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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4. 3당 야합을 거부한 청문회 스타 ⑴

참의부 |2013.11.08 00:37
조회 125 |추천 0

● ‘노동자의 벗’ 그리고 1987년 대선의 악몽

 

당시 노무현은 부산지역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는데, 동료들이 노무현에게 사체부검 입회를 요청했다. 노무현은 이에 앞서 6월 18일 부산에서 시위 도중에 최루탄을 피하다 떨어져 사망한 청년 이태훈의 사체부검에도 입회한 바 있었다. 그는 이석규의 사체부검 입회에 이어 유족 보상 문제 등의 중재에도 나섰다. 그런데 이것이 구속의 빌미가 되었다.

 

“우리는 먼저 임금협상을 원만하게 타결해야 유족 보상과 장례 절차를 원만하게 치를 수 있다고 보면서 중재를 했다. 그런데 검찰이 우리가 노동자를 선동한다면서 ‘제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혐의를 걸었다. 거제에서 붙잡혀 구속된 이상수 변호사는 통영에서 두 달이나 고생을 했다. 나는 일이 있어서 부산으로 돌아왔다가 붙잡혔는데, 부산 변호사들이 대거 참여해 힘을 쓴 덕분인지 구속적부심을 통해 23일 만에 풀려났다.” - 정재형,《성공과 좌절:노무현 대통령의 못다 쓴 회고록》, 학고재, 2009, 206쪽.

 

유신독재나 5공 정권 시절에도 민형사 사건이 아닌 시국사건으로 변호사가 구속된 일은 흔치 않았다. 이병린·강신옥 등 몇몇에 불과했다. 노무현은 변호사 업무까지 정지당하게 되었고, 1988년 2월에는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아 항소했으나 기각되었다.

 

노무현은 “다른 분들은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바치거나 많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는데, 나는 23일밖에 감옥살이를 살지 않았다”고 겸손해하며 “국회의원이 된 것은 행운”이라고 몸을 낮췄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행운이었다. 금뱃지를 달기 위해 수십년을 고생하여 가산까지 탕진하는 경우도 많은데 비해 난 참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때로는 격려의 박수를 받아 가며 큰 명예도 얻었다. 어떤 이는 그게 다 인권운동을 열심히 한데 대한 보답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운동과 정치를 단지 ‘보답’이라는 차원에서만 생각하면 난 참 미안해진다. 70년대부터 또는 그 이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도 재야에서 활동하고 계신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숱한 시간들을 감옥에서 보내고 직장도 가지지 못한 채 오로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말로 다하지 못한 고생을 해 오신 분들에 비하면 내가 겪은 고생쯤은 고생도 아닌 것이다.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불과 3년밖에 안된 시점에서 ‘영입’이란 이름으로 보상을 받았던 것은 역시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감옥을 같다온 시간이 불과 23일밖에 안 되는 나에게….〃- 노무현,《여보 나 좀 도와줘》, 새터, 2004년, 95쪽.

 

노무현은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다. 자신의 투쟁을 부풀려 말하는 사람들은 그만두고라도 투쟁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자들이 무슨 대단한 투사였던 양 행세하는 판에 그는 오히려 ‘불과 23일의 감옥살이’를 면구스러워한 것이다.

 

노무현에게 변호사 자격 정지는 큰 타격이었다. 민주화 열기를 타고 나날이 늘어나는 노동운동 가운데 변호해야 할 노동자들은 늘어나는데 이들을 변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미 사건 수임을 중단하고 있었기에 업무정지를 당해도 먹고 사는 문제와는 별 관계가 없었다. 문제는 노동사건 변론을 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제 상담이나 서면 작성밖에 해 줄 것이 없었다. ‘운동 전문 변호사’가 현장이나 법정에 가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문서만 만지고 있자니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상담과 서면 작성도 무척 보람있는 일이었다. 노동자들에게 노조 설립 신고 절차를 교육하고 설립 신고서와 규약, 의사록 등 서류 작성을 도와주었다. 6ㆍ10 민주항쟁 직후 부산과 경남 일대에서 결성된 노동조합 대부분이 우리 노동상담소의 지원을 받았다. 수백개의 새로운 노동조합 탄생을 도운 산파 역할을 한 것이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94쪽.

 

노태우의 6·29선언 이후 정세는 급변하여 개헌정국으로 치달았다. 신민당이 체제 내의 개헌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하면서 혁명적 열기로 5공 타도에 나섰던 학생·재야인사·노동세력도 차츰 온건노선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양김의 분열은 재야민주세력의 분열을 가져왔다. 후보 단일화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끝내 성사되지 못하고, 6월 민중대항쟁을 주도했던 사람들 사이에는 분열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에 노무현은 절망과 무력감을 느꼈다. 야권에서 김영삼·김대중·백기완이 각자 출마하면 정권교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로서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부산은 김영삼 후보의 독무대여서 선거운동을 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방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어서 “(공정선거감시운동본부장을 맡아)개인 돈을 털어 공정선거 감시활동을 벌였다. 선거 당일 감시단 청년들이 깡패들한테 각목으로 맞아 다쳤는데 치료비를 구해 주지 못했다. 극심한 우울감과 패배감에 젖은 채 맞은 1987년 대선은, 결국 좌절감과 환멸의 깊은 상처를 남긴 채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나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많은 시민들이 큰 상처를 받았고, 이 상처는 끔찍한 악몽으로 남아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 ‘노변’이 정치판으로 간 까닭

 

서구 근대 지식인의 상징으로 불리는 문인 사르트르는『지식인의 변명』에서 “지식인이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인은 숙명적으로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20세기 게릴라의 상징인 게바라에 이어 21세기 게릴라의 새로운 전설로 불리는 마르코스는《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에서 “투쟁은 둥근 원(圓)과 같다. 어느 곳에서나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끝나지 않는다”면서 총을 들었다.

 

한국의 시인 이시영은「비밀」에서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차서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선 사람이여!”라고 노래했다. 시인의 노래처럼 노무현은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찬’ 사람이다. 그 아픔이 억울한 사람들과 약자들의 편에 서게 만들었고 그들의 벗이 되게 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일이라면 투쟁은 어느 곳에서나 시작할 수 있고, 지식인으로서 ‘법과 원칙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픔으로 꽉 찬 사람’ 노무현의 ‘운명’이었다.

 

6월 민중대항쟁에도 불구하고 분열 때문에 군부독재세력을 몰아내지 못한 야권은 1988년 4월 26일의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진영을 정비하면서 다시 한 번 격돌하게 되었다. 16년 만에 부활된 소선거구제 아래서 299석(지역구 224석, 전국구 75석)을 놓고 여야는 물론 야당끼리도 사활이 걸린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여야 했다. 야권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외에도 재야인사들의 한겨레민주당과 민중의당으로 각각 분열되어서 재집권에 성공한 민주정의당과 맞붙게 되었다.

 

야권이 난립하면서 김대중과 김영삼은 경쟁적으로 유능한 재야인사 영입에 나섰다. 기성 정치인만으로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대선에서 패배한 양김이 제1야당 자리를 놓고 다시 경쟁하게 된 판에 재야 명망가를 어느 쪽에서 더 많이 영입하느냐에 따라 대세가 결정되는 형국이었다.

 

노무현은 김영삼의 제안을 받았다. 1987년 대선 때 그를 지지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김영삼 후보의 독무대가 된 부산에서 공정선거 감시운동 부산본부장을 맡아서 ‘불편’하게 했으면 했지 ‘동지’ 관계는 아니었는데 의외였다. 그럼에도 김영삼이 노무현을 영입하려 한 것은 지역의 민심 때문이었다.

 

지난 몇 해 동안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을 이끌면서 보인 열정과 개혁성이 시민들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김영삼이 이것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아내 권양숙은 노무현의 정계 입문을 한사코 반대했다. 남편이 정치를 하게 되면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불편을 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1988년 초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한테서 영입 제안이 왔다. 대선에서 패배한 ‘양김’이 재야 민주화운동 출신 인사를 다투어 영입하던 때였다. 아내가 머리를 싸매고 반대했다. 돌이켜 보면 아내가 나보다 현명했다. 아내는 정치를 몰랐지만, 남편이 정치를 하면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직관으로 알았다.”

 

하지만 노무현은 산업화의 주역이면서도 저임금과 불안정한 신분, 각종 공해와 산업재해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원내에 진출하는 것이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뜻을 굽히지 않았다. 더구나 정권이 변호사 자격까지 정지시킨 상황이라서 변호사로서 노동자들을 도울 수도 없는 처지였다. “처음 정치를 시작할 당시에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라는 일반적인 인식이나 의지도 물론 있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신분을 취득하려던 목적도 있었다. 변호사로서 변론활동을 통해 지원을 하다가 그것을 못하게 되었으니 국회의원 신분이 되면 그게 좀 쉬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노무현은 여느 정치지망생들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또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국회의원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판사직을 집어던질 때, 돈 잘 버는 조세전문 변호사와 결별할 때, 세속적인 명예와 돈, 출세 따위와는 이미 선을 긋고 있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 채 허덕이는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국회의원의 ‘신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노무현은 정치를 한다면 김영삼보다 김대중과 함께 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의 진보적인 정책노선과 살아온 삶의 궤적이 자신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정치 지형이 이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김영삼 총재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소박하게 판단했다. ‘국회의원이 되면 노동자들을 돕는 데 유리할 것이다.’ 민주화운동을 한 동지들과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하고 치열하게 토론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중에는 대선 패배로 인한 6월 항쟁의 좌절을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극복해야한다는 공감대를 이루었다. 더 진보적인 김대중 총재의 정책노선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되려면 통일민주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선되기에 수월한 지역구를 고르라는 김영삼 총재의 호의를 사양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동구를 선택했다. 상대가 모두들 기피하던 전두환 정권의 실세 허삼수 씨였기에 거기에는 지원자가 없었다. 이왕이면 센 상대와 대결하고 싶기도 했고, 그가 전두환 대통령의 왼팔로 통한 5공화국 독재의 상징적 인물이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세력을 대표해서 이기고 싶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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