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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4. 3당 야합을 거부한 청문회 스타 ⑵

참의부 |2013.11.12 17:54
조회 105 |추천 0

● 대의에 따른 도전정신의 승리

 

노무현의 도전정신은 정계 입문 과정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정치인이라면 다들 쉬운 선거구를 택하고자 하고, 정치계 신인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한데 노무현은 쉬운 선거구를 사양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데다가 가장 센 상대가 버티고 있는 선거구를 선택했다. 상대는 5공의 실세 삼허(三許)의 하나인 허삼수(許三守)로,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 지역구였다.

 

˝1988년 4ㆍ3총선, 부산 동구에는 군사정권의 최고 실세였던 허삼수 의원이 버티고 있었다. 민주당에서는 아무도 부산 동구에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노무현이 나섰다. 주변에서는 한사코 말렸다. “쉬운 지역이 많은데 왜 힘든 곳을 택하느냐.” 하지만 그의 대답은 “내가 그를 꺾지 않으면 누가 그 일에 나서겠는가.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대의를 택하겠다”라고 했다. 그는 언제나 당당히 대의를 택하고 용감했다.˝ - 원창희,〈붙잡지 못한 죄 어찌할까〉,《노무현이 없다》, 학고재, 2010년, 181쪽.

 

노무현의 ‘모험심’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허삼수 선거캠프에는 주먹들이 많다는 소문이 돌았다. 선거운동원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허삼수 후보 선거사무소를 찾아갔다. 가서 인사를 하고 정정당당하게 겨루어 보자고 말한 다음 아무 일 없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노무현은 예상을 깨고 부산 동구에서 여유 있게 당선되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선거전이었다. 자금이나 조직도 형편없이 열세였다. 시민들의 대선 패배에 대한 눈초리도 따가웠다. 부산에서 출마한 김영삼 총재가 노무현의 선거구에 와서 지원 유세를 해준 것도 아니었다. 막판에 인접 몇 개 선거구를 묶어 정당 연설회를 한 번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5공 핵심 실세를 물리치고 당선된 것은 부산시민들의 ‘인물’에 대한 심판이었다. 깨끗한 선거를 치른다는 원칙을 준수하고 선거비용도 법적 한도를 넘기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 남아 일부는 다른 지역의 노동자 후보들을 도와주고 나머지는 부산 청년단체에 다 주는” 여유를 보였다.

 

˝선거 막바지에 중앙당의 지원금이 왔으나 워낙 돈 안쓰는 선거운동을 했기 때문에 막판에 쓸 일도 없어서 돈이 남았다. 어려운 형편에도 적지 않은 돈을 모아주었던 부산상고 동문들이 알았다면 화를 냈겠지만, 울산과 마산 등지에서 재벌 후보와 맞붙은 노동자 후보들이 돈이 없어서 만들어 놓은 홍보물을 찾지 못한다고 하기에 돈을 나누어 주었다. 선거 뒷정리가 끝난 뒤에 남은 돈은 부산 청년단체가 사무실을 얻는다고 해서 다 줬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99쪽~100쪽.

 

노무현은 남다른 부분이 많은 사람이다. 선거 뒷정리도 그렇다. 요즘은 달라졌으나 과거에는 선거를 한 번 치르고 나면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반대로 축재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지역구도가 투표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선거구에 출마하게 되면 이를 기회로 기업, 동창, 친인척과 중앙정당의 지원을 받아서 남는 돈을 챙겼다.

 

노무현은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다. “여성 유권자들에게 인기가 있으십니까?”하고 물으면, “좀 없는 편입니다” 한다. “생각은 올바를지 모르지만 당신이 젊은 시절에 한 일이 별로 없지 않으냐, 이렇게 나온다면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한 게 별로 없지요” 한다. “민주당 쇄신 파동 때 혹시 동교동계의 눈치를 본 것이 아니냐?” 하고 물으면, “눈치 좀 봤지요” 해버린다. 묻는 사람이 무안해질 지경이다.

 

2002년에 한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영어를 잘 못하시지요?”하는 질문에 곧바로 “통 못하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걱정스런 표정으로 옆에서 지켜보던 비서관이 보다 못해 끼어들며 말했다. “장관님 영어 잘하시는데요. 회화도 꽤 하시고 발음도 좋은 편이고.” 이에 노무현은 그 비서관을 쳐다보며 “말을 제대로 못하면 못하는 거야” 하고 타이르듯 말했다.

 

노무현이 정직하고 솔직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자신의 일관된 삶의 행로에서 삼가고 또 삼가면서 지켜온 명예와 자존이 상처받고 추구해온 가치가 훼손되자 거침없이 몸을 날려버리는 마지막 결단에서도 나타난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노무현이나 오바마가 ‘그리도’ 솔직해질 수 있는 것은 “도덕적인 자부심과 유연하고 개방적인 자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첫째, 어린 시절에 어른들의 눈치를 보거나 긴장하면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소한 습관적 거짓말은 대개 어린시절에 형성된 방어적 태도에 기인한다. 부모한테 혼이 많이 나는 아이는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습관화할 수 있다. 노무현은 어릴 때 거짓말을 하지 않더라도 어른들이 자신을 사랑할 거라고 믿었고, 거의 혼이 나지 않은 귀염둥이로 자랐기에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둘째, 도덕적으로 자신이 있고 자부심이 강했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나쁜 생각이나 욕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타인에게 들킬까봐 끊임없이 긴장하고 거짓말을 해댄다. 하지만 착한 생각과 건전한 욕구를 가진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노무현은 항상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곧 자신이 다수 국민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니 속마음을 숨길게 없고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셋째,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깨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솔직할 수 있다. “솔직하게 말했다가 망신을 당하면 어쩌나?” 같은 생각은 변화를 거부하는 허약한 자아의 반영이다. 유연하고 개방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은 항상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사람은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는 걸 오히려 좋아한다.

넷째, 성격특성 때문이다. 노무현은 가장 솔직한 특성을 가진 외향 사고형(ET)이다. 언어의 감정 표현이 풍부한 외향형(E)과 타인의 기분이나 눈치에 잘 구애받지 않는 사고형(T)이 결합되면 머릿속 생각을 여과없이 표현하는 솔직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김태형,『심리학자의 눈으로 노무현과 오바마를 분석하다』, 133쪽~135쪽, 예담, 2009년.

 

● 국회의원의 진면목을 보여준 ‘청문회 스타’

 

노무현이 첫 의정에 참여한 13대 국회는 민정당 125석(전국구 38), 평민당 70석(전국구 16), 민주당 59쪽(전국구 8), 공화당 35석(전국구 8), 한겨레민주당 1석(총선 직후 평민당 입당), 무소속 9석으로 의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되었다.

 

재야인사들 가운데 문동환·박영숙·조승형·박석무·이해찬 등은 평민당, 노무현·강신옥·이인제 등은 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에 진출하여 제6공화국 국회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노무현은 마침내 ‘정치인’이 되었다. 그처럼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은 온통 진흙탕인 정치판에서 생존하기란 쉽지 않다. ‘정치인’이라는 개념은 유럽의 종교전쟁에서 처음 등장한다. 16세기 중반 ‘Les Politiques’는 프랑스에서 천주교 신자와 위그노 신자 간의 유혈충돌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 시스템 내의 종교이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싸우는 사람을 의미했다.

 

셰어가 지적한 대로 ‘정치인’은 정교(政敎)가 분리되고 절대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바뀌어 민주주의 규칙을 도입하면서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결국 정치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한국에서 정치 또는 정치인은 대단히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이승만의 백색독재로부터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3대의 군부독재 그리고 민간정부에서도 계속된 권력형 비리와 부패, 권력남용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심지어 시중의 ‘정치적 해결’이란 비합법, 반상식의 반칙을 의미하게 되었다.

 

국회의원들이 다들 기피하는 노동위원회를 지망한 노무현은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자 정부를 추궁하는 한편 대안을 제시하고 현장을 찾아다녔다. 13대 국회 노동위에서는 이해찬·이상수 의원과 함께 ‘3총사’로 불릴 만큼 활동이 돋보였다.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여전히 ‘노동자의 벗’인 노무현은 초창기 의정활동을 모두 노동현장에 쏟았다. “노동 현장의 여러 가지 민원이 있었다. 개인민원도 있긴 했지만, 주로 노동운동 과정에서 노사가 충돌하면서 생겨난 노동탄압 민원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장에 가서 조사하고 그것을 국회에서 따지고 하는 일들이 국회 활동의 전부였다. 예를 들어 원진레이온 사건(노동자들의 이황화탄소 중독사건)이나 문송면 군(입사 후 두달 만에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15세 소년) 사건과 같은 노동문제를 찾아다니는 것이 국회활동의 전부였다.”

 

13대 국회에서는 1988년 3월 31일 전두환의 친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비리와 관련 구속된 것을 시발로 5공 정치권력형 비리조사특위 구성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와 함께 헌정사상 처음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5공 비리’ ‘광주 문제’ ‘언론 문제’ 청문회가 열렸다.

 

열화와 같은 국민의 관심과 성원 속에 진행된 ‘5공 청문회’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리와 음모를 일부나마 폭로하여 국회의 위신을 높이는 한편 밀실정치를 광장정치로 유도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높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적잖았다. 하지만 증인들의 위증과 불성실한 답변, 의원들의 형편없는 자질, 후속 조치 미흡 등을 문제점으로 남겼다.

 

그런 속에서도 5공 청문회는 일군의 스타 정치인들을 탄생시켰는데, 그 중에서도 노무현은 단연 돋보였다. 조세전문 변호사 출신이라고 해서 5공비리특별조사위원이 된 그는 청문회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으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중에 부산 연합철강 노동자들이 서울로 올라와 농성을 시작하면서 그에게 함께할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5공 시절 연합철강이 동국제강을 합병할 때 전두환 정권이 불법 개입했으니 그것을 무효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이 연합철강 사옥으로 와 달라고 해서 갔더니 농성투쟁을 함께 하자고 부탁했다. 나는 청문회 대신 농성에 참가하기로 결심하고 옷가지를 챙겼다. 그러자 웬만하면 내 말을 따라주던 보좌진이 모두 펄쩍 뛰면서 반대했다. 내 마음대로만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적당히 타협을 했다. 첫날 청문회를 일단 해 보자. 신통치 않으면 농성장에 간다. 그리고 이틀밤을 새면서 질의 준비를 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04쪽.

 

국회의원에게 국정감사나 국회청문회는 ‘한 철’이다.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다들 무진 준비한다. 언론의 조명을 받아 이른바 ‘전국구’로 뜰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무현은(빛도 나지 않고 자칫 욕만 먹을 수 있는)노동자들의 농성투쟁에 합류하기 위해 옷가지를 챙겼다. 보좌진의 결사반대로 타협하긴 했지만, 자기에게 이로운 일이 무엇인지보다 무엇이 더 옳은 일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노무현 특유의 심중(心中)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성향이자 정치적 신념이기도 했다. “국회의원이 왜 노동자 편만 드는가? 사장 편도 좀 들어라” 하는 권력집단이나 재벌기업, 족벌신문의 비판에 대해서도 노무현은 “국회에 299명의 의원이 있는데 200명 이상이 사장 편을 들어주지 않는가?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장 편에 서 있는데 노동자 편도 몇 명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고 받아 넘기곤 했다.

 

노무현은 1988년 11월 17일부터 사흘간 열린 국회 5공 특위 일해재단 청문회를 통해 일약 전국구 스타로 떴다.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졌다”는 시인 바이런의 독백 그대로였다. 노무현은 정치 입문 6개월 만에 ‘청문회 스타’가 되어 자신의 존재를 전국에 알렸다.

 

원래 청문회는 증인들로부터 증언을 듣는 자리다. 그러나 청문회를 처음 실시하는 데다 청문회의 주제가 5공 비리나 광주학살과 같은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첨예한 문제일 뿐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다보니 의원들은 고압적인 자세로 증인들을 마치 죄인처럼 다그치고 호통을 치는 것으로 존재감을 높이려 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런 의원들과는 달리 증인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심문했다. 이종원 전 법무부장관, 장세동 전 안기부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을 상대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져 청문회를 지켜보던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노무현이 청문회 스타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청문회 스타’ 노무현은 그저 우연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또 명패를 내던진 ‘활극’ 때문도 아니었다. “국민들과 눈높이가 맞았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은 확실히 돈이 말하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국민들은 일해재단 문제를 ‘강제모금’이 아닌 ‘정경유착’으로 판단했다. 모금의 강제성만 따지면 재벌 회장들은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뇌물을 바치고 사업의 특혜를 받는 정경유착이라면 전두환 정권과 재벌 회장들은 가해자 공범이 되고 국민이 피해자가 된다. 국민들은 법률과 상식을 짓밟으면서 권력을 휘두른 전두환 정권과 그 권력에 야합하여 이권을 챙겨먹은 기업인 모두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으며, 국민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이 분노를 대변해 주기를 기대했다. 나는 ‘정경유착’의 실상을 파헤치고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증인 심문을 했다. 정주영 회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봐 주지 않았다. 온 국민이 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나는 시류에 따라 산다”고 말했던 정주영 회장이 마침내 말문이 막혔다. 결국 바른 말을 하는 용기를 가지지 못했던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가 청문회에서 돋보이게 되었던 것은 국민들과 눈높이가 맞았기 때문이었을 뿐,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05쪽.

 

청문회 국회에서 노무현을 분노하게 한 것은 뒤처리 문제였다. 5공 청문회는 민정당의 거부로 중단되었다가 연말에 가서야 여야 지도부가 광주특위와 5공비리특위 합동회의를 열어 전두환을 증인으로 부르기로 합의한 것이다. 모든 질문은 서면으로 하고 전두환의 일괄 답변 후에 추가질문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다시 청문회에 나온 전두환은 증언이 아니라 광주학살과 관련 ‘자위권 발동’ 따위의 일장 연설을 했다. 정상용 평민당 의원이 증언석으로 뛰쳐나가고 이철용 의원이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고함을 질렀다. 민정당 의원들이 맞고함을 지르면서 청문회장은 난장으로 변했다. “그런데 통일민주당 지도부에서 “평민당이 과격 이미지를 다 뒤집어쓰게 생겼으니 얌전히 구경만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 민정당 의원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전두환이 아직도 너희들 상전이야!” 소란한 가운데 전두환 씨가 퇴장했다. 나는 통일민주당 지도부를 향해 욕을 퍼부으면서 내 명패를 바닥에 팽개쳤다.”

 

노무현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두환에게 질문을 못하게 막고, 전두환의 태도와 민정당 의원들의 조폭 수준의 행동 그리고 자신이 소속한 통일민주당 지도부의 저질스런 지침에 분노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명패를 팽개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다음날 신문들은 노무현의 ‘과격성’과 ‘국회의원 자질’을 들어 일제히 비난했다. 마치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진 것처럼 왜곡하는 신문도 있었다. 전후 사정을 냉철하게 보도하지 않고 ‘명패 투척’만을 집중 보도한 것이다. 노무현은 이와 관련 뒷날 “이때 만들어진 부정적 이미지는 오랜 세월 정치인 노무현을 옥죄었다”고 회상했지만, 마인드프리즘 대표인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아직까지 노무현처럼 ‘진짜 배찡’이 두둑한 정치인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노무현은 ‘무모’한 게 아니라 ‘대담’하다. 무모는 ‘앞뒤를 헤아려 생각하려는 신중성이 없음’이라는 뜻이고, ‘대담’은 ‘일을 하는 태도가 용감하고 담력이 큼’이라는 뜻이다. 대담한 사람을 무모한 사람이라고 욕한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옳을 일을 위해 나서겠는가?”

내 말이 그 말이다. 무지를 배짱으로 아는 정치인은 수없이 보아 왔지만 나는 아직까지 노무현처럼 ‘진짜 배짱’이 두둑한 정치인을 본 적이 없다. 노무현처럼 진정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아는, 심리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 정혜신,〈심리학자가 본 노무현, 바보 vs 배짱 좋은 남자〉,《노무현:상식 혹은 희망》, 행복한책읽기, 2003년, 100쪽.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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