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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2. 출생과 가족 그리고 청년시절 ⑵

참의부 |2013.10.10 22:43
조회 335 |추천 1

 

 

노무현의 집안은 비록 가난했으나 화목했고, 터울이 크게 지는 막내라서 부모님은 물론이고 누나들과 형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랐다. 더구나 두 형은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그런데 노무현에게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그 선생님 덕분에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반 담임 신종성 선생님을 잊지 못한다. 새내기 교사였던 그분은 내게 깊은 관심과 사랑을 주셨다. 휴일이나 방학 때 남몰래 따로 불러 공부를 하게 했다. 집이 멀다고 따로 자취방에 재우면서 밥을 차려 주었다. 나는 4학년 때 반장을 하지 않겠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친 적이 있었다. 졸업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주눅이 들어 있었다. 신종성 선생님은 그런 나를 어르고 달래서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가게 하셨다. 자의 반 타의 반 선거에 나갔는데 회장으로 뽑혔다. 연설을 잘했다고 다들 칭찬했는데, 큰 형님이 특별히 지도해준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그 뒤로는 자신감을 가지고 남들 앞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46쪽~47쪽.

 

노무현은 가난과 왜소한 체구 때문에 열등감을 갖게 되고, 선생님들의 차별과 편애 때문에 저항심을 갖게 되었다. 읍내 출신 아이들은 옷차림이나 먹는 것부터가 달라서 키도 크고 귀티가 흘렀다. 그런 아이들을 편애한 나머지 부당한 결정을 내리는 선생님들에 대한 반감이 어린 노무현의 저항심을 키운 것이다. 그런 가운데 촌놈 노무현을 진심으로 보살핀 신종성 선생님의 사랑이 어린 노무현에게 자신감과 자존감을 심어준 것이다.

 

노무현은 어려서부터 자주 위경련을 앓았는데, 그 때문에도 키가 잘 자라지 않았다. 공부하다가 업혀서 병원에 간 적도 있고, 여러 날 동안 식사를 못할 만큼 증상이 심했다. 한창 자랄 나이의 위경련은 성장을 더디게 만들었다. 위경련은 나중에 고시준비를 할 때나 법조인 시절에도 가끔씩 발병하여 괴롭히다가 정계입문 뒤에는 사라졌다.

 

노무현은 1959년 대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영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집안의 가난은 중학교 입학부터 어렵게 했다. 당시 큰형이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을 못 하고 있어서 더욱 어려운 형편인지라 막내의 중학교 입학금 낼 돈이 없어서 어머니는 학교부터 찾아가 ‘외상 입학’을 시켜달라고 통사정을 해야 했다.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가 여름 복숭아 농사를 지어 입학금을 낼 테니 우선 입학시켜 달라고 애원했지만 거절당했다. 면담을 했던 교감선생님은 농사나 배우라고 했다. 어머니를 향해 큰아들 대학 나와도 백수건달인데 뭐하러 공부시키느냐는 말까지 했다. 자존심이 상해서 원서를 찢어버리고 나왔다. 뒤에서 비수같은 한마디가 날라왔다. “저런 놈 공부시켜 봐야 깡패밖에 안 된다.” 다음날 큰형님이 학교에 찾아가 교육적 언사를 문제 삼겠다며 거세게 항의해서 겨우 입학 허가를 받았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48쪽.

 

이 일은 어린 노무현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궁핍한 살림에 부모님이 연세가 많아 농사일도 쉽지 않은데, 중학교에 가는 것이 죄스러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 노무현에게 큰형은 자랑이고 우상이었다. 마을에서 유일한 대학생(부산대학교 법학과)으로 훤칠한 외모에 노래도 잘 불렀다. 방학을 맞아 대학생 친구들이 찾아와 시국토론을 벌일 때면 노무현은 무슨 뜻인지는 몰라고 곁에서 늘 관심 깊게 귀동냥을 하곤 했다. 그런 큰형이 “부산 범어사에서 고시공부를 하다가 혼인을 하고 나서 고시 공부를 중단하고 한동안 방황하면서 술을 마셔대자 가족 모두가 큰 실망을 해서 집안이 온통 초상집 분위기였다.” 어린 노무편의 보호자이자 우상이던 큰형이 결혼과 함께 허물어져간 것이다. 그때 노무현은 큰형이 처음으로 “못난 사람으로 보였다”고 했다. “대학을 다니다 말고 고시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갔던 큰형님은 초등학교 여선생인 형수를 만나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형님 생각에는 형수가 직장이 있으니 고시공부 뒷바라지를 해줄 거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 형님은 결혼 후 고시공부를 중단했다. 형수의 구박과 괄시 때문에 공부를 더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형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형님과 형수 사이는 끊임없이 불행했다. 내 눈에는 형수님이 형님을 일방적으로 구박하고 괴롭히는 것으로만 보였다. 나는 형님을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노무현의 큰형인 노영현은 고시공부를 하다가 그만두고 마는데,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그나마 가족의 생계를 맡아왔던 과수원까지 팔아야 했다. 장남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집안은 크게 실망하게 되고, 둘째형도 학업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노무현이 중학교에 들어간 무렵에는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1954년)’이라는 전대미문의 폭거를 통해(초대 대통령에 한해)연임제한을 철폐하여 집권을 연장한 이승만의 3선 임기가 끝나가고 종신 대통령을 획책하는 4선을 앞두고 있었다. 이에 야당 의원들이 농성을 하며 저항하자 무술경찰을 동원하여 지하실에 감금한 채 자유당 단독으로 새 국가보안법을 처리하고, 카톨릭계 야당지《경향신문》을 폐간시키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정권 말기의 도착적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이 타락하면 모리배들이 줄을 선다.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1960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해 전국의 모든 학교가 대통령을 찬양하는 글짓기 행사를 열었다. 진영중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무현은 이것이 영 못마땅했다. 큰형과 그 친구들의 시국토론을 귀동냥하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의 실정을 익히 들은 터였다. 그래서 급우들에게 ‘백지동맹’을 선동했다.

 

˝나는 이것이 부당한 일이니 백지를 내자고 급우들을 선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글을 쓰기 싫은 터에 잘됐다면서 모두들 백지를 냈다. 나는 택(턱)도 없다는 뜻으로 ‘우리 이승만(택)통령’이라 쓰고 이름을 적어서 냈다. 감독하러 들어온 여선생님이 울음을 터뜨렸다. 괘씸죄에 걸려 교무실에서 종일 벌을 섰다. 그런데 그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신문에 났다. 선생님이 신문을 보면서 말했다. “역시 이승만 대통령은 운을 타고난 사람이고 하늘이 내신 분이야.” 더 반감이 생겨서 반성문을 쓰지 않고 집으로 도망쳤다. 큰형님이 꾸지람을 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반성문을 쓸 일이고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버텨야지, 사내놈이 왜 도망을 치느냐는 것이다. 다시 학교에 갔다. 그러나 반성문은 끝까지 쓰지 않고 경위서만 냈다. 다행히 사건은 유야무야 되었다. 교감선생님이 나를 보고 "조그만 놈이 우월감이 굉장하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그땐 몰랐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48쪽~49쪽.

 

이처럼 노무현의 저항정신, 비판정신은 일찍이 중학생 때부터 싹을 보였다. ‘떡잎’부터 천생 저항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모르긴 해도 열서너 살 중학생의 반권력 정치선동은 노무현이 전무후무(前無後無)하지 않을까 싶다. 노무현은 그의 말대로 어릴 때 상당히 반항적이었고 한편으로는 열등감이 심했으며, 가슴에 한과 적개심을 감추고 있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쉽게 좌절하기도 했는데, “고시 합격을 통해 그리고 심하지 않았던 열등감과 결별했고 반항 밑에 숨어 있던 분노감정도 상당부분 해소했다. 나아가 끊임없는 ‘좌절’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마침내 4·19민중혁명이 일어났다. 이승만이 쫓겨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노무현은 어린 마음에도 승리의 쾌재를 불렀다. 시골의 중학교에서도 혁명에 관한 갖가지 뉴스가 전해졌다. 대도시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한다며 학교를 나오지 못하게 했다. 시골 마을도 4·19민중혁명의 변화는 나타났다. 보도연맹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유족이 나서서 집단학살 당한 시신을 파내어 큰 봉분을 만들고 합동 위령제를 지냈다.

 

● 부일장학생 ‘노 천재’가 상고로 간 까닭

 

노무현은 중학교 2학년 때 부산에 가서 시험을 쳐 부일장학생에 선발되었다. 진영중학교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어서 큰 경사였다. 부일장학회는《부산일보》사장 김지태가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마련한 장학회였다. 노무현은 중학생에 이어 고등학생 때도 장학금을 받았다. 그런 인연으로 노무현은 김지태를 평생 존경했다고 한다.

 

˝시험을 잘 봐서 부일장학생으로 뽑혔다. 당시에는 장학회가 별로 없었다. 나는 부일장학회를 운영한 <부산일보> 사장 김지태 선생을 평생 존경했다. 그는 무려 25년 동안 부산상고 동창회장을 맡아 모교 발전과 인재양성에 헌신했다. 나는 중학생 때 부일 장학금을 받았고 부산상고에서도 동창회 장학금을 받았다. 둘 모두 김지태 선생이 만든 장학회였으니 그분이 내 인생에 디딤돌을 놓아준 은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5ㆍ16이 난 후 김지태 선생은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등 재산을 거의 다 빼앗겼다. 부일장학재단 재산도 모두 5ㆍ16장학재단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나중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딴 정수장학재단이 되었다. 거사자금을 대주지 않았다고 군사쿠데타 세력이 보복을 한 것이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반지밀수 혐의를 씌워 구속한 다음 협박해서 재산을 다 빼앗았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50쪽.

 

노무현이 부일장학생 선발시험을 보기 위해 부산에 갔을 때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부산 시내에도 여기저기 탱크가 서 있고 총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보였다. 노무현은 어린 나이에도 나라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쿠데타의 여진은 봉하마을에도 어김없이 밀려왔다. 4·19민중혁명 당시 보도연맹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유해를 모아 만들었던 합동 봉분이 파헤쳐졌다.

 

한국의 전통적 가치로는 묘를 파헤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패륜행위였다. “봉분만 파헤쳤는지 유골까지 다 흩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묘를 파헤친다는 것은 아주 끔찍한 느낌을 주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5·16정변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그의 기억은 이런 것으로 남아 있었다.”

 

노무현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부일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3학년이 되면서 다시 고민이 생겼다. 집안 형편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5급 공무원(지금의 9급) 시험을 볼 요량으로 책을 사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큰형이 노발대발하여 부산상고 시험을 치게 했다. 이 학교는 공립인데다 부일장학금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둘째형 노건평은 “(부산상고 진학이)동생의 뜻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집안의 경제사정이 더욱 기울자 동생은 진학을 포기하고 5급 공무원(현 9급) 시험을 보려고 했다. 5급 공무원이 되면 내친 김에 사법고시까지 해치운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큰형님이 부산대 법학과를 나와 고시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뒷바라지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나마 있던 과수원도 빚에 쪼들려 팔아야 했고, 나도 학업을 중단했다. 그때 우리 집의 희망은 고시준비하던 형님이었으니까. 당시 부산상고는 상당한 명문이었다. 상고 중 전국 제일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상고생이 취직이 잘 될 때여서 크게 낙심할 일은 아니었다.” - 노건평,〈내 동생 무현과 우리 가족사를 말한다〉,《월간 중앙》, 2002년 5월호, 74쪽~75쪽.

 

1963년 2월 진영중학교를 졸업한 노무현은 그해 부산상고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목포상고 출신인 직전 대통령 김대중에 이어 상고 출신 대통령이 된 것이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 것이다. 노무현의 ‘부산상고’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 그나마 고등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학벌주의 질곡에 빠진 한국사회에서 ‘상고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다. 노무현은 “그렇게 인연을 맺은 부산상고는 내 삶의 ‘결정적 존재’가 되었다”고 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그 이름이 함께 있었다. 고시에 합격했을 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그리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언제나 ‘부산상고가 최종 학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것은 또한 내 정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밑천이기도 했다. 부산상고는 역사가 깊은 학교이다. 구한말 ‘개성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래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민족지사를 숱하게 배출했다.”

 

노무현이 백범 김구나 에이브러햄 링컨을 각별히 좋아하고 존경한 이유 중에는 변변치 못한 학벌에도 불구하고 뜻이 크고 사상이 올발랐으며 위대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백범과 링컨은 ‘학벌’을 따지지 않고 존경한다면서도 김대중이나 노무현의 학력은 문제를 삼고 더러는 폄하하기까지 했다. 자칭 ‘정론지’라고 하는《조선일보》는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 그의 고졸 학력을 비하하는 만평(신경무)를 그려댔고, 전여옥 국회의원은 한나라당 대변인 시절(노무현 대통령을 빗대어)“다음 대통령은 대학 나온 사람이 해야 한다”는 학력 차별 막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학벌은 군벌·재벌·문벌·족벌과 함께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메커니즘이 되었다. 최근에는 족벌신문의 권력화로 족벌과 재벌이 학벌과 더불어 사회를 지배하는 3대 권력체가 되고 있다.

 

노무현은 평생 우리나라 사회에 만연한 학벌주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문벌 짱짱하고 학벌 좋은 자들, 이른바 ‘주류’들은 ‘기껏 상고’ 출신의 변방 ‘촌놈’이 자기들보다 잘나 보이고 승승장구하는 데 대해 심사가 뒤틀린 나머지 학벌을 가지고 그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학벌은 한국사회의 신판 신분제 또는 한국형 카스트제도를 작동시키는 기제가 되고 있다. “학벌은 이 사회의 신분제다.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남아있는 유일한 호패”라 하겠다. 이런 학벌주의에 가장 시달린 사람이 노무현이었다.

 

노무현의 부산상고 시절은 어려웠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이럭저럭 해결되었으나 부산에서의 숙식비용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였다. 고향의 두 형님은 실업자이고, 늙은 부모님이 산기슭에 고구마를 심거나 취로사업에 나가 번 푼돈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곤궁한 살림인지라 막내아들의 생활비를 댈 형편이 되지 못했다.

 

동급생들도 대부분 가난한 시골 출신이었다. 노무현은 가난에 대한 불만,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자신감을 잃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담배를 하면서 학교에 가지 않는 날도 있었다. 2학년 때는 성적이 중간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각오를 하고 사법고시에 도전할 생각을 하면서 틈틈이 법률 관련 책을 구해 읽었다. 하지만 당장 거처할 방도, 허기를 면할 음식도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노무현은 그야말로 젊은 날을 눈물로 견뎌야 했다. “모든 것이 힘들었다. 3년 내내 한푼이라도 싼곳을 찾아 하숙ㆍ자취ㆍ가정교사ㆍ빈 공장 숙직실을 전전했다. 부산 영주동 작은 누님 집에서 비비고 산 날도 많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지나고 보면 예쁜 추억으로 채색되기도 한다지만, 그 때는 너무 서럽고 괴로워 수없이 눈물을 쏟았다.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있던 초겨울 어느 날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학교 교실에서 두 밤을 혼자 지냈다. 밤새껏 이를 악물고 떨면서 추위를 견뎠다. 다음날 이가 아파 밥을 한 숟갈도 먹지 못했다.”

 

노무현은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곤경을 딛고 일어섰다. 둘째형도 노무현이 “부산상고에 진학한 후에는 공부에만 전념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노무현은 “친구 집을 전전하며 지내기도 하고 어떤 날은 교실바닥에서 자기도 했으니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없었지만(2학년 한때를 빼고는)성적은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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