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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1. “속으로 격렬한 진실 때문에” ‘역사의 사람’이 된 노무현 ⑵

참의부 |2013.10.06 10:24
조회 144 |추천 0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중국 망명지에서 발행한 잡지『천고(天鼓)』「제3집」에 쓴, 새로 부임해오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일우(日愚) 강우규(姜宇奎) 의사(義士)를 애도하는 글에서 사건의 전말을 대략 기록하고, 인간의 ‘죽음’과 관련하여 이렇게 기술했다.

 

˝고종명(考終命)이란 말은 목숨을 버리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자가 만든 것이니 동아(東亞)에 영원히 화를 입힌 것이다.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은 칼로 죽어도 되고 형을 받고 옥사하여도 된다. 어찌 목숨 버리는 것을 생각하여 신음하고 그 혼백이 씨가 되고 7척의 나무를 배회케 하여 차마 버리지 못하면서 정명(正明)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쾌히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구차히 살아서 모욕당하면서 화랑의 의용(義勇)ㆍ충결한 조의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고려 말엽 주자학이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명철보신의 교훈이 새겨져서 어려움에 임하는 자는 구차히 모면하는 것을 옳은 생각으로 여기고 죽는 것은 성현의 도리가 아니고 도학(道學)의 질서를 거짓으로 만든다고 생각해 전력을 다해 처자를 보존하는 것을 좋은 방법으로 여겨서 ‘고종명’ 3자가 구비되어 그것을 품계를 정하여 권장하였던 것이다.˝

 

1849년 12월 22일,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에 섰다. 마치 예수처럼 두 사람의 사형수와 함께 두 눈이 가려진 채 사형대에 묶였다.(그러나 형틀이 십자가는 아니었다.)사형수에는 최후의 5분이 주어졌다.

 

5분 뒤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5분분이다. 그 중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 데, 2분은 삶을 되돌아보는 데, 나머지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는 데 쓰고 싶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도스토예프스키는 뒷날 소설『백치(白痴)』에서 절박했던 운명의 순간을 이렇게 남겼다.

 

레지스탕스 출신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운명 사이에 일어난 끊임없는 투쟁은, 일종의 애정 깊은 적대관계 그것이엇다. 운명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주어진 모든 갈등을 더욱 첨예화시켰다. 더욱이 두드러진 대립상들을 서로 찢어버리기 위해 고통스럽게 잡아 뜯었다. 운명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아픔을 주었다. 그리고 그 역시, 운명이 그를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기에 자신의 운명을 사랑했다”고 썼다.

 

누구라도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듯이 노무현도 ‘운명’의 사람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빈민구제원에서 태어나 세상을 대면한 첫 순간부터 벌써 그가 있을 자리는 정해져 있었듯이, 노무현의 자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멸시받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인생의 밑바닥에서 태어나 가난의 고통을 겪으며 그러나 의롭게 성장하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그래서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여 반칙과 특권을 누려온 자들과 적대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은 가끔 수구세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발언을 던졌다.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남기고 싶다.” 이 얼마나 무서운 비수인가, 얼마나 죽이고 싶었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운명의 5분’으로부터 160년이 흐른 2009년 5월 23일 오전 6시 14분~17분경(추정), 노무현은 봉화산 부엉이바위 아찔한 절벽 위에 섰다. 절벽 위에 선 그의 시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5분이었을까, 아니면 더 짧거나 길었을까? 그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을 이 지경까지 몰아댄 저들의 의도를 떠올리며 비감해 했을까? 새벽녘에 컴퓨터 자판을 눌러 쓴 유서를 다시 생각했을까?

 

죽음보다 더한 굴욕을 견디면서 ‘발분지서(撥憤之書)’라는《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은 생(生)과 사(死)를 자연의 순환법칙으로 이해하면서 ‘태산(泰山)’과 ‘홍모(鴻毛)’에 빗대어 죽음의 무게를 달았다.

 

〃人固有一死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或重或泰山  때로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或輕於溩毛  때로 어떤 죽음은 홍모보다 가볍다.〃

 

사마천은《사기》〈열전(列傳)〉에 숱한 인물의 평을 남겼다. 그리고 얻은 결론의 하나로 삶과 죽음의 의미가 ‘태산’과 ‘홍모’로 나뉘게 된다는 것이었다.

 

고래로 역사의 인물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곤 했다. 유방(劉邦)에게 패배한 항우(項羽)는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죽음을 받아들였고, 궁형(宮刑)의 치욕을 당한 사마천은 살아서 원(怨)을 이루는 쪽을 택했다. 초나라 절세의 시인이자 정치인으로〈이소(離騷)〉를 남긴 굴원(屈原)은 소인배들의 참소를 견디다 못해 멱라수(覓羅水)에 몸을 던졌다.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은 무능하고 부패한 수구세력이 추악한 권력을 지키고자 외세(청나라와 일본 제국주의)를 끌어들여 그들과 합작으로 만든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즉흥시〈운명(殞命)〉을 지어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다”고 한탄했다.

 

〃時來天地皆同力 때를 만나선 천하가 다 힘을 모으더니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愛民正義 我無天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

爲國丹心誰有知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근년에 입적한 법정(法頂) 스님은〈살 때와 죽을 때〉에서 “꽃은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노래했다. 사람은 가는 뒷모습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살 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한다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한다
삶에 철저할 때는 털끝만치도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일단 죽게 되면 조금도 삶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사는 것은 내 자신의 일이고
죽음 또한 내 자신의 일이니

살 때는 철저히 살고
죽을 때 또한 철저히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
모란처럼 뚝뚝 무너져 내릴 수 있을 게
얼마나 산뜻한 낙화인가

새 잎이 파랗게 돋아나도록 칠 줄 모르고 매달려 있는 꽃은
필 때만큼 아름답지가 않다

생과 사를 무를 것 없이
그때 그때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불교의 사생관이다.

 

우리가 순간순간 산다는 것은

한편으론 순간순간 죽어 간다는 소식이다.

 

현자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태고보우(太古普愚) 선사는 세상여행을 끝내면서 제자들에게 남긴〈사세송(辭世頌)〉에서 인생을 “봄날 꿈속”이라고 하여 그 허망함을 노래했다.

 

〃人生命若水泡空  물거품 빈 것 같은 사람의 목숨
八十餘年春夢中  여든 남아 살기를 봄 꿈 같았네

臨終如今放皮垈  이제와 죽으며 가죽 버리니
一輪日下西峰  한바퀴 붉은 해가 서산(西山)을 넘소〃

 

노무현이 부엉이바위 벼랑 끝에 선 새벽에는 해가 아니라 달이 서산을 넘고 있었을까? 원효(元曉)는《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죽음을 두고 “멸(滅)이 곧 생(生)이 되고 생이 곧 적멸(寂滅)”이라고 했다. 원효에 따르면, 노무현의 멸은 곧 생이라 할 터이다. 정녕 노무현은 죽어서 살고자 했던 것일까?

 

〃이 뜻이 생(生)이라 한 것은 진(眞)을 융(融)하여 속을 만든 것이니 적멸의 법이 연(緣)으로조차 생기(生起)한 때문이요, 열이 아니라 한 것은 그 적멸이 생의 연유(緣由)이니 적멸이 적멸이 아니므로 적멸의 뜻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적멸의 연으로조차 생한 것이다. 적멸이 곧 생이라 한 것은 생하지 아니한 생이요, 생의 뜻이 곧 멸이라 한 것은 멸하지 아니한 멸이다. 멸하지 아니한 멸이므로 멸이 곧 생이 되고 생하지 아니한 생이므로 생이 곧 적멸이다.〃

 

● 마지막까지 자유인이 되지 못한 ‘위대한 패배자’

 

노무현의 생애와 글, 연설문을 치밀하게 분석한 심리학자 김태형에 따르면 “노무현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인간승리의 표본이며, 심리적으로 매우 건강한 인물”이다. 수구언론의 ‘마지막 승부수’라는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보여준다. 노무현은 수구언론이 주장한 바대로 과녁을 돌리기 위해 ‘마지막 승부수’로 몸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한동안 신문을 비롯한 각종 매체들은 노무현의 죽음을 ‘마지막 승부수’라고 주장하는 기사들을 버젓이 내보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인간 노무현을 이런 식으로 왜곡하는 분석이 앞으로도 계속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예감에 몸소리를 쳤다. “안 된다. 그런 엉터리 심리분석은 노무현을 두번 죽이는 행위가 아닌가. 막아야 한다.”〃- 김태형,『심리학자, 노무현과 오바마를 분석하다』8쪽, 예담, 2009년.

 

노무현을 죽음으로 내몬 수구세력의 만행은 한국현대사의 쉽게 아물기 어려운 상처가 될 것이다. 그의 죽음이 남긴 피맺힌 유산은 향후 한국정치사의 작용과 반작용, 역학과 동력의 거대한 용암으로 분출되기에 충분하다.

 

서거 당시의 5백만 추모 물결, 서거 주기마다 긴 줄을 잇는 추모 인파, 평소에도 생가와 묘소를 찾는 끊임없는 ‘순례’의 발걸음은 현재와 미래 한국 정치사의 동력이 되고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역사는 쓰레기 집하장이 아니다. 위대함과 사악함, 친민(親民)과 역민(逆民)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원통한 죽음, 억울한 죽임은 반드시 가려낸다. 그 힘이 역사의 운행을 바꾸기도 한다. 옛적에는 힘으로 억누르고 조작하고 은폐가 가능했으나 이제는 그런 것들이 완벽하게 가능하지 못한 세상이 되었다.

 

예로부터 원통하고 억울한 죽음에는 반드시 거대한 역사의 응징이 따랐다. 일제의 명성황후 살해 직후에는 의병항쟁이 잇따랐고, 고종 황제 독살 직후에는 3·1운동의 거대한 저항이 일어났으며, 순종의 서거 직후에는 6·10운동이 전국을 뒤덮었다. 백범(白凡)을 암살하고 죽산(竹山)을 죽인 이승만 정권은 비극적 최후를 맞았고, 숱한 민주화인사를 죽이고 민주화시민을 핍박한 박정희 유신정권은 심복의 총탄에 쓰러졌다. 12·12쿠데타와 5·17쿠데타, 그리고 5·18광주민중학살로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 주범들은 국회 청문회 심판대에 서야 했다. 역사는 결코 의인(義人)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 악인의 만행을 방관하지 않는다.

 

누군들 죽지 않으랴? 노무현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저들에 의해 “이미 비루해진” 삶 대신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고자 죽음을 택했다. 몽고족으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지키고자 했던 남송(南宋)의 의병대장 문산(文山) 문천상(文天祥)은 적군에 잡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정기가(正氣歌)’를 남겼다.「영정양을 지나면서」의 한 구절이다. 벼랑에 선 노무현의 심정이 스쳐간다.

 

〃人生自古誰無死  예로부터 그 누가 죽지 않을 수 있는가
取丹心照汗靑史 다만 이 붉은 심장 남겨 역사에 비추리라〃

 

민주화운동가·시인 고은(高銀)은 일찍이, 그러니까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뜨기 전인 1997년 6월에 펴낸《만인보(萬人譜)》에서〈노무현〉을 노래하면서 “속으로 격렬한 진실 때문에 아마도 그는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고 했다. 눈 밝은 사람은 이렇게 일찍이 ‘인간 노무현’을 알아봤다. 순전히 시인의 감성만은 아닐 터이다.

 

〃모든 것을 혼자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장에 다니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검정고시로 마친 뒤
사법고시도 마친 뒤

그는 항상 수줍어하며 가난한 사람 편이었다
그는 항상 쓸쓸하고 어려운 사람 편이었다
슬픔 있는 곳
아픔 있는 곳에
그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솟아나왔다
푸우 물 뿜어대며

그러다가 끝내 유신체제에 맞서
부산항 일대
인권의 등대가 되어
그 등대에는
마치 그가 없는 듯이
무간수 등대가 되었다
힘찬 불빛으로

어디 그뿐이던가
사람들 삐까번쩍 광(光) 내는 데
그는 혼자 물러서서 그늘이 되었다
헛소리마저 판치는
텐트 밑에서
술기운 따위 없는 초승달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진실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
속으로 격렬한
진실 때문에.〃

 

노무현은 정치인이면서도 비정치적인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국민들은 그를 좋아했다. 백색독재, 군사독재의 ‘정치’에 넌덜머리가 난 국민들은, 권위주의적이지 않고 소탈하고 정직한 노무현을 좋아했다. 그래서 헌정 수립 이래 최다 득표를 하게 되고, 재임 중에 이런 저런 구설도 많고 실책도 적지 않았으나, 퇴임하던 날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손려를 자전거에 태우고 마실을 다닌 그를 좋아했다. 그것이 민초들에게 보기 좋았고 노무현의 소탈한 모습이 정겨웠다.

 

 

그의 돌연한 죽음이라는 비보를 접하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통한이 침묵하던 민초들을 움직이고, 후임을 겪어보고 비교해보니 그립고 안타까워 ‘노무현 현상’으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철창 철학」이란 연제의 강연에서 “개성 송악산에 흐르는 물은 선죽교의 피를 못 씻고, 남강(南江)에 흐르는 물이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 있는 논개(論介)의 이름은 못씻어간다”고 했듯이, 봉화산 부엉이바위 벼랑에 뿌려진 노무현의 피는 자연의 풍우에는 씻길지 몰라도 이 땅의 민초들 가슴에서는 영원히 씻기지 않을 것이다.

 

천성이 감성적이고 신념과 의리를 소중하게 여긴 노무현은 자신의 어려움보다는 주변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받을 고통을 더 못 견뎌했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는 유언을 남길 만큼 괴로워했다.《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정리한 언론인 오연호도 책에서 “인간 노무현은 자신이 받는 고통보다 자신에 의해 받게 될 여러 사람의 고통을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자유인이 되지 못했다. 정치인이었다. 마지막까지 승부사였다”고 썼다.

 

백범과 링컨  그리고 노무현, 백범과 링컨은 노무현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로, 세 사람은 생김새부터가 ‘촌놈 티가 풀풀 나는’ 인상이다. 인권변호사 박원순이 본 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늘 촌놈 티가 풀풀 나는 사람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마 그 자체였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사람이었다. 그 신선함이, 그 담대함이 그를 대통령으로까지 만들었을 것이다.”

 

독일의 저명한 언론인 볼프 슈타이더는『위대한 패배자』에서 “패배자는 새로운 권력자들보다 문화·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승리자로 가득한 세상보다 나쁜 것은 없다. 그나마 삶을 참을 만하게 만드는 것은 패배자들”이라는 말로 책을 맺는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숱한 ‘위대한 패배자’들을 낳았다. 그들의 위대함은 승리자들을 덮고도 남아서 두고두고 민중의 흠모를 받아왔다. 근현대사만 둘러봐도 전봉준(全琫準)·최제우(崔濟愚)·안중근(安重根)·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양세봉(梁世奉)·백범(白凡) 김구(金九)·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장준하(張俊河)…… 열 손가락을 헤아리고도 남는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승만 백색독재 정권·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으로부터 살해당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오늘에 있어 누가 승리자이고 누가 패배자일까? 그리고 역사는 어떻게 이들을 평가할까?

 

대통령까지 지낸 노무현이 ‘패배자’일까 하겠지만 그는 정치적 소수파로서 우리 나라 사회의 뒤틀린 권력구조 안에서 정치보복성 ‘토끼몰이’에 갇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패배자다. 내외적으로 그렇게 죽은 ‘위대한 패배자’가 적지 않았다. 링컨, 트로츠키, 간디, 체 게바라, 전봉준, 여운형, 조봉암……

 

‘위대한 패배자’들이 그렇듯이 노무현은 패배함으로써 민초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그의 죽음은 공의(公義)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기에 그는 최후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아직 인생을 정리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고 한 바대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고 하고 싶은 일도 밀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나운 사냥개들의 미친 사냥몰이 앞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을” 만큼 참담해했고, 살아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탄했다. 그는 서거하기 얼마 전에 쓰기 시작한 자서전에서 “이제 나는 인생에서 세속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는 무엇, 분별을 넘어서는 깨달음이라도 구하고 싶다. 그보다 마음을 닦아서 이 마음의 고통을 극복해나아가야 할 처지이다. 그러나 그동안 배운 것이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썼다.

 

2009년 5월 20일경, 자서전『성공과 좌절』을 정리할 때까지, 그는 서재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을 표구하여 붙여놓고, 성공과 영광의 기억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의 기억을 토해놓고자 했다. 그리고 미래의 꿈을 그리고자 했다. 주변사람들이 터무니없다고 했지만 그는 아들이 있고 손자가 있다는 말로 사람들의 성급함을 나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노무현에 서재에 하필 ‘우공이산’을 걸은 뜻을 헤아려야 했다. 하지만 저들은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안중근이 뤼순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완성하려 했을 때 일제가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마침내 검찰은 그에게 ‘피의자’ 딱지를 붙였고, 5년 내내 헐뜯었던 족벌신문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연일 온 지면을 털어 법(피의사실 공표 금지)를 어겨가면서까지 ‘피의사실’을 소설로 썼다. 기회주의 보도방송들은 헬기까지 동원하여 봉하마을에서 서초동 검찰청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기에 이르렀다. 전에 없던 일이다.

 

5공 시절에 노무현과 민변을 함께 하고, 거제 대우옥포조선소 노사분규에서 제3자 개입 혐의로 그가 감옥에 갔을 대 변호를 맡았던 박원순은 저들은 이번 만행의 “부메랑을 맞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가 정녕 뇌물을 받으려고 했다면 왜(하필)박연차 회장에게서 받았겠는가? 돈을 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텐데, 수사를 했던 검찰, 그 검찰의 수사를 즐기고 있던 여당, 그 배후의 현 정부, 그들은 노 전 대통령만큼 깨끗한가? 나는 언젠가 이 정부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이번 자결사건으로 큰 부메랑을 맞을 것이라고 본다.”

 

과연 노무현은 패배자인가? 저들은 이렇게 해서 노무현을 이겼는가?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그의 죽음을 두고 정파나 이해타산에 따라 갑론을박의 핏대를 세우고 있지만 결국 진실은 역사가 말해주고 민의가 가려줄 것이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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