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노동판의 애환을 딛고 사법고시 합격
노무현은 1966년 2월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노무현은 졸업하면 고향으로 가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 생각이었다. 그래서 농협 직원 채용시험에 응시했다. 신입사원이 출신지에서 근무한다는 농협에 취직하면 고향에서 노령에 든 부모님을 모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밖에 낙방하게 되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세명밖에 뽑지 않아 경쟁이 치열했지만 노무현보다 학교 성적이 못한 친구들이 합격한 터라서 노무현은 더욱 애석해했다. 졸업 때가 되자 학교에서 직장을 알선해주었다. 노무현은 동기생 세 명과 함께 삼해공업사라는 어망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취업한 회사는 공장 청소를 비롯하여 온갖 잡일을 시키고는 첫 월급으로 2700원을 주었다. 노무현이 사장을 찾아가 항의하니 4000원으로 올려주겠다고 했으나 하숙비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판단한 노무현은 회사를 그만두었다. 노무현은 한 달 반 급여로 6000원을 받아 평소 갖고 싶었던 기타와 고시 관련 헌책 몇 권을 샀다. 남은 돈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 고시공부와 막노동을 오가며 방황한 청춘
고향집의 실정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큰형은 실직상태이고 그나마 취직했던 둘째형도 얼마 뒤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늙은 부모가 고구마순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면목이 없었다. 노무현은 사법고시를 준비하기로 하고, 둘째형은 5급 세무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했다. 그래서 형제는 마을 건너 산기슭에 손수 토담집을 짓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함께 공부하던 둘째형은 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동생은 되겠다’고 생각했다. “동생과 나는 우리집 건너편 산기슭에 작은 토담집을 하나 지었다. 나무와 흙을 써서 우리 힘으로 그 집을 지었다. 방 한 칸에 부엌 하나, 우물이 달린 그 집에 아버님이 마옥당(磨玉堂 : 구슬을 가는 집)이라는 현판을 지어주셨다. 전기가 안 들어오니 밤에 촛불을 켜야 했고 들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스스했다. 나는 가끔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동생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시공부를 하는데 그걸 보니까 ‘아, 동생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공부하던 스타일과는 딴판이었으니까……. 공부하는 때 필요한 환경과 도구들을 잘 정비했다. 과학적으로 했다. 톱밥과 널빤지를 구해와 방의 사방 벽을 둘러쳤다. 그렇게 하고 나니 밖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절간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완벽한 방음장치였다. 나무로 독서대를 만들어 특허를 내기도 했다. 참 좋은 독서대였다. 누워서도 책장을 넘기며 공부할 수 있는 독서대였다.”
공부방은 마련되었으나 고시공부에 필요한 책을 살 돈은커녕 생계조차 막막했다. 당시에는 대학 2학년을 수료해야만 사법고시 응시 자격이 주어지고 노무현처럼 고졸 출신들은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이란 것을 거쳐야 했다. 일종의 ‘예비고사’였다. 노무현으로서는 고시를 보기도 전에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었다.
당장 하루의 생계가 막막한 가운데 상업학교를 졸업하면 취직해서 부모님을 편히 모시겠다고 장담해왔다가 고시공부를 한답시고 빈둥거리는 꼴에 부모님이 실망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노무현은 방황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민 끝에 울산으로 가기로 했다. 당시 울산은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하면서 많은 공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울산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떠돌면서 이미 울산으로 떠난 마을 청년들도 꽤 있었다.
노무현은 무작정 울산으로 갔다. 그리고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게 되었지만, 공치는 날이 많아서 밥값을 대기도 어려웠다. 배가 고파 남의 과수원에서 배를 훔쳐 먹기도 하고 닭서리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사장에서 다쳐 그나마 막노동도 하기 어렵게 되었다. 노무현은 뒷날 “이때 밀린 외상 밥값을 떼어먹고 도망쳤다”고 고백했다.
“‘한국비료’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친구와 난 거기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일당 180원, 함바와 콘크리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자리를 만들어 잠을 잤다. 하루 세 끼를 얻어먹는데 105원, 그 밥값을 제하면 겨우 75원이 남았다. 그나마 일자리가 없어 하루 일하면 이틀은 공쳐야 했다. 그때 울산에는 서생 배밭이 있었는데, 거기서 배 도둑질도 해 먹고 닭서리도 해 먹었다. 돈도 못 벌면서 그렇게 어울려 다니기만 한 것 같다. 그러다 하루는 공사장에서 큰 못에 발을 찔려 더 이상 품도 팔 수 없게 돼 버렸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밥값이 2,000원 이상이나 밀려 있었다. 도망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일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곤 식당주인 몰래 울산역으로 내달렸다. 그때 울산역 플랫폼에서 얼마나 뒷꼭지가 당기고 또한 서럽든지….” - 노무현,《여보 나 좀 도와줘》, 새터, 2004년, 182쪽.
노무현의 방황과 일탈은 계속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둘째형과 마을 뒷산에 과수원을 만든다고 밤중에 김해 농업시험장에 들어가 감나무 묘목을 훔쳐다 심었다. 뒷날 이렇게 심은 감나무가 자라나 가정에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정작 감나무 묘목 도둑질이 노무현의 ‘운명’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
훔친 묘목을 싸들고 온 신문지에서 예비시험 공고를 보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때 훔친 묘목을 신문지에 싸들고 왔는데, 집에 와서 신문지를 펴놓고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이 있다는 공고가 그 신문에 실린 것이다. 부랴부랴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그 해 11월 부산에서 시험을 봤다. 10개 과목의 시험을 봤는데 그럭저럭 잘본 것 같았다.” 첫번 예비시험에서 합격하고 몇 해 뒤에는 사법고시까지 합격했으니, 묘목 도둑질이 ‘운명’을 확 바꿔놓은 셈이다.
8·15해방 후 단신으로 월남한 리영희(李泳禧)도 대학 진학이 어려운 처지에 우연히 한 신문에서 ‘전액 국비’라는 국립해양대학생 모집 공고를 보게 되어 해양대학생이 되고, 6·25남북전쟁 중 피난길에 들른 대구 교육구청에서 ‘유엔군 연락장교단’ 모집 공고문을 보게 되어 통역장교가 되었다. 이때 닦은 영어 실력으로 리영희는 제대 후 통신사 외신부 기자가 되었으니, 우연이 운명이 된 셈으로 노무현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은 예비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울산으로 가서 막노동판을 찾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일거리가 많았지만 마땅한 숙소를 찾기가 어려워 밥값을 떼먹고 도망쳤던 그 식당을 찾아갔다. 용서를 빌고 돈을 벌어 갚아줄 요량이었다. 뜻밖에도 주인은 흔쾌히 받아주었다. 세상에는 마음씨 좋은 사람도 많다는 걸 느꼈다. 노무현은 얼마 뒤 다시 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다.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 즈음엔 일자리도 늘어나고 일당도 좀 올라 220원을 받았다. 야간작업을 하면 280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옛날 떼먹은 밥값도 다 갚고 4,000원 가까이 돈을 모았을 즈음 나는 또다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작업 중 큰 목재에 얼굴을 얻어맞아 이빨이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져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입술을 꿰매고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 원창희가 그날 신문을 보여주었다. 원창희는 사고 소식을 듣고 가장 빨리 달려와 입원비 보증을 선 친구였다. 예비시험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 노무현,《여보 나 좀 도와줘》, 새터, 2004년, 183쪽.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다쳐 입원한 병실에서 접한 예비시험 합격 소식은 절망스러운 처지에 빠져 있던 그에게 큰 용기와 위안을 주었고, 사법고시에도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랄까? 얼마 후에 예비시험 합격이 아무 쓸모가 없게 돼 버렸다. 사법고시에서 학력 제한이 철폐된 것이다. 각고의 노력이 도로가 된 셈이었으나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았다.
노무현은 예비시험 합격의 기쁨도 잠시 병실에서 연일 고민에 빠져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입원비 때문이었다. 사고로 부러진 이빨 두 개를 갈아 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뒤 친구들이 찾아와 병원비를 산재로 처리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노무현은 그때까지도 산업재해보상제도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친구 한 녀석이 허리에 구리가루를 바르고 엑스레이를 찍으면 뼈에 금이 간 것처럼 진단이 나오고, 그리하면 상당한 산재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고 ‘요령’을 알려주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고, 입원비만 내지 않아도 다행이다 싶었다.
노무현은 뒷날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나서 산업재해 전문 변호사가 되었는데, 그도 ‘운명’이었을까? 또 그의 예비시험 합격은 나중에 쓸모없게 되고 말았지만, 노무현의 집안에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막내의 합격은 두 형들에게 크나큰 자극제가 되어 큰형은 1967년에, 둘째형은 1968년에 각각 5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 쥐구멍에도 볕이 든 것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쨍 하고 해 뜰 날’이 온 것이다.
● 곱사춤에 실어 보낸 ‘시절의 아픔’
고교시절부터 노무현과 단짝 친구이자 “평생 동안 노무현을 보살펴준” 부산상고 동기생 원창희는 “노무현이 고등학교 시절 장기자랑으로 좌중을 압도했다”고 회고했다. “노무현은 중학교에서도 부일 장학생으로 공부했고, 고교 입학시험에서도 다시 선발됐다. 체구는 작았으나 아주 총명하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명랑한 소년이었다. 소풍을 가서 반 대항 장기자랑이 벌어지면 개사한 노래로 우리를 즐겁게 했고 가히 일품의 장기였던 뱀 장수 흉내와 곱사춤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그는 이처럼 신명이 있는 소년이었지만 취업과 진학 등 장래에 대한 걱정과 고민도 많았다.”
나중에 노무현은 공사판에서 일하던 시절에도 쉬는 날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흥이 겨우먄 곱사춤을 추었다.
노무현은 뒷날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술자리 흥을 돋우기 위해 곱사춤을 추곤 했다. 곽병찬(당시《한겨레신문》편집위원)은 술자리에서 곱사춤을 추는 노무현 ‘의원’을 보고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3당 합당 뒤끝이라 정치얘기에 모두들 넌더리가 났지. 허리띠 풀고 열심히들 마셨는데도 표정들이 그리 밝아지지 않았어. 그때 노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라고. 양복저고리 벗어 던지고, 와이셔츠 속으로 바가지를 밀어 넣더구먼. 그러더니 오른손엔 숟가락을, 왼손엔 다른 바가지를 들고 구성진 각설이타령을 뽑으면서 곱사춤을 추더라고.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어. 순식간에 그 자리가 꼭 70년대 말, 80년대 초 대학가 분위기가 되어버린 듯했지. 흥이 오르자 노 의원은 바가지를 가슴 쪽으로 밀어 넣고 계속 춤을 추대. 영락없는 병신춤이었지. 그가 춤추는 걸 보며 문득 탈춤 속 말뚝이나 홍동지(洪同知)를 떠올렸던 기억이 있어. 때론 해학으로, 재치로 혹은 억센 힘으로 양반사회를 풍자하는 거 같더라고. 억압에 맞서고 갈등을 풀어가는 그 말뚝이 말이야. 이 기억은 오랫동안 그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었어. 노동자, 농민 등 소외 계층과 아픔을 마음으로 느끼고 일체감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거야.” - 허어영,〈노짱의 춤을 본 적이 있는가〉,《노무현이 없다》, 69쪽~70쪽, 학고재, 2010년.
그의 곱사춤에는 다양한 소도구가 등장했다. 나무젓가락, 밥공기, 바가지, 방석 심지어 담배까지 마구잡이로 집어 들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선 구성진 가락이 흘러나와 돌고 돌았다. 김이택(당시《한겨레신문》수석편집국장)은 노무현을 “곱사춤이 어울리는 유일한 정치인”이라고 했다.
“하루는 그가 술상을 물렸다. 등줄기에 방석을 밀어 넣고 양쪽 콧구멍엔 담배를 끼웠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흐느적거렸다. 곱사춤이 어울리는 유일한 정치인. 17년 전 민주당 대변인 노무현은 그렇게 소탈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 허어영,〈노짱의 춤을 본 적이 있는가〉,《노무현이 없다》, 69쪽~70쪽, 학고재, 2010년.
노무현은 왜 하필이면 뱀장수 흉내를 내고 곱사춤을 추었을까? 탈춤의 하나인 곱사춤은 양반계급의 위선에 대한 풍자, 민중의 애환, 사회모순에 대한 비판정신과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정신을 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핍박과 소외를 절감해온 노무현은 곱사춤을 통해 가슴에 쌓인 울분을 풀고자 했을까? ‘곱사등이(민중)’의 비애와 한을 잊지 않고자 하는 그만의 다짐이요, 그 한을 풀어주고자 하는 살풀이였을까? 자신의 고독한 영혼을 곱사춤 춤사위에 실어 위로한 것일까? 그 역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곱사등이’와 동변상련의 비주류, 변방이었다. 시인 이월란이〈곱사등이춤〉에서 노래한 대로 그는 “거친 땅 낭하에서 실낱같은 꿈의 테두리를 놓아 행려의 몸짓으로 꽃고비 맥 놀듯 엉기덩기 춤을 추”었다.
곱사등이 춤
내가 춤을 추네
가슴 휘어 꺾인 가훼 한 그루 등에 지고
갈마의 사슬 지으려 춤을 추네
구릉 사이 엇박자로 디딘 설움
누구의 넋이었던가 무슨 조화였던가
안을 수 없는 사랑 마치 등에 업고
환절의 손끝마다 새겨진 비련의 지문
버거운 인연이라 망연히 실어 날리우고
환소리같은 생언어 목젖 내려 삼키며
사지육신 농간 부리듯 오늘도 춤을 추네
곱사등이 춤을 추네
이제 막 탯줄이 잘린 고통의 신생아들이
호흡의 문을 열고 울음 우는 고빗사위
걸머진 죄를 하역하는 이단의 얼굴로
불구의 등골 지고
바람의 핵을 쫓는 무희가 되었다네
날보고 손가락질 하네 돌아서 웃네
못난 등짐 속에서도 기억의 섶은 둥지를 틀고
무애(撫愛)의 고치솜 꿈틀꿈틀 토해내며
채롱에 흔들리던 어린 영혼 등에 업고
빈 몸 누일 봉분 마저 등에 지고
육봉 가득 꽃씨 실어
사막을 지르는 단봉악대가 되었다네
운두 낮은 노을 아래 뒤뚱뒤뚱 발간 꽃물이 들면
거친 땅 낭하에서 실낱같은 꿈의 테두리를 놓아
행려의 몸짓으로
꽃고비 맥놀듯
엉기덩기 춤을 추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