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57년 생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57년의 짧지도 길지도 않는 생애를 오로지 반일언론운동(反日言論運動)·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민족사학연구(民族史學硏究)에 바친 애국지사다. 단재의 삶은 범부(凡夫) 5백년의 생애보다 훨씬 값지고 훌륭하다.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단재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사통(史統)을 바로잡고 정기(正氣)를 세우려고
애타게 외쳤건만 국운을 붙들 길 없어
큰 집이 무너져 가며 가슴 태워 우시더니
봄바람에 몸을 던져 압록강 건너실 제
멀어가는 고국강산 울며 돌아보시던 양
지금 그려만 보아도 가슴 뮈어집니다."
단재는 우선 역사학자로서 민족사학의 골격을 세웠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단재가 옥사한 직후 쓴「단재와 사학」(『동아일보』1936년 2월 26일, 28일자 상·하)에서 “광박(廣博)한 포부가 동서를 아울러 사학의 정광(精光)이 크게 빛나고 사학적 고격(高格)과 공교(工巧)한 장인정신의 소유자로서 유지기(劉知畿)의 재(才)·학(學)·식(識) 삼장(三長)을 두루 갖춘 청구사학(靑丘史學)의 제1인자”라고 평가하였다.
단재는 투철한 시민적 민족주의자였다. 안재홍(安在鴻)은「조선사학의 선구자」란 글에서 “그는 구한말의 지도자로서 또는 그의 지속적 노력자로서 종시(終始)한 관(觀)이 있고, 그 사상·학식에 관하여서도 조선에 있어서의 봉건주의 시대의 말기적인 도정에서 자본적인 민족사상 또는 국민주의의 발흥하는 시대에 걸쳐 가장 총명하고 예민한 양심으로서 그 개척자적 임무를 다하던 분인 것이다”라고 분석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에 망명한 단재를 만났던 홍명희(洪命熹)는「상해 시대의 단재」란 글에서 “북경서 달포 동안 단재와 교류하는 중에 비로소 그의 인물됨을 잘 알았습니다. 단재가 논의에 앙양(昻揚)하고 행동에 교계(較計)가 적으나, 앙양이 과한데 정열이 있어 좋고, 교계가 적은데 속기가 없어 좋았습니다. 단재가 고집이 세고 괴벽스럽다고 흉보듯 변보듯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나, 단재의 인물됨을 잘 알면 고집이 맘에 거슬리지 않고 괴벽이 눈에 거칠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기술하였다.
투철한 민족언론인이었던 단재에 대해 언론인 천관우(千寬宇)는「언론인으로서의 단재」란 글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사가(史家)로서, 또 언론인으로서 단재는 다방면으로 우리 근대사에 거보를 남겼지마는, ‘단재의 일념은 첫째 조국의 씩식한 재건이었고’(안재홍,『조선상고사』서문) 사학도, 신문도 말하자면 그 독립운동을 위한 방법이고 수단이었다. 그것은 신문 내지 사학에 종사하는 태도에 있어 현대의 직업적 저널리스트 내지 사학도들과의 큰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왕조 말부터 일본 강점 시대에 걸쳐서는 독립운동과 사학과 언론을 삼위일체처럼 파악하고 실천한 유형의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라고 썼다.
단재는 이렇게 ‘무슨 하나’가 되는 것보다 ‘모두 무엇’이 되기를 요구하는 국난기 선각자로서 ‘시대 정신’ 바로 그것이었다.『꿈하늘』등 여러 편의 소설과『을지문덕전』등 애국영웅전을 쓴 문인이고, 아나키즘 이론가이고, 가정교육과 여성계올을 위한 순 한글『가정잡지』를 주재한 여성운동가이기도 하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주필로 반일언론 주도
스물여섯 살의 청년 단재가 위암(葦庵)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위원에 위촉될 때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5년 2월이다. 청년 논객 단재는 국운이 기우는 시점에서 애국계몽의 논설을 집필하고,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에 즈음하여 18일자『황성신문』에 장지연이「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쓸 때 이 글의 후반부 원고 집필을 도왔다고 한다.
이 논설로 인해『황성신문』이 폐간되자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대한매일신보』주필에 취임하여 12월 18일자에「시일야우방성대곡(是日也又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대논객으로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단재는『대한매일신보』주필로서 일제(日帝)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 행위를 통렬히 비판했다. 이 무렵 주요한 시국 논설은「일본의 3대 충노(忠奴)」「금일 대한제국의 목적지」「영웅과 세계」「학생계의 특색」「한국자치제의 약사」「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이십세기 신국민」등이 있다. 국운이 이미 기울어 일제에 아첨아부(阿諂阿附)하는 무리가 떼를 지을 때 단재는 이들을 통렬히 질타하였다.
단재는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1910년 4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더불어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면서 해외에서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전개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중국 산동반도의 청도(靑島)에서 일행은 ‘청도회담’을 열고, 여기에서 토지개간사업, 군관학교 설립, 교관 양성과 전문 기술자 확보 등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尹世復)·이동휘(李東輝) 등과 더불어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해조신문(海潮新聞)』의 후신인『대동공보(大東共報)』에 관여하다가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로『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동하였다. 여기에서도 일제의 강도와 같은 조선병탄을 폭로하면서 무장투쟁을 주창했다.
단재는 이 신문이 문을 닫게 되자 만주 지방을 돌면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유물을 답사하여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북경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의 이석증(李石曾) 교수의 주선으로 보타암(菩陀庵)에 머물면서 조선사(朝鮮史)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북경신문』에 논설을 쓰기도 하였다. 이 무렵 이석증·채원배(蔡元培) 교수와 친교를 맺었는데, 이들은 아나키즘 연구자로서 나중에 중국 5·4운동에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단재의 아나키즘에 대한 사상적 기반은 이들과의 친교가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가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29인 모임(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李承晩)이 국무총리로 추대되자 이승만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을 들어 이를 반대하고 퇴장하였다. 이후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임시정부와는 결별하고 새로운 반일신문『신대한(新大韓)』을 창간, 무장투쟁 노선을 견지하는 논설을 집필하였다.
『신대한』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다시 북경으로 건너가 개인잡지『천고(天鼓)』를 발행, 중국인과 한국인을 결속하는 항일투쟁과 한국 고대사 연구에 열정을 바쳤다. ‘하늘 북’이라는 이름의『천고』창간사에서 단재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천고여, 천고여!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이 땅에 가득찬) 더러움과 비린내(역겨움)를 씻어다오. 혼이 되고 귀신이 되어 적의 운명이 다하도록 저주해다오. 천고여, 칼이 되고 총이 되어 왜적(倭敵)의 기운을 쓸어 버려다오. 폭탄이 되고 비수가 되어 적을 동요시키고 뒤흔들어다오. 국내에선 민족의 기운이 고양돼 (적에 대한) 암살과 폭동의 장거가 끊이지 않고 있다. 밖으로는 세계 추세가 달라져 약소국가들의 자결운동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천고여, 천고여! 너의 북을 두드려라. 나는 춤을 추리라. 우리 동포들의 시기를 끌어 올려보자꾸나. 우리 산하를 돌려다오. 텬고여! 분투하라. 노력하라. 너의 직분을 잊지 말지어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