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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14. 아픈 가슴 들키어 쥐고 운명의 정한 길로 갑니다 ⑴

참의부 |2013.09.30 03:10
조회 46 |추천 0

● 일본 연호 쓰는 신문 연재 거부

 

〃나는야 필리핀 사나이

싸움터로 간다.

어떠한 운명이 내게 닥칠지

지금은 누가 알 수 있으랴?

나의 운명이 죽음이라면

저 대지 위에 쓰러지리라.

누가 그때 눈물로 슬퍼하며

잠든 나를 덮어주려나?

-「싸우러 나가는 필리핀 전사」〃- 스테판 하벨리나,『새벽을 보지 못하고』, 361쪽, 청계연구소, 1987년.

 

투옥된 지 2년 10개월째인 1930년 5월 9일 대련법정에서 단재는 10년형이 확정되었고 곧 뤼순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차디찬 뤼순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8년여 동안 심한 노역에 시달리면서 옥살이를 해야 했다.

 

단재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1928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의 외국위체 위조사건을 시도하면서 자신이 가야 할 운명의 길을 친구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시하고 있다.

 

˝형에게 한마듸 말을 올니라고 이 붓이 뜁니다. 그러나 억지로 참움니다. 참자니 가슴이 아품니다마는 말하란즉 뼈가 절임니다. 그래서 아푼 가슴을 들키어 쥐고 운명의 정한 길로 감니다….˝ - 홍명희,「곡 단재」,『조선일보』, 1936년 2월 29일.

 

그러나 단재는 뤼순감옥에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옥살이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제 노역 중 10분 휴식 사간에도 책을 읽는 의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종신의 노작으로 출감 후에는『조선사색 당쟁사』와『육가야사』등의 저작을 구상하였다.

 

그가 힘든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안재홍과 신백우의 주선으로『조선일보』학예란에『조선사』(1931년 6월 10일~10월 14일)와『조선상고문화사』(1931년 10월 15일~12월 3일 및 1932년 5월 27일~31일)가 각각 연재되고 있었다.

 

단재는 옥중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면회간『조선일보』기자 신영우에게 원고의 보완과 수정의 필요성을 들어 연재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연재 중단의 이유를 ‘보완과 수정’을 들었지만, 심정적으로는 일본의 연호(年號)를 쓰는 신문에 자신의 글을 게재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소신이었다는 분석이 따른다. 단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안중근과 단재가 순국한 뤼순감옥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가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고, 단재가 8년 옥고 끝에 옥사한 뤼순감옥은 중국 요녕성 대련시 뤼순구구[旅順口區]에 소재한다. 뤼순감옥의 현재 정식 명칭은 뤼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이다. 최초로 1902년 제정 러시아가 건설했고, 그것을 1907년 일본 점령군이 확장했다.

 

러시아는 19세기 중엽 연해주 지역을 점령하여 태평양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인구가 적고, 식량자급이 어려운 극동 러시아 영토의 유지와 방위가 다급하여 가급적이면 극동에서의 분쟁을 피한다는 것을 기본 정책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을 길게 접하고 있는 청나라와 대립,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극동까지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영국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러시아는 1891년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시작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 건설과 극동 지역에 세력을 강화하면서 일본을 당혹하게 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의 세력이 뿌리내리기 전에 대륙, 특히 조선에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려고 하였던 까닭이다. 청일전쟁을 도발한 것도 조선에서 청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청일전쟁의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은 요동반도를 할양받게 되었다. 이것은 만주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러시아에게 위협이 되었다. 이에 제정 러시아는 3국 간섭을 통하여 요동반도를 일본이 청국에 다시 반환하도록 하고, 1896년 치타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북만주를 횡단하는 동청철도 부설권을 얻었다. 1897년 11월 뤼순항에 러시아 해군함정을 파견하고, 이듬해인 1898년 청나라 조정을 압박하여「여대조차조약」을 체결하고 여대(뤼순·대련) 지역을 강제로 조차하였으며, 하얼빈-뤼순 간의 남부선 철도 부설권도 얻었다.

 

1899년 러시아는 식민지통치 지휘부로서 뤼순에 관동주(關東州) 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겸 태평양담당 해군장관에 알렉세예프를 임명하였다. 관동주 총독 에프게니이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Evgenii Ivanovich Alekseev)는 각지에 군대와 경찰, 비밀요원들을 풀어 강압통치를 하였다. 1900년 의화단봉기가 일어나자 러시아군은 뤼순을 기지로 하여 천진의 8개국 연합군에 참여하여 의화단을 진압하는 한편, 수송로를 확보한다는 미명 아래 만주 동삼성을 점령하였다. 이때 체포 구금한 중국인들을 수용하기에 기존의 감옥은 너무 협소하였다. 관동총독부는 이에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건의하여 1902년 뤼순의 원보방(元寶房)에 감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903년 8월 바이칼 이동지역 문제에 전권을 갖는 극동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알렉세예프는 다시 극동총독에 임명되었는데, 대일 강경파인 그의 부상은 일본을 자극하였다.

 

일본은 러시아 철도가 완성되기 전에 러시아와 일전을 벌일 결정을 하였고, 1904년 2월 8일 인천과 뤼순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문에 뤼순감옥의 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때까지 건설된 본관과 85간의 옥사는 전쟁 중 양측의 야전병원과 기마대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군이 다시 뤼순을 점령하였다. 일본은 1907년 러시아가 건설하던 감옥을 22만 6천평방미터 대지 위에 275개의 감방을 만들어 약 2천명 이상을 수감할 수 있도록 확장하여 감옥 내에는 보통 옥사 253칸, 지하감옥 4칸, 병사 18칸이 있었고, 감옥 안에는 몸수색실, 취조 및 고문실, 교수형실과 15개의 작업장이 있었다. 감옥 바깥에는 수감자들이 강제노역을 하는 벽돌가마, 임목장(林木場), 과수원, 채소밭이 있었다. 감옥은 22만 6천평방미터 지역을 관할로 하여 많은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러시아인과 그리스인들이 수감되었으며 처형되기도 했다. 이렇게 확장한 뤼순감옥은 관동도독부감옥서(關東都督府監獄署)로 불리다가 1920년 관동청감옥(關東廳監獄), 1926년에는 관동청형무소(關東廳刑務所)로, 1934년 관동형무소, 1939년에는 뤼순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1909년 11월 3일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3월 26일 뤼순감옥 내의 사형집행장에서 어머니가 보내준 옷을 새로 갈아입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1928년 중국에서 체포되어 1930년 10년형을 받은 단재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1936년에 옥사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뤼순 지역에 들어와 이 감옥을 폐지했으며, 1971년 7월 개수작업을 거쳐 전시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1988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뤼순감옥을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다. 1905년 구뤼순감옥전시관은 전국문물박물관 우수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선정되었다. 현재 연간 60만명 이상이 방문한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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