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민족항쟁 들불 되어 임시정부 수립
한민족 사상 최초로 국권을 상딜당한 지 9년만인 1919년 3월 1일, 마침내 일제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3·1민족항쟁은 조선 민중이 총궐기한 시위운동이었다. 총독부의 정치사찰 형사로 악질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조선인 출신 신철(申哲)은 3·1운동의 진행과정을 사전에 탐지하고서도 끝내 입을 다물었다.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은 사전에 독립시위 대열에 참여할 것을 교섭받았으나, “사람들이 민족반역자다, 매국노다, 하는데 지금 독립운동 한다고 해서 나를 애국자라 하겠는가?” 하고 참여를 거부하였다. 교섭을 맡았던 사람이 그가 밀고하지 않을까 우려하였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는 항설이 나돌 만큼 3·1운동은 민족의 단결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언론인·역사학자 천관우(千寬宇)가 “근대 민족운동의 물줄기가 이리로 흘러들고 그 이후의 모든 민족운동이 여기서 흘러나간다”고 지적했듯이 3·1민족항쟁은 우리 근대 민족운동의 분수령이었다. 박은식(朴殷植)은『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피해 상황은 사망 7509명, 부상 1만 5961명, 구속 4만 7948명, 방화된 민가 715호 등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고 적었다.
3·1민족항쟁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 배영운동인 제1차 사타그라하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독립운동 등 아시아·중동 지역의 독립운동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1민족항쟁은 그렇다고 타국의 민족해방운동의 불씨로 번진 것만은 아니었다. 상해의 신한청년당과 만주의 무오독립선언, 일본의 2·8독립선언 그리고 거족적인 3·1운동은 마침내 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구체적인 독립운동의 방안으로 전개되었다.
3·1민족항쟁이 확산되는 가운데 국내외에서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거나 준비를 하게 되었다. 포악한 식민통치에서 서로 연락이 부자유한 처지라 유사한 여러 곳의 임시정부가 태동한 것이다.
그 중에서 서울의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大朝鮮共和國漢城政府)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서 수립한 노령정부(露領政府)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대표적이다.
한성정부는 3·1민족항쟁 직후 서울에서 추진되어 4월 2일 인천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열고 4월 초 서울에서 국민회의를 개최하여 선포하였다. 노령에서는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를 국민의회로 정비하고 3월 21일 국민의회에서 임시정부의 체제로 개편하였다.
상해의 민족지도자들은 이 해 4월 초 서울에서 망명한 인사들로부터 한성정부 수립 추진의 소식을 듣고, 13도 대표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3개의 임시정부는 상해와 노령의 임시정부가 1919년 9월 6일 제1차 개헌 형식을 거쳐 통합하고, 한성정부도 요인들이 속속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면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단재는 국내의 3·1민족항쟁 소식을 듣고 “전울과도 같은 감격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얼마나 기다리던 소식인가? 당장 고국으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조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상해·노령·민주 지역의 망명 동지들과 빈번한 연락을 취하면서 상해로 건너갔다. 3월 하순에서 4월 초에 걸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조성환(曺成煥)·조소앙(趙素昻)·신익희(申翼熙)·조완구(趙琬九)·서병호(徐丙浩)·남형우(南亨祐)·여운형(呂運亨)·신석우(申錫雨)·현순(玄楯)·이광수(李光洙)·김철(金鐵)·손정도(孫貞道)·최창식(崔昌植)·선우혁(鮮于爀) 등이 상해에 와 있었다.
단재는 이들과 만나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여 29인 발기인 중의 한 명으로 추천되었다. 29인은 단재를 포함하여 현순·손정도·신익희·조성환·이광(李光)·이광수·백남칠·조소앙·김대지(金大池)·남형우·이회영(李會榮)·이시영·이동녕·조완구·김철·선우혁·한진교(韓鎭敎)·진희창(秦熙昌)·신철(辛鐵)·이홍근(李弘根)·신석우·조동진·조동우·여운형·여운홍(呂運弘)·현창운·김동삼 등이었다.
임시정부 발기인 대회에서 회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으로 하자는 동의가 채택되어 의정원이 성립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의정원은 국호 문제를 비롯하여 임시정부의 기본 체제에 관해 활발한 토론 끝에 국호를 대한민국, 정체를 민주공화국으로 하고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 정부 구성에 합의하였다.
단재는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왕정 체제로 복귀하자는 복벽주의자(復辟主義者)들을 설득하였다.
● 이승만의 위임통치론(委任統治論)에 격분
임시정부의 조각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일어났다. 신석우(申錫雨)는 국무총리에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大朝鮮共和國漢城政府) 집정관총재인 이승만(李承晩)을 선출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단재는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반대 이유는 이승만은 1919년 2월에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포기하고 국제연맹(國際聯盟)의 ‘위임통치(Mandatory)’를 청원했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정한경(鄭翰景)은 1919년 2월 25일 미주에서 “연합국들이 장차 한국의 완전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일본의 현 통치에서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의「청원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정한경은 3월 14일 미국 신문기자에게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국제연맹회의에서 한국을 관할하되, 민주 정치를 하는 미국이 한국 정치를 고문하여 차츰 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자 한다”고 설명하였다.
이들의 위임통치론의 본질인 국제연맹의 위임통치가 실제로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고문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정한경은 또 3월 21일자『뉴욕타임즈』기고문에서 “한국의 모든 인민은 한마음으로 파리 강화회의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호소하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한국에서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나고 미국의 신문에도 이 사실이 보도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한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의 의지를 손상시키고 대일항쟁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단재가 이승만의 국무총리 선출에 단호하게 반대한 것은 이 같은 ‘위임통치론(委任統治論)’ 때문이었다. 단재는 이 자리에서 국무총리 후보에 하와이에서 무장투쟁론을 전개하면서 군사훈련을 시키고 북경에 머물고 있는 박용만을 천거하였다. 조소앙이 박영효를 천거했다가 부결된 데 이어 단재가 박용만을 천거한 것이다. 그러나 박용만 안도 부결되고 김동삼이 이상재(李商在)를 천거했다가 역시 부결되고, 현창운이 단재를 천거했지만 역시 부결되었다.
천거 인사 대부분이 부결되자 여운형은 안창호, 신석우는 이동녕, 현순은 조성환, 이영근은 김규식을 각각 천거했지만, 이들도 모두 부결되었다. 새로이 천거한 결과 이승만, 안창호, 이동녕 3인이 국무총리 후보로 천거되고, 무기명 단기식 투표 결과 이승만이 국무총리에 선출되었다.
‘완전독립’과 ‘자주독립’을 주창해온 단재는 ‘위임통치론자’인 이승만을 임시정부의 첫 국무총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당선되자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단재는 회의장에서 “미국에 들어앉아 외국의 위임통치나 청원하는 이승만을 어떻게 수반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이오? 따지고 보면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오. 이완용 등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우리 나라를 찾기도 전에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란 말이오!” 하고 성토하면서 퇴장하였다. 열혈 청년들이 회의장을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이들을 뿌리치고 퇴장하였다. 그러나 단재는 아직 임시정부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신채호는 제11회 상해 임시정부의 조직 때에는 그 자리에서 ‘퇴장’했으나 그렇다고 임시정부와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신채호는 임시의정원의 제2회 회의(1919년 4월 22일)에도 의정원 의원으로서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제5회 의정원 회의(1919년 7월 7일~19일)에서는 다시 의정원 전원위원회(全員委員會) 위원장을 맡고, 또한 충청도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신채호는 1919년 4월~7월까지는 상해 임시정부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신용하,『증보 신채호의 사회사상연구』, 54쪽~55쪽.
단재가 거센 항의를 하면서 회의장을 빠져나온 정황을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는 …또 이승만 박사의 먼테토리 문제는 대의상 용서할 수 없고 안도산은 국민회장으로 이 박사를 대표로 임명 파견하였으니, 그래서 사분(私分)으로 무척 흠모하건마는 찾지 아니하노라고 말하고
“우리가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오? 대의밖에 더 있소? 절개밖에 더 있소?”
하고, 절개의식의 마멸은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이라고 극론하였다.
……먼저 임시정부를 조직할 때는 이 박사의 수반을 반대하여 일좌(一座)의 위협 만류도 듣지 아니하고
“나를 죽이구랴.”
하고 벌떡 일어나서 유유히 회장에서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기미년 4월 10일 그 전날, 즉 9일부터 만 24시간 불면불휴로 토의한 임시정부 성립의 날이었다. 그는 열혈 있는 청년 수인의 생명에 대한 위협도 모른 체하고 초지를 굽히지 아니하였다. 거기 단재의 불굴(不屈)하는 성격이 잘 나타났던 것이다."- 이광수,「탈출도중의 단재 인상」,『개정전집』, 下 472쪽~473쪽.
● 임시정부의 외교론 등 통박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막중한 시기에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이승만이 국무총리에 당선되었다고 하여 회의장을 뛰쳐나온 단재의 행위는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다. 3·1민족항쟁의 성과로 어렵게 애국지사들이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고 있는 역사적인 자리였다. 또 민주주의 일반 원칙에도 걸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단재는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은 3·1민족항쟁으로 봉기한 국민의 뜻과도 배치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코 사분이나 사감이 아니라 민족적 대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법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 교통총장 문창범 등 각부의 청장과 차장을 선출하여 출범하였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한성정부 체제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는 국무위원 선임은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독립운동 방법론에 있어서 지나칙 외교중심론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임시정부 구성이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지주, 부르주아 계층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명망가 중심이라는 비판이 따랐다.
이승만은 취임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 워싱턴에서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자격으로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대내외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동포사회에서는 집정관총재의 직명을 쓰고, 대외적으로는 대통령(President)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임시정부를 대단히 곤경에 빠뜨리게 하는 일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대통령(大統領)이란 칭호를 사용하지 말도록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미 각국에 보낸 국서에 대통령 명의를 사용하면서 도리어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독립운동에 지장이 온다는 사실을 들어 임시정부에 회신하였다.
결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국무총리 직위를 대통령으로 고쳐 이를 사용하는 것을 승인하는 정부 조직을 개편하는 개헌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였다. 위인설관(爲人設官)격의 개헌안이었다. 그리고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의 대통령 추대 문제가 정식으로 거론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승만과 안창호 등 임시정부의 지도노선이 외교론에 의존하려는 성향으로 굳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명망가 중심과 외교중심론은 명실상부한 ‘통합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령 국민회의와의 통합 과정에서도 해소되지 않았다. 상해 임시정부의 명망가적 성격은 노령 국민의회의 무장투쟁적인 노선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임정 지도부에서는 여러 가지 독립운동 방법론이 제기되었다. 초기에는 안창호가 내무총장으로 부임하고 국무총리(서리)까지 겸임하면서 독립운동 전략이 준비론으로 고정되었다. 준비론자들은 독립전쟁의 시기를 먼 장래에다 두고, 지금 당장은 민심의 통일과 지덕(知德)의 준비, 국민개조에 있다고 하였다. 안창호와 이광수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이 준비론은 다시 실력양성론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은 시종일관 외교론을 주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성립된 베르사이유 체제에서 국제연합이 조직되고 민족자결의 원리에 의해 약소국가가 독립될 수 있으니 위임통치를 포함한 외교를 통해 독립을 이루자는 방안이었다.
이에 반해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전쟁론을 주창한 이동휘는 “노·중령에 10만 규모의 의용병을 모집”하고 “국내 용병사관학교와 비행대 편성을 하자”는 등 의욕적인 무장투쟁론을 펴고, 미국에서 군사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조직하고 무장투쟁론을 주장해온 박용만은 북경으로 와서 군사통일회를 조직하고 무장투쟁론을 제기하고 있었다. 단재는 초지일관 무장투쟁의 독립전쟁론을 주장하였다.
단재가 임시정부와 본격적으로 결별한 것은 1919년 8월 28일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대통령, 임시의정원, 국무원, 법원 등 삼권분립에 입각한 임시헌법 개정안과 총리제를 대통령제로 하여 이승만을 추대하자는 임시정부 개조안이 상정되면서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이른바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노선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창조파는 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을 내세우며 3·1민족항쟁으로 봉기한 국민들의 독립투쟁의 열정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이었다. 여기에는 단재와 박은식·김창숙 그리고 노령에서 독립운동을 해온 무장투쟁 세력과 북경의 박용만 계열이 합세하였다.
반대로 개조파는 3·1민족항쟁 후 독립운동 세력의 총의로 구성된 상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달리 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이승만·안창호를 비롯한 임시정부 지도층 대부분이 여기에 동조하였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