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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를 찾아 민족통일운동에 자신의 몸을 던진 민족주의자 장준하(張俊河)

참의부 |2013.08.16 01:11
조회 219 |추천 0

 

장준하(張俊河)는 일제강점기에는 20대로 민족해방운동의 ‘제단(祭壇)’에 자신을 던졌고, 이승만(李承晩) 독재정권 시절에는『사상계(思想界)』를 통해 “자유·민주의 나무는 피를 마시며 자란다”라는 민주주의의 ‘등불’을 밝혔다. 또한 박정희(朴正熙) 독재정권 18년 동안 장준하만큼 준엄하고 격렬하게, 그리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부딪쳐 나간 사람은 없었으니, 이는 장준하의 도덕적 자부심이 박정희의 본심(本心)을 날카롭게 꿰뚫어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장준하는 일생 동안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위한 끝없는 고뇌와 모색 속에서 자신을 시대정신에 맞추어 갱신해 나간 드문 인물 중 하나다. 건국 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그는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앞장서 지키다가, 7·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분단체제의 모순구조를 직시하면서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민족통일운동의 맨 앞줄에 나섰다.

 

이후 장준하는 민족통일시대를 열어젖히기 위해 온 몸으로 밀고 나가다가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의 사고로 57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장준하의 생애는 그의 순교자적·예언가적 지성과 함께 흙탕물 같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연못에 핀 한 떨기 연꽃 같은 것이었다.

 

민족의 ‘돌배개’를 베고 짧은 일생 굵은 발자취를 남긴 장준하의 57년, 그 역사적 삶과 죽음에 이르는 궤적을 따라가 본다.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에서 목사이던 장석인의 4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집안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독학으로 공부한 장준하는 열세살 되던 해가 되어서야 인근의 삭주 대관보통학교에 5학년으로 바로 입학하고, 1932년 평양에 있던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숭실중학교는 역사와 전통에서는 물론 민족의식 면에서도 명성을 떨치던 학교였다.

 

그러나 장준하의 평양 숭실중학교 생활은 1년만에 끝났다. 아버지 장석인이 평양에서 평북 선전(宣川)에 있던 신성중학교로 전근가면서 장준하도 아버지를 따라 전학했다. 선천은 평양에 비할 바 못 되는 작은 고장이었으나, 전국적으로 이름 높았던 기독교의 고장이자 애국적 고장이었다.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신민회(新民會) 탄압사건이라든가, 선천 3·1만세시위 등이 일어났던 곳이며, 기독교도들의 각성된 의식이 전 민족에게로 퍼져나가는 수원지(水源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신성중학교 시절을 통해 장준하는 일본식 교육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결정했다가 징계와 퇴학처분을 받을 뻔하기도 했다. 방학 때가 되면 농촌실정과 농민문제의 핵심을 알기 위해 농촌현장을 발로 뛰어 다녔으며, 독서에 열중했다. 졸업할 무렵에는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의 평론을 등사하여 읽다가 들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신성중학교를 함께 졸업한 대중가요 작곡가 김용환(金龍煥)은 ‘장준하의 인간상’이란 회고록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장준하 형은 의자가 놓여 있지 않은 교회마루를 학생들의 체육관으로, 음악당으로, 혹은 무용당으로 대용하는가 하면, 성가대를 조직하여 주일예배의 꽃으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교회의 제직(諸職) 회의에 참석하여서는 노쇠한 조직과 고식적 학교 운영을 통박하고 “육영이란 미명의 간판을 하나님 집에 달아놓고 여러분이 하는 일이 뭐냐” 하는 추궁에도 서슴이 없었다.

 

정주의 젊은 풍운교사 장준하가 재직했던 신안소학교는 후일(8·15광복 직후) 한 단계 높아져서 평동중학교의 새 간판으로 바뀌어 걸렸다. 1938년 여름에 과수원에서 교회 청년들과 학생들이 곡괭이를 휘두르며 합창으로 부르던 신안소학교 교가소리가 지금도 내 귀에 생생히 울리는 듯하다.〃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장준하의 나이 24세 때였다. 그 해에 그는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예과)에 들어갔다가, 이듬해에 일본신학교로 옮겼다. 목회자로의 길을 권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였다. 장준하가 일본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이 학교에는 전택부(全澤鳧)·문익환(文益煥)·문동환(文東煥)·김관석(金觀錫)·박봉랑 등도 있었다. 그중 문익환은 장준하와 함께 1960년대~1970년대에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졌으며, 장준하의 타계 후 장준하의 ‘후계’를 자임, 1980년대 후반 민족통일운동에 앞장섰다가 장준하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났다.

 

1943년이 되면서 태평양전쟁 초기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위세가 현저히 퇴조했다. 일제는 조선인 대학생에게 ‘학도지원병제’라는 올가미를 씌웠다. 1944년에 실시된 징병제의 전초로 반강제적 조치였다. 이로써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할 때까지 전쟁터로 끌려간 조선인 청년은 20만여명에 달했다. 이 시절 이광수(李光洙)와 최남선(崔南善)은 학병권유 강연에 나섰고, 장준하도 그 강연을 들은 바 있다.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은 1938년 일본의 신사(神社) 참배를 거부하여 실직자가 되었다가, 간신히 삭주 대관교회에서 목회자로 일했다. 그에게는 ‘요시찰인’이란 딱지가 붙어 일본 경찰관의 미행과 위협이 항상 뒤따랐다. 장준하는 그의 자서전『돌베개』에서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전했다.

 

“일본인들이 항상 주목하고 또 가장 미워하던 목사 가운데 한 분이 나의 아버님이었다. 신사 참배를 반대하였다는 죄목으로 선천 신천중학교 교직에서 축출당한 뒤에도 계속 요시찰인물로 형사들이 뒤를 따르는 형편이었다. 나는 장남이다. 나는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 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내던져 버렸다.”

 

장준하는 자기의 집안이 닥칠 불행을 예감하고 스스로 희생양이 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1943년 11월 하순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귀국을 서두른 데는 또 다른 사연도 있었다. 김희숙과의 결혼 때문이었다. 김희숙은 장준하의 제자뻘이었다. 장준하는 신안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당시 김희숙의 집에서 하숙했고, 그후 일본 유학시절에도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기에 조선인 처녀들을 이른바 정신대란 이름으로 징발하자 조선의 여성들은 전전긍긍했고, 김희숙에게도 그 마수가 뻗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장준하는 김희숙을 유부녀로 만들어 ‘보호’하려는 뜻으로 결혼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1944년 1월 5일 김희숙과 결혼하고, 2주만인 1월 20일에 일본군에 입대했다. 두가지 목적을 위한 입대였다. 나머지 한가지 목표였던 학병(學兵) 탈영과 임시정부에의 귀환은 가슴속 깊숙이 간직했다.

 

장준하가 입대한 일본군 부대는 평양에 있던 기병 제42연대였다. 42연대에서 복무하던 시절 장준하는 마구간 청소를 맡아 하다가 지독한 동상(凍傷)에 걸렸다. 밤이면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했다. 일본인 군의관은 고름이 생겨 환부를 째야 하는데 마취제가 없다면서 참을 수 있겠는가 물었다. 장준하는 참겠다고 했다. 군의관은 손가락을 다섯 군데나 쨌다. 장준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냈다. 웬만한 사람이면 기절했거나 비명을 질렀을 텐데 그는 끝까지 참았다.

 

장준하는 훗날『돌배개』에서 “손가락 수술을 받고 난 뒤 그 엄지손가락은 끝내 병신이 되고 말았지만, 그 칼자국들은 내가 최초로 일본인 군의관과 대결해 승리한 훈장으로 빛나고 있다”라고 술회했다.

 

기병 제42연대에서 훈련이 끝나고 얼마 후 장준하는 중국 강소성 서주의 쓰카다 부대에 배속되었다. 중국 땅으로의 배치는 장준하가 원하던 바였다. 장준하의 학병지원은 ‘탈영’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냥 탈영이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뛰어들기 위한 단계였다.

 

1944년 7월 7일 장준하는 마침내 일본군 병영을 탈출했다. 중국에 배치된 지 널 달 만이었고 쓰카다 연대에 배속된 지 한 달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함께 탈출을 도모한 동지는 김영록·홍석훈·윤경빈 등이었다.

 

장준하는『돌베게』에서 일본군 병영을 탈출한 그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44년 7월 7일 이 날은 광활한 대지에 나의 운명을 맡기던 날이다. 중경을 찾아가는 대륙횡단을 위해 중국벌판의 황토 속으로 그 뜨거운 지열과 엄청난 비바람과 매서운 눈보라의 길 6천리를 헤매기 시작한 날이다. 풍전등화의 촛불처럼 나의 의지에 불을 붙이고 나의 신념으로 기름을 부어 나의 길을 찾아 떠난 날이다.˝

 

일단 탈출에 성공한 장준하는 아내에게 “돌베게를 찾노라”라는 글을 띄워 보냈다. ‘돌베게’는 장준하가 그의 아내에게 귓속말로 일러준 암호였다. 자신의 편지 속에 ‘돌베게’라는 말이 쓰여 있으면 일본군으로부터 탈영에 성공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장준하의『돌베게』발문을 보면 이 암호와 관련된 부분이 있다. 직접 인용해 보자.

 

˝창세기 28장 10절~15절에 나오는 야곱의 ‘돌베게’ 이야기는 내가 결혼 일주일만에 남기고 떠난 내 아내에게 일본군 탈영의 경우 그 암호로 약속하였던 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게를 찾는다”라고 하였다. “어느 지점에 내가 베어야 할 돌베게가 나를 기다리겠는가”라고 썼다. 그 후 나는 돌베게를 베고 중원 6천리를 걸으며 잠을 잤고 지새웠고 꿈을 꾸기도 하였다.˝

 

탈출 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대륙의 햇볕은 뜨거웠고 장준하 등은 목이 타서 거의 죽을 것만 같았다. 여름 더위는 보통 화씨 100도를 오르내린다고 하던 일본군 교관의 말이 떠올랐다. 바람 한 점 없는 조밭 속에 누워 그 복사열을 받았으니 오죽했겠는가? 조 포기들은 차츰 말라비틀어져 가고 살갗에 와 닿는 직사광선은 그대로 불덩어리였다. 물 한 모금의 갈증이 일체의 잡념을 몰아갔다. 장준하 일행은 중국대륙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물의 포로였다.

 

일본군에서 탈출한 후 장준하 일행은 중국군 유격중대에서 김준엽(金俊燁)을 만나 그와 함께 6천리 장정(長征) 길에 나섰다. 하루에 120리 내지 150리 길을 강행군했다. 중원에서 가장 더운 8월에 나무 한 그루 없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고, 도중에는 일본군과 토비(土匪)들도 출몰했다.

 

장준하 일행은 땀에 절고 노숙으로 더럽혀진 걸인의 몰골로 탈출 두달여만에 중경(重慶)으로 가는 길의 중간 귀착지라 할 수 있는 안휘성 임천(臨川)에 당도했다. 임천에는 중국의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가 있었고, 한국 광복군 간부 훈련반이 특설되어 있었다. 일행은 훈련반에 입소하여 교육을 받으면서 틈을 내《등불》이란 잡지를 펴냈다. 조동걸 국민대학교 명예교수는 ‘장준하와 독립운동’이란 논문에서《등불》발행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돌베게』는 이때의 일을 두고 “이것이 나와 잡지와의 최초의 인연이 되었다”라고 했는데, 후일의『사상계』를 생각하면 그것도 그것이지만, 이때의 교육과《등불》편집을 통하여 장준하의 민족의식과 논리가 체계화되었다고 이해하게 된다. 훈련반 교육에 피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참가했다면 몰라도, 그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훈련반 교육이 내실 있게 발전하도록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그러한 적극적 성품과 자세는 그 전에 이미 갖춰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신학도인 그로서 민족논리의 기초는 이때 정리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 광복군 간부 훈련반 교육을 마친 장준하는 일행 50여명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있는 중경으로 향했다. 이들 일행은 임시정부를 향해 멀고 험한 고난의 행군을 했다.『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제갈량의 고향인 남양을 지나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 입구의 노하구(老河口)에 도착했다.『삼국지연의』의 그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이 벌어진 적벽강이 흐르는 곳이었다. 중경 임시정부의 광복군 전방 파견대도 노하구에 있었다.

 

장준하 일행은 1945년 1월 6일 노하구를 떠나 다시 중경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일행은 파촉령에 대해서 귀가 닳도록 들었다. 해발 3천미터인 파촉령은 도보로 넘는 데만 열흘이 걸리고 일본군의 마포대(馬砲隊)도 그 산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험준한 지형 때문이다. 오죽하면 파촉잔도(巴蜀棧道)를 내었을까? 파촉잔도는 양자강 수로가 3협(三峽) 12봉 협곡 사이로 뚫린 구간으로 험산험로(險山險路)였다. 게다가 정상은 혹한 가운데 끝없는 대설원이 펼쳐졌다.

 

끝없는 험로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정상에 올랐으나, 그 다음은 그야말로 엄청난 설원답파(雪原踏破)를 해야 했다. 머리와 손과 발에서 감각이 사라지고 사지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칼바람이 전신을 엄습했다. 어디 한 군데 바람과 추위를 가려줄 만한 것이 없는 극한상황에서 장준하는 아내를 떠올렸다. 아내 김희숙이 환영 속에서 “야곱의 돌베게를 베고 있는 당신을 지금 꿈꾸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런 혹독한 고생 끝에 대망의 중경에 다다른 것은 1945년 1월 31일이었다. 서주의 쓰카다 연대를 탈출한 지 거의 6개월의 오랜 장정 끝에 장준하 일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당도했다. 2층과 단층의 벽돌 건물 두세채의 청사는 평지보다 높은 땅에 세워져 있었고, 청사 옥상에는 태극기가 펄럭였다. 태극기를 보는 순간 장준하는 벅차오르는 감격을 누를 길이 없었다. 이윽고 임시정부 청사 앞 계단에 백범(白凡) 김구(金九) 주석이 두루마기 차림으로 나타났다.

 

백범과 장준하의 첫 대면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말로만 듣던 백범이었으나 장준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장준하는 그때까지 백범을 일제에 충격을 준 홍구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의 배후 지도자인 것으로 미루어 강철 같고 태산 같은 인물로 상상했다. 그러나 중국식 두루마기를 입은 백범의 모습에서는 의열투사적 풍모가 전혀 풍기지 않았다. 투박할 만큼 검소한 옷차림에 검은 테 안경 속의 부드러운 눈빛과 엷은 미소. 백범은 높은 기개와 민족애를 몸 전체에서 뿜어내고 있었다. 민족의 지도자 백범을 찾아 장장 6천리 길, 6개월여의 대장정을 마치고 새로운 기항지에 당도한 장준하는 감격에 겨워 온 몸이 파도쳤지만 애써 참고 부동의 자세로 서 있었다.

 

저녁에는 임정 청사에서 장준하 일행을 위한 환영회가 열렸다. 국가주석 백범이 격려사를 할 때 일동은 숨을 죽여 경청했다. 백범은 장준하 일행이 일제의 폭압 밑에서도 굴하지 않고 머나먼 탈출에 성공한 것은 조국의 혼이 펄펄 살아 움직이고 잇는 증거라고 칭송했다. 장준하는 답사 대표로 나서 용솟음치는 감개를 억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국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태극기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애국가를 들을 수 있어 너무나 감회가 깊다는 말도 덧붙였다.

 

임정의 공식 환영회가 잇따라 열렸다. 각종 언론과 단체들이 이들의 뉴스를 전하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임정의 각 정파들은 학도병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기 위해 맹렬하게 움직였다. 장준하는 그것을 직감했다. 임정은 수립단계에서부터 구성이 복잡했고,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싸고도 의견이 백출했다. 여기에 지방색에 이르는 각종 분파적 요소들로 영일(寧日)이 없었다. 민족해방운동 진영이 똘똘 뭉쳐도 일제와의 대결에서 절대적 열세에 놓여 있거늘, 각종 분파작용으로 그나마의 힘마저 소진하고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7개의 정당·단체가 난립해 있었다. 이들 정당·단체가 경쟁적으로 학병 탈영자들을 상대로 교섭을 계속 벌이자, 장준하는 각 정당·사회단체의 환영회 제의를 일체 거절했다. 셋집을 얻어 정부청사로 쓰고 있는 형편에 정파의 수가 의자 숫자보다 많다는 사실에 애국청년 장준하는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중경시내의 한국인교포들이 전부 모이는 자리에 장준하가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 장준하는 국내 실정을 보고하여 좌중의 심금을 흔들고 난 뒤 돌연 노기에 찬 어조로 말했다. 중경에 있는 독립운동지사들에게 조그마한 보탬이라고 되고자 사경(死境)을 겪으면서 수천리를 걸어왔으나 지금은 중경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폭탄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장준하의 어조가 좀더 격렬하게 바뀌었다. 가능하다면 중경을 빨리 떠나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자신의 심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제가 만약 일본군에 다시 돌아간다면 꼭 그들의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본군 항공대에 입대하게 된다면 저는 중경 폭격을 지원하여 여기 임시정부의 청사에 폭탄을 투하하고 싶습니다. 임정이 이렇게 정당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분파 투쟁에만 매달리고 아까운 시간만 허비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장내는 공중폭격을 맞은 것처럼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1945년 4월 29일 장준하는 중경을 떠나 서안에 있던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었다. 이어서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대원이 되기 위해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

 

단기간의 훈련은 매우 힘들고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OSS 대원은 연합군의 총공세시 본국 침투를 위한 특수훈련을 받아야 했다. 대원들은 국내에 잠입하여 먼저 첩보활동을 벌이고, 다음으로 정보통신활동을 벌이며, 마지막으로 유격대를 조직하여 군사시설을 파괴한다는 목표를 세워놓았다. 이 3단계 공작이 성공하면 민병대를 조직하여 미국군의 상륙작전에 때맞춰 후방 교란활동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장준하를 비롯한 광복군 청년장병들은 도강술·사격술·암벽등반 등 게릴라 작전에 필요한 강도 높은 모든 훈련을 받았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훈련이었다.

 

광복군 제2지대 시절 장준하는《등불》을《제단》으로 바꾸어서 1호와 2호를 발간했다.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등불’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단’에 몸을 바치겠다는 순국에의 의지에서엿다. 애석한 것은 8·15광복 후《등불》다섯 권과《제단》두 권을 가지고 환국했으나 6·25남북전쟁 때 원본을 모두 잃어버려 장준하의 민족주의 사상을 자세히 탐구할 수 있는 자료가 사실상 없어졌다는 점이다.

 

마침내 7월 말 3개월간의 정규교육을 마친 장준하를 비롯한 제1기생 대원 50명은 한국광복군 소속 국내 잠입반을 편성했다. 그 명칭은 정진대(挺進隊)였다. 이 무렵 장준하는 고국의 부모와 아내에게 유서나 다름없는 일기와 함께《등불》과《제단》을 호수대로 한 권씩 챙겨 소포로 쌌다. 소포를 쌀 때 다음의 시구를 써서 꾸러미 속에 집어넣었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

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

 

그러나 광복군의 국내 침투계획은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 허망하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국왕 히로히토가 연합군에 대한 무조건 항복선언을 한 것이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중국 대륙에서의 모든 군사작전은 일시에 백지화되었다. 정진대를 국내에 잠입시켜 지하기반을 구축하려던 기도 역시 취소·변경되었다.

 

앞서 광복군 참모장 겸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 장군은 장준하가 배속된 정진대를 이끌고 서울로 향하는 미국군의 항공기에 편승하여 서해상공을 날았으나, ‘한국진입 중지’ 명령을 받고 회항했다. 사흘 뒤인 8월 18일 재진입 결정에 따라 여의도에 착륙했으나, 이번에는 일본군의 제지로 회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준하 일행은 분루(憤淚)를 삼키면서 서안으로 회귀했다. 백범과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 그리고 이범석이 심혈을 기울이고 장준하를 비롯한 정진대원들이 필사의 노력을 다했던 국내침투작전은 이로써 허무하게 무산되었다.

 

8·15 광복이 된 지 석 달하고도 1주일이 지난 1945년 11월 23일에 장준하는 임시정부 국가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수행비서 격이 되어 임정요인 1진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황량한 김포 벌판과 미국군 병사 20여명 뿐이었다. 미군정 당국은 임정요인의 입국사실을 국내에 일체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정요인들은 망명정부의 요인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조국에 귀환했을 뿐이었다.

 

백범 이하 임정요인들은 서대문의 경교장을 거처로 삼았다. 경교장에서 장준하가 맡은 일은 백범의 비서역할이었다. 백범을 만날 인사들을 챙기고 백범의 성명서와 기자회견문을 작성하는 등 해방정국의 숨가쁜 상황 속에서 장준하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백범은 장준하를 “장 목사”라고 불렀다. 장준하가 중경의 한 한인촌에서 ‘무자격’ 목회를 열자, 기독교도이던 백범이 농담 반으로 장 목사라 부르며 ‘안수’를 내려준 후 생긴 별칭이었다.

 

1947년 장준하는 경교장을 나와 정진대 지휘관이었던 이범석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이범석과의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해방정국에서의 이범석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연성대장으로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에 참전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신화를 창조하고,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기병대장과 광복군(光復軍) 제2지대장으로서 오로지 일제(日帝)를 구축(驅逐)하기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하던 독립군 대장 시절의 이범석이 아니었다. 그에게서도 한 정파의 우두머리 냄새가 났고, 조선민족청년단 역시 온갖 시정잡배들을 끌어모아 세력 키우기에 급급한 사정이었다. 장준하는 이범석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나, 그런 장준하의 태도에 이범석은 점차 탐탁잖은 기색을 보였다. 또 알고 보니 이범석은 경교장의 백범을 심복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에 별다른 기여를 한 바 없는 기회주의자 이승만(李承晩)을 추종했다.

 

이범석과 헤어진 뒤 장준하는 1948년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하여 6개월만에 졸업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지 18년 뒤인 1933년 한신대학에서는 장준하를 제1회 ‘한신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된 뒤 임정세력은 이승만의 탄압으로 완전히 몰락했고, 1949년에는 장준하가 가슴 깊이 존경하던 백범마저 암살되었다. 이어 민족의 최대비극인 6·25남북전쟁이 발발했다. 전쟁통에 장준하 일가는 많은 아픔을 겪었다. 부친이 인민군의 총격으로 절명하고 할아버지가 별세했다. 아우는 전란중에 실종되고 첫 딸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장준하는 ‘비상시형의 인물’이었다. 그의 행동주의 철학은 잡지발간으로 이어졌다. 임천 한광반에서의《등불》과 서안 OSS대원 시절의《제단》의 연장선에서 장준하는 1952년 월간지《사상》을 창간했다. 그러나《사상》은 단명으로 끝났고『사상계(思想界)』를 다시 창간했다.

 

《사상》과『사상계』는 ‘계(界)’란 한 글자가 더 있는 것만 달랐을 뿐 같은 몸체였다. 글씨까지도 오기석이 같은 서체로 썼다. 장준하는 전시의 피난지 부산에서《사상》을 창간할 때 백낙준(白樂濬)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 피난 정부의 문교부 장관이었던 백낙준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장준하와는 신성중학교 선후배간이었고, 같은 기독교도였다. 백낙준은 장관 직책을 맡았을 때 전쟁으로 파괴된 국민정신을 바로잡고 민족의 사상적 체계를 확립할 필요성을 절감해서 문교부 산하에 ‘국민사상연구원’을 만들어 장준하에게 참여를 요청했다. 장준하는 정치성을 배제한 그 기관에 참여하여 기관지《사상》을 발행했다.

 

《사상》의 내용과 취지는 장준하의 ‘편집후기’에 잘 나타나 있다. 민족의 역사가 험난한 고비를 넘기고 있던 당시, 시대적 고민과 과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세계사적 안목이 요구되며,《사상》은 그런 역사적 사명을 띠고 발행되었다는 것이다.《사상》의 내용은 따라서 다소 아카데믹하고 이념적인 것에 치중되었다.

 

1953년 4월 장준하는《사상》의 후신으로『사상계』를 창간했다. 장준하 혼자서 청탁·교정·제작일을 다 맡았다. 등짐꾼처럼 배본까지 맡아 했다. 하늘도 무심치 않아서였을까? 창간호는 서점에 깔리자마자 예상을 깨고 불티나게 팔렸다. 창간호 다음의 제2호는 발행부수도 늘렸다. 그때는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 시점이었다.『사상계』도《사상》시절의 순수한 교양지 차원에 머무를 수만은 없었다. 국내의 정치상황과 현실을 어떤 형태로든 수용하고 비판하는 종합지의 성격을 띠어야 했다.

 

『사상계』편집부는 1953년 11월 정부의 서울 환도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종로 네거리 종각 앞 한청빌딩 4층에 둥지를 틀었다. 편집위원 진용도 서서히 갖추었고 지면도 사회과학·교양·문학예술 등으로 확장했다. 정전 후의 황폐하고 절망적이던 풍토 속에서『사상계』는 새로운 영양분을 제공하면서 지적(知的) 저수지 역할을 했다. 젊은이들은 물론 지식인들이『사상계』란 지식시장에 몰려들었다.『사상계』는 이제 지식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급상품이 되었다.

 

1956년 장준하는 그의 생애에서 귀중한 사람을 만난다. 함석헌(咸錫憲) 목사와의 조우(遭遇)였다. 함석헌이『사상계』1월호에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제목의 글을 기고하고 난 뒤였다. 이어서 함석헌 목사와 윤형중(尹亨重) 신부 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유명한 지상논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고,『사상계』는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리면서 잡지부수를 엄청나게 끌어올렸다. 대학생이라면『사상계』를 끼고 다녀야 하는 풍조까지 생겼다.

 

1958년과 1959년 자유당 정권은 권력 말기적 폭압상을 보였다.『사상계』는 본격적으로 반독재투쟁·민주화운동의 정론지로서 모습을 갖추면서 진용도 이에 맞추어 개편했다.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들이『사상계』로 몰려들어 튼튼한 버팀목이 되었다. 안병욱(安秉煜)·김준엽(金俊燁)·조지훈(趙芝薰)·정병욱(鄭炳昱)·한우근(韓優劤)·현승종(玄勝鍾) 등 국내의 내노라하는 지식인들이 모두 한 차례 필진이나 편집위원으로『사상계』에 참여했다.

 

1958년은 광복 14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기념호인 8월호에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이 게재되었다.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을 통해 함석헌은 극우반공적 정신풍토에 폭탄을 던진 듯한 충격을 주었다. 이 글로 함석헌은 ‘20일간의 참선(구속)’을 강요당했고, 장준하는 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함석헌은 이 기고문에서 ‘미국의 꼭두각시 이승만’이란 표현을 거침없이 내뱉었고,『사상계』는 그것을 활자화해서 세상에 배포했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구속기사가 신문에 나가자『사상계』는 전국 서점가에서 동이 나버렸다.

 

1958년 12월 24일 ‘보안법 파동’이 일어나자 장준하는 1959년 2월호애서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권두언을 백지로 해서 냈다. 제목만은 넣었다. ‘무엇을 말하랴?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였다. 자유당 정권은『사상계』를 눈엣가시로 여겼다.『사상계』는 자유당 정권의 서슬시퍼런 기색에 굽히지 않고 이승만의 비정(秕政)을 날카롭고 거침없이 비판하고 성토했다.

 

1960년 제4대 정·부통령선거 부정 당시『사상계』는 이승만의 하야(下野)와 정권교체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다른 언론에서 언감생심(焉敢生心)할 대담한 주장이었다. 4·19민중혁명 당시 시위대가 화신백화점 건너편 한청빌딩에 걸린『사상계』의 깃발을 올려다보며 환호성을 올린 것은『사상계』의 역할에 대한 시위대의 공감 때문이었다. 4·25대학교수시위 당시 교수들 가운데는『사상계』‘동인’이나 집필자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사상계사는 서울에 있는 각 대학교수들의 집합소 및 연락처가 되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교수사랑방’이었다.

 

4·19민중혁명 당시『사상계』가 일반 국민에게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가는 그 부수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때 우리나라의 양대 일간지던《동아일보》·《조선일보》의 발행부수는 8만부선에 머물렀다. 그러나 4·19민중혁명을 전후해『사상계』의 발행부수는 최고 9만 7천부에 달했다. 월간잡지와 일간지의 부수를 큰 폭으로 앞질렀으니 그 유명세를 알 만하다. 또 2005년 제60회 광복절 기념행사를 맞아『교수신문』에서 100여명의 대학교수에게 설문지를 보내 조사한 바, 해방 후 우리 지성사에서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친 시사지로『사상계』가 1위를 차지한 것만 봐도,『사상계』가 우리나라 지식인 사이에서 차지한 비중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4·19민중혁명 후 장면(張勉) 정권이 들어서자 장면 정권에서는 야심찬 국토건설계획을 세우고 국토건설본부(國土建設本部)를 설치했다. 장준하는 몇 차례의 고사 끝에 기획부장 역을 맡으면서 장면 국무총리가 겸임한 본부장 역할까지 했다. 국토건설본부에서 장준하가 맨 먼저 한 일은 대학졸업자 2천명을 국토건설요원으로 공개채용한 일이었다. 응모자 가운데는 5·16정변에 가담하고 국무총리와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지냈던 김종필(金鍾泌) 중령의 이력서도 있었다. 그중 선발된 사람들은 일정기간 훈련을 거친 뒤 건설특공대원으로 전국 농어촌에 배치되었다. 장준하는 이들을 다시 불러들여 중앙부서에 기용할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전국의 건설사업 현황을 파악하게 한 뒤 지방의 군수자리를 모두 이들 건설정예요원으로 대체할 계획을 세웟다.

 

장준하가 국토건설본부에 있었던 기간은 아주 짧다. 사업의 첫발을 막 떼려는 순간 5·16군사쿠데타가 발발했다. 건설본부는 고스란히 군사혁명위원회에 접수되었다. 그러나 군부는 전국 깡패 소탕작전의 일환으로 불량배를 줄줄이 엮어 전국의 건설현장에 투입해 강제노역을 시켰다. 장준하가 국민운동 차원에서 벌이려던 건설계획과는 전혀 딴판의 길로 가버린 것이다.

 

5·16쿠데타가 났을 때 장준하는 처음에는 쿠데타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혁명공약’에 따른 민정이양 쪽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사상계』1961년 7월호에 권두언으로 “긴급을 요하는 혁명과업 완수와 민주정치에로의 복귀”를 주장했고, 함석헌의「5·16정변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게재했다. 함석헌은 이 글을 통해 4·19민중혁명과 5·16쿠데타를 비교하면서 4·19민중혁명 때는 국민들의 감격이 있었지만 5·16쿠데타에서는 그것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4·19민중혁명은 대낮에 했지만 5·16쿠데타는 밤중에 몰래 했고, 그만큼 정신적으로도 낮다면서 혁명은 민중의 뜻에 의해 하는 것이지 군인의 권력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비난했다. 이들 기사로 장준하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 준장을 만나 기사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했다.

 

1962년 3월 16일 장준하는 일찍이 한 번도 정치에 참여해본 적이 없는데도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인 4천 3백여명의 명단 안에 들어 발이 묶였다. ‘부패언론인’이라는 명목이었다.『사상계』는 좀더 직설적으로 군정(軍政)에 대한 비판을 강화했다. 7월호의 권두언은「군정의 영원한 종말을 위하여」를 제목으로 하면서 특집으로 다루었다. 쿠데타정권은 ‘반품’으로『사상계』의 고사작전에 들어갔다.

 

공작적 탄압은 1965년까지 3년간 계속되었다. 장준하로서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버텨야 했다. 바로 그때 아시아지역의 노벨상격이었던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화부문 수상자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장준하가 선정되었다는 전문이 날아왔다. ‘하늘이 보내 준 지원군’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장준하에게 막사이사이상을 준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이다”고 수군거렸다.

 

『사상계』가 투데타세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박정희 대장이 번의(飜意)에 번의를 거듭하던 때였다. 장준하는『사상계』1963년 4월호에 군정반대 특집편을 실었다. 초판 5만부가 일주일만에 매진되었다. 7월호는「군정의 영원한 종말을 위하여」를 특집으로 다루는 등 군정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나 매진되었던『사상계』는 군부의 공작과 억압에 의해 ‘반품’으로 되돌아왔다.『사상계』는 회복하기 어려운 빚더미에 가위눌려야 했다.

 

장준하와 군부의 대결은 김종필과 장준하의 민족주의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 서울시내 대학에서는 두 사람을 초청하여 강연을 여는 일이 많았다. 1963년 11월 6일자 한 신문에 따르면 장준하는 “요즘 민족주의를 팔아 자기옹호나 자기변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무리를 경계해야 한다” 하고, 김종필이 주장하는 민족주의는 “귀한 외화를 써가면서 사치한 외국호텔(워커힐) 창가에서 향수에 젖어 흐르는 눈물 같은 것”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반면 장준하 자신은 중국 광야에서 광복군에 입대해 국내진공작전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고된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춥고 배고프고 발톱이 빠지도록 조국을 찾아 해매는 가운데 뱃속으로 체험한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김종필 등이 민조(民度)가 높아야 민주정치가 가능하다고 하면서 강력한 지도자 운운하는 것은 건방진 수작이며, 민도가 높으면서도 우리처럼 못사는 민족은 온 세계에 없다고 질타했다. 박정희·박종규·김종필 등은 이때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고, 이 ‘민족적’이란 관사(冠詞)가 붙은 ‘민족주의’를 둘러싸고 한창 논쟁이 이어졌다.

 

1964년 3월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거세게 일어났을 때 장준하와『사상계』는 그 선봉에 섰다.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던 군인이 침략자이자 전범자 집단인 일본 자민당과 굴욕적 매국협상을 벌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사상계』는 긴급 중간호 4월호를 내어「한일회담의 제문제」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이 증간호는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의 텍스트가 되었다. 

 

1964년 6월 3일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발동하자 장준하는 은신했다. 계엄령이 해제된 뒤 모습을 나타낸 장준하는 다시 전국 순회강연에 나섰으며, 1965년 2월에「신(新) 을사조약의 해부」를 특집으로 다시 긴급 증간호를 내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제2의 텍스트가 되었다.

 

사상계사는 또 다시 세무사찰을 받아 빈사상태에 빠져들었고, 장준하는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다음은 장준하의 후일담이다.

 

“『사상계』도 나도 생명줄이 끈질겨서 비록 초라한 모습으로 병원 침상에서 사경을 헤매며 투병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지만,『사상계』만은 어쨌든 외관상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양 매달 그 위용을 나타냈다.”

 

1965년에도 장준하와『사상계』는 한일굴욕회담 반대의 전진기지였다. 그해 3월 지독한 세무사찰을 받고 5월에는 시금포탈에 추징벌과금이 붙은 고지서와 통고서를 받았다. 여름부터『사상계』의 원고청탁에 대한 기피현상이 나타났고, 편집위원들에게는 ‘정치교수’란 낙인이 찍혔다. 어느 때는 두 달째『사상계』가 나오지 못하는가 하면, 때로는 면수를 몇십 쪽으로 줄인 납본용『사상계』를 만들기도 했다. 납본을 하지 않으면 폐간처분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장준하는 사실상 정치계에 뛰어들었고,『사상계』는 재기불능 상태에서 겨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장준하는 1964년 3월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위원회의 초청연사로 전국을 누비면서 수십 차례 강연했을 때 이미 정계에 투신했는지 모른다. 아니 박정희 정권이 그를 정치권의 투사로 몰라냈다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할지 모르겠다.

 

1966년 세칭 ‘한비(韓肥) 사카린 밀수(密輸)사건’이 벌어졌다. 재벌 기업 삼성 계열사에서 ‘한국비료(韓國肥料)’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일본의 전범 기업 미쓰이[三井]으로부터 기계를 들여오는 대가로 대량의 사카린을 건설용 장비로 위장해 밀수한 사건이었다. 당시 삼성은 건설용 장비가 있어야 했고, 박정희 정권은 ‘검은돈’이 필요했다. 집권층과 재벌의 정경유착(政經癒着)관계는 일찍이 장준하가 우려했던 바였다. 재벌이 무엇을 수입하면 그 이권에 상응하는 정치자금을 상납해야 했다. 외자(外資)를 도입할 때도 일정액을 집권층에 바쳐야 했다. 그런 먹이사슬 관계에서 한국비료는 박정희 정권에게 바친 리베이트의 반대급부를 챙기기 위해 사카린을 밀수했던 것이다. 사카린은 폭리(暴利)가 보장되는 품목이었다.

 

야당과 대학생들이 전국적 규탄대회를 열었다. 장준하는 1966년 10월 민중당이 주최한 ‘특정재벌 밀수 진상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에 연사로 참석하여 재벌총수와 이른바 ‘고위층’ 사이에 오고 간 밀담(密談)의 내용을 폭로하면서 “우리나라의 밀수왕초는 바로 박정희란 사람입니다”라고 직격탄을 쏘았다. 뿐만 아니라 장준하는 월남파병(越南派兵) 동의안과 관련하여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한국청년들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장준하는 이 연설로 즉각 체포되었으나, 적용할 죄목이 마땅치 않아서인지 두 달만에 풀려났다.

 

1967년 장준하는 야당 대통령선거 후보 단일화를 위해 윤보선(尹潽善)·백낙준(白樂濬)·이범석(李範奭)·유진오(兪鎭午)의 4자회담을 주선했다. 장준하는 4자회담에서 대국적 타협을 만들어내 민중당과 신한당의 통합을 이끌어냈고, 통합야당의 당수에 유진오, 대선후보에 윤보선을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신민당이 출범하고, 윤보선이 대선후보가 되었다. 장준하는 이를 계기로 신민당에 동참했으니, 장준하의 본격적인 정치인생이 개막된 것이다.

 

장준하는 신민당의 대선후보 윤보선의 지원유세에서 박정희에 대해 과거 어느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대담하고 직설적으로 공격했다.

 

“박정희 씨는 일본의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군대의 장교가 되어 우리의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누었으니, 이런 인물이 우리나라의 대통령으로 있는 것은 우리 국가와 민족의 수치입니다.”

 

“박정희 씨는 국민을 물건으로 취급하여 우리나라 청년들을 월남에 팔아먹고 있고, 그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씨는 과거 공산주의 집단인 남로당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남한에서 지하공작 활동을 한 사람이며, 조직원 동료를 팔아 희생시키면서 자기 한 목숨을 산 사람입니다.”

 

대통령선거 직후 장준하는 구속되었다. 재판담당 판사가 판시한 바와 같이 장준하는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명예훼손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격까지도 추락”시키는 비난을 서슴없이 감행했다. 그 시절 박정희를 이렇게 정면에서 신랄하게 비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장준하는 선거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감옥에 수감되었으니 입에 재갈을 물린 꼴이었다.

 

1967년 6월 8일에 악명 높은 ‘6·8국회의원 총선 부정선거’가 있었다. 장준하는 구속상태에서 동대문 을구에서 출마했는데, 강력한 야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하였다. 여당은 이 선거에서 막대한 선심·물량공세를 퍼부었다. 야당은 도회지에서 간신히 당선되는 수준이었다. ‘6·8망국선거’아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박정희가 망국선서를 서슴지 않은 것은 3선개헌을 위한 전초작업 때문이었다.

 

장준하는 국회의원 신분이 되면서『사상계』에서 손을 떼야 했다. 혈육의 정을 칼로 베는 아픔 속에서 그는『사상계』를 동인의 한 사람이던 부완혁(夫琓爀)에게 넘겼다.

 

1969년 9월 14일 박정희가 국회 제3별관에서 3선개헌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넘어서고 말았고, 박정희는 영구집권의 길목에 들어섰다. 장준하는 재야세력을 주축으로 ‘3선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개헌안은 물리적 힘으로 통과되고 말았다.

 

3선개헌 반대투쟁 후 1970년 장준하는 그를 따르던 6·3학생운동권 젊은이들과 ‘민족학교’를 내걸고 새로운 형태의 민중운동을 전개했다. 반독재투쟁을 위해서는 정치인이 아닌 노동자·농민·서민 등 대중과 학생 등 기층세대를 결속하여 민주주의와 민족문제를 논의하고 실천하는 지성의 유격전이 필요하다는 각성에서였다. 

 

1971년에는 김재준·천관우·이병린을 대표위원으로 하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해 5월에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 장준하는 정당 배경 없이 홀로 출마했다가 낙선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그는 이때부터 한동안 안국동 윤보선의 캠프에 드나들었다. 재야세력에서는 장준하를 박정희의 ‘천적’으로 보고 대통령선거 출마를 권유했다. 일찍이 1966년 야당통합돠 대선후보 단일화를 위한 4자회담 때에 장준하를 일컬어 ‘재야의 대통령’이란 말이 회자된 적이 있었지만, 그는 한사코 출마를 사양했다.

 

1971년에 장준하는 자신의 학병 탈출과 광복군 입대시절을 회고하는『돌베개』를 편찬하였다.『돌베개』에서 장준하는 현대사의 증언(證言)임을 자임하면서, 학병들의 저항정신과 임정 선배들의 독립운동, 그리고 항일투쟁의 이면사 등을 곁들였다.

 

장준하는 가짜 광복군이 해방 이후 군사독재정권을 구축했기 때문에 이 증언을 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특히 민족해방운동의 측면적 증언은 바로 만주국군 패잔병이었다가 뒤늦게 임시정부 광복군 대열에 합류한 기회주의자들의 비열한 작태를 역사 앞에 밝히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이는 바로 박정희를 비롯한 일본군 소속 한국 군인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장준하가 “순국선열의 주검 위에서 칼을 든 자들을 군림시켰다”라고 개탄한 것은 “일본군 패잔병에서 광복군으로 급속하게 변신한 자들이 군사독재정권을 구축하여 순국선열들을 욕되게 하고” 있음을 고발한 것이다. 장준하는 또『돌베개』를 순국선열 앞에 ‘바람의 묘비’로 바치겠다고 했다. 순국선열 앞에서 반민족·반민주 세력에 대한 투쟁을 맹세한 숭고하고 장엄한 의식이었다.

 

해가 바뀌어 1972년 7월 4일의 일이다. 낮방송이 없던 시절 중앙정보부장 이후락(李厚洛)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특별방송에 모습을 나타내고는 입을 뗐다.

 

“대통령 각하의 명을 받아 저는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전 국민은 순간 경악했다. 이후락은 이어서 자기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고 했으며, 7개 항복으로 된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시간 북한 측에서도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공동성명이 나가자 온 나라가 환호로 들끓었다. 7·4공동성명이 나오자 장준하는 성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장준하는 7·4공동성명의 감격 속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그는 이로써 몽양 여운형과 백범 김구가 걸어간 민족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통일운동의 거목(巨木)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장준하는 이제 분단체제의 병리를 꿰뚫어보는 예언가적 지성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1972년 9월호《씨알의 소리》에 실린〈민족주의자의 길〉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장준하는 이렇게 썼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은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평등·자유·번영·복지, 이 모든 것들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 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의 통일은 이런 것이며, 그렇지 않고는 종국적으로 실현되지도 않을 것이다.〃

 

7·4공동성명을 계기로 장준하는 민족문제에 획기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무엇보다 분단체제를 인식하는 데 어느 누구보다 통찰력이 뛰어났다. 민족주의자로의 길이 몽양에게 좌우합작이었고 백범에게 남북협상이었다면, 장준하에게는 분단체제의 극복 바로 그것이었다.

 

대외적 인식에서도 그런 변화의 조짐을 볼 수 있다. 장준하는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공의 대립·대결의 완화, 소련과 중공의 동맹과 대립의 과정은 근본적으로 한반도 주변 정세를 바꾸어 놓았다고 보고, 외세에 의해 분열이 강요됐던 부정적 조건이 변화한 이상 우리도 바뀌어야 한다고 시대의 징표를 읽었다. 이것은 장준하의 민족관과 통일관이 크게 수정되고, 마침내 장준하 스스로 통일운동의 제일선에 나설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또 민족통일의 주체로 어느 누구도 아닌 민중을 내세웠다. 그는 절대다수의 민중만이 통일을 진정으로 원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민중이야말로 통일하지 않고는 빈곤과 부자유 등 모든 현실적 고통을 해결할 수 없으므로 통일문제는 민중 스스로 주도적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준하는 이들 민중세력과 반외세민족세력,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 모든 반독재세력으로 민족공동이상을 개발하고 실천할 새로운 민족세력 형성을 제창했다. 이들은 곧 민족화해의 주체이고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세력이었다.

 

장준하는 또 통일에는 자기희생과 헌신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나의 사상, 나의 지위, 나의 명예가 진실로 민족통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 분단체제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과감하게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어서 “하나의 조국은 두 개의 국가 때문에 피해받는 민중의 조국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두 개의 국가란 그러한 상황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몇 사람의 것이요, 민중의 조국은 끝까지 하나”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7·4공동성명은 이른바 ‘10월 유신’을 위한 화려한 전주곡에 불과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영구집권의 길로 들어섰다. 장준하는 일생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으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위험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맞받아칠 결의를 다졌다.

 

1973년 박정희 정권이 6·23선언을 발표하자 장준하는 이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박정희는 선언에서 남한과 북한이 유엔 동시가입을 해도 좋다고 제의햇지만, 장준하는〈민족외교의 나아갈 길〉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박정희의 선언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또 다시 냉혹한 국제 권력정치 속에 빠뜨리려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으로 분단이 유엔을 통해 합법화될 수 있어 분단을 고착시킬 뿐이라고 질타한 것이었다.

 

 

민족주의자로서 장준하에게 나타난 또 다른 변화는 한국 현대사의 재해석이었다. ‘해방 후 3년사(三年史)’에 대한《돌베개》에서의 해석과는 180도로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장준하는 1973년에 쓴 미발표 유고「민족통일전략의 현 단계」에서 자신을 민족의 역사라는 비판적 도마 위에 올려놓고 스스로를 치는 심정으로 해방공간 3년을 뒤둘아보았다.

 

장준하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민족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으려는 기민한 대책이며 몽양을 비롯한 국내 항일세력이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획득한 전진적 확신의 표현으로 보았다. 건준에 송진우 일파가 동의하지 못한 것은 일제 식민지체제 아래 편입되었던 지주·친일세력으로서의 도덕적 파경(破鏡)의 표시라고 속내를 꿰뚫었다.

 

백범의 임정에 대해서 장준하는 이승만을 위시한 보수우익세력을 일찍이 극복하지 못했고, 반탁운동을 이승만의 민족분열 책동의 명분으로 연결해 주었으며, 새로운 민족통일국가의 이념을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한 점을 한계로 지적했다. 장준하는 백범 노선의 실패원인으로 친일·민족반역자의 청산, 이승만 탄핵운동으로서의 대중적 역할을 확산하지 못한 점, 이승만 탄핵운동의 방법과 시기를 놓친 점 등을 지적했다. 당시 어느 전문연구자도 미처 깨닫지 못한 탁견(卓見)이었다. 장준하는 몽양과 우사 김규식의 좌우합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백범의 통일운동이 가장 순결하고 애국적인 길이엇다고 확신했다.

 

1973년에 장준하는 주로 재야 민주세력의 연대·연합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이 시기에 장준하가 주로 만난 사람은 김재준 목사,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목사, 지학순 주교, 법정 스님, 이태영 변호사, 강원용 목사, 계훈제 교사, 통일운동가 백기완과 홍남순 등이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24일 YMCA회관에서 전격적으로 개헌청원운동본부가 발족되고, ‘헌법개정 100만인 서명운동’의 서명서를 장준하가 읽었다. 박정희의 10월 유신선포 이후 최초로 나타난 조직적이고 평화적인 저항운동이었다.

 

박정희는 이에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이후 긴급조치는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기까지 9호까지 발동되었다. 이른바 ‘긴조시대’였다. 장준하는 백기완과 함께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15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장준하의 옥살이는 1974년 12월 말기에 중지되었다. 협심증과 간경화 증세로 수형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편『사상계』는 1967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인이 장준하에서 부완혁으로 바뀌었다. 그 후『사상계』는 모진 탄압과 당국의 고사작전으로 피멍이 든 채 부채와 판매부진으로 안간힘을 쓰던 중 1970년 5월호에 저항시인 김지하의「오적」을 실어 세상을 발칵 뒤집었다. 이 사건으로 장준하의 분신『사상계』는 마침내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1974년 연말에 석방된 장준하는 병상에서도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975년 1월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 공개했다. 중병에 걸린 몸으로 병원을 나온 장준하는 각계 재야지도자는 물론 김영삼·김대중·양일동 등 정치지도자들과 만나 민주화운동 세력의 통합에 전력을 다했다.

 

이 무렵 장준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마음으로 민족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뚫고 나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비장하게 결심했다. 함석헌이 장준하 추도식에서 자신은 그때 하루도 장준하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할 만큼 장준하는 당시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는 듯 순교자적 비장함을 품고 살았다.

 

장준하는 산행(山行)의 베테랑이었다. 한번은 속초에 갔다가 설악산을 넘어 서울의 도봉산까지 산길로만 이틀 만에 답파하기도 했다. 그런데 운명의 그날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서울 시계를 떠나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계곡으로 갔다가 약사봉 계곡 암벽 아래 추락사한 듯한 사체로 발견되었다. 향년 57세였다. 장준하는 평소에도 지인들과 더불어 산행을 즐겼으나 사고 당일에 호림산악회의 산행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는지, 아니면 호림산악회장 김용덕이나 최후 동행인 김용환의 강권에 의해 따라나선 것인지 목격자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장준하가 사망한 그날의 상황을 돌이켜보자. 1975년 8월 17일에 약사계곡으로 향하는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들어선다. 장준하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40분 가량 산을 오르던 이들은 한 계곡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호림산악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밥을 짓는 사이에 장준하가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장준하가 산속으로 사라진지 얼마 되지 않아 일행 중 한 명인 김용환이 그를 따라나섰다. 갑작스런 비보가 들려온 것은 회원들이 막 점심을 먹으려던 찰나였다고 한다. 김용환이 급하게 뛰어오면서 장준하가 낙반(落磐)했다고 일행에게 긴박하게 알렸다. 사고 직후인 이때에 장준하의 시신을 발견한 산악회원들의 진술은 유가족들의 진술과 상당부분 일치했다. 눈에 띄는 외상(外傷)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일행 중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장준하의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격자는 장준하의 선거운동을 도와주며 오랜 인연을 맺은 지인 김용환이었다. 그는 장준하가 가파른 벼랑 위에서 소나무에 의지해 그만 추락했다고 설명했다. 장준하가 추락했다는 벼랑은 높이는 대략 14미터, 경사는 70도가 넘는 지형으로 대단히 가파른 언덕이었다. 현장을 살펴본 회원들은 사고가 벌어진 것이 무리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당시 시신을 검안했던 의사는 두개골 오른쪽에 생긴 함몰골절이 직접적인 사망원인으로 추정된다는 소견을 밝혔다. 미끄러운 절벽 위에서 추락해서 머리를 부딪혀 사망에 이르렀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실족사란 그의 사인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2012년 여름 비 피해로 파주시 천주교 나사렛공동묘원의 장준하 묘소 뒤편 석축이 붕괴되면서 이곳에 안장된 유골을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으로 이장하였다. 이장시 유골을 검시한 결과, 머리 뒤쪽에서 지름 5~6cm 크기의 원형으로 함몰된 구멍과 금이 간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는 사고 당시 검안의사가 확인하고, 이후 재조사 과정에서도 결정적 사인으로 지적된 두개골 함몰골절과 일치하므로 엄밀한 의미로 보면 새로운 발견은 아니었다. 그러나 추락사한 사람의 유골이라고 보기에는 골절부분이 너무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이 미스터리였다.

 

유골에 생긴 골절은 딱 두 군데, 두개골과 엉덩이뼈에 생긴 골절뿐이었다. 전문가들은 높은 벼랑에서 추락해 죽은 사람의 유골이라고 하기엔 장준하의 경우는 너무 비상식적이고 과학적으로도 매우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망자가 추락하면서 머리와 엉덩이 뼈에 부러질 정도의 충격을 받게 될 경우에 머리를 지지하고 있는 목뼈와 지면에 닿는 어깨뼈, 그리고 척추와 갈비뼈에 동시에 골절이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사망 당시 장준하의 나이를 감안하면 다른 뼈는 모두 멀쩡한데 두개골과 엉덩이뼈만 부러졌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함몰된 듯한 두개골의 골절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 골절은 마치 도장을 찍어놓은 것처럼 테두리가 너무 뚜렷한 원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통상 추락할 때 생기는 골절의 모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추락사한 사망자의 두개골에서 생기는 골절은 금이 가는 부위가 사방으로 퍼지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 추락할 때 받는 충격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삶은 달걀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달걀을 떨어뜨리면 지면에 닿는 접촉면에서부터 그 주위로 넓게 금이 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추락할 때 장준하의 유골처럼 선명하에 원형으로 금이 가는 경우는 드물다는 얘기이다. 사실 장준하 사망 당시 추락사로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두부 함몰골절 외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다는 점 때문에《동아일보》의 장봉진 기자가 타살 의혹을 제기했다가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일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장준하가 추락사했다는 실제 산악 지형, 높이 14미터에 경사도 75도의 이 벼랑에서 구르거나 어딘가에 부딪치지 않고 반듯하게 누운 자세에서 추락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지난 2004년에 최형연 홍익대학교 기계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이 벼랑을 무대로 추락실험을 진행했다. 토목기사가 직접 측량한 지형정보를 입력하고 사망 당시 장준하와 똑같은 인체 모델도 만들어냈다. 먼저 사람과 장기의 형태가 비슷한 돼지를 이용해서 추락실험을 실시했는데 시뮬레이션으로 예상한 결과와 실제 실험이 거의 흡사하다는 데이터를 손에 넣었다. 목격자 김용환의 증언대로 장준하가 소나무를 붙잡고 추락했다는 가정하에 시뮬레이션을 실시한 결과 무려 스물세차례나 구르고 부딪쳤다. 머리는 물론 팔꿈치와 허리, 등과 무릎 및 발목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추락의 자세는 절벽을 마주보고 추락하는 경우, 절벽에 등을 대고 추락하는 경우를 포함해 모두 열두가지로 분류됐는데, 장준하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에 의해 누운 자세로 던져져서 떨어지는 자세도 여기에 포함돼 있었다. 그 결과, 이 모든 경우 머리에만 세 번 이상의 충격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장준하의 유골에서 두개골과 엉덩이 뼈 부분의 골절만 있었고 나머지 부위의 뼈는 손상이 없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봤을 때 결코 실족추락이 장준하의 사망 원인으로 작용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낸 것이다.

 

SBS-TV『그것이 알고 싶다』제작진은 편견을 배제하기 위해 장준하에 대한 일체의 정보를 주지 않고 오로지 뼈와 사고 현장의 지형만을 제공한 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에릭 바틀링크 법의학과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바틀링크 교수는 장준하의 유골이 추락사한 경우로 보기에는 매우 독특한 사례라는 설명과 함께 만약 장준하가 추락사한 게 맞다면 의식이 없거나, 독극물에 중독되어 이미 죽은 상태에서 수평으로 추락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실제 당시 장준하의 사체를 검안했던 조철구 박사는 오른쪽 팔과 엉덩이 부분에 주사자국을 발견했다는 증언을 했던 바 있다.

 

장준하가 추락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목격자 김용환의 진술에 의하면 사고 당일 오전 11시 30분 약사봉 계곡 입구에 도착했고 날이 더우니 오늘은 계곡에서 놀다 가자며 짐을 푼 시각이 12시경의 일이었다. 장준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이 모습이 일행이 살아있는 장준하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김용환이 뒤를 따랐다. 10분 후 등산로 한켠에서 김용환은 장준하를 만났다. 이때에 장준하는 혼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명의 무장한 군인은 김용환을 제외하고 장준하를 본 유일한 목격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 두 명의 군인이 누구였는지는 사고 이후 어디에서도 확인된 바 없었다.

 

목격자 김용환의 진술에 따르면 여기서부터 장준하와 김용환 두 사람의 등반이 시작된다. 40분간 등반하던 두 사람은 정상을 조금 지난 지점에서 오후 12시 50분경에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다. 다시 하산을 시작해서 문제의 벼랑에 도착한 것이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의 일이다. 목격자 김용환에 따르면 장준하는 김용환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사코 가파른 벼랑을 통해 하산을 시도했다고 한다. 평소 장준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김용환은 장준하가 소나무를 붙잡고 내려오다가 추락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한순간이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소나무의 존재는 장준하가 어떻게 추락했는지 추정해볼 수 있는 소중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김용환은 1988년 포천경찰서 재조사에서 갑자기 “나는 장준하가 실족사할 때에 소나무를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 자세히 보지 못했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게다가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당시에는 “소나무가 휘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소나무가 있다는 것을 지금껏 한 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75년 장준하의 장례식장에서 녹음된 김용환의 육성에는 분명히 장준하가 추락하기 직전에 소나무를 잡았다고 진술했다.

 

2003년에 출범한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제2기 장준하 사망 담당 조사관이었던 고상만은 2012년 9월에 방송된《딴지일보》인터넷 팟캐스트 라디오 시사토크『나는 꼼수다』「봉주19회」에 출연해 “조사관이 생각하는 이 사건의 진실과 유족이 바라본 진실, 또 이 사건을 전해들은 진실이 제각각 다 달라서 진상규명불능 판정을 내렸다”고 회고했다. 장준하와 김용환이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선거 때였다고 한다. 그러나 1971년 이후부터 김용환은 장준하 곁을 떠났고, 사고 당일인 1975년 8월 17일까지 약 4년간 김용환의 행적은 오리무중이다.

 

고상만은 여러 차례 번복되는 김용환의 진술과 전문산악인들까지 동원한 사고현장에 대한 답사, 당시 호림산악회원들의 증언을 종합해본 결과 사고 당일 김용환이 장준하와 함께 등반을 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판단했다. 김용환의 주장에 따르면 그와 장준하는 약 497미터의 산자락에서 제대로 된 등산로도 없는 길을 따라 약 40여분만에 정상을 넘었고, 다시 10여분만에 실족지점인 계곡 위쪽에 도착한 셈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하산길로 택했다는 장소는 수직에 가까운 벼랑이었다. 20년 이상 경력의 전문산악인들조차 쩔쩔 맬 정도로 아찔한 지형, 한눈에도 위험천만한 이 벼랑을 과연 장준하는 하산길로 고집했었을까? 더구나 장준하가 추락하자마자 아무 장비도 없이 그것도 등산화가 아닌 구두를 착용한 상태에서 한달음에 내려왔다는 김용환, ‘스파이더맨’도 아닌 이상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김용환은 산악회원들과 함께 장준하의 시신을 수습한 후 가까운 이동파출소로 가서 장준하의 추락사고를 신고하고 포천경찰서로 안내되어 하룻밤을 보낸 뒤 의정부지청에 가서 조사를 받았으며 장준하의 아내 김희숙이 신원보증을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위가 1975년 당시 이동파출소에 근무했던 경찰관들을 찾아 조사한 결과 김용환이 파출소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과 의정부지청의 서돈양 검사에 의해 18일 포천경찰서에 김용환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건 이후 12시간 동안의 김용환 행적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김용환이 김희숙으로부터 신원보증을 받았다는 진술도 거짓말임을 확인했다.

 

또 고상만은『나는 꼼수다』「봉주19회」를 통해 1975년 8월 17일 오후 3시경 장준하의 자택에 한 통의 괴전화가 걸려왔는데, 당시 열여덟살이던 장준하의 막내아들 장호준이 그 전화를 받았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가 “장준하 선생이 포천 약사봉에서 부상을 입었으므로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야 이송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는 일화를 전했다. 고상만은 당시 그 전화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 이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열쇠하고 판단하여 중앙정보부가 장준하를 사찰했던 문건을 일일이 확인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전화를 건 사람이 김용환이라는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장준하의 사망 원인이 절대 실족추락일 수가 없으며 타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김용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진상규명위의 조사를 받으며 계속 거짓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고상만은 진상규명위의 조사 당시 기무사령부가 장준하에 관련한 자료 제출 요구에 대해 단 한 장의 문서도 협조하지 않았다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 나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권력은 신문이나 TV 뉴스에 나오는 그들이 아니라 어느 곳에도 노출되지 않고 우리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아무도 알기 어려운 은밀한 집단이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장준하 사망에 대한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요구했다.

 

정경모는 1980년대에 많이 읽힌『찢겨진 산하』에서 해방 후의 대표적 민족주의자로 몽양 여운형·백범 김구·장준하를 꼽고, 그 반대의 인물로 이승만과 박정희를 지적했다. 정경모의 평가대로라면 반민족적인 인물들은 권력의 자리에 올라 독재정권을 유지하려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 자신의 천수를 다 누리지 못했다. 망명과 피살로 얼룩진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몽양과 백범, 장준하 역시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다. 한국 현대사의 암영(暗影)을 보여주는 것이다. 

 

몽양·백범·장준하에게는 타계 1, 2년 전부터 죽음의 신이 끊일 새 없이 어른거렸다. 분단이 눈앞에 닥쳤을 때 몽양은 사신(死神)이 곧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백범이 살아남기에는 이승만의 반공·분단국가가 너무 극우 이데올로기로 색맹(色盲)이 되어 있었다. 함석헌이 매일 장준하 앞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생각했다고 했지만, 장준하 역시 매일을 종말론적으로 살았다.

 

장준하는 직관적 인물이었으며, 불의에 참지 못하는 격정적 파토스(Pathos)의 의인이었다. 장준하는 어려운 시절을 적당히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었다. 지조·순결··헌신·겸손·고결·치열·인내·결단 같은 단어가 어울리는 예언가적 지성이었다. 학병탈출과『사상계』시절을 지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를 통해 그는 박정희 타도 투쟁과 민주화운동의 가장 완강한 최전선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망하기까지의 3년 동안 함석헌과 함께 분단체제의 극복과 통일운동을 민족의 최대 어젠다로 제기한 것이다. 이 시기에 장준하가 발표한「민족주의자의 길」과「민족통일전략의 현 단계」는 우리의 통일운동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탁월한 통찰의 결과였다.

 

장준하가 걸었던 민주화와 민족통일에의 길을 그의 사후 동갑친구 문익환도 걸었다. 장준하의 그 길을 잇기 위해 민주화·자주화·민족통일운동에 뛰어들었던 문익환도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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