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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5.애국계몽운동과 반일언론의 선봉장 ⑶

참의부 |2013.08.30 14:04
조회 140 |추천 0

●『독사신론』등 사론 집필

 

흔히 단재를 독립운동가, 언론인, 문학인, 아나키스트, 민족주의 역사가로 일컫는다. 어느 한 부문도 소흘할 수 없는 전문적인 업적을 쌓고 훌륭한 행적을 남겼다. “단재는 무정부주의자이기는 해도 단재의 사상을 기왕의 어떤 틀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단재 나름으로 생각해야 단재를 이해할 수 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속에서 단재를 찾다가 보면 단재를 찾을 수 없는, 단재 나름의 길이 있었다”는 주장처럼, 단재는 이념 성향뿐 아니라 연구와 활동, 전문성에 있어서도 당시 한국의 선각자로서 할 수 있는, 해야 할 거의 모든 일을 빠지지 않고 수행하였다.

 

그 중에 한 가닥이 민족사 연구라 할 수 있다. 민족사 연구도『대한매일신보』재직 시절에 시작하여 해외 망명 초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불후의 업적으로 남아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단재의 사학을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원조’로 인식한다. 그는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국민의 애국심을 개발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로 전국민의 꿈을 일깨우는 ‘신(新)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잘못 쓰인 역사 교과서를 새로 짓는 자세로 쓴 것이「독사신론(讀史新論)」이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연재한「독사신론」에서 확고한 근대 민족주의의 사관을 제시하고 새로운 학설들을 정립하여 제시하였다.

 

신용하 한양대학교 석좌교수는 이를 14가지로 분류, 정리한 바 있다.

 

"① 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 주족론(主族論), ② 단군(檀君)-추장시대론(酋長時代論), ③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 부정, ④ 기자(箕子) 일읍수위설(一邑守衛說), ⑤ 만주영토설(滿州領土說), ⑥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附設) 부정, ⑦ 초기 대일관계신론(對日關係新論), ⑧ 삼국문화의 일본 유입설(流入說), ⑨ 초기 대국방 민족관계신론(民族關係新論), ⑩ 초기 대중민족관계신론(對中民族關係新論), ⑪ 삼국 흥망원인신론(興亡原因新論), ⑫ 삼국통일 및 김춘추 비판론, ⑬ 발해·신라 양국시대론, ⑭ 김부식 비판 등과 그 밖의 작은 주제들에 대한 다수의 신학설들이었다."

 

단재의「독사신론」이 발표되면서 사학계뿐 아니라 전 문화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 저작의 사관과 내용은 당시의 역사교과서들과 비교하여 보면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단재가 1910년 4월 해외로 망명한 직후 최남선(崔南善)은 이 글을 자신이 발행하던 잡지『소년』제3권 제8호에 전재하면서「역사사론(歷史私論)」이라고 제목을 고쳤다. ‘사론(私論)’임을 강조할 만큼 이 글은 당시의 사대주의적 내용과 관점을 깨부수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독사신론」은 1911년 미주 지역에서도 순 한글판으로 간행되어서 교포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독사신론」을 연구한 신용하 교수는 이 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사학은 신채호의 연구에만 의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라 박은식 등 그 전후의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한 공동 노력의 결과로 성립된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성립의 범주에 드는 획기적인 첫 작품은 근대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다수의 신학설을 제시한 신채호의「독사신론」인 것이다.

 

저작을 중심으로 보면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사학은 신채호의「독사신론」에 의하여 1908년에 성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화기에 애국계몽운동기에 다수의 역사서들이 간행되어 근대민족주의 사학에 기여했지만, 그 대표적인 결실이 신채호의「독사신론」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성립은 신채호의「독사신론」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독사신론」은 미완의 사론이다. ‘서론(敍論)’과 ‘제1편 상세(上世)’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되었다. 단재가 신문사를 떠나고 망명을 준비하느라 미처 완성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론은 구한만 민족주의 사학의 편린을 이해하고, 이후 ‘단재사학(丹齋史學)’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서론’의 한 대목을 살펴본다.

 

"국가의 역사는 민족 소장성쇄를 열서(閱敍)할 자라,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지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지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그 또한 무겁지 않을 수 있는가? …국가가 이미 민족정신으로 구성된 유기체인즉, 단순한 혈족으로 전래한 국가는 고사하고, 혼잡한 각족(各族)으로 결집한 국가일지라도 반드시 그 중에 항상 구심력이 되는 특별 종족이 있어야, 비로소 그 국가가 국가될지니, 만일 한 반(盤) 위에 모래를 뿌리듯이, 동족에서 온 일종족도 모여들어, 네가 장부냐 내가 장부냐고 이견이 있을진댄, 이는 일추장 정치도 공고케 행하기 불능할지며, 일부락 단체도 완전케 자립하기 불능할지니, 항차 국가 건설 문제야 어찌 서로 논하리요?"

 

단재는「독사신론」외에도「대동 4천년 역사」를 당시 학생들의 요청으로 집필했다고 하는데,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단재는 그의 역사민족주의 관점에서 근대민족주의 사관(史觀)을 수립하고, 기존의 사관과 사서(史書)들을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신용하 교수는 다음 4가지로 분석하였다.

 

"첫째, 신채호는 국사에서의 존화사관(尊華史觀)과 사대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종래 유생들의 사학(史學)이 대부분 존화사관에 젖은 사대주의 사학이었음을 통탄하고, 그 역사적 대표자로서 김부식(金富軾)을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그는 존화사관을 한국인으로 하여금 정신적 노예로 만드는 역사관이라고 매섭게 비판하였다.

 

둘째, 신채호는 왕조사 중심의 중세사학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왕실의 흥망이나 정통을 따지면서 강목체(綱目體)와 편년체(編年體)로 쓰인 중세사학을 왕명(王名)과 연대와 인명과 지명이나 기술할 뿐이지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지도 못하고 민족진화의 과정이나 민족국가의 흥망성쇠의 인과도 밝히지 못하는 낡고 가치 없는 역사라고 비판하였다.

 

셋째, 신채호는 한국 역사에 대한 일본 역사서들의 한국사 왜곡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일본인들이 한국의 고대사가 중국 민족과 북방 민족에 대한 자주성이 없는 복속의 역사이며 남한은 일본이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여 지배한 역사라고 거짓의 무고한 학설을 지어내 퍼뜨리는 것을 격렬하게 공박하였다. 그는 고대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기는커녕 도리어 일본이 한국 문화를 수입하여 개화의 은혜를 입은 나라라고 지적하였다.

 

넷째, 신채호는 또한 한국인이 지은 당시의 역사교과서들을 예리하게 분석하였다. 그는 당시의 역사교과서들이 사대주의적 존화사관도 전부 다 비판 극복하지 못했으며, 일본인들이 거짓으로 날조한 신공왕후(神功王后)의 신라침공설이나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도 비판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도리여 이러한 거짓 학설들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악교과서(惡敎科書)들이라고 통탄하였다."

 

단재가 망명지에서 집필한『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등 사서와 사론은 뒤에서 별도로 살피기로 하겠다.

 

●『대한매일신보』변질되자 미련 없이 떠나

 

단재가『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지면을 통해 반일논설을 쓰고 여러 곳의 계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에 나라의 운명은 돌이키기 어려운 경각으로 치닫고 있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에 항거하여 의병항쟁을 벌였던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 등이 전라도 순창에서 피체되어 일본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고(1906년 6월 12일), 홍암(弘巖) 나철(羅喆)이 이끄는 오적암살단(五賊暗殺團)이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일원인 이근택(李根澤)과 권중현(權重顯)을 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907년 3월 25일).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황제 고종(高宗)의 헤이그 특사가 파견되었으나 평화회의에 참석이 거부당하자 이준(李儁) 열사가 순국하고(7월 14일),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면서 순종(純宗)이 즉위하고(7월 20일), 법률 제정과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 고등 관리의 임용은 통감의 동의를 받고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대한제국 정부의 관리로 임명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었다(7월 24일).

 

「신문지법」이 제정(7월 24일)되어 사전검열제가 실시되고,「보안법」이 제정되어 집회·결사가 제한되기 시작했다(7월 27일). 마침내 군대까지 해산당하고(7월 31일), 이에 저항하여 보병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이 자결하면서(8월 1일) 대한제국군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충돌하는 등 정미의병항쟁(丁未義兵抗爭)이 일어났다(8월).

 

통감부는 의병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총포와 화약 단속법을 제정하고(9월 6일), 이에 맞서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결성되었다(12월 6일). 1908년 1월에는 13도창의군이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했지만 패배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의사(義士)가 친일 미국인 외교관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를 쇠뭉치와 권총으로 습격해 처단하였다(3월 23일).

 

1909년 일본의 각의는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건’을 의결하고(7월 6일), 일본군은 전국에서 일제히 봉기한 의병들에 대해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전개하여(9~10월) 무자비한 살육극을 벌였다.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가 만주 하얼빈에서 국적(國賊)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여 처단하고(10월 26일), 이재명(李在明) 의사가 종현성당에서 1급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단도(短刀)로 찔렀으나 미수(未遂)에 그쳤다(12월 22일). 이재명·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이와 같은 시국의 격변 속에서 단재는『대한매일신보』와 여러 분야의 활동을 통해 무너져 가는 국가의 운명을 떠받치고 있었으나, 국권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일제는 영국에 베델(Ernest Thomas Bethel)을 추방하거나 신문 발행을 중단하도록 요구하는 외교 교섭을 끈질기게 벌여, 마침내 베델을 두 차례나 재판에 회부하였다.

 

영국의 법정은 베델에게 6개월의 근신을 명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대한매일신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일제의 침략을 더욱 강하게 비판하고, 친일 내각을 통렬히 단죄하였다. 일제는 이 같은 보도내용을 문제 삼아 베델 추방 공작을 추진하고『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을 더욱 높였다. 이 과정을 정진석 서울대학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일본은 베델의 추방을 요구하는 외교 교섭을 벌이는 한편으로「광무신문지법」을 개정하여『대한매일신보』의 판매와 배포를 금지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해서 일본인 순사가『대한매일신보』의 사옥에 들어가 신문을 압수하기도 하고,『대한매일신보』의 구독을 방해하는 등의 행정적인 탄압과 병행하여 통감부기관지『서울 프레스』를 동원하여『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논설을 비난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일본의 강력한 요구를 받아들여 영국은 두번째로 베델을 기소하여 1908년 6월 15일부터 제2차 재판에 회부하였다.

 

베델에 대한 두 차례의 재판이 열리던 때는 의병들의 항일무장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며 전국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도 드높던 시절이었다.

 

베델에 대한 두번째 재판이 열리기 전에『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을 만함(Alfred Weekly Mamham)으로 바꾸고 6월 1일부터는 영문판 발행을 중단하였다. 베델이 3주간의 금고형을 받고 풀려나왔을 때는 이미 발행인이 바뀌어 있었다."

 

일제는 베델을 구속한 데 이어 양기탁(梁起鐸)에게도 탄압의 올가미를 씌워 구속하였다. 1908년 7월 12일 국채보상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씌운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의 총본부 역할을 한『대한매일신보』와 회계의 책임을 맡고 있던 양기탁을 엉뚱한 혐의로 구속한 것이다.『대한매일신보』를 없애기 위한 일제의 치밀한 계략이었다.

 

베델은 상해에서 형을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인 1908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우리 선각자들과 함께 힘겹게 싸우다가 이역에서 생을 마치고 한국을 영원한 고향으로 삼아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단재는『대한매일신보』시장 베델이 서거했을 때 ‘여상고비(女喪考枇)’란 표현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베델의 존재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일진회 기관지『국민신보(國民新報)』와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대한신문(大韓新聞)』에서는 ‘여상고비’란 역사상 성군 요(堯) 임금이 돌아간 때나 쓰는 문자라 하여 트집을 잡아 연일 비난하고, 신문사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자들도 있었다.

 

이에 단재는「국민·대한 양 마두상(魔頭上) 각일봉(各一棒)」이란 논설 한 편으로 이들을 격파하였다. “『국민신보』와『대한신문』의 두 마귀 머리에 몽둥이 한 대씩을 갈긴다”는 제목의 글에서 특유의 고증적인 해박한 해설과 논조로 ‘여상고비’의 본 뜻을 풀이하고 일반 독자의 오해를 풀어주었다. 이를 통해 단재의 해박한 지식과 문명(文名)은 다시 한번 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단재는『대한매일신보』시절에 몸이 허약하여 병고를 자주 치렀던 것 같다. 신문사에서 논설위원으로 함께 일했던 장도빈(張道斌)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때 신채호(申采浩)씨가 그 신문사의 논설주필로 있어서 불행히 병에 걸려 출근이 여의치 못하므로 대개 내가 논설을 쓰게 되었는데 그러나 신씨가 혹 신문사에 오고하여 나를 만나보고서 깊이 친한 친구가 되어 아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일생에 반가운 분이었다. 약 1년후에 신씨가 병이 대강 치료되어 신문사에 출근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1주일은 신씨가 논문을 쓰고 1주일은 내가 논문을 썼다. 이것이 1909년의 일이다."

 

『대한매일신보』는 만함이 맡아 1년 동안 발행하다가,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 확실해지자 한국주재 영국총영사 보나르(Henry Alfred Constant Bonar)가 만함에게 신문을 통감부에 팔 것을 권유하였다.

 

만함은 이를 받아들여 1910년 5월 21일 비밀리에『대한매일신보』의 판권과 시설을 7천엔(7백파운드)을 받고 통감부에 팔아넘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단재는 통감부의 유혹을 물리치고 단호히 신문사를 떠났다. 통감부는 신문을 매수한 직후 양기탁에게 신문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회유했으나 양기탁도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박은식에게도 비슷한 제안이 있었을 것이나 이들 민족진영의 언론인들은 판권과 운영이 통감부에 넘어간『대한매일신보』에 더 이상 미련을 남기지 않고 국권회복의 새로운 길을 찾아 모두 신문사를 떠났다. 이때부터『대한매일신보』는 더 이상 민족지가 아니었다. 1910년 8월 29일 병탄늑약(倂呑勒約)이 공개된 다음날 ‘대한(大韓)’이란 글자를 떼고『매일신보(每日申報)』란 이름으로 총독부의 기관지로서 36년 동안 반민족친일언론으로 일제에 충성하였다.

 

신문사를 떠난 단재는 집을 판 돈으로 조씨 부인에게 논 5두락(斗落)을 사주어 친정으로 돌려보내어 영원히 부부의 인연을 끊고 망명준비를 서둘렀다.

 

"두 사람의 사이가 사실상 이혼으로 끝맺게 된 것은 부인이 슬기롭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당시 일제의 합병이 박두했음을 알리고 직감하고, 머지않아 떠날 망명 준비로서 먼저 가정 그 자체를 정리해서 자신의 부담을 떨쳐 버리려는 결심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 그에겐 가정이라는 좁은 세계에 얽매이기보다는 민족독립운동과 민족사 연구가 더 큰 이상의 우주처럼 절실하게 인식되었던 듯하다."- 최홍규,『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 102~103쪽, 형설출판사 

 

단재의『황성신문(皇城新聞)』과『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시절에 대한 평가는 다음의 글에서 잘 압축되어 있다.

 

"단재는 충북 청주의 출생이라 약관 적에 이미 사상혁명과 신도덕 수립에 입지한 바 있었고, 때는 마침 청나라와 러시아·일본 3개국이 교침하던 시기를 만나 5천년 조국의 명맥이 날로 기울어 가고 민인(民人)의 우울함은 걷잡을 수 없던 즈음이었으므로 서울의 평단에 나선 단재는 누를 수 없는 북받치는 정열을 항상 한 자루 붓에 맡기어 사회에 드러내고 써 민족의 심장을 쳐 움직였었다.

 

그가 필정(筆政)을 잡고 있던『황성신문』과『대한매일신보』는 아마 그 청년 시대에 마음의 집으로 살고 있던 꺼지지 않는 꿈의 자취라고 하겠다.

 

그는 국정의 득실을 통론하였고 시류(時流) 인물의 장단을 포폄하였고, 더군다나 당시 사상의 오탁과 도의의 저하를 분개하여 그 병균의 밑등인, 즉 국가사통(國家史統)이 바로잡히지 못함과 민족정기가 두드러지지 아니하였음에 있는 것임을 똑바로 보았을 때 선유(先儒) 사필(史筆)의 왜곡됨과 가치의 전도와 시비의 착오됨을 역론(歷論)하니 이에서 신단재(申丹齋)는 당시 엄연한 국민사상 개혁의 급선봉이었다. 그는 정론(正論)의 외에「독사신론」을 쓰고……"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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