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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4. 3당 야합을 거부한 청문회 스타 ⑶

참의부 |2013.11.15 17:17
조회 142 |추천 0

 

● 국회의원직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의 벗’

 

노무현은 국회청문회 기간에도 틈틈이 노동현장을 찾아가 조사하고, 그것을 국회에서 따지고 하는 등 노동위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지만 정치현실과 내면 사이에서 깊은 갈등을 느껴야 했다. 5공 청산작업은 변죽만 울린 채 어이없이 끝나버리고 정당과 국회는 국민의 권익이나 사회정의나 당파간의 흥정이나 그들 간의 사익을 앞세웠다. 노무현은 노동자들의 요청으로 노사분규 현장을 찾아 중재에 나서기도 했으나 국회의원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이것이 노무현의 “삶을 불편하게 다시 죄의식을 불러왔다.” 경찰이 그의 눈앞에서 노동자를 끌어가고 노점상 포장마차를 뒤엎었지만 도울 방법이 없었다고 한탄했다. “예전에 같이 얻어맞고 끌려갔을 때는 고통을 함께 겪는 떳떳함이라도 있었는데 이제 그마저 없었다. 삶이 왠지 불편해졌다. 박해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박해받지 않고 산다는 것, 그런 상황이 안겨주는 불편한 느낌, 인권변호사로 활동할 때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던 그 낯익은 고통과 죄의식이 다시 찾아왔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또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되면 하루아침에 ‘정치귀족’으로 변신하는 자들이 수두룩한 세태에서 노무현은 “그들을 위해 별로 할 일이 없는” 국회의원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배지를 달았는데, 막상 국회에 들어와서 보니 그런 일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움을 느낀 노무현은 그런 자리라면 이제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9년 3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가로수들이 화창한 봄볕 아래서 싱그럽게 어린 잎을 피워 올렸고 하늘빛도 무척이나 고왔다. 오전 본회의를 마치고 국회 정문을 빠져나오다가 버스 정류장에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 우두커니 줄지어 서있는 광경을 보았다. 수행비서가 상계동 철거민인데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밀려났다고 했다. 플래카드를 둘둘 말아들고 맥 빠진 표정으로 서있는 그 사람들 앞으로 국회의원들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다. 슬픔이 어깨를 짓눌렀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런 사람들이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막는 국회에 몸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내가 하는 일이 혹시 정의롭지 못한 권력을 위한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돌아오는 것은 양심의 쓰라림뿐이었다. 문득 떠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09쪽~110쪽.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대부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할 수 있는지를 묻자 공자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먼 데 있는 사람을 찾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란, 군왕에게는 만백성이요, 목민관에게는 지역민이다. 정치란 바로 백성을 섬기는 일이라는 말이다. 백성의 고단한 삶을 살펴 그 눈물을 닦아주고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정치라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너도나도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를 하겠다고 호언한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은 없다. 눈물을 닦아주기는커녕 피눈물을 흘리지 않게만 해도, 선정은 고사하고 폭정을 일삼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읍할 일이다.『시경(詩經)』「대아편(大雅篇)」은 그런 절절한 사정을 노래하고 있다.

 

˝백성들이 고통에 지쳐 있나니
바라건대 조금이라도 쉬게 하시라
나라 안의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들의 근심 씻어 주었으며
거짓말로 속이는 사람 용서치 말고
못된 무리를 삼가 물리치며
약탈하고 포악스런 짓하는 사람 막아
그대 아직 젊은 몸일지라도
정도를 그르치지 말아 줬으면.˝

 

여기서 “그대 아직 젊은 몸일지라도 정도를 그르치지 말아줬으면” 대목이 눈길을 끈다.(기성 정치인들의 시선이나 기존의 관행으로 보면)노무현의 자세는 잘못되었다. ‘귀족’이 되었으면 귀족답게 행동해야지 노동자들의 집회나 쫓아다니고, 빈민들의 곤궁한 처지에 눈물짓는 일은 동료 ‘귀족집단’을 영 불편하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일부 동료 의원들과 언론들은 초선의 감성주의니 소영웅주의니 위선이니 하며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하지만 노무현의 말대로 “200명 이상이 기득권 편을 드는 마당에 99명이나마 소외된 사람들 편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99명은 고사하고 노무현과 같은 국회의원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내 노무현은 1989년 3월 17일 의원직 사퇴서를 쓰며 “대중투쟁의 대열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다.

 

˝민정당이 5공비리 청문회 거부를 선언했다. 야당 단독 청문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5공 독재의 피해자들이 증인석에 나와 절규하는 것을 기운빠진 야당 의원들이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광경이었다. 나는 청문회장 내 자리에 앉아 의원직 사퇴서를 썼다. “이제 노태우와 그 일파의 눈에는 국회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사퇴서는 이렇게 시작해서 “지금 이 시간에도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싸우는 대중투쟁이야말로 의정활동 못지않게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입니다.”는 말로 끝났다. 국회 우체국에서 국회의장 앞으로 사퇴서를 발송한 다음 무작정 길을 떠났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10쪽.

 

그는 일찍이 ‘가문의 영광’이던 판사직을 내던지고, 잘 나가던 조세전문 변호사 자리를 걷어차더니, 이번에는 하다못해 논두렁 정기라도 타야 된다는 국회의원직마저 벗어던졌다. 5공 비리 청산이 물건너 간 황폐한 의원석에 앉아 사퇴서를 작성하는 노무현의 심중에는 세상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이 땅 민초들의 고단하고 억울한 삶이 가득했다. 그들의 한 서린 신음소리가 들렸다.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한 노무현은 열흘 동안 충주호, 예산 수덕사, 강릉 등지를 혼자 떠돌아다녔다.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어 가는 곳마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우연히 만난 길손과 더불어 충주호에서 하루 종일 낚시를 하고, 수덕사의 젊은 비구승으로부터 법문을 듣기도 했다. 다들 잘했다고 격려하면서도 “당신 같은 한 사람이라도 국회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복귀를 권했다.

 

열흘 만에 집에 전화를 했더니 아내가 “사표는 왜 썼느냐, 썼으면 당당하게 다녀야지 비겁하게 도망은 왜 다니느냐”고 함참을 퍼부었다. 둘째형은 이 일로 김영삼 총재에게 불려가 동생 대신 호통을 들어야 했다. “1988년 11월부터 열린 청문회가 이듬해 당시 민정당의 비협조로 흐지부지해지자 동생이 의원직 사퇴서를 내버린 일이 생긴 것이다. 동생은 사직서를 내고 강원도 어딘가로 가버렸는데,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나를 서울 상도동 자택으로 불러 캐물었지만 동생이 어디 있는지 내가 알 턱이 없었다. YS는 형이 동생 간 곳을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며 호통을 치는데 정말 난감했다. 동생은 그 일로 해서 너무 경박한 처신을 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일로 노무현에게는 소영웅주의라는 둥 온갖 비난이 난무했고, 소속 당에서도 곱지 않은 논평을 쏟아냈다. 아무도 노무현의 심중을 헤아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문재인 변호사, 부산상고 동기회장, 최형우 국회의원 등이 부산 집으로 찾아와 사퇴 번의서 서명을 강요했다. 사퇴 번의서에 서명하기까지는 참으로 고뇌의 나날이었다. 노무현은 뒷날 “국회의원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인간적 고뇌와 절망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정치인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부족해서 저지른 사고였다”고 했다.

 

열흘 간의 방황과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국회로 돌아온 노무현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의정활동을 더욱 치열하게 전개한다. 다시 경향 각지의 노사분규 현장에는 어김없이 찾아가 조정 역할을 하거나 공권력의 탄압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했다. 특히 정기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정부의 노동자 탄압과 악덕 기업주들의 횡포를 가차 없이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했다. 이무렵 노무현·이해찬·이상수 세 사람은 언론에서 ‘노동위 3총사’로 불릴 만큼 활동이 두드러졌다. 13대 국회는 노동위만 보일 정도였다.

 

● 노동자를 위한 투쟁

 

노무현의 의원직 사퇴소동이 벌어진 1989년에는 3월의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 5월의 부산 동의대 사태, 조선대생 이철규 변사사건, 6월의 임수경 평양축전 참가사건,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 등이 잇따라 일어났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주도권을 잃은 노태우 정권은 이를 빌미로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5공식 탄압을 일삼았다.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도 심해졌다.

 

노무현은 16년만에 부활된 국회 국정감사에서 노동자인권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그는 국회의원 초년기의 의정활동을 온통 노동자인권문제에 집중했다.

 

노무현은 1989년 9월 26일부터 20일 동안 계속된 국정감사를 마치고〈노동부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노동행정의 실태-‘재벌공화국’의 노동통제정책들〉이라는 장문의 보고서를 통해 안기부의 노동부 통제와 노동부의 노동자권리운동 통제의 실상을 폭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노동부가 안기부의 지시와 통제를 받으면서 정보비를 사용하고 정보수집 활동을 해온, 노동부와 안기부의 ‘밀착’에 대한 항간의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고 폭로하고, “노동부가 이에 관한 자료 제출을 기피하고 민정당 의원들의 회의 진행 방해로 노동부와 안기부 간에 오간 문서의 내용과 정보비 집행 실태에 관한 자료를 확인하고 분석·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 관계를 유추할 수는 있는 몇 가지 문서와 노동부와 안기부가 주고받은 비밀문서 수발대장 등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노동부가 관계된 정부의 노동통제정책이 음성적으로 이루어지고 구조적인 모습을 띠는 것이라면, 노동부의 노동통제는 보다 직접적이어서 곧바로 조합원, 노동대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노동부의 노동통제는 정부기관이라는 권위를 업고 노동자에게 불리한 편파적인 지침과 법규의 자의적인 해석과 적용으로 노동자의 기본권을 제약하고 노동통제를 강화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그는 실례로 “1988년 12월 28일 노태우 대통령의 <민생치안확립을 위한 특별담화>에서 ‘노사분규에 강력 대처하겠다’고 밝힌 이후 1989년 1월 2일 풍산금속 안산공장에 처음 경찰력을 투입한 이래 7월 20일까지 전국에서 30차례에 걸쳐 연인원 2만 7천명이 노동쟁의 사업장에 투입됐다. 이는 단 두차례에 걸쳐 경찰병력 2천 4백명을 투입됐던 1988년에 비해 15배 이른” 사실을 들었다.

 

이처럼 노무현의 13대 국회 의정활동은 노동자인권문제에 집중되었다. 노동위원회 소속이기도 한 때문이지만, 본질적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동질감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아래서 이른바 ‘산업역군’으로 희생당해온 노동자들의 사는 형편은,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수출산업이 활기를 띠어 신흥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사이에도 나아지기는커녕 각종 산재·부당해고·저임금·탄압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노무현은 이런 현실을 분개하고 안타까워했다.

 

노무현이 국회에서 노동자인권문제에 전력투구하고 있을 무렵, “평범한 노동자를 위한 문예잡지”를 표방한『노동문학』이 창간(1989년 3월, 실천문학사)되었다. 이 잡지의 필진은 박현채·김근태·윤구병·박원순·고은·이호철·이오덕·유시춘 등이었다. 노무현은 이 잡지에 창간호부터「노무현 칼럼」을 실었다. 창간호에 노무현이 쓴 칼럼은〈매 맞는 노동자의 희망〉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그리고 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을 일깨우는 내용이다.

 

˝기사년 새해를 맞이하여 우선 노동자 여러분들께 글로써나마 큰 절을 올린다. “새해 복 많이 쟁취하십시오.” 요새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지 않고 “복 많이 쟁취하십시오.”한다.

이 말의 의미는 복이란 운 좋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노동자들처럼 몸뚱이 하나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행복한 삶, 우리의 운명은 남의 손에 맡길 수 없고 우리가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진년에 무진 애를 먹은 노동조합은 기사년에 기사회생한다는 기사년인지, 기를 쓰고 노조를 죽이려는 기사년인지 새해 벽두부터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소식이 들려온다.

구사대 폭력이 진정으로 노ㆍ노간의 싸움인가? 절대 아니다. 더군다나 모토로라에서는 얼마 전 미국인에 의한 길 가던 임산부의 폭행사건으로 국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는데, 또 다시 미국인 기업에서 조합원이라고 여성 노동자가 폭행을 당해 유산을 하였다는 사실에 민족적 격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올해는 이 땅에서 구사대 폭력을 추방하자. 푸대접 받는 노동자의 삶도 억울한데, 회사측의 사주를 받아 양심을 팔고 공권력과 결탁해서 자행되는 대리싸움에서 더 이상 놀아나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사악한 모든 음모를 물리치고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나아가자.˝ -『노동문학』, 1989년 3월 창간호, 40쪽~41쪽.

 

노무현은 이어 4월호에는〈중간평가를 불신임으로〉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 정국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중간평가’ 실시를 흘리고 있었다. ‘중간평가’는 노태우가 후보 시절 유세에서 공약으로 제시한 것이다. 대통령이 되면, 올림픽 직후 6·29선언을 포함한 주요 민주화 공약 내용의 실천 여부를 심판받는 신임 연계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야당은 정파간에 이견을 보이고 있었고, 노태우 정권과 민정당은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계속 연막을 치고 있었다. 칼럼의 후반부 내용은 이 무렵 노무현의 정치인식과 현실관을 보게 한다.

 

˝궁지에 몰린 노태우 씨는 특위 정국이 잠잠해진 틈을 타 작년 12월부터 폭력적인 본질을 드러내고, 노동자들의 투쟁, 농민들의 투쟁에 대해 5공화국 때와 같은 공권력을 동원한 원천봉쇄, 폭력적인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더니, 정치적으로는 국민들의 5공비리 청산과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이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이에 대한 면죄부로서 중간평가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중간평가는 원천적으로, 자신이 한뿌리이기 때문에 5공 비리의 청산과 광주학살 책임자의 처벌이라는 범국민적인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불신임 투표여야 한다. 이것만이 노정권의 쿠데타적 발상을 막고 5공과 광주 문제를 해결하고, 민중의 생존권과 민주적인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다. 이는 독재정권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부정부패의 여지를 제거하는 것이며, 독재정권이 발디딜 수 있는 곳을 하나하나 없애 나가는 민주화 과정이다.

그러므로 중간평가는 5공과 광주문제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며 5공과 광주 문제, 민중의 인권과 탄압 등 독재의 뿌리를 뽑는 일을 국민들이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 의지를 결여한, 아니 해결하기 보다는 5공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노태우 정권을 불신임시키고, 퇴진시키는 데에 모두 한길로 나서야 할 것이다. 노태우 씨도 백담사에서 전두환 씨와 같이 참회하여야 한다.˝ -『노동문학』, 1989년 4월호, 73쪽.

 

또 노무현은 6월호에 쓴 칼럼〈두려운 것은 패배가 아니라 패배주의이다〉에서 그의 시국인식을 토로하고, 나아가 정치권력과 지식인·언론인들의 타락상에 분노했다. 이 글을 보면, 노무현은 여느 정치인들처럼 “친애하는 노동자·농민 여러분”과 같은 사탕발림의 수사를 일삼는 대신에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언어로 노동자·농민을 사랑하고 실천한 정치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간평가’를 이용해 정치를 실종시키고 ‘문목사 방북’을 이용해 ‘빨갱이 때려잡기’소동을 벌이며 ‘동의대 사태’를 일체의 반정부 활동을 말살시키는 데에 십분 이용하고 있다. 4ㆍ13때 호헌 지지를 하고 나선 세력들이 폭력 척결의 플래카드를 내걸며 공공연하게 등장하고 백색테러의 전과자까지 망라된 이들 집단에게 재벌들은 30억원의 자금을 선뜻 지원하고 나섰다.

세번째는 여론의 왜곡이다. 나는 ‘동의대 사태’에 대한 중앙 일간지의 사설을 보며 엄청난 왜곡과 과장을 역겹게 지켜봐야만 했다. 재단의 비리가 문제시되었을 때 문교부에서 충분히 조사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방치하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공권력을 동원해 무모하게 진압한 점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도 없고, 심지어 감금된 전경을 태워 죽인 것인양 써 놓은 작자들까지 있었다.

그 이후 단 한 마디 사과도 없이 말을 바꾸는 이들에게 과연 지식인으로서의 양식이 있는가 조차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론의 왜곡과 진실보도에 대한 외면이 노동 쟁의에 대해선 더더욱 극심하다는 것은 국회 노동위원회에 들어와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경찰중립화, 사법부의 독립, 언론의 민주화를 포함하여 권력의 수족이기를 거부하는 우리의 노력마저 사라졌다고 믿지는 않는다. 성과는 적고 진척은 더디다 할지라도 우리 국민은 그것을 지지하고 또한 요구하지 않는가. 정당하고 의로운 권력을 세우기 위해 싸워 온 위대한 우리 국민들이 말이다. 우리의 길이 승리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패배가 아니라 패배주의이듯이 나 역시 그리고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력감을 벗어나 함께할 수 있는 때가 곧 오리란 것을 나는 믿는다.˝ -『노동문학』, 1989년 6월호, 68쪽~69쪽.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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