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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3. 부림사건과 ‘거리의 변호사’ 노무현 ⑷

참의부 |2013.11.04 00:13
조회 314 |추천 0

● 변호사 업무를 접은 ‘아스팔트 위의 전사’

 

인간은 역사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역사는 인물을 낳고 인물은 역사를 움직인다. 인물과 역사의 순환논리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 가운데서 학생들은 저항의 물꼬를 트고 재야인사들도 행동에 나섰다.

 

1983년 5월 18일, 김영삼(金泳三)은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3주년을 기해 민주화를 위한 단식투쟁을 벌였다.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金大中)이 이를 지지하는 선언을 하면서 양김(兩金)은 다시 손을 잡았다. 그해 9월 30일에는 1970년대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 대표들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을 창립했다. 의장에 김근태(金槿泰)가 선출되었으나 당일 경찰에 연행되었다. 12월에는 변형윤(邊衡尹) 전 서울대학교 교수 등이 해직교수협의회를 발족하고 행동에 나섰다. 이듬해 봄에는 서울대·연세대 등에서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가 속속 결성되고, 상도동·동교동의 양김세력이 민주화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를 결성하고 투쟁전열을 가다듬었다.

 

이 무렵 노무현은 공해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송사를 맡으면서 갖게 된 관심사엿다. 1984년 공해문제연구소가 발족되고 이사에 취임했다. 이후 공해나 환경문제는 평생의 화두가 되어 대통령 퇴임 뒤 봉하마을에서 생태농업과 하천습지 복원, 숲 가꾸기 등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운동으로 이어졌다.

 

노무현이 본격적으로 재야의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것은 1985년 ‘부산의 양심’으로 불리는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이하 부민회)가 출범하면서부터다. 부민회는 이후 서울의 민주화운동 세력과 연계하면서 부산지역의 반독재투쟁을 주도했다. 노무현은 부민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설립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탄압받는 노동운동가들을 변론했다. 그러면서 변호사 업무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의 변호사 사무소는 노동법률상담소와 공해문제연구소를 비롯화여 각급 노동운동단체의 간판이 걸려 마치 운동단체의 합동사무소처럼 되었다. 운영기금이 없는 운동단체들이 하나둘씩 무료로 입주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노동법률 상담소를 만들어 놓았는데 또 환경문제와 관련해서 도움을 요청해와 거기에 공간을 주었더니 사무실의 거의 절반이 운동단체에게 나가버려 나머지 절반으로 변호사 업무를 했다. 그러다 점차 운동이 본업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의 한국사회는 반독재 투쟁의 격랑에 휩싸였다. 면면히 저항의 역사를 써온 민중의 분노를 언제까지나 폭력으로 억누를 수는 없었다. 1985년 2월, 그동안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급거 귀국하여 김영삼과 손을 잡고 연초에 창당한 통일민주당을 지원함으로써 그달 12일에 실시된 제12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총선에서 승리한 민주당이 이듬해 2월 민추협 및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 천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면서 전두환 정권과 야권은 ‘마주보고 달리는 기차’의 형국이 되었다.

 

야당의 개헌서명운동이 추진되면서 학생·재야인사·노동자들도 격렬한 반독재투쟁에 나선 가운데 서울대생 김세진·이세호가 분신하여 다시 대학가는 반독재투쟁의 거대한 분화구가 되었다. 1986년 10월에는 전국 26개 대학생 2천여명이 건국대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정부는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개시했는데, 126개 중대 1만 8천여명의 경찰병력과 30대의 소방차 그리고 헬기까지 동원하여 최루탄을 난사하며 시위대를 몰아쳤다. 이 작전으로 연행한 1525명의 학생 가운데 무려 1295명을 구속함으로써 세계민주화운동사의 기록을 세웠다.

 

정국은 일촉즉발의 위기감에 휩싸였다. 전두환 정권이 학생들의 평화적인 농성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등 최후의 발악을 하는 가운데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이어 6월 9일에는 연대생 이한열이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마침내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고 6월 민중대항쟁이 전개되었다.

 

노무현은 1986년 9월부터 사건 수임을 전면 중단하고 민주화운동에 전념했다. 직업변호사에서 시국전담 변호사로, 다시 반독재투쟁 민주화인사로서 아스팔트 위의 투사가 되었다.

 

6월 민중대항쟁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6월 민중대항쟁은 1919년 3·1운동(1542회의 집회에 연인원 202만명 참가)에 이은 최대의 거사로,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살인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리는 날에 18개 도시에서 일제히 궐기하고,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전국 37개 지역에서 100여만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 6월 민중대항쟁과 ‘사람 사는 세상’

 

연일 시위에 나선 노무현은 부산의 시위를 주도한 부민회를 이끌면서 반독재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6월 민중대항쟁(六月民衆大抗爭) 중에 학생들이 즐겨 부른 민중가요〈어머니〉노랫말 가운데 ‘사람사는 세상’을 자신의 정치신념과 비전으로 삼게 되었을 만큼 6월 민중대항쟁은 그의 생애에서 고딕체가 되었다.

 

〃1987년 6월 민중대항쟁은 운동의 최절정기였다. 국민들의 폭발적인 지지 속에 우리는 신명이 나서 뛰어다녔다. 운동권 내부의 갈등은 모두 정리되고 모두들 하나같이 똘똘 뭉쳤다. 오직 하나, 이 땅에서 독재를 몰아내고 ‘새 세상’을 만들고자 최루탄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1987년 6월 18일, 성난 시위대는 드디어 서면 로터리의 경찰 방어선을 뚫고 범냇골까지 진출했다. 수십만의 시민들이 그 넓은 도로를 꽉 메워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대열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물밀듯이 행진을 했다. 그 어떤 누구도 오늘의 이 행진을 막지 못하리라. 그 때 나도 그 대열 속에 휩쓸려 함께 행진을 하고 있었다. 몇몇의 학생들이 ‘어머니’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노래는 마치 들불처럼 앞뒤로 옆으로 번져갔다. 나는 노래를 부리며 힘차게 걸어가는 청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만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아 버렸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덩실
해방의 거리로 달려 가누나
아아 우리의 승리
죽어 간 동지의 뜨거운 눈물
아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싸워 나가리
어머님 해맑은 웃음의 그날 위해.〃- 노무현,《여보 나 좀 도와줘》, 새터, 2004년, 225쪽~226쪽.

 

노무현이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리더가 되기까지는 고난과 고통,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는 경찰에 끌려가고, 9월 노동자 대투쟁 기간에는 구속되기도 했으며, 11월에는 변호사 자격까지 정지되기에 이르렀다.

 

6월 민중대항쟁이라는 국민적 저항을 맞은 전두환 정권은 민주정의당 원내총무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들었다. 어디까지나 발등의 불을 끄고 보자는 전략적 유화책이었다. 노무현은 6월 29일 서울에서 열리는 국민운동본부 대표자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중에 기차 안에서 6·29선언 소식을 들었다. 그는 회의를 마치고 저녁에 부산으로 내려와 청년들과 식사를 하면서 차후의 대책을 논의했다. 노무현은 그 자리에서 “독재정권이 물러나게 되었으니 이제 변호사 일이나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가 학생들로부터 “뭐가 끝났느냐”고 혹독한 질책을 받았다. 뒷날 노무현은 “당시 우리 국민은 너무 순진했다. ‘호헌철폐! 독재 타도’라고 외쳤으면서도 중간 목표인 ‘호헌철폐!’만 믿고 ‘독재타도’라는 최종목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린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6월 민중대항쟁은 그동안 독재정권에 짓눌렸던 노동자들의 권리투쟁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악덕 기업주들은 군부권력과 유착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부당해고를 일삼았으며, 어용노조를 만들어 노동조합을 탄압했다.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쫓겨나고 희생되었다. 이 무렵 노무현은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나는 더 바빠졌다. 민주화 분위기를 타고 그동안 억눌렀던 노동자들의 요구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1987년 7월과 8월 전국을 휩쓸었던 ‘노동자 대투쟁’이었다. 노동법률상담소에 노조 설립 방법을 문의하는 전화가 쇄도했다. 그런 상황에서 거제도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거리 시위를 하던 중 이석규 씨가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온 나라의 시선이 거제도로 쏠렸다. 나는 노조 결성 방법과 회사 측의 방해에 대한 대응 방법ㆍ효과적인 조합 운영법을 자문해주는데 힘썼다. 그런데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사체부검 입회를 간절히 요청해왔다.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현장에 가게 되었다.

서울에서 이상수 변호사가 와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노동사건 변론을 했던 순박하고 뚝심있는 변호사였다. 연민과 동정심이 많아서 고생하는 노동운동가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93쪽.

 

노무현은 1987년 2월 7일 부산 중구 남포동 부산극장 앞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집회에 참가했다. “고문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는 등 가두집회를 주도했다. 그밖에도 수차에 걸쳐 시위를 벌였다. 이와 관련 검찰은 불법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노무현을 기소햇다. 2월 19일, 부산지검의 검사 정현태가 피의자 노무현과 마주앉았다. 노무현은 “이번 일이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라며, 조금도 거리낌 없는 여유와 당당함을 보여주었다.

 

〃검사 - 묻는 대로 답하겠는가.
노무현 - 인적사항만 말하고, 사실관계는 말하지 않겠다.

검사 - 피의자는 1986년 8월 10일 오후 7시 부산 중부교회 인근에서 학생 50명을 선동해 “폭력경찰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선창하는 등의 가두시위를 전개한 사실이 있는가.
노무현 - 알 필요가 없다.

검사 - 1985년 김광일ㆍ문재인 변호사와 함께 300만원을 각출해 당감성당 안의 부민협 사무실을 부산 진구 범천1등 845호 송호진 씨 소유의 건물로 이전토록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있는가.
노무현 - 그런 것도 문제가 되는가.

검사 - 부민협은 민통련 산하 단체로서 민통련과 이념을 같이하고 있다는데 사실인가.
노무현 - 부민협의 운동이념을 알 뿐, 민통련의 이념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산하단체라고 하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검사 - 1987년 2ㆍ7 박종철 추모집회를 위해, 1월 10일과 2월 3일 부민협 사무실에서 2회에 걸쳐 부민협 등 재야단체와 신민당이 회합을 가져 박종철 추도행사를 2월 7일 오후 2시 대각사에서 열기로 하고, 행사가 저지될 경우 집회와 시위도 불사한다는 등의 결의를 했는가.
노무현 - 질문도 정확하지 않고 대답 또한 하고 싶지 않다.

검사 - 박종철 추모행사에 쓰이는 유인물과 플래카드, 어깨띠 등을 제작하는 등 필요한 경비로 피의자가 50만원을 제공했는가.
노무현 - 알 필요 없다. 하지만 뭐라고 할까, 귀신같네.

검사 - 추도회의 사회는 부산 Eyc 총무 최명철이 맡고, 개회선언은 부민협 사무국장 김재규가 했고, 피의자의 추도사를 소개한 것도 김재규인가.
노무현 - 한 가지가 틀렸다. 그러나 말하지 않겠다.

검사 - 당일 행사의 추도사를 위해 미리 추도사를 준비했는가.
노무현 - 미리 준비했다면 좀 더 잘했을 것이다.(중략)

검사 - 박종철군 사건의 성격, 부산이 박종철의 고향이라는 사정, 부산 시민의 기질 및 부산 시민이 갖고 있는 정치적 경험을 비춰볼 때 박종철 추도회를 제지하지 않으면 인천사태 등과 같이 극도의 혼란 사태가 생기지 않고, 피의자가 말하는 평화적인 추도회만으로 끝날 것으로 자신하는가.
노무현 - 자신할 수 있다. 그런 불안은 이런 추도회를 평화적인 추도회로 끝날 수 없도록 원인을 제공한 자들의 불안일 뿐이다. 민주적인 제 권리가 보장된 곳에서는 추도회가 폭력사태로 발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검사 - 법조인의 견지에서 볼 때 피의자의 행동이 너무 정치적이거나 지나치다고 느껴지진 않았나.
노무현 - 나는 개인적으로 정치적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정치적 권리는 보장돼야 하고, 그 행사는 시민의 의무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법조인이라면 법률적 방법으로 대응해서는 스스로의 권리는 물론 시민의 권리조차 옹호할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검사 - 현재의 심경은.
노무현 - 이번 일은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정재형,《성공과 좌절:노무현 대통령의 못다 쓴 회고록》, 학고재, 2009, 205쪽~206쪽.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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