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한국 근대 민족주의사학(韓國近代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15. 살아서도 사람, 죽어서도 사람 ⑴

참의부 |2013.10.01 00:02
조회 44 |추천 0

● 쉰일곱 해의 장엄한 ‘운명교향곡’

 

˝나는 조국의 하늘에 밝아오는 새벽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새벽을 보게 될 그대들이여! 그대들은 그것을 기쁘게 맞이하라. 그리고 밤 사이에 쓰,러져간 사람들을 결코 잊지 말라.˝(호세 리잘)

 

국내에서는 조선총독부가 1935년부터 각급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한국 농민 80만명을 만주로 이주시키기로 일본 척무성(拓務省)과 합의하는 등 억압과 광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이 해 1월 23일 심훈의 계몽소설『상록수』의 모델 최용신, 1월 31일에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시베리아에서 사망하였다.

 

뤼순감옥에서 긴 옥살이를 하던 단재는 수형생활 7년을 넘기면서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본래 건강체질을 타고나지 못한 데다, 정처없이 떠도는 망명생활, 뤼순지방의 혹독한 추위는 건강을 급속히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건강이 악화되자 형무소 당국은 서울의 가족에게 병보석 출감을 통고하였다. 형무소의 지침에 따라 국내의 친지들이 종문(宗門)의 재력 있는 친일인사를 보증인으로 세우고 가출옥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부러질지언정 휘는 것을 거부하며 올곧게 살아온 그가 받아들일 리 없는 제안이었다. 친일파에게 자신의 몸을 내맡길 수 없다고 이 제의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불의와는 한 치의 타협도 하지 않은 채 험난한 세월을 살아온 그답게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친일파에게 내 몸을 내맡길 수 없다”는 단호함을 보였다. 단재가 아니고는 결단하기 어려운 ‘단재다운’ 행동이었다. ‘운명의 정한 길’로 가는 그에게 ‘운명’은 어쩌면 베토벤의「운명교향곡」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바칠「영웅교향곡」을 만들었다가 그가 권력에 눈이 멀어 황제에 취임하자 이미 지었던 곡을 가차없이 찢어버리고 교향곡을 다시 만들었다. 1808년에 완성된 이 곡의 이름은 제1악장 첫머리의 동기에 대해 베토벤 자신이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고 설명한 그대로「운명교향곡」이었다.

 

57세가 되는 1936년 2월 18일, 단재는 뤼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뤼순의 2월은 여전히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었다. 시멘트 감옥 독방에서 심한 노역과 추위에 시달리던 그에게 병마까지 겹쳐 뇌일혈로 쓰러진 것이다.

 

1930년 5월 9일 뤼순감옥으로 이감된 지 6년여만에 한마디의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쓰러졌다. 고난의 역사에서 불사조와 같이 조국해방을 위해 투쟁해 온 ‘선비 투사’는 더 이상 병마를 버틸 기력을 갖지 못하였던 것이다.

 

형무소 당국에서는 서울의 가족에게「신채호 뇌일혈,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란 전보를 보냈다. 전보를 받은 부인 박자혜 여사와 큰아들 수범, 친우 서세충이 뤼순감옥으로 달려왔다. 가족이 뤼순에 도착하여 까다로운 면회 절차를 거쳐 “병실인지 감방인지 모를 어떤 독방에 안내되었다. 여기도 화기라고는 조금도 없고, 시멘트 바닥에 다다미 몇 장, 그리고 홑이불 정도밖에 안 되는 얄팍한 이부자리, 그 속에 아버지께서 드러누워 계셨다.”

 

이때까지는 의식은 잃었지만 아직 운명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앞으로 한두 시간 정도일까, 기껏 좋아야 오늘 자정을 못 넘길 것이오”라는 의사의 진단에,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니 두 시간만이라도 있게 해 달라, 한 시간만이라도 더…”, 가족의 애끓는 애원에도 저들은 “면회시간이 다 되었으니 퇴출하라”고 가족을 쫓아냈다.

 

그리고 2월 21일 하오 4시경에 아무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가운데 파란 많은 생애를 접었다. 향년 57세, 망명길에 나선 지 26년만이었다. “조국의 하늘에 밝아오는 새벽을 보지 못하고” 그는 눈을 감았다.

 

후일 장남 신수범은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얼마 전 형무소 전옥으로부터 ‘형 만료는 1937년 10월 17일, 현재는 일상생활에서 이상이 없으며 건강도 양호하다’는 서신을 분명히 받았는데, 뇌일혈이라니 이것은 자연 발생한 것일까, 인위로 돌아기시게 한 것이 아닐까? 아무래도 의심이 가셔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사인이 인위적인 것으로 믿고 있다”라고, 의문을 제기하엿다. 하지만 일제 감옥에서 벌어진 ‘음모’의 실상을 당시나 지금이나 알 길이 없다. 단재의 옥사는 영원한 미제의 ‘의문사’라고나 할까?

 

“자기를 낳아준 겨레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친 위대한 인간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오후 4세 20분 얼어붙은 황량한 뤼순감옥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누워서 아무도 지켜보지 못한 채 홀로 그의 장엄한 일생을 마치고 순국하였다.” 출옥을 1년 8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 감옥 전용 화장장에서 한 줌 재로

 

나는 2000년 7월 중순 단재가 순국한 뤼순감옥을 찾아갔다. 그러나 거대한 감옥의 어디에서도 단재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변무충(番武忠) 씨의 소개로 일제 말기에 화장장에서 인부로 일했던 사람(중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단재는 사망한 다음날 뤼순시 용하서(龍河西) 삼리교(三里橋) 부근의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 뤼순감옥에서 시내 쪽으로 1킬로미터 지점 8천여평 부지에 자리잡은, 일제가 감옥 전용으로 설치한 건물이 화장터이다. 당시의 화장장 건물은 지금도 퇴락한 채 남아 있었다.

 

잡초가 무성한 공터 한 켠에 세워진 화장장 건물 2동은 지금은 건축자재를 넣어두는 창고로 변하였다. 중국인 인부는 일제는 당시 뤼순감옥에서 옥사하거나 처형한 항일지사들을 이곳에서 화장하엿다고 증언하였다.

 

중국인 인부는 1936년 2월 어느 추운 날에 조선의 중한 사상범이 죽어 경비가 심한 상태에서 화장했다고 들엇다고 증언하였다. 이렇게 단재의 유해는 낯선 땅 화장터에서 한줌 재로 변하여 가족의 품에 안겨 고국으로 돌아왔다.

 

단재는 생전에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으나, 그의 유해는 후손들을 위해 묘소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서울에 돌아온 유해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 기슭 옛집터에 공개리에 암장되었다. 망명객 단재에게는 국적이 없었기 때문에 매장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총독부의 조선 민사령이 공포되기 전에 망명을 한 까닭에 그에게는 호적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매장 허가가 없이 매장을 하였다. 일가 중에 면장으로 있는 이가 있어서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면장은 이로 인해 경찰서에 불려다니다가 결국 파면당하고 말았다.

 

망명객 단재에게는 고국에 뼈를 묻힐 한 편의 땅도 허여되지 못한 것이다.

 

많은 애국인사들이 초라한 묘소에 참배하러 왔다가 일경에게 발각되어 고초를 겪을 만큼 일제는 묘소참배까지도 극도로 경계하였다. 후일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벌석(伐石)하고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서각(書刻)한 비석을 신백우(申伯雨)가 일제의 눈을 피하여 묘소 앞에 세웠다.

 

해방이 되고서도 단재의 묘소는 여전히 방치되었다. 한때 유지들에 의해 묘소가 정비되고 비각이 세워졋지만, 비석은 오자·탈자 투성이고 봉분은 풍상에 씻기어 망가지고 있었다. 2004년 여름 단재의 며느리 이덕남 씨가 인부들을 동원하여 비밀리에 이장을 시도하다가 관계 당국에 알려져 현재는 가묘 상태에 놓여 있다.

 

해방된 조국에서 단재의 혼령은 정처를 찾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게 되었다. 친일파들이 국립묘소에 묻히거나 호화 묘역에서 위세를 부리고 있는 세태에서 단재의 혼련이 저승에서 얼마나 노호할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저술

 

〔계속}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