으면 살아날 수 있는 것 아닌가.
“오늘은 121호부터 140호분들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자, 순서대로 엘리베이터에 오르시지요.”
남자의 표정이 다시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자신의 번호가 지목된 사람들은 마치 죄를 지은 죄수마냥 힘 없이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시작했고 남자 뒤에 있던 두 남자들은 번호를 체크해가면서 이상이 없는지 파악했다. 그런 모습을 잠깐 보던 남자는 곧장 내게로 다가와 말했다.
“내일 결과가 나올 겁니다.”
“예.”
“긴장되십니까?”
“어차피 나를 걱정해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하하. 좋습니다. 어쩌면 은혜를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군요.”
남자는 멍하니 앉아 있는 은혜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뚜벅. 뚜벅. 구두굽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공간에서 남자의 뒷모습이 처음 볼 때와 같이 점차 거대해져간다.
“..가.”
그리고 미세하지만 은혜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남자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뚜벅. 뚜벅. 그 소리를 들은 것일까. 남자는 잠시 뒤를 돌아 은혜를 보고는 미련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 은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하지만 은혜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볼 뿐 아무런 호응도 하지 않는다. 그럴 것을 애초에 알고 있던 남자는 나지막이 웃으며 손을 거두었고 이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4층. 5층. 6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 그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내일인가..”
6층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잠깐 상념에 빠진다.
“형씨.”
하지만 내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샌가 나타난 30대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나를 보며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은 그리 좋아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남자에게 딱히 할 말은 없다. 남자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올 때부터 저 양반이 형씨한테만 뭐라 말을 하는 것 같던데 무슨 비밀교환이라도 한건가?”
“....”
남자의 왼쪽 눈이 약간 꿈틀거린다. 하지만 곧 비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아, 다 서로 좋자고 하는거 아니겠어? 나나 자네나 같은 처지인 것 같은데 말야. 나도 부모 없이 여기까지 오다가 팔자 좀 피어보자는 속셈으로 지원하긴 했지만 말야.. 이 사람이란게 원.. 때가 되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있나.”
남자의 표정에서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그동안 나를 대하며 가식적인 가면을 쓰던 사람들과는 다르다. 진실의 얼굴. 거짓이 아니다. 때가 되어 불안함을 이기지 못해 나를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를 하려는 것인가.
“그저 이 아이를 맡아달라는 얘기외에는 없습니다.”
내 말에 남자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은혜를 삿대질 하며 말한다.
“이... 이런 모자라 보이는 애를? 아, 아니 미안하네. 성격이 급해져서 그러네. 정말 그것 뿐인가?”
“예.”
“..하아.”
남자는 더 이상 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다른 무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뭐라고 수근대기 시작했다. 그 작은 소리에 3~4명으로 되어 보이는 무리들은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자.”
그런 무기력한 꼴이라니.. 자신이 선택한 일을 책임질만한 각오도 없는 것인가. 은혜의 손을 이끌고 내 방으로 걸어간다. 뒤에서 다른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니 궁금하지도 않는다.
스르륵.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밀고 은혜를 침대 위에 강제적으로 눕힌다. 버둥거리며 일어나려는 은혜를 억지로 눕힌 뒤 가만히 지켜본다.
“....”
자기 싫은지 은혜는 내 손을 뿌리치다시피 걷어내고 TV 앞에 앉는다. 하는 수 없이 TV를 틀어주고 소파 옆에 앉아 은혜를 지켜본다.
“마지막일지도 모르겠구나.”
아름다운 새장 속에서 날개를 접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새처럼 은혜의 모습이 연약해 보인다. 하지만 아름답다. 지켜주고 싶다. 갖고 싶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몸이 멋대로 움직인다.
“....”
나의 투박하고 두터운 입술로 은혜의 작고 여린 입술을 탐해도 되는 것일까. 세상을 살아오면서 온갖 더러운 것을 먹고 뱉어낸 입술이다. 이런 걸로 괜찮은걸까. 서로의 숨이 느껴질정도로 가까운 거리. 은혜는 아무 말 없이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
역시 안되겠다. 나의 더러운 것으로 은혜를 물들일 수는 없다. 지금처럼 그저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 그게 나의 올바른 선택이자 행동이다.
TV에 몰두해 있는 은혜를 가만히 본다.
“날씨입니다. 내일은 전국의 저기압 영향으로 안개가 짙게 끼는 날이 되겠습니다. 체감 온도는 5~10도..”
..그렇게 무료한 공간 속에서 잠이 든 것 같다.
“..하라구!”
“어서!”
얼마나 지났을까. 이 공간에서 도저히 들릴 수 없는 불협화음에 눈이 떠진다. 그와 동시에 내 눈에 잡히는 것은 내 앞에서 뭔가를 꾸물거리는 남자의 모습이다. 아까 전 나에게 뭔가를 물어보던 남자의 작당들 중 한 명이다.
“제길.. 왜 이렇게 안돼?”
내 의식을 알아차리지 못한 남자는 연신 중얼거리며 내 몸을 점점 옥죄어간다. 손을 보니 뭔가로 나를 묶으려 하고 있다.
“얌마. 조용히 해. 저 놈이 보는 앞에서 이년을 능욕해야 하니까.”
“다음은 나라구. 순서 제대로 지켜.”
“취미 한 번 고상하다니까.”
“어차피 죽는 마당에 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남자를 돌아보며 다그치는 남자. 이상하게도 상의를 입고 있지 않다. 왜 저런 옷차림이지? 천천히 시선을 옮겨 남자의 아래에 깔려 있는 누군가가 눈에 가득 잡힌다. 지켜야만 하는 연약한 어린 새 은혜다. 전과 같은 멍한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지만 다른게 있다면 은혜의 상의 역시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이상한 행동에 내 앞에서 꾸물거리던 남자 역시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침대에서 백색의 빛을 내고 있는 은혜다. 부드득. 부득. 마음 속의 폭풍이 강하게 휘몰아친다.
“어, 어이!”
당혹스러운 남자의 목소리. 내 앞의 남자는 어쩔 줄 몰라 어물거리며 내게서 물러난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엄청난 속도로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파악.
낯선 소리와 함께 뒤에서 느껴지는 충격. 그리고 뜨겁고 따가운 뭔가가 눈과 코를 타고 흘러내려 입으로 들어간다. 찝찝하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것.
“으워어어!”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뒤에서 공격을 가한 남자의 목에 강한 하이킥을 날린다. 차마 피할 생각도 없었던 남자는 그대로 맞아 떨어져 일어나지 못한다. 죽었나? 상관 없다. 내가 죽더라도 오늘 너희들은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까.
“혀, 형씨 잠깐만!”
당장 눈 앞에 있는 남자의 목을 잡고 들어올린다. 고통스러워하며 내 양 팔목을 잡으며 버둥거리는 남자를 그대로 바닥에 메친다. 퍼억. 소리와 함께 뜨거운 뭔가가 사방으로 튄다. 상관 없다. 오늘 너희들은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까.
“으아아아악!”
비명소리. 남자는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미꾸라지처럼 바닥을 기다가 이내 방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단숨의 도약으로 남자와의 거리를 좁힌다. 허겁지겁 방문을 밀고 나가려는 남자의 손목을 잡고 강하게 비튼다. 콰득. 콰드득. 익숙한 소리가 내 청각을 후벼판다.
“크아아악!”
살을 뚫고 나오는 뼈를 보며 공포에 젖은 남자는 연신 비명을 질러댄다. 하지만 나는 이 남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그대로 손목을 뜯어내고 다른 손으로 남자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친다. 쿠웅. 소리와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실신한 듯 쓰러진다. 하지만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다. 미약하게나마 가슴 팍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살아있다. 죽여야한다. 죽여버리고 싶다. 서서히 발을 떼고 남자의 목을 짓누를 준비를 한다. 단숨에 끝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