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록강을 건너간 청년 망명객
1910년 5월 중순 어느 날, 한 청년이 압록강을 건너는 기차에 앉아서 차창 밖으로 명멸하는 고국산천을 처연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5월의 압록강은 강변의 푸른 신록과 어우러져 더욱 푸른 물결을 이루며 도도하게 흘렀다.
압록강은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데, 혜산·중강진·만포·신의주를 거쳐 용암포의 초하류(梢下流)에서 황해로 유입한다. 우리 나라와 중국의 동북지방과 국경을 이루는 강으로 직선 거리로는 4백킬로미터 정도이나 상류 쪽에서 심한 곡류(曲流)를 이루므로 실제 강 길이는 직선거리의 두 배에 가깝다.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의 빛과 같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 하여 ‘수색여압록(水色如鴨綠)’ 즉 압록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백두산과 더불어 한민족의 모태이기도 한 이 강은 동부여(東夫餘)에서는 ‘엄리대수(奄利大水)’, 고구려(高句麗)에서는 ‘청하(靑河)’라고도 불렀다. 압록강은 아리나례강(阿利那禮江)이라고도 하는데, 아리가 ‘밝음’의 신령성을 나타내는 우리 고어의 ‘알’에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압록강 건너 북쪽은 고구려, 발해(渤海) 시대까지 한민족의 땅이었던 것이 우리의 대륙국가가 쇠망한 이래 요(遼)·금(金)·원(元)·청(淸) 등 북중국의 왕조 교체에 따라 중국이 점거하고, 1909년 일본이 안봉선(安奉線) 철도 부설권 등 이권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이른바 ‘간도협약(間島協約)’에 의해 이곳을 중국에 넘겼다.
우리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중국에 가는 사신이나 공물은 모두 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열하일기(熱河日記)』에도 첫 편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 땅에 이르는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 탐관오리를 피해서, 또는 흉작으로 먹고 살기 위하여 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압록강을 건넜다. 나라가 망한 후에는 일제의 폭압을 피해서 역시 이 강을 건너 조국을 등지는 유랑민이 많았다. 그래서 한때는 유랑민들의 ‘압록강 민요’가 유행되었다.
"이 서방 떠난 날 흐른 눈물이 마르기도 전 김서방 또 짐꾸리네 / 삼천리 강토가 넓다드라만 오척의 신구도 둘 곳 없다네 / 넘기는 백두산 원한에 닮고 건너는 압록강 눈물에 부니 / 닥치는 요동벌 한숨에 차네"- 이영택「압록강」,『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괴나리봇짐을 달랑 멘 청년은 기차가 중국 안동현(安東縣)에 도착할 때까지 고국 땅을 바라보면서 차마 떨어지기 어려운 발길로 만주대륙을 밟았다. 괴나리봇짐 속에는『동사강목(東史綱目)』한 질이 들어 있었다. 몇 해 전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의 후손으로부터 빌린 원본이었다. 몇 번이나 읽고 애지중지하던 책이었다.
청년은 본래 천성이 청절하고 거래가 분명한 성격이었으나 이 책만은 자기 손에서 떼 놓을 수 없었던지 망명길마저 싸가지고 떠난 것이었다. 순암의 후손으로부터 증정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물유각주(物有各主)’라 하여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하였다. 어쩌면『동사강목』이 제 주인을 제대로 만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청년이 고국을 떠나면서,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정처없는 망명길에 메고 간『동사강목』은 순암이 20여년에 걸쳐 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 말기까지 다룬 20권 20책의 통사(通史)다. 청년 지사(志士)가 글을 쓰고 역사를 연구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데 이 책에서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
순암은『동사강목』에서 역사가의 중요한 원칙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계통을 밝힐 것. 둘째, 찬탈자와 반역자를 엄하게 평할 것. 셋째, 시비를 바르게 내릴 것. 넷째, 충절을 높이 평할 것. 다섯째, 법제를 상세히 살필 것 등이다. 이는 청년 지사의 일관된 사관(史觀)이고 역사 서술의 원칙이기도 하였다.
젊은 망명객은 기차가 압록강 철교를 건너서 만주로 들어갈 때 멀어져가는 조국 땅을 돌아보며 떠나는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람 사이 칼로 썩 비면 고우나 고운 핏덩어리가 줄줄줄 흘러 나려오리다 한나라 땅에 골고루 뿌려서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한나라 생각」『나라사랑』제3집, 단재 신채호 선생 특집호 157쪽, 외솔회.
심지가 굳고 의지가 곧기로 소문난 청년 지사도 기약 없는 망명의 길을 떠나 조국을 등질 때에는 이렇게 감상에 젖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한나라 생각」은 자신과 조국을 일체화시키는 애국혼의 발로다.
청년 망명객은 조국을 떠난 후 1917년 조카 딸 향란의 혼사 문제로 잠시 조국에 ‘잠입’하였다가 다시 출국하여,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여 한줌 재가 되어 환국할 때까지 26년을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단재 신채호 선생이었다.
● 신민회 간부들과 망명 결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서른한 살의 한창 나이에 망명길에 올랐다. 정치적 탄압이나 종교적 혹은 민족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 외국으로 나가는 망명자는 어느 시대에나 늘 있었다. 프랑스 시민혁명 과정에서 귀족 망명자들의 해외 망명이 시작된 이래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후의 백계 러시아인들의 망명, 독일 나치스 정권의 탄압에 의한 유태인·자유주의자·사회주의자들의 해외 밍명, 그리고 일제의 침략기에 우리 애국지사들의 망명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폭압에 맞서기 위해서 망명자들은 해외로 떠났다.
단재는 1910년 초 국내에서 항일투쟁이 더 이상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동지들과 함께 해외 망명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를 빌미삼아 사법권과 경찰권을 강탈하고 ‘일한합병(日韓合倂)’을 추진하고 있었다. 한국의 마지막 버팀목이던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도 일제(日帝)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으로 대부분의 의병이 학살되거나 국경선 밖으로 밀려났다. 일제의 발악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단재는 1907년 중반 이후 3년여 동안 몸담으면서 항일구국의 필봉을 날렸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1910년 4월에 친일파의 손에 넘어가자 결연히 신문사를 떠났다. 이제 해외로 망명하여 힘을 기르고 무장투쟁으로 일제와 싸우는 일뿐이었다.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논의를 거듭한 끝에 국외로 망명하여 일제에 저항하자는 쪽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신민회는 1906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갑(李甲)·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노백린(盧伯麟)·조성환(曺成煥)·이상재(李商在)·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 등과 함께 만든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 조직이었다. 애국심이 강하고 헌신적이며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조직의 명령에 따라 바칠 수 있는 사람에 한해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입회할 수 있는 비밀결사단체였다.
8백여명의 회원을 확보한 신민회는 정치·교육·문화·경제 등 각 방면의 진흥운동을 일으켜 국력을 기르는 데 힘썼다.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각각 창설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서울에서『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고, 대구에서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여 문화운동에 힘쓰는 등 망국기 최대 규모의 비밀조직이었다.
단재는 신민회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면서 해외 망명을 준비하였다. 사랑하는 조카 딸 향란을 믿을 만한 동지 임치정(林蚩正)의 집에 맡겼다. 임치정은 당시 스무아홉살의 청년으로『대한매일신보』의 회계 책임을 맡고 있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한『공립신보(共立新報)』의 제작에 참여하다가 귀국하여『대한매일신보』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1909년 12월 29일 이재명(李在明) 의사(義士)가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종현성당의거(鐘峴聖堂義擧)에 관련된 혐의로 구속되기도 한 의열 청년이었다. 1911년 105인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신민회 간부들은 임치정의 집에서 비밀 모임을 갖고 망명문제도 여기서 논의하였다. 단재가 망명을 떠나면서 조카 딸을 임치정의 집에 맡기게 된 것은 그만큼 신뢰가 깊었기 때문이다. 1917년 단재가 잠시 고국에 ‘잠입’했던 것은 조카 딸이 친일파와 혼사 문제가 거론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단재의 설득에도 듣지 않는 조카 딸과는 단호히 의절하였다.
단재는 망명을 앞두고 그동안 기거하던 삼청동 집을 정리하여 노자를 마련하고 헤어진 부인과 일부는 조카의 생활비로 맡겼다. 신민회 간부들의 아지트는 서울 원서동 추정(秋汀) 이갑(李甲)의 사랑방이었다. 1910년 3월 여기서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의 방략’을 채택하였다.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군관학교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들은 국내보다는 자유로운 중국 산동성(山東省) 청도(靑島)에서 신민회 확대회의를 열기로 뜻을 모았다. ‘청도 회담’에서 향후 구체적인 독립운동의 방략과 전략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가 이미 국권을 장악하여 일본 경찰관들이 애국지사들을 샅샅이 뒤쫓고 있는 실정이어서 저들을 따돌리고 해외로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 사람씩 짝을 지어 해로와 육로를 통해 청도로 떠나기로 하였다. 망명 지사들의 비용 대부분을 이종호(李鍾浩)가 맡기로 하였다. 이종호의 할아버지는 재력가 이용익(李容翊)이다.
이용익은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장호원에 은신해 있을 때 고종(高宗)과 연락을 잘 한 공로로 황제의 신임을 얻어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이 되었다. 이준(李儁)·민영환(閔泳煥)·이상재 등과 더불어 개화당을 구성하고 친러파의 영수로서 1904년 ‘일한의정서’ 조인에 반대하여 배일·친러분자로 지목받고 일본으로 납치되었다가 풀려났다. 귀국해서는 경상북도 관찰사에 등용되고 보성학원(고려대학교 전신)을 창립하여 청년 교육에 헌신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반대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연금당하기도 했으며, 풀녀난 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손자 이종호는 할아버지가 상해 덕화은행에 거금을 예치한 사실을 알고 이 자금을 찾아서 독립운동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청도 회담에서 구체적 방략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단재는 안창호·김지간(金志侃)과 함께 4월 8일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행주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로 건너갔다. 정남수라는 청년이 길 안내를 맡았다. 일행을 태운 나룻배는 강화도를 돌아 교동섬으로 향했다. 교동섬은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이 유배된, 왕조 시대의 대표적인 유배지이며, 경기·황해·충청 삼도수군통어사가 있었던 곳이다.
강화도는 여몽전란(麗蒙戰亂) 40년을 겪은 민족 고난의 현장이고, 마니산에 단군성조(檀君聖祖)를 모시는 역사의 혼이 깃든 곳이다. 단재는 작은 나룻배를 타고 만감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강화도를 거쳐 교동섬을 지나면서 심한 배 멀미에 시달리게 되었다. 산골에서 태어나 배를 처음 타 본 데다 몸이 허약한 그에게 파도치는 황해의 뱃길은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김지간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배 멀미로 먹은 음식을 전부 토해 낸 단재와 김지간은 교동에서 하선하여 개성을 거쳐 육로로 청도에 가기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러나 안창호 등은 선편을 이용하여 망명지로 떠났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