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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유격대 토벌전에 앞장섰던 백선엽은 어떻게 전쟁 영웅으로 부각되었는가?

참의부 |2013.09.08 18:16
조회 117 |추천 1

● 이승만·백선엽·박정희 ‘친일·숭미 3인방’의 인생유전

 

이승만(李承晩)·백선엽(白善燁)·박정희(朴正熙). 한국 현대사를 풍미했던 이들 ‘친일(親日)·숭미(崇美) 3인방’이 지난 2011년 한국사회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었다. 발단은 이승만 동상 건립과 ‘공영방송 KBS’의 특집 프로그램 때문이다. KBS는 2011년 6월 백선엽을 ‘민족영웅’으로 미화한《전쟁과 군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2부작으로 방영한 데 이어 9월에는《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초대 대통령 이승만》2부작을 내보냈다. 문제는 KBS가 이들 두 사람에 대해 공과(功過)를 제대로 짚기보다는 찬양 일변도의 내용을 방영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박정희가 빠질 수 없다. 지난해 5월, 5·16정변 50주년을 맞아『조선일보』·『중앙일보』등 수구언론에서 ‘박정희 찬양가’를 틀어대면서 다시 ‘박정희 논쟁’에 불을 붙였다.

 

한편, 이들 세 사람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들로 하나같이 역사적 평가에서 공과(功過)가 교차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다보니 수구우익세력과 진보개혁진영 간에 호불호도 극명하게 갈린다. 수구우익세력은 이들을 영웅시하는 반면 진보개혁진영에서는 친일전력 등을 이유로 부정적 평가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이들 세 사람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을 한번 따라가 보자.

 

우선 세 사람 가운데 이승만과 박정희는 전직 대통령으로, 장기집권과 독재통치로 삶의 마지막을 비참하게 마쳤다. ‘백색독재자’ 이승만은 4·19민중혁명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쓸쓸히 지내다가 생을 마쳤다. ‘군부독재자’ 박정희는 18년 장기집권 끝에 1979년 10·26궁정동총격사건으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을 맞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두 사람 모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현재 생존해 있는 백선엽도 사후 이곳 장군묘역에 묻힐 가능성이 크다.

 

백선엽(1920년생)과 박정희(1917년생)는 경력 면에서 공통점이 아주 많다. 우선 두 사람은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 출신이다. 평남 강서 출신인 백선엽은 평양사범학교를, 경북 구미 출신인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 두 사범학교는 당시 서울의 경성사범학교와 함께 3대 사범학교로 꼽힌 명문으로 이들이 수재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두 사람은 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있다가 군대에 입문한 것도 똑같다.

 

백선엽은 만주국의 봉천군관학교 9기로,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 2기로 입교했다. 백선엽의 ‘봉천군관학교 9기’는 박정희의 1기 선배인 ‘신경군관학교 1기’와 같은 셈인데, 나이가 적은 백선엽이 박정희보다 만주국군관학교 입교가 빠른 데는 이유가 있다. 박정희는 사범학교 졸업 후 ‘의무복무기간’을 다 마치고 입교한 반면 백선엽은 도중에 입교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총독부에서 이를 문제 삼자 그때 백선엽을 도와준 사람은 만주국군의 군의장교 원용덕이었다.

 

백선엽과 박정희 두 사람 모두 ‘만주국군관학교’ 출신이었던 만큼(박정희는 본과 2년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다님) 둘 다 만주국군에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이때의 경력이 이들 두 사람에겐 두고두고 치명적인 오점이 됐다. 소위 ‘친일군인’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박정희는 만주국군 보병 제8여단장(대좌급)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2년 봄 만주국군 소위로 자무쓰[佳木斯]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에 배속돼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8·15해방 당시 두 사람의 계급은 모두 중위였다.

 

한편 두 사람의 만주국군 경력과 관련해 비난이 심한 쪽은 박정희보다는 백선엽 쪽이다. 그건 조선인들로 구성된 항일유격대(抗日遊擊隊)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등을 주로 토벌해온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 때문이다. 그간 알려진 바나 또 필자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박정희는 간도특설대에 몸담은 적은 없다. 반면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 3년간 근무했다. 이는 백선엽 자신이 남긴《군과 나》라는 회고록에도 잘 나와 있다.

 

“봉천군관학교를 마치고 1942년 봄 임관해 자무쓰 부대에서 1년간 복무한 후 간도특설대의 조선인 부대에 전출, 3년을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그동안 만리장성 부근 열하성(熱河省)과 북경 부근에서 팔로군(八路軍)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간도특설부대에서는 김백일(金白一)·김석범(金錫範)·신현준(申鉉俊)·이용(李龍)·윤춘근(尹春根) 등과 함께 근무했다.”

 

만주국군관학교 입교자 가운데는 백선엽의 경우처럼 평안도 출신이거나 방원철·김동하 등 함경도 출신이 많았다. 이는 이북지역 출신이라는 지역적 연고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점에서 보면 경북 구미 출신의 박정희나 충남 대덕 출신의 송석하가 만주국에 가서 군인이 된 것은 다소 예외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정희의 경우 나이가 많아 입교가 어렵게 되자 ‘혈서’를 써서 바쳤다는 점에서 그의 친일성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최근에 타계한 김준엽 전 고려대학교 총장은 일본 유학중 1944년 1월 학도병에 강제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배치됐다가 목숨을 걸고 일본군 병영을 탈출, 6천리를 걸어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重慶)으로 가서 마침내 광복군에 합류했다. 누구는 안정된 교사직을 버리고 만주국군 혹은 일본군 장교가 되었고, 누구는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을 탈영했다. 똑같은 시대상황에서 박정희와 백선엽은 김준엽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사정이 이러니 생각도 딴판일 수밖에. 간도특설대 근무에 대한 백선엽의 ‘회고’ 한 대목을 보자.

 

“우리 군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으로서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일본을)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구를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식으로 문죄(問罪)하지 않았는데도 백선엽은 스스로 자신의 죄과에 대해서 인정하고 비판을 감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지난 시절 백선엽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죄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오히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6·25남북전쟁 당시 자신의 전공(戰功)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강조해왔는데, 이는 제대로 따져 묻지 않은 언론의 책임도 없진 않다. 몇몇 수구신문들은 그의 ‘어두운 그림자’는 아예 제쳐둔 채 그를 ‘전쟁 영웅’으로 만드는 데만 혈안이 되어 온 터이다.

 

8·15해방 후 패잔병의 몰골로 귀국한 두 사람은 이후 한국군에서 다시 만났다. 여기서도 백선엽이 빨랐다. 백선엽은 해방되던 해 12월 미군정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약칭 ‘군영’) 1기생으로 입교해 이듬해 2월 임관했다. 반면 해방 후 북경에서 ‘해방 후 광복군’에 잠시 몸담았던 박정희는 해방 이듬해 5월 귀국해 고향에서 빈둥거리다가 그해 9월 뒤늦게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생으로 입교했다. 3개월 단기 과정을 마치고 그해 12월 박정희가 한국군 소위로 임관할 무렵 백선엽은 국방경비대 제5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백선엽과 박정희, 평소 알고 지냈을 법도 한 이 두 사람이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박정희의 좌익활동 때문이었다. 1948년에 발생한 ‘여순군사반란’을 계기로 군부 내에서 숙군(肅軍) 바람이 휘몰아쳤는데, 여기에 박정희가 걸려든 것이다. 여러 증언과 자료에 따르면, 박정희는 남로당(南勞黨)에 가입해 군부 내 조직책을 맡고 있었다. 결국 그가 김창룡에게 붙잡혀 군사재판에 회부돼 처형 위기에 몰렸을 때 그를 구명해준 사람이 바로 백선엽이었다. 당시 백선엽은 육군 정보국장으로 있으면서 숙군 총책임자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박정희는 6·25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 소령으로 다시 군에 복귀했고, 백선엽은 제1시단장으로 전투를 지휘했다. 개전 초기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낙동산까지 후퇴한 백선엽은 미국군 제27연대와 함께 칠곡에서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를 치렀으며, 다시 반격에 나서서는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입성으로 그는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전쟁 중인 1952년 7월 그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그때 그는 불과 32세였다. 6·25전란 발발 직후 하동·진주 방면의 전투에서 북한군 제6사단의 매복기습으로 전사한 채병덕 후임으로 정일권이 졸지에 육군참모총장 겸 3군사령관에 취임한 때가 33세였으니 백선엽도 이에 못지않게 승승장구한 셈이다.

 

한편 현역으로 복귀한 박정희는 1953년 11월 준장으로 승진, 장군이 되었으며 2년 뒤 55년 7월 제5사단장으로 나가면서 ‘은인’ 백선엽을 다시 만났다. 당시 백선엽은 육참총장을 마치고 1군사령관을 맡고 있었는데, 5사단이 1군 예하에 있었다. 그해 ‘탄신 80회’를 맞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 시찰을 하면서 5사단에도 들러 박정희 사단장과 악수를 나눴다. 그런데 이날 박정희는 이승만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박정희는 평소 그가 따르던 수도경비사령관 이용문과 함께 이승만 축출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용문이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면서 이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승만→백선엽→박정희로 이어진 라인업은 1960년 4·19민중혁명을 기화로 졸지에 붕괴되고 말았다. 우선 최고권력자 이승만은 4·19민중혁명 일주일 뒤인 4월 26일 대통령에서 하야한 후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제1군사령관을 마치고 두번째로 육참총장에 취임한 백선엽은 연합참모회의 의장(현재 합참의장) 재임 중 4·19민중혁명을 맞았다. 당시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 장교들의 군부 쇄신운동에 떠밀려 급기야 그해 5월말 그는 군문을 떠나야만 했다. 이후 백선엽은 중국주재 대사를 시작으로 근 10년간 해외에 대사로 나가 있었다. 결국 최후의 생존자는 박정희 한 사람뿐이었다.

 

한편 4·19민중혁명 이듬해인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마침내 최고의 권좌에 올랐다. 박정희는 해외를 떠돌던 백선엽을 불러들여 교통부 장관(1969년~71년)을 시킨 다음 이어 국영기업체 여러 곳의 사장 자리에 앉혔다. ‘은인’에 대한 그 나름의 ‘보은’인 셈이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망명지 하와이에서 별세한 후 시신이 국내로 운구되자 박정희는 3부 요인을 대동하고 김포공항으로 나가 영접했으며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토록 했다. 이 역시 한때 그가 모셨던 지도자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을 것이다.

 

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이미 죽었고, 백선엽은 1920년생으로 올해 92세다. 죽은 두 사람은 모두 대통령을 지냈으며, 백선엽은 이들 두 사람 밑에서 장군과 장관을 지냈다. 권력 창출자가 아니었기에 백선엽은 최고 권좌에 오르진 못했지만 한 개인으로 보면 부귀영화를 두루 누린 셈이다. 특히 박정희와는 도움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지낸 사이라고 하겠다. 4·19혁명과 5·16쿠데타로부터 반게시가 지난 지금에 와서 이들이 새삼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풍미했던 이들 3인은 이제 ‘역사의 법정’에 섰다. 공정한 판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의 공(功)과 과(過)를 빠짐없이 저울에 올려놓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고 나서 평가할 것은 평가하고 또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 될 터이다. 따라서 KBS의 이승만·백선엽 찬양 프로그램 방영이나 수구세력 일각에서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는 주장은 모두 ‘페어플레이’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들에 대한 역사 법정의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적 인연을 앞세운 일방적인 찬양은 되레 그들을 두 번 법정에 세우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 ‘백선엽 영웅 만들기’, 기념비에 명예원수까지

 

최근 들어 백선엽이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은 것은 지난해인 2011년 6월 KBS가 2회에 걸쳐 백선엽의 6·25전란에서의 공적을 찬양하는《전쟁과 군인》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했기 때문이다. 23일엔 제1부〈기억의 파편을 찾아서〉, 25일엔 제2부〈싸움의 능선을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특집방송은 백선엽의 공과를 균형 있게 다루기는커녕 일방적으로 그를 ‘전쟁영웅’으로 찬양하는 데 그쳤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논란의 핵심인 그의 친일전력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24일 방영된 제1부에서 백선엽이 지휘하던 제1사단의 평양 입성(1950년 10월 19일)을 언급하는 가운데 “백선엽이 평양에서 자랐고 이후 만주국군관학교에 입학해 일본군 장교를 지냈으며, 이 전력으로『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고 언급한 게 친일전력 부분의 전부였다. 그의 친일전력의 핵심이랄 수 있는 간도특설대 근무 경력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반면 뒤이어 곧바로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다”며 오히려 그가 민족진영에서 활동한 것처럼 호도했다.

 

‘백선엽 미화’의 결정판이랄 수 있는 지난번 KBS의 특집방송은 최근 한국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승만·박정희 미화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미 수년 전부터 착착 준비돼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허물이나 비판요소는 덮어둔 채 동상 건립이나 각종 찬양행사, 기념비 건립 등이 그것이다. 혹자는 ‘백선엽 미화’를 통해 박정희의 ‘친일’과 이승만의 ‘독재’를 희석시키려는 의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간 군부를 중심으로 진행돼온 백선엽 미화 작업의 실태가 이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백선엽은 이미 알려진 대로 만주 봉천군관학교 9기생 출신으로 항일유격대 토벌작전을 전담하는 간도특설대 근무 중 해방을 맞았다. 귀국 후엔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군 장교로 변신했다. 1948년 ‘여순군사반란’ 당시 육군본구 정보국장으로 숙군(肅軍) 책임자였던 그는 박정희 구명에 앞장섰으며, 6·25남북전쟁 때는 제1사단장으로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를 지휘했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33세 때 한국군으로서는 첫 4성 장군에 올랐다. 이밖에도 그는 육군참모총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으며, 한국군 현대화에 공로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니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몇 세워졌을 법도 한데 첫 기념물은 전북 남원의 명물 광한루 경내에 들어섰다. 이승만 대통령이 탄신 80회를 맞은 1955년 5월 15일 이승만의 지시로 이곳에 백선엽 ‘공적비’가 세워졌다. 그의 ‘공적’이란 6·25남북전쟁 당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공로를 일컫는다. 1951년 말 미국군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임무를 백선엽 당시 1군단장에게 맡기고는 사령부 명칭을 그의 이름을 따 ‘백야전전투사령부(白野戰戰鬪司令部)’로 불렀다.

 

당시 그가 붙인 공비토벌 작전명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r Kill)’으로, 이는 지리산을 포위해 토끼몰이식으로 주민을 소개(疏開)하고 먹을 것을 없애 고사시키는 방식이었다. 그의 이 같은 무모한 작전으로 인해 지역의 무고한 민간인 다수가 희생됐다는 증언이 얼마 전에 보도된 바 있다(그의 공적비는 1987년 6월 6일 토벌현장인 지리산 뱀사골로 옮겨졌다.).

 

한편 이곳에는 백선엽 이외에도 2명의 토벌공로자 공적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전경사 사령관 신상묵과 경무관 최치환이 바로 그들이다. 신상묵(辛相默)은 대구사범학교 5기생으로 박정희의 1기 후배이며, 그 역시 박정희·백선엽처럼 교사 근무 중 일본군에 자원입대했다.

 

8·15해방 후 신상묵은 1946년 국립경찰 양성 1기로 미군정 시절 경찰에 투신했는데, 열린우리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지낸 신기남 전 국회의원이 그의 아들이다. 수년 전 그의 친일행적이 말썽이 돼 신 의장이 당직에서 하차해야만 했다. 최치환(崔致煥)은 만주국군관학교 출신으로 그 역시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하여 서울시 경찰국장을 지냈다. 이들 3인 모두 친일전력이 있는 인물들이다.

 

한편, 백선엽의 대표적인 전공(戰功)은 6·25동란 61주년인 지난 25일 폭우로 무너져 내린 ‘호국의 다리(일명 왜관철교)’ 일대에서의 ‘다부동전투’라고 할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남침한 북한군은 열세인 남한군을 물리치고 3일만인 6월 28일에는 서울을, 7월 말에는 목포와 진주를, 8월 초에는 김천과 포항을 파죽지세로 함락시켰다.

 

급기야 남한군과 미국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는데 이 가운데서도 칠곡 다부동은 전략상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이에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3개 사단 약 2만 1천 5백명의 병력을 투입해 필사적인 공세를 펼쳤고, 이에 맞서 남한군 제1사단과 미국군 제27연대는 화력의 열세에도 북한군의 ‘8월 총공격’을 저지하여 대구를 사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던 중 9월 15일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보급로가 차단되고 동시에 낙동강방어선에서 남한군과 미국군의 총반격이 개시되면서 한때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던 다부동을 탈환했다. 이후 남한군은 기세를 살려 북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데 이어 백선엽이 지휘하던 제1사단은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했다.

 

이 같은 국면전환은 백선엽이 지휘한 1사단이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 3개 사단 병력을 격퇴시킨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6·25남북전쟁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격전이었던 다부동전투의 현장인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유학산(遊鶴山) 기슭에는 남한군 제1사단의 승전을 기려 1981년 다부동전적비가 세워졌다.

 

이와는 별개로 칠곡군에는 백선엽의 전공을 기리는 기념비가 두 곳에 서 있다. 하나는 1973년 9월 칠곡군 유지들이 군내 동명면 소재 동명초등학교 교정에 세운 ‘백선엽 전적비’가 그것인데, 이곳은 당시 남한군 1사단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또 하나는 지난 1981년 다부동 전적지에 세운 백선엽 공적비가 그것인데 비석 전면에는 ‘대한민국 제1사단장 육군 준장 백선엽 호국구민비’라고 새겨 있어 흔히 ‘호국구민비’라고 불리고 있다. 이 비석은 당초 가산면 다부리 414호 5번지에 있던 것을 지난 2003년 7월 ‘다부동전적기념관’ 경내로 이전했다. 이 두 기념비의 경우 그의 전공을 기린 것으로 크게 논란까지 될 것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후부터 진행된 과도한 ‘백선엽 미화’다. 특히 미화의 양태나 방식도 다양할 뿐더러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추진돼오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미화 작업의 첫 테이프는 그의 친정이랄 수 있는 육군본부가 끊었다.

 

육군본부는 옛 참모총장 접견실을 개조한 후 이 방을 그의 이름을 따 ‘백선엽장군실’로 명명한 후 2005년 3월 28일 개관식을 가졌다. 특정인물을 기념해 기념비나 동상을 세우는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정부기관의 청사 내에 특정인의 이름을 딴 방을 만드는 경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백선엽장군실’은 따가운 비판에 직면했다. ‘백선엽 미화’라는 지적 때문이었다.

 

이에 육본이 대안으로 내놓은 인물이 바로 하얼빈의거의 주역 안중근 의사였다. 육군본부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하루 앞둔 2010년 3월 25일 ‘안중근장군실’ 개관식을 가졌다. 그러나 세간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백선엽 미화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는 지적이다.

 

한편 육군 제1사단은 ‘안중근장군실’ 개관 보름 전인 2010년 3월 9일 사단 사령부에서 또 하나의 백선엽 기념물을 제막했다. 보도에 따르면 1사단은 이날 사단 내 전진광장에서 백선엽 공적기념물 제막식을 가졌는데 그는 이날 제막식에는 참석했다.

 

기념물은 사단 약사와 6·25전쟁 경과를 기록한 1점, 백선엽의 공적을 새긴 1점 등 모두 10점의 기념석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 가운데서 백선엽 기념물이 가장 돋보이는 편이다. 군복차림의 얼굴사진과 함께 정면 한가운데에 배치한 때문이다. 1사단 측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선배 전우들이 이룬 자랑스러운 부대 역사와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물을 제작했다”고 하나 역대 사단장 가운데 그를 특별히 부각시킨 점은 ‘백선엽 미화작업’의 하나로 보기에 충분하다.

 

육군본부에 이어 이번에는 국방부가 본격적으로 나섰다. 지난해 국방부는 6·25남북전쟁 60돌을 맞아 기념사업의 하나로 백선엽(예비역 대장)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원수(元帥)는 5성 장군을 말한다. ‘원수’는 6·25남북전쟁 당시 연합군을 지휘한 맥아더 원수처럼 전시에나 볼 수 있는 계급이다. 따라서 현역 5성 계급의 지위는 극히 소수의 나라에만 존재하며, 우리보다 화력에나 병력에서 규모가 큰 미국군에도 원수 계급의 장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부가 비록 ‘명예’를 붙였다고는 하나 그에게 ‘원수’ 추대를 추진한 것은 ‘백선엽 미화’의 극치였다고 하겠다.

 

무리수는 반발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그가 일제강점기에 만주국군 중위로 복무하면서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유격대 토벌작전을 지휘했던 ‘친일행적’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다. 일반국민은 물론 심지어 일부 군 원로들도 그의 ‘명예원수’ 추대를 반대하고 나섰다. 비록 표면적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을 정신적 뿌리로 하고 있는 남한군이 친일전력이 있는 그를 ‘명예원수’로 추대할 경우 건군이념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결과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6·25전란 참전 군 원로들의 반발도 만만찮았다. 그들은 “백선엽 장군 혼자 싸운 게 아니라 전부 도와서 싸웠다. 혼자만 원수 자격이 있느냐”며 반발하고 나섰다. 결국 국방부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미흡하다”며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한편 충남대학은 2011년 6월 9일 ‘창군 원로이자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에게 ‘명예 군사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남한군 창설에 참여해 창군의 기초를 닦았고, 다부동전투와 평양 입성을 대표적 공적으로 들었다. 기업인도 받고 정치인도 더러 받는 명예박사학위니 굳이 이것까지 토를 달 필요는 없다고 치더라도 파주시가 줄기차게 그의 동상 건립을 추진해온 점은 가벼이 보기 어렵다.

 

파주시는 6·25남북전쟁 발발 61주년을 맞아 2011년 6월 25일 임진각에서 ‘6·25참전기념비’를 제막했다. 이 부조물에는 백선엽을 중심으로 그를 따르는 참전용사와 학도의용군이 진격하는 장면이 새겨 있어 백선엽이 이 기념비의 ‘포인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간 기념비 제막식이 있기까지 파주 지역사회에서 적잖은 잡음이 있었는데 이는 ‘백선엽 미화’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당초 파주시에서 세우려고 했던 것은 이 같은 부조물이 아니라 백선엽의 동상 건립이었다. 그러나 지역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이 부딪치자 결국 동상 건립을 포기하고 대신 이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백선엽 동상 건립을 강력하게 추진해온 사람은 이인재 파주시장. 그는 민주당 출신이지만 ‘안보에 관해서는 보수꼴통’을 자처하며 “어떤 이념과 논리도 국가안보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주장해온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2010년 7월 1일 부임한 이 시장이 백선엽 동상 건립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6·25동란의 실상을 모르는 후대에게 안보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북한과 접경인 파주의 시장으로서 뭔가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접경지대의 지역자치단체장으로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시장은 백선엽에 대한 다각도의 검토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11월 파주시는 이인재 시장 등 선양사업추진위원 20여명이 참석해 선양비건립추진위원회 정관 및 선양비 시안을 확정한 후 관련 예산 2억여원을 배정했다. 그리고는 자유로에 “함께 지켜낸 대한민국, 6·25전쟁영웅 백선엽 장군,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과 백선엽의 사진이 실린 대형 광고판을 내걸었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파주지역 10개 정당·시민사회단체는 ‘친일인사 백선엽 동상 건립 반대 파주시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반대운동에 나서 1인 시위와 1만인 서명운동, 촛불문화재 등을 이어갔다. 결국 파주시는 항복했고 동상 대신 ‘6·25전쟁영웅 백선엽 장군 기념조형물’을 세우게 된 것이다. 

 

☞ 정운현『오마이뉴스』논설기자 겸『진실의 길』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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