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생과 영락한 가문
흔히 영웅호걸이나 천재·수재가 태어날 때는 범상하지 않은 태몽이나 이변 또는 자연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돼 있다. 또 당사자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태어나거 세살 때면 이미 글을 읽고 시를 지어 인근에 신동으로 소문이 난다.
여기에 풍수설까지 곁들인다. ‘풍수(風水)’란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에서 나온 말로서, 음양론과 오행설을 기반으로 인재(人才)가 태어난 곳은 반드시 풍수지리적으로 길지(吉地)라는 속설이 추가된다. 우리의 ‘위인(偉人)’들은 늘 이렇게 천지 간의 조화 속에서 출생하였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1880년 11월 7일(음력) 충남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에서 신광식(申光植)과 밀양(密陽) 박씨(朴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광식은 가난한 농촌의 한사(寒士)로서 서른 두 살에 첫째 아들 재호(在浩)를 낳은 지 8년만에 채호를 얻었다.
그의 출생에 특별한 비화나 태몽 같은 것은 없다. 가난한 농부의 평범한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고 출생지의 산천이 ‘좌청룡 우백호’ 하는 식의 풍수지리나 산수정기를 타고 태어났다는 그런 전설 같은 일도 없었다. 다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우수하고 행동거지가 남달랐다고 한다.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후예로서 엄격한 유학가문이었다는 점,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인근에서 걸출한 애국지사 여러 명이 태어난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현상이었다.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의 주도자 손병희(孫秉熙),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바 있고 임시정부에 내분이 생기자 25일간의 단식 끝에 목숨을 끊은 신규식(申圭植), 민족 대표 33인의 구성원이었던 신석구(申錫九)·권동진(權東鎭)·권병덕(權秉悳),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근무했던 신백우(申伯雨),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변절한 정춘수(鄭春洙) 등이 인근 지역 출신이다.
단재와 신규식·신석구·신백우 등 애국지사들을 이 지역 고령(高靈) 신씨(申氏) 가문에서 배출할 만큼 고령 신씨 풍문은 학문과 애국심이 깊은 지방의 명문가였다.
조선 초기의 정치인·외교관이었지만 사육신(死六臣)과 뜻을 함께 하지 않고 권세를 택한, 그리하여 변절의 상징 인물로 통한 신숙주(申淑舟)의 가문에서 ‘일편단심(一片丹心)’의 ‘단(丹)’자를 호로 쓰면서, 일생을 “무서우리만큼 맵고, 차고 그리고 불꽃처럼 치열한 삶”을 산 단재와 같은 후손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는 신비한 일이다.
‘실용주의 노선’을 택한 조상 신숙주의 길보다 ‘청절지조(淸節志操)’의 길을 걸은 이성 정몽주(鄭夢周)를 더 닮고자 한 단재의 길은, 5백년의 간격을 두고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한쪽은 부귀공명(富貴攻名)이 따르고 다른 쪽은 빈한(貧寒)과 압제(壓制)가 따랐다.
단재가 태어난 해는 나중에 총리대신이 된 김홍집(金弘集)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황준헌(黃遵憲)이 쓴『조선책략(朝鮮策略)』을 고종(高宗) 군왕에게 바치면서 정국이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최시형(崔時亨)의『동경대전(東經大典)』이 간행된 때였다.
두 살 때에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중국 천진으로 압송되고,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 체결되었다. 제물포조약은 임오군란 때 본국으로 도망쳤던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들어와 조선 조정을 협박, 배상금을 요구하고 부산·원산·인천 등 개항장의 상업활동 범위를 넓히는 내용의 조약을 말한다. 제물포조약으로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일본 군대가 서울에 주둔하게 되는 등 일제가 한국 침략의 마수를 뻗히기 시작하는 시발점(始發點)이 되었다.
단재가 열여섯살 때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이 일어났다. 한국의 전통적인 봉건사회가 외세의 침략과 내분으로 서서히 붕괴되어 가면서 민생은 더욱 어려워져 갔고 나라의 운명은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동학혁명은 소년 단재에게 반일의식과 부패한 봉건주의 타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단재가 일곱 살 되던 1886년에 아버지가 작고하면서 사족은 신씨 일가가 많이 사는 청원군 남성면 귀래리(고드미) 마을로 이사하였다. 이 지역 일대는 고령 신씨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살아온 신씨 집성촌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황해감사를 지낸 단재의 16대 고조부 신광윤이 가족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낙향하면서 신씨 일문이 터를 잡아 살게 되었다. 단재의 가계는 신분상으로 양반에 속하며 대대로 문과에 급제하여 선비의 전통을 이어온 사족(士族)의 집안이었다.
조선 초기 세종(世宗)에서 성종(成宗)대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쳐 영의정 등을 지낸 신숙주는 고령 신씨 문중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단재의 종조부 약우(若雨)는 진사를 지내고, 조부 성우(星雨)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6품인 정언(正言) 벼슬을 지낼 만큼 그의 직계 선대는 대대로 문과에 급제하여 선비의 가문을 이어왔다.
조부 신성우는 벼슬을 마치고 고향인 귀래리로 낙향하여 사숙(私塾)을 세우고 인근 젊은이들을 모아 학문에 힘썼다. 부친 신광식도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이었으나 조선 말기 문란해진 과거(科擧)에 실망하고 관계 진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단재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점차 가세가 기울어 갔다. 단재가 태어날 무렵에 할아버지는 처가인 충남 대덕군 산내면 한밭 근교인 안동(安東) 권씨(權氏) 마을 외딴 묘막에 은거하면서 가난한 가계를 이어왔다. 아버지의 대에 와서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워지고 단재의 어린 시절은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고달픈 나날이었다.
가족이 먹는 음식은 보릿가루에 쑥을 넣어서 쑨 쑥죽이 상식이 되었다. 끼니를 쑥죽으로 연명하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질 때는 콩죽을 먹으며 살았다. 단재가 후일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조반석죽(朝飯夕粥)을 하면서도 결코 콩죽을 멀리하였던 것은 어렸을 적의 이런 연유 때문이다.
단재는 망명 시절 친구 원세훈에게 “나는 아이 때부터 콩죽에 하도 물려서 오십이 가까운 지금에도 콩죽이라면 몸서리를 칠 만큼 신물이 나오” 하고 실토한 적도 있었다.
단재의 청년기까지 이름은 한자로 채호(寀浩)로 쓰다가 뒤에 해외 망명을 전후한 중년기부터는 채호(采浩)로 바꾸었다. 호는 처음에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의「단심가(丹心歌)」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되는 ‘일편단심(一片丹心)’이라고 썼다. 그러나 호가 너무 길다고 생각하여 ‘단생(丹生)’으로 줄여 쓰다가, 그것을 다시 단재(丹齋)로 고쳐 불렀다.
그 밖에도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등의 아호 또는 필명을 썼다. 그러나 단재라는 호를 가장 많이 썼고 세상에도 가장 널리 알려졌다.
해외 망명생활 중에는 필요에 따라 유병택·유맹원·박부·왕조숭·왕국금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던 이름일 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단재는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항상 잔병치레가 많았다. 한창 성장할 때에 제대로 먹지 못하여 자주 병을 앓고 그러다 보니 발육도 신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가난한 생활에서도 청빈한 선비 집안의 가풍은 어린 단재에게 일찍부터 학문에 눈을 뜨게 하고, 남다른 영민한 재질과 노력이 더하여 준재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단재의 외모와 관련해서는 망명길에 방문한 오산학교에서 처음 그를 만나본 이광수의「탈출 도중의 단재 인상」이나 다른자료를 참고할 때, 그는 결코 남에게 헌앙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신채호가 열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가 인근 사람들로부터 학문과 문재(文才)에는 뛰어나면서도 외모와 성격이 못나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 할아버지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너를 보고 흐리고 못났다고 하는데 무슨 까닭이냐?” 하고 손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그는 “나 보고 못생겼다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도 알고 보니 별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최홍규,『단재 신채호』태극출판사, 74쪽.
소년기의 그의 외모는 어릴 때부터 병약하고 의식(衣食)이 풍족하지 못한 탓으로 남에게 윤택하거나 헌앙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소설가 심훈(沈熏)은 후일 북경에서 단재를 만난 소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당시 그는 마흔두세살의 장년이었는데, 원체 문명(文名)을 높이 들었을 뿐아니라금 강산 단풍 구경보다도 몽골 사막풍에 흉금을 펼치고 싶다고 할 만치 기골이 품품한 ××가(家)로 알았던 것과는 딴판으로 남산골 샌님처럼 그 체구와 풍모가 옹졸하여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으로 고리삭은 선비로구나 하는 첫 인상을 받았었다."- 심훈,「단재와 우당」,『동아일보』 1936년 3월 12~13일,『개정판 단재 신채호 전집별집』411쪽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