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분자「소탕선언문」발표
다물단은 김달하를 처단한 후「악분자 소탕선언」을 국내에서 발행되는『시대일보』등에 우송하였다. 선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독립전쟁을 하기 위하여 큰 칼로서 왜국 총독과 왜국 천황을 죽여야 하지만, 조선인으로서 왜노의 혼을 가진 분자부터 먼저 소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선언한다. 왜노를 우리의 독립전쟁의 목표로 삼는다면 불량 분자인 왜노의 개[犬]는 독립전쟁의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이 장애물을 소탕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전도는 폐쇄되고 독립전쟁은 진행하기 곤란하므로 우리들은 악한 분자를 소제할 것을 맹세한다.˝
다물단은 독립전쟁의 장애물이 되는 친일파를 처단할 것임을 거듭 천명하면서 친일파들에게는 경각심을, 동포들에게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김달하 처단사건과 관련하여 북경 거주 한국인 교포들은 중국 관헌들의 엄중한 감시를 하게 되고, 단재를 비롯한 심산·우당 등 지도급 인사들은 한때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단재는 감시와 체포를 피해가면서 저술과 다물단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사건 직후 우당과 단재 두 사람 사이에는 한때 오해로 인해 소원한 관계가 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신채호와 김창숙은 “이회영 내외가 김달하의 집을 조문갔다”는 와전된 소문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곧『북경 시대』를 통하여 가까운 동지였던 이회영 앞으로 “우당장 내외가 김달하 초종(初終)에 조상갔다니, 앞으로 절교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더욱이 이무렵 다물단의 행동대원들도 이회영을 도리어 김달하와 같은 부류로 지목하고 감시하는 일마저 생겨 이회영으로서는 몹시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이쯤 되자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그들 부처가 처한 곤경과 오해를 풀기위해 비장한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곧 아들 이규창을 데리고 신채호와 김창숙이 동거하는 서단패류 한세량의 집으로 찾아가 부엌에서 쓰는 칼을 들이대며, 그 사실의 유무를 따져 마침내 오해를 풀게 되었다.〃- 최홍규,『신채호와 민족주의 사상』, 형설출판사, 1983년, 217쪽.
이 때의 정황에 대해 이은숙은 다음과 같이 그 전말을 밝히고 있다.
〃그 시(時)의 북경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행동이 대단히 엄할 때라, 다물단원 한 사람은 육혈포(六穴砲)를 차고 우리 집에 무슨 눈치가 있나 하고 종종 다니니 살얼음판 같은지라. 내가 무심히 있다가는 가군의 신분이 위험한지라. 하루는 아침 일찍 규창을 데리고 집안 식구들 모르게 칼을 간수하여 단재와 심산이 있는 집에 찾아가니 아침 식사중이라 하여간 바싹 추켜잡고 일일이 들은 말대로 따지며,
“너희 눈으로 우리 영감이 김달하 집에 조상간 걸 보았느냐? 잘못 보는 눈 두었다가는 우리 동포 다 죽이겠다. …우리 영감의 굳세고 송죽 같은 애국지심을 망해 놓으려고 하는 놈들, 김달하와 처음부터 상종한 놈들이 저희가 마음이 졸여서 누구를 물고 들어가려고 하는가? 정말 바로 말 아니하면 이 칼로 너희 두 놈을 죽이고 가겠다!” 하고, 어찌나 분한지 죽을 것 같이 몸부림을 치며 두 사람을 휘어잡았다.
두 사람은 나중에, “잘못했소. 우리들이 잘못 알고 그랬소” 하며 사죄를 했다.
이런 중에 가아(家兒)가 와서 한진산 병원에 가 내 몸의 상처를 치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군께 좀 걱정을 들엇지만 그 뒤부터는 일절 우리에 대해 부정한 말이 없었다.〃- 이은숙,『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정음사, 1975년, 52쪽~53쪽.
단재의『북경 시대』시 중에「영오(詠誤)」가 있다. ‘잘못됨을 읊음’으로 번역되는 시다. 혹시 이 무렵에 독립운동의 동지 우당을 오해한 데서 읊은 것이 아닐까 싶다.(원문 한시)
˝나는 잘못 듣고 그대는 잘못 말하고
잘못을 고치자한들 어느 누가 진실인지
인생이 태어난 게 원래 잘못 온 건데
잘못을 잘 되게 하면 결국 선인이 되지˝
단재와 그의 동지들은 망명지의 간고한 삶 속에서도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서릿발 같은 지조를 지키며 돈독한 우애를 나누었다. 다물단은 아나키즘적 경향의 단체였다. 단재는 이후 사상적으로 아나키즘에 더욱 경도하게 되었다.
● 다물단의 시대적 역할
『북경 시대』에 단재가 선언문을 쓰고 적극 참여하여 일제의 악질 밀정을 처단한 다물단에 대해 박환 수원대학교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 역할을 정리하였다.
˝첫째, 중국 관내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는 주로 상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다물단은 그 근거지가 북경에 있다는 점이 일단 하나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적인 거점은 다물단의 활동에 일정한 제약과 특성을 이루게 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다물단은 동 시대의 북경 지역의 단체들이 주로 선전활동에 힘을 쏟는 가운데 의열투쟁 노선을 취하고 있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북경 지역은 기본적으로 한국인 동포의 숫자들이 제한되어 있고 그들 역시 농사에 종사하는 일반 동포들이 아니다. 즉 그들의 대부분은 망명객이나 유학온 학생들 가티 도시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중국 지사들과의 연계투쟁, 선전활동, 의열투쟁 등에 국한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다물단은 신채호·유자명·이회영 등과의 연계 속에서 의열투쟁 노선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선에 따라 김달하를 처단하는 등의 직접 행동을 전개하였다.
셋째, 다물단은 그들의 정치 노선에 대하여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구성원의 성격 등을 통해 볼 때 공화주의를 추구한 것 같다. 아울러 유자명·신채호·이회영 등과의 일부 연계성으로 보아 무정부주의적 특성도 포함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특정 이념을 내세우기보다는 의열투쟁이라는 투쟁 노선에 좀 더 힘을 경주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 북경에서 1923년에 조직된 다물단은 1925년 국민당과 연합하여 다물단의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이것은 양 단체가 자체 역량의 부족으로 연합함으로써 항일운동의 역량의 확대를 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다섯째, 다물단은 상해 임시정부보다는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과의 연계 속에서 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김동삼 등과의 연계가 특별히 주목되며, 대한통의부·정의부 등과의 관계는 좀더 긴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단체들과의 연계 및 위상 설정 문제는 좀더 깊은 검토가 있어야 될 듯하다.
여섯째, 다물단은 김달하 처단, 서울 주요 신문사에 친일파 처단 선언문 발송, 국내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끝으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 신간회 중앙위원으로 참여
1923년 9월 일본에서는 한국인 아나키스트 박열(朴烈)과 그의 일본인 연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요시히토[嘉仁] 일본 국왕과 히로히토[裕仁] 왕세자를 폭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쳐 구속되고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관동지역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정부는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한편, 공산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인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선동한다” 등의 각종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키고,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하였다.
국내에서는 3·1운동 후 총독부가 ‘문화정치’를 내세우고 민족분열 정책을 펴자, 이에 편승하여 민족개량주의가 대두되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1923년 가을부터 한국 민족 역량상 당장의 독립은 불가능하니 자치권을 획득해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변절한 이광수가『동아일보』에 “독립운동을 일본이 허용하는 자치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민족적 경륜」이란 논설을 발표하고 김성수·송진우·최린 등은 자치운동을 위한 결사단체로 연정회(硏正會)를 조직하려다 일제의 개입이 폭로되면서 실패하였다.
1924년 4월에는 무산계급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전국 노동자, 농민단체, 청년조직 260개, 회원수 5만 3천여명에 이르는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이 창립되었다. 조선노동총동맹은 임시총회에서 민족개량주의를 선전하던『동아일보』불매운동 결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의 이민 반대, 친일파 단체인 각파 유지 연맹의 박멸을 비롯해 사회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1925년 1월 만주 길림성에서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분열 이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광정단(匡正團)·의우단(義友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변론자치회(辯論自治會)·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고본계(固本契) 등의 독립운동 단체가 모여 정의부(正義府)를 출범시켰다. 4월에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창설되고, 일제는 5월 7일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그리고 법의 개정을 통해 사상범은 사형까지 받도록 했다. 6월에는 총독부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설치하여 식민사관을 통한 한국사 왜곡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 해 10월 서울 남산에 조선 신궁이 세워지고, 11월에는 구한말 이래 단재와 더불어 언론·역사연구·독립운동을 함께 해온 백암 박은식이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1926년 1월 총독부는 남산 기슭에 있던 통감부 건물에서 경복궁 앞에 지은 거대한 청사로 이전하였다. 매국노 이완용이 2월에 죽었다. 4월에는 융희황제(隆熙皇帝) 순종(純宗)이 파란 많은 생을 접었다. 독살설이 나돌고, 이로 인해 6·10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반일항쟁이었다.
1927년 2월 15일 국내에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치안유지법이 실시되면서 민족적 위기의식이 증폭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신간회는 각계의 호응으로 일본의 도쿄 지회와 오사카 지회를 포함하여 나라 안팎에 총 149개의 지회가 결성되었으며, 회원은 4만여명에 이르렀다.
신간회는 합법운동단체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정기대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조선인에 대한 착취기관 철폐, 일본인의 조선 이민 반대, 타협적 정치운동 배격, 사회과학과 사상연구의 자유보장, 식민지 교육정책 반대 등을 내세우면서 노동파업, 소작쟁의, 동맹휴학 등을 지도했다.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이 일어나자 이를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민중대회를 열려다 집행위원장 허헌(許憲)을 비롯한 40여명의 간부가 체포되었다. 이후 민족개량주의 세력이 신간회 본부를 장악하고 자치운동을 주장하는 등 타협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해소론이 제기되고, 1931년 전체 대회에서 해소안이 가결되엇다.
단재는 북경에서 홍명희의 요청으로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창립총회에서 37명 중앙위원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었다.
그러나 신간회가 점차 타협 노선으로 바뀌면서 이를 심하게 비판하고 다물단원으로 하여금 친일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