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행정부와 새누리당, 더 정확하게는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박승춘 보훈처장, 그리고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 의해 조직된 한국현대사학회가 찬양·칭송·미화하기 위해 왜곡·날조·은폐시키려 하는 18년 장기집권 박정희 독재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김재홍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최신 저서《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저자의 직접적 경험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친일파의 후예, 군사정변 세력이 조작한 잘못된 신화와 삐뚤어진 우상을 깨고 우리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다!
● 더러운 전쟁의 시작, “옷을 다 벗으세요”
#01
아무런 간판도 장식도 없는 삭막한 콘세트 건물.
군 정보기관 소속의 한 소령 계급이 연행돼온 남자에게 협조해줄 것을 나름대로 정중하게 당부한다.
“옷을 다 벗으세요.”
그는 속내의만 남기고 겉옷을 모두 벗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4명의 점퍼차림들이 다짜고짜 달려들어 속내의를 벗겼다. 점퍼들은 나체가 된 남자의 팔과 다리를 교차하여 묶더니 그 사이에 큰 막대기를 끼워서는 두 개의 책상 사이에 걸어놓았다. 마치 통닭구이처럼 사람을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았다. 취조 4인조는 ‘통닭 남자’의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는 주전자로 물을 붓기 시작했다. 숨을 못 쉬고 거의 질식상태인 그에게 또 사정없는 각목 구타가 이어졌다.
고문에 못 이겨 그는 풀어주면 말하겠다고 했다. 점퍼들은 서너 차례나 다짐을 받고는 그를 풀어 땅에 꿇어 앉혔다. 갑자기 그의 입에서 “우드득, 딱” 하는 소리가 났다. 혀를 깨물었으나 의치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취조하던 점퍼들은 당황해 하면서 그를 제지했다.
#02
국가정보기관의 수사 안가에 밤 11시경 한 50대 민간인이 연행돼왔다. 옷을 벗기고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힌다. 이어 의사가 건강상태를 점검했다. 의사는 책임자에게 “혈압이 높으니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담당 수사관은 “사실대로만 얘기하면 곧 나갈 수 있어요”라며 점잖게 취조하기 시작했다. 수사관은 수년 전 잡혀왔을 때도 신문하던 그 사람으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조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수사관이 바뀌더니 2인조 고문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주먹질과 각목 구타가 이어졌다. 고문자들은 기가 빠진 그를 지하실로 끌고 들어갔다. 의자에 앉혀 손발을 묶고 고개를 뒤로 젖혀 얼굴에 물을 부었다. 그래도 묻는 말에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자 고문자들은 그를 어떤 작은 방에 집어넣었다. 진공실 고문이었다. 조금 있으니 얼굴과 가슴이 바깥으로 찢어지는 것 같고 몸뚱이 전체가 공중에 둥둥 뜨는 듯했다. 비명을 지르려 해도 목소리가 안 나오고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
#03
체격이 건장하게 큰 40세 안팎의 남자 한 사람이 군 헌병대로 연행됐다. 콘세트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2명의 조사요원이 야전 침대용 각목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고 남자는 실신해 쓰러져버렸다. 완력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남자의 옷을 다 벗겨서 묶으려면 상당한 실랑이가 벌어질 터였다. 그런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 그냥 처음부터 두들겨 패서 기절시켜서 해결해버린 것이다. 그가 의식을 회복해보니 실오라기 하나도 남김없이 벌거벗겨져 전라 상태가 된 채 손과 발이 묶여 주리를 튼 것 같은 상태에서 두 책상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이어 얼굴에 수건을 씌워놓고 주전자로 물을 부으니 그는 다시 실신했다. 정신이 들어보니 의사가 혈압을 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하는 것이다. 고문은 밤을 새우며 여러 차례 반복됐다.
이 야만적인 고문장면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것일까?
흔히 우리는 일제강점기 고등경찰이나 헌병대가 항일독립운동 애국지사에게나 가하는 악행을 연상한다. 아니면 1970년대 중반 남미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가했다는 고문을 생각할 수도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이 벌인 악행은 ‘더러운 전쟁’으로 시사용어사전에도 올라 있으며 지금까지 세계인의 저주 대상이다.
그러나 위의 고문장면은 일제 식민지 지배 시기도,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 아래서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도 불과 40년 전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에서 벌어진 일이다. ‘박정희식 더러운 전쟁’이다. 아르헨티나의 독재권력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벌인 ‘더러운 전쟁’은 1976년부터 시작됐으니, 박정희가 ‘더러운 전쟁’에서는 그의 선배인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유신쿠데타였다. 그러자 중앙정보부, 보안사, 헌병대가 설치기 시작했다. 국가기관이 조직폭력배나 다름없는 불법폭력을 구사했다. 그것은 가히 독일의 히틀러 나치 권력이나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게서 자행되던 체제폭력이었다. 명색이 국민의 대표로서 국정감사 중이던 국회를 해산하고는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을 붙잡아다 악행을 가했다. 갖은 고문기술을 동원해 비인간적으로 문초했다. 그 고문기술은 일제로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것이라고 했다.
장면 #01은 당시 신민당의 유일한 군 장성 출신인 이세규 국회의원이 당하는 모습이다. 그는 5·16쿠데타 후 군 장성 출신 중에서도 자기 집 한 채 없이 사는 청렴결백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1971년 대통령선거 때 신민당 소속 김대중 후보의 안보특보로 정계에 입문한 것이 죄(?)라면 죄였다. 군 장성 출신인 그가 군 내부 사정에 밝은 것은 당연했고, 야당에서 매우 긴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군 내부에서 익명의 제보도 많았다. 박정희에게는 그것이 더욱 눈에 거슬렸다.
박정희는 자신이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아서인지 특별히 군 내부의 동향파악에 신경을 썼다. 자신이 과거 남로당의 군내 프락치였다가 그 조직을 밀고하고 살아남아서인지 내부 밀고자와 정보망을 특히 증오했다. 군 장성 출신으로 야당으로 간 이세규 국회의원이야말로 그런 점에서 박정희와 그 주구들이 눈독들일 만한 표적이었다.
군 정보수사기관에서 인간 이하의 고문에 시달린 이세규는 혀를 깨물고 의치가 부러져 피투성이가 된 입을 겨우 벌려 이렇게 소리쳤다.
“전쟁에 져서 적군의 포로가 되어도 장군에게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장군으로서 최후의 것을 다 잃었다. 더 이상 살아봤자….”
제아무리 악랄한 군 취조관이라 해도 이세규의 처절한 저항에 잠시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이러시오?”
이세규는 고문자들에게 입속의 핏물을 내뱉으며 울부짖었다.
“너희 놈들은 군인도, 인간도 아니다!”
이세규는 닷새나 더 그렇게 고문에 시달렸다. 그들의 요구는 이세규의 군부 내 인맥과 제보자 명단이었고 10·17유신쿠데타에 지지성명을 내달라는 것. 이세규는 끝까지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더 이상 정치권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평생 허리통증에 시달리며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장면 #02는 조연하 전 국회부의장이, 장면 #03은 최형우 전 정무장관이 역시 10·17유신쿠데타 직후 잡혀가 고문을 당하는 모습이다. 최형우는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내란 때도 보안사에 끌려가 똑같은 악행을 당했다. 그는 김영삼 행정부가 들어 선 후 민주자유당 사무총장과 내무장관을 지낸 실세가 됐다. 그렇게 못된 악행을 당하고도 가해자들과 손잡고 3당 합당을 한 대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김영삼 행정부 아래서 내란과 부정축재로 구속된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그들의 체제가 저지른 고문악행을 되갚아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군사정권이 끝나고 명색이 문민정부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도 3당 합당의 대가일까?
유신쿠데타 당시 이와 똑같은 박정희의 ‘더러운 전쟁’에 당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20여명에 이른다. 위의 세 정치인 외에 강근호·김경인·김녹영·김상현·김한수·나석호·박종률·이종남·조윤형·홍영기 등이 모두 국가기관에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
이들 중 13명의 야당 의원들은 1975년 2월 28일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들이 겪은 고문에 대해 증언했다. 그러나 종교인과 학생운동 간부들은 아직 이렇다 할 고문악행에 대한 증언을 남겨놓지 않았다. 필자는 유신쿠데타의 전조라 할 수 있는 1971년 10월 15일 대학가 위수령 때 교정에서 체포돼 일주일 이상 경찰서와 중앙정보부에서 공포의 고문악행을 당했다. 나는 이제야 그 전모를 증언한다.
● 위수령과 강제입영으로 학생운동 ‘소탕’
당시 박정희는 가장 비타협적인 저항세력이던 학생운동을 소탕하기 위한 ‘더러운 전쟁’을 벌였다. 전국 대학가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연대장급 지휘 아래 군대를 투입했다. 서울대학교 본부와 문리대 법대 등이 있는 동숭동에는 김복동 대령, 서울대학교 상과대학과 고려대학교가 있는 종암동 지역에는 전두환 대령, 그리고 연세대·이화여대·서강대 등이 있는 신촌에는 정병주 준장의 부대가 각각 진주했다. 지휘관들은 모두 박정희의 친위대인 하나회 멤버들 또는 그에게 충성하는 장교들이었다. 그러나 정병주는 후에 전두환의 12·12쿠데타 때에 반대하다가 하나회 부하의 총격을 받고 체포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군부대가 진주하기 전 관할 경찰서는 대학 캠퍼스에 사복형사대를 투입해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그날 하루만 전국에서 1889명을 붙잡아갔다가 그 중 92명의 간부만 유치장에 구금하고 모두 석방했다. 그 후 캠퍼스에 붙잡히지 않은 학생간부까지 포함해 전국 각 대학에서 모두 177명이 제적당한 채 군 강제입영 조치됐다. 우리는 논산훈련소를 거쳐 일선 철책부대에서 34개월 내내 행정반 근무가 금지된 채 소총수로만 근복무를 했다. 박정희에 의한 ‘더러운 전쟁’의 희생자들은 당연히 남다른 유대를 갖게 됐고 제대 후 ‘1971동지회’를 결성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서울대학교 개교기념일인 10월 15일, 필자는 이틀 전 1000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연합학생총회의 사회자였기에 일단 서울의 교외에 숨어야 했다. 그런데 대학본부에서 열리는 총장 주재 개교기념 행사에 학생 대표가 참석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전갈이 왓다. 당시 나는 서울대 문리대의원회 의장으로, 그리고 김상곤(현 경기도 교육감)은 총학생회장으로 개교기념 행사장에 가야 했다. 그때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제적과 강제입영은 못 면하더라도 모진 고문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학본부 총장실에 막 들어가려 하자 안에서 보직교수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일러주었다. “김 군, 큰일났네. 곧 10시에 정부가 위수령 발동을 발표한다고 하네.” 교수들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나왔다. 나는 위수령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겠다며 대학본부를 나서다가 건너편 의과대학 구내에서 동대문경찰서 형사 팀에 체포되고 말았다.
경찰서에 들어가자마자 두 형사가 뺨을 때리면서 욕지거리와 함께 일종의 야료를 시작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못하던 정보과 형사들이 위수령 발동에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김상곤도 벌써 뺨을 몇 대 맞았는지 벌겋게 부어 있었다.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는 당시 관할이던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 그리고 성균관대 학생간부들이 불법 감금했다.
경찰 조사반은 항상 밤 12시가 넘어서야 우리를 불러냈다. 지하 취조실이었다. 맨 뒤에 조사반장이 있고 그 앞쪽에 취조 형사의 책상이 자리했다. 책상에는 각목이 하나씩 준비돼 있었다. 취조 형사는 수시로 그것을 들어 어깨와 팔을 두들겨 패며 “빨리 불어, 임마!” 하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아, 이 자식 안되겠네. 어이!” 하고 부르면 건장하고 늘씬한 사내가 나를 끌고 컴컴한 암실로 들어갔다. 사내는 나에게 온갖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그리고는 녹초가 되게 폭행당한 나를 다시 취조 형사 앞에 앉힌다.
“야, 임마. 너 버텨봐야 고생만 해. 불지 않으면 절대 안 끝나. 우리도 죽겠어.”
경찰서에서 그렇게 시달린 지 한 사나흘 쯤 되는 날 밤 2시경.
취조 형사는 책상에서 몽둥이를 들어 나를 다시 후려 팰 기세였다. 그때 뒤쪽의 조사반장이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예? 아 예, 그놈 여기 있습니다.”
그러더니 반장은 나를 노려보며 몽둥이를 드는 형사에게 말했다.
“어이, 그놈, 그냥 놔둬라. 그놈 A에서 올려 보내라고 한다야.”
나는 그 A라는 말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이게 과연 시중에서는 남산이라 불리는 중앙정보부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당시 중앙정보부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제발 그곳만은 피해야 하는데…….
“너 임마, 거기 가면 진짜 고생하는데…. 내가 뭐라 그랬어. 여기서 빨리 불라고 할 때 끝내 버리지 참….”
그의 짐짓 동정어린 말투가 나를 더욱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순간 그래도 경찰이 내 편이고 중앙정보부는 악의 소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악행의 정도가 다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나에게 취조반 한쪽에 앉아 쉬라고 했다. 그리고 서너 시간이나 흘렀을까? 새벽녘에 나는 검정색 지프차에 짐짝처럼 실렸고 두 사내가 양쪽에서 팔을 잡았다. 차가 퇴계로 쪽을 향하자 그들은 내 머리를 앞 의자 등받이 밑으로 처박았다. 나는 바깥을 내다보지 못한 채 끌려가 그 ‘남산’의 어느 독방에 던져졌다.
▶ 김재홍 著,『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株)책으로보는세상 編, 2012년 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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