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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2. 출생과 가족 그리고 청년시절 ⑴

참의부 |2013.10.09 08:29
조회 198 |추천 1

● 의병대장의 결기를 물려받은, 빈농의 막내아들

 

노무현을 탐구하고 묘사하는 코드는 다양하다. 정치인, 대통령, 정치학자, 사상가, 인간 그리고 바보, 먼저 ‘인간 노무현’ 곧 ‘자연인 노무현’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노무현의 가문은 직계로는 딱히 내세울 만하거나 높은 벼슬을 한 선대도 없었지만 종증조부 노응규(盧應奎:1861년~1907년)가 구한말 반일의병항쟁에 참여한 것이 눈에 띈다. 경남 함양 태생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성오(聖五), 호는 신암(愼菴)인 노응규는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위정척사론(衛政斥邪論)의 태두인 최익현(崔益鉉)에게도 사사(師事)했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에 이어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진 데 분노한 유림(儒林)이 대거 거병하자 노응규도 이에 호응하여 1896년 함양에서 의병을 모집해 봉기했다. 노응규의 의병부대는 진주성을 단숨에 함락시키고 진주 인근 세력을 합세시켜 진주창의진(晉州倡義陳)을 구성했다. 진주창의진은 부산 방면으로 진공하여 김해까지 장악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일본군의 선제 공세와 동지의 배반으로 진주성을 잃고 결국 해산되었다.

 

이때 가족이 피살되고 가산이 몰수되는 불행을 당한 노응규는 호남지방에 피신 중,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직후 상소를 올려 사면을 받았다. 이후 을미사변에 항거해 의병을 모집한 유학자들이 중용되는 가운데 노응규도 동궁시종관 등의 직책을 맡아 고종(高宗)을 지근에서 보필했다. 그런데 러일전쟁 이후 강성해진 일제가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등 국권 피탈을 가시화하자 노응규는 벼슬을 내던지고 1906년 전북 정읍에서 거병한 스승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합류했지만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와해되었다. 이때 몸을 피한 노응규는 그해 충북에서 일단의 의병항쟁 지도자들과 함께 다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수차례 일본군을 타격했으며, 한성 진공을 꾀하던 중에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는데, 왜놈들이 주는 밥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가 옥중에서 굶어죽었다고 한다. 1977년 국민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일세를 풍미한 의병대장 노응규의 보국충절(保國忠節)의 기개에서 그 종증손자 노무현의 결기가 느껴진다.

 

 

● ‘비현실주의자’ 아버지와 여걸 풍모의 어머니

 

노무현은 1946년 8월 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서 소농인 아버지 노판석(盧判石)과 어머니 이순례(李順禮) 슬하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대는 10대조부터 진영읍 본산리 여러 곳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노무현이 태어날 무렵부터 봉하마을에 정착했다. 농사가 업이라지만 생계도 꾸리기 어려운 소농이었다.

 

노무현의 둘째 형 노건평에 따르면, 한학을 익힌 아버지 노판석은 아이들 교육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경제적으로는 무능한 가장이었고, 집안 살림은 실질적으로 어머니가 도맡아 꾸려야 했다. 어머니 눈에 비친 아버지는 항상 남의 입장만 생각하다 정작 자신은 챙기지 못하는 ‘비현실주의자’였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어머니는 더욱 이를 악물고 살림을 챙겨야 했고, 90세를 넘겨 장수했지만 말 못할 고생을 했다.

 

그런데 노무현에 따르면, “경제적으로 무능했다”던 아버지도 한때 큰 재산을 일군 사업가였다. “아버지는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도쿄와 오사카, 중국 상하이 등지를 오가며 타이어 매매업을 해서 적잖은 재산을 모았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셨다. 중국 대륙 곳곳으로 전쟁의 포연이 확산되던 1942년, 가족들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거짓 전보를 쳐서 아버지를 귀국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는 어머니 친척 되는 사람한테 사기를 당해 재산을 다 날려버린 뒤였다.”

 

노무현은 아버지를 정의롭고 자애로운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는 분이었다. 여간해서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거나 폐를 끼친 일이 없으셨다. 그러나 정의감이 있고 어떤 점에서는 고집이 센 분이었다. 일본인 마름을 했던 동네 유지와 이웃 사람들 사이에 땅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을 때 약자인 이웃을 도와주다가 여러번 폭행을 당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사업을 할 때 기독교 신앙을 얻어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린 나를 읍내 교회에 나가게 하셨다. 교회에서 늦게 돌아오는 날에는 지금은 공단이 들어서 있는 공동묘지 너머 먼곳까지 나와 기다리다가 내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걸어오시곤 했다. 천자문도 가르쳐 주셨다. 여섯 살 때 내가 천자문을 뗐다고 너무 좋아하셨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노무현의 아버지는 선량한 농사꾼으로, 약자에게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손해를 보는 때가 많았고, 아내로부터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노무현이 어릴 때, 봉하마을에서는 일본인 지주 밑에서 마름을 살던 친일파들이 해방이 되자 지주가 되어 떵떵거리며 세도를 부리고 다녔다. 그들은 툭하면 마을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소작인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땅을 빼앗으려고 송사를 벌였다. 그들이 부당하다는 것은 온 마을이 다 아는 일임에도 사람들은 친일파들이 무서워 분쟁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친일파들의 협박과 회유를 무릅쓰고 소작인들을 편드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노무현의 아버지였다. 당시 노무현의 아버지는 자작농이었으므로 소작인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토지분배 송사에 참여해 소작인들을 위해 증언을 해주었고 그 덕에 약자인 소작인들이 이기곤 했다. 그 일로 노무현의 아버지는 친일파의 자식들이나 동네 불량배들한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 노무현 자서전,〈운명이다〉, 61쪽, 돌배개, 2010년.

 

노무현은, 어머니에 대해서는 여걸의 풍모가 있는 분으로 “누나들이나 형들한테는 엄격했지만 막내(노무현)한테는 한없이 자애로웠다”고 회상했다. “어머니는 총명하고 기가 센 분이었다. 매사에 자기주장이 뚜렷하셨다. 가난에 한이 맺혀 있었고 돈이 없어 수모를 당하는 것을 몹시 분하게 여기셨다. 아들들이 출세해서 집안을 일으켜 주기를 바랐다. 누님들과도 그랬지만 특히 형님들과 기싸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마흔 넘어 얻은 막내한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출세에 대한 기대는 주로 두 형님에게 걸었다. 어린 나한테는 오직 사랑만 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변호사가 된 후에도 집에 오면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눕곤 했다.”

 

노무현의 외가는 역시 평범한 농가로, 같은 마을의 성산 이씨였다. 외조부는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한센병 환자들까지 치료하는 등 널리 선행을 베풀어 마을에서 칭송을 들었다. 원래 고향은 경남 창원군 진전면(현재는 마산시에 편입)이었으나 1960년대 중후반쯤 진영으로 이사했다. 딸 다섯 자매 중 맏이인 노무현의 어머니는 신식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한문 실력은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을 능가했으며, 다재다능하고 생활력이 강했다. 노무현의 강한 성정은 어머니를 닮은 것이라고 하는데, 여섯 살 때 천자문을 떼어 총기를 보여준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노무현이 태어난 진영 봉하마을 들판에 솟아 있는 봉화산(해발 140미터) 정상에 오르면 사방 30리를 조망할 수 있다. 봉화산은 옛적부터 왜구의 침략이 있을 때면 밀양-청도-중앙 봉수로에 이르는 봉홧불을 밝혔던 곳이다. 노무현은 어릴 적에 “크면 이 산의 봉화지기가 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봉하마을은 농토가 척박하여 5년 농사를 지어 3년 소출이 있으면 다행이라 할 정도로 빈촌이었다. 여기에 수해와 한해가 거듭되어 “까마귀가 와도 먹을 것이 없어 울고 간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노무현의 집안도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은 어머니가 마흔다섯에 낳은 만산(晩産)이었다. 요즘 말로 ‘늦둥이’다. 낳을 때 대단한 난산으로 “진영 읍내에서 남산병원장이 직접 와서 집게로 끄집어냈고, 그 바람에 머리와 어깨에는 집게 자국이 남게 되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아기를 낳고도 먹을 것이 없어서 이웃사람이 쌀을 가지고 와서 밥을 지었다고 한다.

 

노무현이 태어나 성장한 시기는 이른바 해방공간이다.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국토는 남북으로 갈려 각기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갈등으로 정국은 혼란스럽고 민생은 일제강점기보다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한에서는 1948년 8월에, 북한에서는 그해 9월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에는 6·25남북전쟁이 터졌다. 그리하여 남북 분단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노무현은 그 시대 여느 농촌의 아이들처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유년기를 보냈다. 소년 노무현은 봉화산과 자왕골을 오르내리며 소박한 꿈을 키웠다. 유년 시절 그의 기억에서 “봉화산과 자왕골을 빼놓을 수 없는 무대이다. 나는 그곳에서 칡을 캐고 진달래도 따고 바위를 타기도 했다. 풀 먹이러 소를 끌고 나오는 곳도 항상 그 골짜기였다. 아이들은 소를 골짜기에 몰아넣고 모두 발가벗고 놀았다. 골짜기의 맑은 물에서 목욕도 하고 물장구도 쳤다. 물놀이가 시들해지면 산사태가 난 곳에서 미끄럼을 타기도 했다.”

 

노무현의 집은 가난하여 소를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소를 키우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내로서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란” 덕분인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궁핍을 느끼지 못했다.”

 

● ‘돌콩’의 저항의식과 중학생 ‘백지동맹’

 

노무현은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란데다가 고등학교만 나온 탓에 심한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그의 죽음까지도 이와 연관시키려 들지만, 심리학자의 분석은 사뭇 다르다.

 

˝그는 비록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궁핍을 느끼지 못했다.’ 심리학적으로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아에 치명적인 상처가 생길 수 있는 위험한 시기는 대체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상처를 받게 되면 왜곡되거나 허약한 자아를 갖게 된다. 만일 이런 상태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가 불우한 경험을 하게되면 그야말로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부대끼게 되더라도 비교적 잘 견뎌낼 수 있다. 비유하자면 어린 시절의 행복한 경험이 이후의 병에 대한 내성이나 면역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 김태형,『심리학자의 눈으로 노무현과 오바마를 분석하다』, 26쪽, 예담, 2009년.

 

노무현의 어린 시절은 무척 행복했다. 60여년 전 이 나라의 농어촌 지역 대부분이 그렇듯이 봉하마을도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봄이면 밀을 꺾어 밀사리를 해먹었다. 보리싹이 나면 보리피리를,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면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보리 깜부기를 뽑아 얼굴에 새까맣게 바르고 보리밭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여학생을 놀래키는 장난도 많이 쳤다.”

 

노무현은 1953년 김해시 진영읍 대창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10리 길이나 되는 곳에 학교가 있어서 아침 일찍부터 먼 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해방공간의 혼란이나 6·25남북전쟁의 참혹함을 느끼고 체험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전란의 폐해는 이 땅의 어디라도 다르지 않았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비교적 맑고 밝게 자라던 노무현도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가난’을 피부로 느끼게 되고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곳에도 빈부 차이는 있어서 읍내 아이들과 시골동네 아이들은 옷차림과 학용품이 달랐다. 선생님들은 아무래도 부모가 학교를 자주 찾아 인사하는 읍내 아이들을 더 총애하고 관심을 가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노무현은 교내 붓글씨 대회에서 2등을 했다. 그러나 시상식 날 그는 그 상을 반납했다. 대회가 열리던 날, 당초의 약속된 규정과 달리 새로 한 장을 고쳐 써낸 급우에게 1등상이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런 저항의 대가로 돌아온 것은 지도선생님에게 맞은 따귀 한 대 그리고 담임선생님의 차가운 눈초리였다. “상황이 한참 전개된 뒤에 뭔가 자신이 옳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 당시 그가 깨달은 교훈이다.

 

노무현은 마을에서 다소 유난스런 아이로 자랐다.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아이들과 어울리고, 이웃마을 아이들과의 싸움에서는 여러 모로 불리한 여건에서도 상대측을 설득하여 언변으로 분위기를 바꾸기도 했다. 둘째형(노건평)까지도 동생의 언변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초등학교 때 전교 회장에 입후보해서도 후보로 나온 아이들을 말솜씨로 눌렀지요. 연단에 올라가 연설을 시작하니까 분위기가 확 달라지데요. 그 때는 참 얼마나 작았는지…. “작은 고추가 맵십니더”하면서 아이들을 웃기는데 동생이 참 당차게 느껴지더라고요. 1988년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돼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하는 것을 직접 가서 본 적이 있었어요. 그 때도 “아, 무현이 참 말 잘하네….”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옵디다.”

 

노무현에게는 초등학교 때 두 가지 별명이 있었다. 하나는 키가 작다고 해서 ‘돌콩’이고, 다른 하나는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노 천재’였다. 아이는 출생 때부터 난산인데다가 산모가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키가 자라지 않고 병약했지만 공부도 잘하고 야무져서 ‘돌콩’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다. 체구는 왜소했지만 당차기가 하늘을 찔렀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의 지도자 전봉준을 당대인들이 ‘녹두장군’이라 부른 것도 비슷한 경우다. 어린 노무현은 워낙 깡이 세서 아무도 섣불리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노무현은 대창초등학교 6년 동안 전교 수위의 우수한 성적을 놓치지 않았다. 평상시 공부를 별로 하지 않고도 늘 우수한 성적을 받는 것으로 보아 머리가 명석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자주 비애를 느끼는 일을 겪게 되고, 반장을 하면서는 어수룩한 여학생을 꼬여 새 필통과 자신의 낡은 필통을 바꾸었다가 급우들로부터 크게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노무현은 이를 두고 “공인(?)으로서의 도덕성에 관한 첫 심판을 경험한 셈이었다. 이후 이 사건은 내 마음속에 두고두고 남아 내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회의로 남아 있었다”고 회상했다.

 

노무현이 뒷날 비판적인 법조인, 거리의 변호사, 반독재투쟁 정치인이 된 것은 어릴 적부터의 불평등과 차별,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심에서 비롯되었지 싶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가난뱅이 시골 출신들의 중심이 되곤 했지만 속이 풀리지는 않았다”고 했다.

 

“읍내 아이들의 부모는 종종 선생님을 찾아와 인사도 하고 얘기를 나눴지만, 나를 비롯한 시골 아이들은 만날 기성회비를 제때 못 냈다는 이유로 벌을 서고 창피를 당해야 했다. 그 때문에 고학년으로 차츰 올라가면서 아이들은 비교적 잘 사는 읍내 출신과 가난뱅이 시골출신으로 은근히 패가 갈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항상 시골출신들의 중심이 되곤 했지만, 그렇다고 속이 풀리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심리학자 김태형은 “구김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기본적으로 열등감이 심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열등감은 자기 혐오감, 자기 모멸감과 결합될 때에만 비로소 병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 부모에게서 지지와 격려를 많이 받는 아이는 자기 혐오감을 받기가 정말 힘들다. 따라서 부모 형제들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아 구김살 없는 시절을 보낸 어린 노무현은 기본적으로 열등감이 심할 수가 없는 인물이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가난과 열등감’, ‘반항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존심과 우월감도 그에 못지않게 강했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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