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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3. 부림사건과 ‘거리의 변호사’ 노무현 ⑵

참의부 |2013.10.27 21:10
조회 113 |추천 1

● ‘잘나가던 변호사’의 삶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

 

1979년 10월, 독재자 박정희의 폭정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유신(維新)쿠데타로 종신집권체제를 구축한 박정희는 1978년 12월 27일 체육관선거를 통해 다섯 번째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해 치른 제10대 총선에서는 신민당이 공화당(31.7퍼센트)보다 높은 득표율(32.8퍼센트)을 기록함으로써 유신정권에 대한 민심의 이반 현상을 보여주었다.

 

호랑이 등에 탄 독재자는 스스로 내려오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9년 8월 9일 YH무역 여성노동자 170여명이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정부가 심야에 수천명의 경찰관을 투입해 노동자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100여명의 사상자(1명 사망)가 발생하고, 야당 의원과 당직자들도 심하게 폭행당했다. 10월 4일에는 여당 의원들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제명하면서 정국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10월 16일 부산지역에서 타오른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는 이틀 후 마산지역으로 번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었다. 이에 정부는 10월 18일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10월 20일 마산지역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위대를 폭압적으로 진압했다. 이른바 부마민중항쟁(釜馬民衆抗爭)이다. 부마민중항쟁은 노무현의 생애에 커다란 전환의 풍랑이 되었다. 당시 부산의 법조계는 독재정권의 인권 유린에 대부분 침묵하고 있었다.

 

부마민중항쟁에 앞서 1978년 4월 17일 부산대생들은 반민주적 탄압 중지, 긴급조치 해제, 노동자·농민 권익 투쟁 방해 및 인권침해 중지, 언론탄압 중지 등을 요구하는〈자율화 민주투쟁 선언서〉를 배포했는데 주동자들이 구속되었다. 이어 벌어진 부마민중항쟁 과정에서는 1500여명의 학생·시민이 연행되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87명의 학생·시민 가운데 20명이 실형을 선고받고, 651명이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노무현은 부마민중항쟁 가운데 시민·학생들이 영장도 없이 체포되고 고문을 당하는 현실을 지켜보며 한없는 분노와 무력감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내게 다가온 새로운 삶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부마민중항쟁 때 수많은 학생과 재야인사들이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병원들이 겁에 질려 시위 중에 다친 학생들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사무장이 분통을 터뜨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그저 그런가보다 했을 뿐이다. 김광일ㆍ이흥록 등 부산에서 활동하던 동료 변호사들이 험한 고초를 겪었다는 소문이 들려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운명을 바꾸었던 ‘그 사건’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판사로 변호사로 사는 동안 애써 억눌러왔던 내면의 소리를 진지하게 듣게 되었다.

내 삶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당한 삶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출세해서 좋은 일 하겠다고 혼자 다짐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갓 세상에 발을 내디딘 청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나에게 다가온 새로운 삶을 받아들였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79쪽.

 

● 얼떨결에 맡게 된 부림사건 변론

 

1981년 9월, 변호사 노무현의 삶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심복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져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박정희가 총애했던 하나회 우두머리 전두환이 12·12쿠데타에 이어 5·17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했다. 무수한 광주시민을 참살하고 5공 정권을 수립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유신정권보다 더한 폭정을 자행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시민들은 피로 세운 5공 정권을 용납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학생들이 반독재투쟁의 선봉에 섰다. 파시즘을 연상케 하는 공포정치 속에서도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은 도처에서 들불처럼 타올랐다.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1주년인 1981년 5월과 6월에는 서울지역 대학뿐 아니라 전남대·충남대·부산대 등 처음으로 “5월 광주시민항쟁을 기억하자”는 플래카드를 내걸었으며, 종로 4가와 동대문경찰서까지 진출해 경찰과 충돌해 상당수가 부상을 입고 10여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14일부터 29일을 광주시민항쟁 희생자 위령제 기간으로 선포하고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그해 9월 중순, 이른바 부림사건(釜林事件;부산의 학림사건)이 터졌다. 신군부정권 공안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부산지역의 학생·교사·회사원·지식인 등 20여명을 불법 연행한 후 고문하여 기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부산지검 공안검사 최병국이 지휘했는데, 영장 없이 체포·구금된 이들은 대공분실에서 길게는 두 달여 동안 살인적인 구타와 고문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조작됐다. 당시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정권의 안보 도구로 쓰이는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되었는데,(원래 변론을 맡기로 되어 있던)김광일 변호사 대신 노무현이 변론에 나서게 된 것이다.

 

사실 노무현은 이즈음까지도 시국에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신쿠데타 당시에는 새로 산 유신헌법 책을 외우면서 “모멸감을 느낀” 정도의 그저 평범한 고시생이었다. “절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는 와중에 10월 유신이 났다. (……) 유신이 되었으니까 헌법을 새로 사야 했다. 10월 유신은 나에게 헌법 책을 새로 사야 한다는 것, 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또(억지이론으로 가득 찬)그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고시생 노무현에게 유신쿠데타는 ‘헌법 책을 새로 사야 한다는 것’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 초기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평범한 변호사였다. 그런데 부림사건이 그의 삶을, 아니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런데 ‘부림(釜林)’의 ‘림(林)’자는 돌림자의 연원이 있다. 이에 앞서 1980년 12월 ‘무림사건(霧林事件)’이 있었고, 그 원조는 1967년 7월의 ‘동백림사건(東伯林事件)’이다. 무림사건은,「반파쇼학우투쟁선언」이라는 유인물을 뿌리고 “전두환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 서울대학생 100여명을 연행하여 무자비한 고문을 통해 반국가단체 조직 사건으로 조작하려 한 사건이다. 민주화인사 김근태(金槿泰)를 고문했던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李根安)도 이 수사에 고문기술자로 참여하여 그 공로로 1계급 특진했다. 이때 공안당국은 반국가단체 조직도까지 그려놓고도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하자 조작 공작을 중도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사건 전체가 안개 숲에 싸여 종잡을 수 없다는 의미로 ‘무림(霧林)’이라고 한 것이다.

 

노무현은 부림사건 당시 “검사가 김광일 변호사까지도 엮어 넣겠다고 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모른 채 변호를 맡게 되었다.”

 

˝공안당국은 반국가단체를 만들어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이호철ㆍ장상훈ㆍ송병관ㆍ김재규ㆍ노재열ㆍ이상록ㆍ고호석ㆍ송세경ㆍ설동일 등 부산지역 지식인과 교사, 대학생 22명을 구속했다. 그런데 이들이 실제로 한 일은 사회과학 책을 읽고 독서 모임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정부를 비판한 것이 전부였다. 구속자는 대부분 1979년 이흥록 변호사가 만들었던 부산 양서조합 회원들이었다. 개업식 축하모임, 돌잔치, 송년회를 한 것이 범죄 사실로 둔갑했고, 계엄법과 국가보안법, 집시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이 사건에 손대게 되었다. 당시 부산에서 지속적으로 인권운동을 한 변호사는 이흥록ㆍ김광일 두 분밖에 없었다. 그런데 검사가 김광일 변호사까지도 사건에 엮어 넣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변호를 맡을 수가 없었다. 손이 모자란다는 하소연을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변호를 맡게 된 것이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77쪽.

 

● 예견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운명’

 

‘운명’이었다. 조세전문 변호사가 시국담당 변호사가 되었으니 말이다. 신군부 쿠데타정권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노무현은 평범한 변호사로 적당히 삶을 즐기며 평탄하게 살았을 것이다. 노무현은 “부림사건’ 변호를 맡을 때만 해도 사건의 내용이나 성격을 파악하기는커녕 시국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조차 가지고 있질 못했다. 그럼에도 선뜻 변론에 나선 것은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노무현은 부림사건을 맡으면서, 영장도 없이 체포된 이들이 수십일 동안 불법 감금된 채 무자비한 몽둥이찜질과 물고문을 당해 육신이 망가져 있는 상태를 보고 분노했다. 담당 변호사인 자신까지도 공안기관의 첩자가 아닌가 하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그들의 상처받은 영혼 앞에서 가슴이 미어졌다. 가족들은 자식이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실성한 사람처럼 부산 시내를 헤매고 다녔다.

 

이런 참상을 지켜보면서 잠재된 분노감이 폭발한 노무현은 기꺼이 그 ‘불길’에 뛰어들었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졌다. 사실과 법리를 따지기도 전에 걷잡을 수도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법정에서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변론을 하기가 어려웠다.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처참한 고통을 거론하면서 공안기관의 불법 행위를 폭로하고 비판했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검사뿐만 아니라 판사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법정 분위기가 험악했다. 다음날 보자고 해서 검사를 만났더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느냐고 나를 힐난하면서 협박했다.

“부산에서 변호사 한두 명 죽었다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 될 줄 아시오?”

나는 오기가 나서 법정에서 검사와 삿대질을 해가며 싸웠다. 그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는 후일 국회의원이 되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78쪽.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한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은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盧德述)에게 끌려가 온갖 모욕과 고문을 당하고 나서, 분하고 억울해서 사흘간 통곡했다. 그 무렵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엉뚱하게 장덕수(張德秀) 암살사건 배후 관련자로 지목되어 미국 군정청 법정에서 온갖 모욕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은 1958년 이승만(李承晩)에 의해 간첩죄로 몰려 총독부 판사 출신으로 대법원 판사가 된 자들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었다. 독립운동지사들을 고문하고 사형을 선고했던 자들이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박정희 정권에서도 변함없이 영달을 누리고 권세를 휘둘렀다.

 

부림사건 조작을 지휘하며 노무현을 협박했던 그 부장검사는 얼마 뒤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에 노무현은 “이 나라의 옳은 길을 걸었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패배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 역사를 다시 쓰지 않고서 한국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하고 개탄하며 “이후 부산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재야단체의 간부로, 노동법률 상담소장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운동을 펼쳤는데, 1987년경에는 ‘아스팔트 변호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바닥에 드러누워 항의를 하는 것도 불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무현은 부림사건 변론 과정에서 비로소 현실의 참상을 인식하게 되면서 삶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다. 피의자인 젊은 학생들의 얘기를 통해 오히려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력착취와 빈부격차의 모순구조를 인식하게 되었다. 사회현상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노무현은 학생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사회에 진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학생들이 읽다가 붙잡혀온 바로 그 ‘불온서적’들을 읽으면서 “이기적인 사상의 껍질들이 균열되기 시작했다”고 토로했다. 그로부터 ‘운동’이 자신의 직업이 되었다고 했다. 30대 중반의 잘나가는 조세전문 변호사가 20대 청년들로부터 이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겨지는가? 노무현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상식적인 일에서는 그 정도로 유연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노무현은 시국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운동권 청년들을 자주 만났다. 이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 성적도 우수하고 졸업하면 좋은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인재들인데도, 부모님을 걱정시키면서 사회악과 독재와 싸우다가 구속된 청년들이었다. 자주 만나면서 그들을 존경하게 되고 그 정의감과 용기에 감동했다. 그래서 노무현도 기꺼이 ‘직업’ 변호사의 안락한 길을 버리고 약자들의 편에 서서 헌신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노무현은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무료 변론을 도맡다시피 했다. “멀었던 눈이 한 번 떠지자, 비로소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당하는 핍박과 설움이 또렷이 보였다. 그들의 아픔이 내 가슴에도 전해져 왔다.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에 대한 울분이 되살아났다. 무엇인가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무현은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1981년부터《부산일보》에 생활 법률상담을 연재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연재를 통해 전문적인 공부는 물론 글쓰기 훈련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이듬해 3월 18일, 노무현을 시국사건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게 한 큰 사건이 일어났으니,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이다. 부산 고신대생들이 광주시민항쟁 유혈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어 부산 미국 문화원에 들어가 불을 질렀다. 이날 학생들은 미국을 “민주화·사회개혁·통일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파쇼 군사정권을 지원하여 민족분단을 고정화”시킨 제국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미국 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했다.

경찰은 이와 관련 문부식과 김은숙 등 11명을 검거하고, 광주시민항쟁 관련자로 수배 중인 김현장이 가톨릭 원주 교육원에서 이들에게 의식화를 교육시켰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또 원주 교육원장 최기식 신부를 범인은닉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1980년대 반민투쟁과 광주·대구 등 잇따른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이나 점거농성의 선도적 투쟁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반미 반체제 용공사건으로 몰아가고 ‘땡전’ 뉴스와 족벌신문들은 학생들을 테러범으로 닦아세우며 거세게 비난했다.

 

노무현은 변호인단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서울의 인권변호사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이돈명ㆍ유현석ㆍ홍성우ㆍ황인철 등 서울의 유명한 인권 변호사들이 모두 부산으로 왔다. 신부와 수녀ㆍ가톨릭 신도들이 법원 마당을 빽빽이 채우고 찬송과 기도를 했다. 나는 아주 작은 역할밖에 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서울과 다른 지역의 인권변호사들을 알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조영래 변호사와도 교류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정법회(正法會)’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정법회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모태가 되었다.”

 

정법회(正法會)의 정식명칭은 ‘정의실천법조인회’로서 1986년 5월 19일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박정희 정권 이래 인권변론을 주로 담당해온 변호사들이 처음으로 조직화한 단체다. 정법회는 이돈명ㆍ하경철ㆍ한승헌ㆍ박원순ㆍ강신옥ㆍ고영구 등 그동안 반독재투쟁과 인권옹호에 헌신해온 민주화진영의 변호사 30여명이 참여하고, 이후 청변(청년변호사회)과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중추역할을 담당했다. 노무현도 정법회에 참여하여 학생·노동자·민주화운동가들의 변론에 크게 기여했다. 자신 또한 구속되었을 때 정법회의 도움을 받았다. 박원순은 정법회 활동에 대한 ‘노변’의 열의가 높았다고 했다.

 

˝6월 노동자 대투쟁사건 중 대우조선사건과 관련하여 노무현ㆍ이상수 회원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1987년 8월 6ㆍ29 이후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거제도 옥포 대우조선의 파업사건 때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석규 씨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형법상의 장례식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당시 김정렬 국무총리는 “대우조선분규에 외부세력이 개입,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처사이며, 전통적인 장례절차를 무시하여 영령을 욕되게 하는 짓”으로 규정하면서 반인륜적 범죄로 몰아가려 했다. 이 변호사가 구속됨에 따라 정법회 회원들 역시 그가 구속되어 있던 충무경찰서까지 가서 접견하고, 재판부 면담하러 가느라고 그 무더운 여름을 빨리 보낼 수 있었다. 결국 이 변호사는 보석으로 풀려났다.

한편 같은 해 9월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에서 가두집회를 주도한 것이 집시법 위반이라고 하여 몇 차례 영장 신청 끝에 구속되었다. 정법회 차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변협 인권위원들도 부산지검과 지법을 방문하여 진상조사와 더불어 석방을 요구했다. 노 변호사는 정법회의 수안보 정기총회를 비롯하여 각종 모임에 먼 부산에서 참여하러 오는 등 열의가 높았는데, 정법회 회원으로서는 세 번째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 - 박원순,「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두레, 2003, 375쪽~376쪽.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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