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삼웅 친일문제연구소장
1980년 5월 17일 전남대학교에 진주해 온 공수부대는 밤늦게 도서관 등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과 연구실의 실험실습생들 그리고 건축전을 준비하느라 밤을 지새고 있던 공대 건축과 학생들을 무조건 끌어내 구타하고 기합을 주기 시작했다. 공수부대가 광주에 도착하여 시작한 첫 계엄업무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공수배데에게 밤새도록 구타당하고 기합에 시달린 학생들은 속옷 한 장만 남기고 벌거벗겨진 채 전남대 본관 건물의 현관에 모두 무릎을 꿇고 죄인처럼 아침을 맞았다. 아침 일찍 학교에 나온 교직원들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한 구타에 일그러진 학생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요일인데도 비상근무차 학교에 나온 교직원들은 즉시 지휘관에게 항의하여 학생들을 3층 회의실로 데리고 가 아침식사를 하도록 했다.
전남대에 진주한 공수부대는 모든 학교문을 폐쇄하고 학생들의 출입을 철저히 막았다. 지난밤 계엄확대조치로 인해 휴교령이 내려진 사실을 모르고 학교에 나온 학생들은 교문에서 막무가내로 못 들어가게 하는 공수부대원들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정문과 후문에서는 학생들의 항의와 공수부대의 무조건적인 출입통제가 맞붙어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그냥 돌아가는 학생들도 있었고 학교에 못 들어가게 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지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 학생들은 전에도 학교에 군인들이 진주해 있을 때 함께 얘기를 나누며 지냈던 것을 생각하고 지금 교문을 막고 서 있는 그 군인들도 복장은 다르지만 마찬가지일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이 군인들은 학생들을 향해서 무차별 공격을 감행했다. 교문 안으로 끌려들어온 학생들은 안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인계되어 곤봉(棍棒)과 장총(長銃) 개머리판으로 두들겨맞고 군화발에 짓밟혀 피투성이가 되어나갔다. 실신지경에 이른 학생들은 황급히 병원으로 실려갔고 나머지 학생들과 3층 회의실에 있던 학생들도 오후 늦게 모두 트럭에 실려나갔다.
오후부터 공수부대는 시내에 투입되어 본격적인 학살 만행을 시작했다. 시내 곳곳에서 대검에 찔리고 곤봉에 피곤죽이 다 된 청년·학생들이 트럭에 실려와 마치 짚더미처럼 운동장에 부려졌다. 연행되어 온 청년·학생들은 대부분 실신상태에 이른 것 같았다. 전남대 운동장에 부려진 청년·학생들은 곧 분류되어 부상이 심한 사람들은 이 학부 건물에 수용되었고 겨우 정신을 수습할 수 있는 정도의 연행자들은 모두 트럭에 실려나갔다. 이 학부에 수용된 중부상자들은 형식적인 응급치료를 받고 난 후 모두 육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짚더미처럼 트럭에 쌓여 실려온 후 운동장에 내던져졌다가 다시 질질 끌려 이 학부 건물까지 오는 동안 이미 사지가 뻗어버린 청년들도 눈에 띄었다. 전남대 운동장과 이 학부 건물에는 피에 젖은 신음소리가 지켜보는 교직원들의 온몸에 소름이 돋게 했다.
철저하게 통제된 전남대는 살상이 합법적으로 자행되는 것 같았다. 이날 하루 동안 끌려들어온 학생들은 모두 밤늦게까지 트럭에 실려나갔다. 그 중에는 집에 있다가 구타당하여 실려온 사람, 길 가다가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고 붙들려온 사람, 먼발치에서 시위를 구경하다가 무조건 붙들려온 사람들이 시위를 하다가 잡혀온 사람 수보다 많았다.
19일 새벽 광주에는 또 3개 대대 병력의 공수부대가 증파되었다. 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금남로에서 탱크를 앞세운 무력시위로, 먼저 와 있는 공수부대 못지않게 살육적 위력을 과시했다. 오전부터 시내 일원에서는 공수부대의 대검과 곤봉, 장총 개머리판에 머리가 터지고 온몸이 일그러진 청년들이 전남대로 실려왔다. 역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보다 무고한 시민들의 수가 더 많았다. 공수부대와 대치한 학생들은 잽싸게 몸을 피할 수 있엇지만 옆에서 구경하고 있거나 집 앞에 나와 있던 시민들은 괜찮겠거니 싶어서 있다가 시위대를 놓친 공수부대원들에게 붙들려 구타를 당하고 트럭에 실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제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전남대에서는 이미 실신지경에 이른 부상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하는지 트럭에 싣고 나갔다. 이렇게 실려나간 사람들이 학교에 남아 있는 사람 수보다 월등히 많았으니 시내 일원에서 얼마나 참혹하게 구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전남대에 남은 청년들도 대부분 신체 어느 한 부위는 터지거나 깨져 있었고 팔과 어깨가 부러진 경우는 다반사였다. 정문 안쪽에는 두어명으로 보이는 시체가 거적에 덮여진 채 발목만 내놓고 있었다.
어제와는 반대로, 걸을 수 있는 정도의 부상자들과 연행자들은 모두 이 학부 건물 안에 구금되었다. 이미 18일 하루 동안 시내 일원에서 연행당한 시민들도 상무대의 수용능력이 넘어버린 듯싶었다. 트럭에 겹겹으로 쌓인 채 실려온 청년들은 시내에서 당한 살상과는 또 다른 형태의 사선을 넘나드는 구타와, 대검과 장총 개머리판에 의한 무참한 살육의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정문 양편에 있는 잔디밭에 텐트를 치고 있던 공수부대는 병력이 증원되어서인지 19일부터는 이 학부 건물에서 숙식을 하기 시작했다. 트럭에 실려가지 않고 이 학부까지 끌려온 청년들이 들어선 복도 곳곳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이미 서슬이 퍼렇게 세워진 대검을 갈고 또 갈고 있엇다. 그들이 갈고 있는 대검은 날에 어린 서슬만 보아도 식은 땀이 저절로 배어나왔다. 20일 밤이 되자 구금되어 있는 청년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15도 각도의 상공을 응시한 자세로 공수부대원들이 뭊는 말에 대답했다. 잠시라도 눈길이 흐트러지거나 몸을 움직이면 사방에서 예측불허의 장총 개머리판과 군화발이 닥치는 대로 짓찍고 내리질렀다. 공수부대원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다시 자기들 나름대로 청년들을 분류했다. 가장 우선 순위는 대학생으로 시위에 가담했던 청년들과, 김대중 전 ‘민국연(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의장을 지지하여 시위를 선동했다는 사람들이었다.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잡혔거나 그 근처에 서 있다가 붙들려온 사람들이 모두 그 부류에 속했다. 다음은 방위 복무중이거나 군장교 출신의 청년들이었다. 이들의 죄명은 반란군이었다. 그 다음은 특별히 취급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된 전신전화국 직원으로 특별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분류를 마친 공수부대원들은 번갈아가며 장난기 섞인 살상을 시작했다. 모두 머리 위로 손을 올리라고 명령했으나 이미 팔이 부러져 손을 올릴 수 없는 청년 한 명이 사정을 말하자 네댓 명이 달려들어 초죽음이 되도록 구타하고 짓밟아댔다. 공수부대원들이 묻는 말 이외의 여하한 말도 허용되지 않았다. 숨소리도 크게 낼 수 없었으며 화장실에도 대여섯 명이 굴비처럼 엮어져 가야 했다. 걸핏하면 장총 개머리판과 곤봉이 온몸을 난타했다.
21일 시민들의 필사적인 투쟁에 쫓겨 주둔지로 퇴각한 공수부대는 전남대에 구금되어 있던 40여명의 청년에게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전남대 이 학부 강의실은 다시 죽음의 그림자라 덮쳐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돌아가면서 피투성이가 된 청년들을 대검으로 찌르고 발길질을 해대다가 곤봉과 장총 개머리판으로 청년들의 온몸을 짓찍어대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원들의 웬만한 살상행위에는 비명도 지를 수 없게 된 청년들의 눈앞에는 자신의 죽음이 수차례 스치고 지나갔다.
자기들 나름대로 분류한 순서에 따라 청년들을 불러 세운 공수부대원들은 그 동안 잘 갈아두었던 대검을 치켜들며 “이 대검이 월남전에서 여자들 유방 40개나 잘라낸 것이다”고 설명한 후 청년 한 명의 정수리에 대검을 박아넣고 머리 한쪽의 표피를 완전히 잘라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분수를 쏟으며 쓰러진 그 청년은 그대로 실신해 보였다. 두 명의 공수부대원이 피범벅이 된 청년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고, 나머지 공수부대원들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참상이 바로 눈앞에서 찰나에 벌어지자 청년들의 얼굴은 모두 사색으로 변했다. 욱신거리던 통증도 사라진 듯했다. 눈동자도 옆으로 돌릴 수 없는 청년들은 나도 저렇게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심장이 저절로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공수부대의 만행은 계속되었다. 공수부대원이 한 청년에게 집이 어디냐고 묻자 겁에 질려 있던 청년은 엉겁결에 양동구라고 대답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질문을 던졌던 공수부대원은 광주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듯 “양동이면 양동이고 구동이면 구동이지 광주에 양동구가 어딨어. 너 이 새끼 간첩 아냐!” 하며 들고 있는 장총 개머리판으로 그 청년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청년이 엎으로 넘어지자 서너명의 공수부대원이 함께 달려들어 무차별 구타를 하기 시작했다. 견디지 못한 청년이 혀를 깨물어버렸는지 입안 가득 치가 고였다가 입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공수부대원들은 “이 자식이 이거 완전 독종이구만!” 하면서 군화발로 짓밟고 장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으며 더 가혹한 구타를 해댔다. 얼마나 두들겨맞고 입안으로 피를 흘렸는지 청년은 한동안 사지를 부르르 떨다가는 축 늘어져버렸다. 두 명의 청년이 더없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광경을 본 나머지 청년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에 대검이 스칠 때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죽음을 생각했다. 40여명의 청년 중에는 시위에 직접 참여한 수가 많지 않았다. 한 청년이 또 공수부대원의 트집에 걸려들었다. 시위를 했느냐는 물음에 안 했다고 대답한 것이었다. 공수부대원은 즉시 권총을 뽑아 장전하더니 청년의 입에 갖다대고 왜 거짓말 하느냐며 윽박질렀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 같은 모습이었다. 권총을 입 안에 들이밀자 청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죽음만을 실감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옆에 있던 다른 공수부대원이 말리자 그는 권총을 거두고 나서 군화발로 청년의 복부를 내질렀다. 청년은 오금이 굳은 상태로 나뒹굴면서도 신음 한마디 토하지 못했다.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은 날이 새도록 계속되었다.
그들의 만행이 가해질 때마다 청년들의 목숨은 천 길 벼랑을 오르내리는 아슬아슬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지샌 20일 밤은 한시도 공포의 전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목숨을 유지한 40여명의 청년들은 이미 찢겨질 대로 찢겨진 수건짝 같은 몸으로 또 다시 어디론가 실려가야 했다. 분노한 광주시민들의 공격적 대응에 밀린 공수부대가 광주 일원에서 퇴각하게 된 것이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이 철수하게 되자 2일 동안 구금당해 있었던 청년들은 교도소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남대 운동장에는 군용 부식을 실어나름직한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학부에 있던 청년들은 포승줄로 굴비처럼 엮어져 밖으로 나왔다. 청년들은 시내에서 실려올 때는 아무렇게나 던져진 채 포개어져 왔는데 이번에는 좁은 차량 안에 40여명을 모두 세워 빽빽하게 실었다. 나무토막을 세워 싣듯 태워진 청년들은 좁은 차량 안에서 숨이 막혀 질식할 지경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그런 차량 속에서 다시 가스탄 2개를 터뜨린 후 문을 닫고 테이프로 틈사이를 붙여버린 것이다. 서로 몸부림 치는 사이 독한 가스에 허물어진 살갗이 짓뭉개지기 시작했고 모두 코피가 터졌다. 선 채로 오줌을 싸는 청년들도 많았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도 이들은 움직일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을 수 있는 여력마저 빼앗긴 채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나치 독일군의 유태인 학살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해가 지기 전인 오후에 전남대를 출발한 차량은 완전히 날이 어두워진 밤중에 교도소에 도착했다. 평소에는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까지는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에 불과하다. 가스탄까지 까넣은 이 차량이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려 교도소에 도착하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청년들은 차량 안에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전주나 순천쯤의 교도소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광주교도소에 도착하자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하늘에는 악몽처럼 희미한 별빛이 보였다. 네댓 시간 만에 차문이 열렸다. 얼마나 차량 안에서 몸부림을 쳤는지 포승줄이 풀어져 있었다. 함께 그 차에 타고 왔던 청년 3명이 차량 안에서 숨져 있었다. 질식해 죽은 것 같았다. 청년들은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머리를 땅에 박고 기합을 받아야 했다. 청년들이 차량에서 내린 위치는 광주교도소 여사 쪽에 있는 공터였다.
차량 안에서 짓뭉개진 살갗이 바람을 쐬자 쓰라렸다. 피멍든 온몸이 욱신거리고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청년들은 줄지어 쓰러졌다. 공수부대는 쓰러진 청년들마다 여지없이 군화발로 짓밟고 곤봉으로 후려쳤다. 청년들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릴 지경이었다.
차량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다 내렸을 쯤 갑자기 총성(銃聲)이 울렸다. 바로 앞에서 터져나오는 총성은 한동안 계속 들렸다. 동시에 “이 자식들 다 죽여버려야 한다”는 공수부대원들의 고함소리도 섞여 들렸다. 청년들은 전남대 이학부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학우들을 생각하며 자신들의 죽음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은 멀리 사라졌고 정신마저 추스릴 힘이 없었다. 그들의 옆에는 10여구의 시체가 발목과 얼굴만 내놓은 채 거적에 덮여져 있었다.
청년들이 도착한 광주교도소에는 이들뿐만이 아니라 여러 대의 비슷한 차량에 청년들이 수없이 실려왔고 먼저 와 있는 청년들도 있었다. 그들도 몰골로 봐서 비슷한 공수부대의 살상에 고초를 겪은 것 같았다. 공수부대는 한동안 총기를 격발하더니 뭐라고 얘기를 한 후 땅바닥에 누워 잠을 자라고 했다. 이틀 만에 처음으로 누워 잠을 잘 수 있었다. 한동안 계속 들리던 총성이 멎자 자신들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 청년들은 땅바닥에 그대로 누웠다. 온몸이 자지러질 것 같았으며 어느새 잠에 떨어졌다. 하늘의 별도 자신들을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의 안위를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청년들은 잠도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부러진 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자신의 제어로 고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곳에 고정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팔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공수부대원들은 어김없이 무차별 구타를 가해왔다. 아무리 긴장하려고 애를 써도 잠은 죽음의 공포보다 더 짙게 엄습해왔다.
얼마쯤 잤을까? 갑자기 공수부대의 군화발이 아무데나 가리지 않고 걷어차며 청년들을 깨웠다. 그새 밤이 꽤 깊어진 것 같았다. 교도소 내에 있는 가마니 창고로 이동한다며 땅바닥에 누워 자던 청년들을 모두 깨워 다시 몇 차례 시범 보이듯 몇 명의 청년에게 극심한 구타를 가했다.
교도소 내에 있는 가마니 창고는 상당히 넓었다. 맨땅에 이슬을 맞고 잠을 잤던 청년들은 가마니가 깔려 있는 창고로 들어온 것만도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몰랐다. 여전히 공수부대의 만행은 창고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대검과 장총 개머리판에 청년들의 신체 아무 부위나 닥치는 대로 찌르고 내리치기 시작했다. 청년들에게 가해지는 공수부대원들의 살상행위는 23일까지 계속되었다. 보통 하룻밤 사이에 대여섯명의 청년들이 시체로 변해 가마니에 말려져 나갔고, 휘둘러대는 대검과 구타에 실신을 거듭하다가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광주교도소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밖에서 총 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들었던 M16의 연발음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카빈, M1 총기(銃器)의 총성도 함께 들렸다. 바로 그날부터 총상을 입은 청년들이 잡혀오기 시작했다. 한두 발 맞은 청년들부터 심지어 열발에 가까운 M16 총탄에 맞은 부상자들까지 들어왔다. 총상을 입고 들어온 부상자들은 밤새 물을 달라고 애원하는 등 몸부림치다가 아침이면 시체가 되어 나가는 것이었다.
밖에서 들려온 총성은 광주에서 공수부대를 퇴각시킨 시민군이 광주 상황을 외부로 알리고 시위를 확산하기 위해 길목을 막고 있는 계엄군과 치열한 총격전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 추후 정권을 탈취한 학살주범들은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가 광주교도소에 수감중이던 범죄자들을 탈옥시키기 위해 습격한 것이었다고 조작·발표했다. 이에 대해 광주교도소 가마니 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시민들의 구체적 목격사실을 통해 그것이 조작임이 입증되고 있다. 광주교도소를 습격한 인민군 특수부대라며 공수부대에 의해 잡혀온 사람들은 대부분 고무신을 신은 40대였고 심지어 중학생들까지 있었으며, 이들의 거주지는 모두 망월동이나 담양 등지였다. 결국 이들은 광주교도소를 습격한 것이 아니라 광주에 나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총탄을 맞은 사람들이거나 총격전이 벌어지자 궁금해서 밖으로 나왔던 시민들과 어린 학생들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교도소를 습격한 인민군과 폭도들에게는 특별대우를 해야 한다며 나이든 시민들과 어린 중학생들까지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타했다. 사실을 이야기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무차별 구타를 당해 실신지경에 이른 이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5월 23일 그 동안 살육을 즐기던 공수부대가 이동하고 제20사단 병력이 교체되어 들어온다고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잔혹한 공수부대의 살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의 숨을 돌렸다.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20사단은 보통사단이었기 때문에 공수부대와 같은 잔혹한 행위는 하지 않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교체되어 들어온 병력도 마찬가지었다. 자기들의 표현대로 그들은 지옥의 사자들이었다. 23일 오후에 교도소에 들어온 제20사단 병사들은 청년들을 상대로 한 살상행위도 공수부대에 뒤질 수 없다는 듯 더한층 가혹한 구타와 대검을 이용한 살상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처음 가마니 창고에 들어온 한 장교는 “우리는 실전 경험이 없는 공수부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DMZ에서 북한괴뢰와 직접 대치하면서 죽고 죽이는 실전 경험을 많이 치러본 지옥의 사자들이다”라고 자기 부대를 소개한 뒤 지옥의 사자라는 면모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살상행위도 공수부대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침마다 시체가 든 가마니가 나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밖에서는 매일 헬기가 요란스럽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사상자들을 수송하는 데 있어서 부상자들은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사망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이동됐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일부가 제101사격장에 암매장된 채 발견되었을 뿐이다.
20일 오후에 전남대로 끌려가고 다시 교도소까지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이금녕씨는 광주상황이 끝나도 집에 연락할 길이 없어 형을 확정받고서야 식구들의 면회를 요청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자신이 이미 사망자가 되어 망월동 묘지에 자신의 무덤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결국 형집행정지로 나와서야 망월동에서 살아난 것이다. 이금녕씨의 묘였던 그 묘지의 비문은 이제 무명열사로 바뀌었다.
교도소 내에 있는 교도관이나 그밖의 관계자들도 군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곤 했다. 교도소 관계자들은 가마니 창고에 있는 부상시민들을 제대로 치료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응급처지도 살갗에 붉은 약품 한 가지밖에 발라줄 수 없어 안타까워했다. 하루에 평균 두세명이 시체로 나갔던 희생자들이 지금 어디에 파묻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전남대에서 교도소까지의 과정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안병섭·전병현·서만오·임은택·고규석·방장환·민병열·이용충·김인태·최열락·정지영씨 등만이 사망자들 가운데 신분과 이름이 확인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