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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4. 3당 야합을 거부한 청문회 스타 ⑸

참의부 |2013.11.18 01:54
조회 153 |추천 0

 

 

선출되지도 않고 교체되지도 않는 족벌언온은 군사독재와 유착하면서 인적·물적 급성장을 이루고, 이를 기반으로 거대한 권력기관으로 발돋움했다. 자신들의 이념과 이해에 반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세력)을 적대시하고 주시하다가 기회가 되면 집중적으로 ‘조진다.’ 가히 언론의 탈을 쓴 ‘조폭’이다. 노무현이《조선일보》와 악연을 짓게 된 데는 그의 ‘노동자에 대한 사랑’이 빌미가 되었다.

 

˝이 악연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일보>지국 신문배달 소년들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통합민주당 대변인 발령 1년쯤 전 어떤 청년이 <조선일보> 배달 소년들을 데리고 무작정 의원회관 사무실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노조 비슷한 조직을 만들어 근무조건 개선을 요구했는데 지국장이 본사 직원으로 교체되고 배달원이 모두 잘렸다는 것이다. 합숙소를 방문해 소년들을 격려하고 지국장에게 “앞으로 이 아이들을 도울테니 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당을 출입하던 <조선일보> 기자가 전화를 걸어 위협적인 말투로 손을 떼라고 했다. 나는 기자면 기자답게 하라고, 이런 일로 은근히 협박하지 말고 기사나 똑바로 쓰라고 쏘아붙였다. 큰 신문사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도 모르고 기분 내키는 대로 한 것이다. <조선일보>가 이제 와서 그 일을 가지고 보복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18쪽~119쪽.

 

한국에서 거대 족벌신문의 횡포에 맞서 정면대결을 감행한 정치인은 김대중(평민당 총재 시절) 등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정치인들은 거대 언론이 인격모독과 왜곡보도를 일삼아도 꿀 먹은 벙어리인 양 꾹꾹 참는다. 저들에게 한번 ‘찍히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럴수록 저들의 횡포는 심해지고 안하무인이 된다.

 

그러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노무현에게는 저들의 어떤 협박이나 횡포도 통하지 않았다. 그것이 독재자이거나 족벌신문이거나 가리지 않고 그는 엄청난 고통과 손해를 당하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노무현은《조선일보》에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통합야당 민주당의 대변인이 거대 신문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주위에서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버릇을 고쳐놔야 다른 사람이 더 이상 억울하게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이 노무현의 ‘노무현다움’이다.

 

˝<조선일보>는 출입기자를 통해 통합민주당을 비방하는 기획 시리즈를 내보내겠다고 당지도부를 협박했다. 내심 두려웠지만 부당한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투쟁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해서 소송을 냈다. <조선일보>는 같은 분량의 해명기사를 실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해명기사가 아니라 오보에 대한 사과 기사를 써야 한다고 맞섰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21쪽~122쪽.

 

결국 법원은《조선일보》의 기사 전체가 사실무근으로 노무현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판결하고 2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선고했다. 거대 족벌신문을 상대로 승소한 노무현은 조선일보사의 사장과 담당 기자의 사과를 받고 항소심 진행 중에 아무 조건 없이 소송을 취하했다. 역시 노무현다운 행동이었다. 한 언론운동가는 뒷날 이 사건과 관련하여 “더 이상 노 후보는 ‘언론’을 단순한 ‘활용 대상’ 혹은 ‘협조 대상’으로 보는 협애한 시각 속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던” 까닭을 분석했다.

 

˝노 후보는 정치인으로서는 하기 힘든 결단(언론사에 소송제기)을 내렸고 소송에서 이겼다. 그러나 이 ‘재판’은 승소한 재판으로서만 기억되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조선일보와 노 후보가 치르고 있는 ‘전쟁’속의 ‘첫 전투’였으며 첫 싸움에서의 승리는 노 후보 내면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초선의원 시절 겪은 조선일보와의 갈등은 노 후보의 ‘언론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더 이상 노 후보는 ‘언론’을 단순한 ‘활용대상’ 혹은 ‘협조대상’으로 보는 협애한 시각 속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최민희,〈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노무현:상식 혹은 희망》, 행복한책읽기, 2002년, 121쪽~122쪽.

 

《조선일보》는 왜 노무현을 그토록 적대시하게 되었을까?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고졸 출신이라는 학벌에 대한 편견, 판사·변호사·국회의원 등 노무현이 ‘상류계급’에 편입되고서도 여전히 ‘노동자 의식’을 갖고 있는 반계급성, 신문배달원들의 노동조합 결성에 법률자문을 해준 것에 대한 적대감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신문의 노무현에 대한 왜곡은 뿌리가 깊다. 1989년 현역의원 노무현의 울산 파업현장 방문 일정이 알려지자 ‘국회의원이 노동자들을 만나러 오는’ 이례적인 행위에 당황한 회사 측은 “노무현 의원이 다음 선거에 울산에서 출마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냈다. 이 헛소문에 대해 노무현은 “노동자 대표 20명만 국회에 보내주면 화끈하게 한번 하겠는데….(……)여기 울산에서 노동자 대표 한번 뽑아주이소. 저는 딴 데 어디 가면 또 안 되겠습니까?” 하고 응수했다.

 

《조선일보》는 이 내용을 “나 같은 사람 20명만 있으면 국회도 흔들 수 있다. 나는 대한민국 어디에서 출마해도 당선된다”고 악의적으로 ‘작문’하여 노무현을 모함했다.

 

언론학자 김동민은 정치인 노무현을 여느 정치인들과 구분하여 ‘안티조선’ 운동참여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이 운동의 연장선상에 정치인 노무현이 있다. 언론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이나 언론운동 활동가들도 선뜻 나서기를 꺼려하고, 대부분의 시민운동단체들이 활용론의 늪에 빠져《조선일보》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일제강점기에 해방독립의 희망을 포기하고 친일에 나섰던 자들처럼 진보의 띠를 두른 지식인들까지도《조선일보》의 꽁무니를 쫓는 마당에 정치인이《조선일보》에 정면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보통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정치인은 아무리 영향력이 작은 언론사라도 무조건 상전으로 모신다.”

 

● ‘야합’이 승리한 제14대 총선과 대선

 

1992년 3월 24일, 제14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노무현은 부산 동구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번에서 5공 핵심 실세 허삼수와 대결하게 되었다. 허삼수는《주간조선》에 보도된 허위내용을 사실인 양 집중적으로 거론하면서 노무현을 공격했다.

 

김영삼은 4년 전 통일민주당 총재 시절에는 부산지역 지원 유세에서 “허삼수 후보는 반란을 일으킨 정치군인, 국회가 아니라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가 민자당 총재가 된 이번에는 “허삼수 씨는 충직한 군인, 뽑아주시면 중히 쓰겠다”고 천역덕스럽게 말을 바꾸었다. ‘현실 정치’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코미디였다.

 

당시 부산·경남지역에서 김영삼과 맞서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마찬가지였다. 노무현은 비록 눈부신 의정활동으로 전국구 스타가 되고 통합야당 대변인으로서 중앙정계에서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성장했지만 “우리가 남이가” 한마디로 정리되는 ‘TK의 희망’ 김영삼의 영향력을 이기고 그 지역에서 당선되기란 난망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중앙당 대변인 역할을 하고 노동현장을 누비느라 지역구 관리에도 소흘할 수밖에 없는데다가 지역 민심은 그가 ‘김대중 정당’에서 일한다며 영 못마땅해했다.

 

이 같은 상황을 알고 있는 당과 주변에서는 부산 선거구를 포기하고 서울에서 입후보할 것을 권유했지만 노무현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영남 야당 복원을 열망”했던 그는 부산을 버릴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기기 어려운 선거였다. 나를 아끼는 분들은 모두들 서울에서 출마하라고 했다. 하지만 김정길 의원과 나는 부산을 버릴 수 없었다. 우리는 영남의 야당을 복원하고 싶었다. 그런데 부산 동구에 돌아와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노동 현장과 중앙정치무대를 뛰어다니느라고 지역구를 돌보지 않아 조직이 다 무너진 상태였다. 게다가 부산 사람들은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마치 자식 입학시험 응원하듯 김영삼 민자당 총재를 밀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라이벌 김대중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 대변인이 뛰어들었으니 선거가 잘될 리 없었다.” 

 

중국의 사상가 장주(莊周)는 일찍이 “대붕역풍비(大鵬逆風飛) 생어역수영(生魚逆水泳)”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그 뜻은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헤엄친다”이다. 이 글귀를 백범이 휘호로 남겼는데, 평소 백범을 존경해온 노무현은 이 휘호 사본을 선거사무소에 걸어놓고 운동원들과 마음을 다졌다. “나도 그렇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부산의 ‘김영삼 바람’을 거슬러 날아오를 만큼 큰 새가 아니었다. 허삼수 후보의 절반 밖에 표를 얻지 못했다. 예상대로 낙선하고 나자 기분이 오히려 홀가분했다. 나를 둘러쌌던 화려한 장막이 사라졌고, 큰 짐을 벗은 것 같았다. 앞으로도 정치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나? 노력하면 찾을 수 있을까?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되기도 했다.”

 

노무현은 지역주의에 희생되었으나 민주당은 전체적으로 약진했다. 민자당은 149(전국구 33)석을 얻어 과반 확보에 실패했고, 민주당은 97(전국구 22)석을 얻어 13대보다 19석을 늘렸다. 대선을 앞두고 창당한 정주영의 국민당이 31(전국구 7)석을 얻어 이채를 띠었다.

 

사마천(司馬遷)이 쓴《사기(史記)》〈진섭세가(陳涉世家)〉에 ‘홍곡지지(鴻鵠之志)’ 고사가 나온다. ‘참새들’ 세상에서 그 ‘홍곡지지’는 참으로 외롭고 때로는 비웃음을 산다.

 

˝진승(陳勝)은 중국 하남성에서 날품팔이 하는 노동자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은 날로 어지러워져가는 시국을 탄식하며 진나라의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루는 고생하며 일하고 있는 동료들을 보면서 말했다. “장래 내가 출세한다 해도 내 결코 그대들을 잊지 않겠네.” 그러자 친구들은 한껏 비웃으며 면박을 주었다. “무슨 잠꼬대인가, 날품팔이 주제에 출세라니?” “아아, 어찌 참새나 제비 따위가 기러기나 고니의 큰 뜻을 알겠는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친구들을 보며 진승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 김태형,『심리학자의 눈으로 노무현과 오바마를 분석하다』, 103쪽~104쪽, 예담, 2009년.

 

진승의 농민혁명은 비록 6개월 천하에 그쳤지만 그의 ‘홍곡지지’는 백성을 질곡에 빠뜨린 진나라 왕조의 멸망을 불렀고 그는 세계혁명사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런 ‘홍곡지지’를 품에 안은 노무현은 계파 줄서기나 대세 편승을 거부하는 독특한 정치인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민주당을 탈당하고 하다못해 무소속으로라도 나오면 찍어주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감투를 쓰기 위해 대세에 편승하거나 시세에 영합하는 비굴한 정치인이 될 수 없다는 신념이었다.

 

노무현이 한국사회의 타락한 기득권층의 벽을 뚫고자 하는 이념적 바탕에는 진보사상이 깔려 있다. 조선왕조 인조반정(仁祖反正) 이래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사대주의와 민중 수탈을 일삼아온 기득세력에 대한 저항의식이었다. 진보운동은 좌절감과 사회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1980년대 내내 사회 전반으로 번진 진보운동의 거센 물결은 노무현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다. 그는 진보가 하나로 뭉쳐 투쟁한다면 어떤 거대한 벽도 허물 수 있으리라고 믿게 되엇다. 그는 개인사의 좌절은 물론 역사와 사회의 모든 좌절을 극복하는 길은 병든 사회를 개혁하는 데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사회개혁은 성공할 수 있다고 낙관햇으며, 또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노무현의 무의식적 소망과 의식적 목표는 이렇게 민중의 지향과 만나 하나로 합쳐짐으로써 거대한 불길로 솟아나기 시작했다.

 

여의도 정가에서는 일찍이 원숭이와 국회의원을 대비한 풍자가 회자되어왔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인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나라의 정치가 지나치게 원내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회의원의 위상이 그만큼 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풍자에서 비켜간 예외가 있으니 노무현이다. 그는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여전히 정치인이었다. 노무현은 선거에서 떨어질수록 더욱 중요한 정치인이 되어갔으니, 흔한 말로 ‘연구 대상’이다.

 

낙선한 원외위원장 노무현은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청년특위위원장에 임명된 데 이어 12월 대선에 대비하여 중앙당 선거대책위원회 산하에 물결유세단을 조직하여 부산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지역주의의 벽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아무리 민주당의 정책과 김대중 후보의 능력을 소개해도 ‘김영삼 바람’을 막아내기 어려웠다. 모든 정치·사회적 가치는 지역주의라는 거대한 블랙홀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제14대 대통령선거는 ‘3당 야합의 결실’로 마무리되었다. 997만표를 얻은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가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804만표),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388만표), 신정당의 박찬종 후보(151만표)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민주당의 가장 큰 패인은 영남 지역에서 막판 지역감정 고조와 국민당의 부진을 꼽았다. 국민당의 부진으로 영남지역에서 예상보다 100만표 이상의 차질을 빚은 것으로 민주당은 분석했다. 또 10% 이상의 확실한 리드를 장담했던 수도권에서 겨우 2~3% 리드에 그친 점도 패인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번 대선은 김영삼 후보와 민자당의 ‘돈 잔치’로 치러졌다. 노태우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1992년 김영삼의 요청으로 대선 자금 3,000억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김 후보와 민자당이 자체적으로 기업 등으로부터 마련한 천문학적인 선거자금과는 별도의 지원금만 3,000억원이라는 것이다. 이런 금권선거만 있었던 게 아니다. 선거를 사흘 앞둔 12월 15일 부산 남구 초원복집에서 김기춘 법무장관 주재로 김영환 부산시장, 박일룡 부산경찰청장, 이규산 안기부 부산지부장, 김대균 기무사 부산지역 부대장, 우명수 부산시교육감, 정경식 부산지점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강병중 부산상공회의소 부회장 등이 김영삼 후보 당선을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선거 대책’을 논의한 사실이 국민당 선거대책위원회에게 발각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민자당의 되치기로 ‘불법 도청’에만 초점이 맞춰져 사건의 본질인 ‘불법 관건선거’는 묻혀버린 채 영남지역 표가 김영삼 후보에게 더욱 쏠리는 역작용만 낳고 말았다. 민주주의의 근본 질서와 가치를 파괴하는 중대범죄 행위도 수구언론의 물타기와 “우리가 남이가” 하는 지역주의 앞에서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3당 야합이라는 역사적 폭거를 자행하고 지역주의를 부추긴 김영삼은 낙승하여 대통령이 되고, 반민주세력에 맞서 분투한 김대중은 낙선 후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이런 역사의 반동에 노무현은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김영삼을 따라 3당 합당에 참여한 많은 옛 동지들이 김영삼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고 권력자가 되는 걸 지켜보는 노무현의 가슴에 인간적 비애가 사무쳤다.

 

김대중을 떠나보낸 민주당은 곧 체제정비에 나섰다. 집단지도체제로 당헌을 바꾸고 3월 11일 전당대회를 열기로 했다. 원외 신분으로 최고위원 선거에 나선 노무현은 당내 기반이 전혀 없어 “곁불을 쬐며” 선거운동을 해야 했다. “나는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했다. 대의원 한 명이 네 사람씩 찍는 선거였는데 나는 정치적 입지가 없었다. 통합 협상과 국회의원 공천 과정에서 유별나고 거칠게 싸웠기 때문에 당 주류인 동교동계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기택 대표 쪽에도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독자적으로 해보려 했지만 돈과 조직이 없어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곁불을 쬐며 선거운동을 했다.”

 

여기서 ‘곁불’은 이기택 대표가 주선한 모임에 끼어 밥도 먹고(이기택의)연설이 끝나면 슬그머니 일어나 연설한 것을 말한다. 민주당의 대의원들은 수준이 높았다. 이승만 독재정치 이래 지난 40여년 동안 온갖 탄압을 받으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켜온 정통 민주화운동세력이었다. 대의원들은 그 동안 노무현의 민주주의 투쟁과 불모지 부산에서 고군분투한 열정을 높이 평가하며 최고위원 8명 중 5위로 당선시켰다. 어떤 계파나 조직의 지원은 물론 자금도 없이 단기필마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승리한 것이다.

 

노무현은 이제 제1야당을 이끄는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비록 원외이긴 하지만 정통민주세력의 정치집결체랄 수 있는 민주당의 최고위원 자리는 정치인으로서의 높은 위상과 탄탄한 입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비주류인데다 기댈 언덕도 없었다. 게다가 이기택 대표의 독선에 실망하고 좌절해야 했다.

 

최고위원이 된 그해, 경기도 광명에서 있을 보궐선거에 주위에서 출마를 종용했다. 당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자 광명지구당의 당원들이 찾아와 출마를 요청했다. 민자당에서는 진보 성향의 정치학자인 서강대학교의 손학규 교수를 영입하여 출마시켰는데, 노무현은 광명이라면 한번 해볼 만하다고 판단하고 생각을 굳혔다.

 

후보를 결정하는 날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 되었다. 본인의 신상문제여서 참석하지 않은 것인데, 이기택 대표가 ‘자기 사람’을 추천하여 밀어줌으로써 노무현은 분루를 삼켜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당의 결정에 쾌히 승복하고 최고위원으로서 열심히 보궐선거를 도왔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이기택 대표의 그런 ‘사적’ 행보가 이어지자 노무현은 “그에 대한 신뢰를 접었고” 오래지 않아 갈라섰다.

 

“여당의 아성인 대구 동구 보궐선거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기택 대표는 후보의 경쟁력보다 개인적 인연을, 명분보다 계보를 중시하는 공천을 했고 선거에 참패했다. 나는 그에 대한 정치적 신뢰를 접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갈라섰다. 계보원에게 충성을 요구하려면 이익을 챙겨줘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공정성을 잃는다. 한두 사람을 챙기는 대가로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노무현의 정치인생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최고위원이긴 했지만 원외 신분이라서 생활이나 조직 관리에서 어려움이 컸다. 소속 계보가 없다보니 ‘흘러오는’ 정치자금도 한 푼 없었고, 가까운 기업인이나 여유 있는 동창생들에게 손을 벌릴 만큼의 넉살도 없었다. 천정배·임종인 등이 만든 해마루법률사무소에 참여하여 겨우 생활비를 벌었다.

 

이 무렵 노무현은 가끔 지인들과 선술집을 찾아 회포를 풀었다. 그러다 흥이 오르면 애창곡〈작은 연인들〉이나〈상록수〉를 불럿다. 가끔 장기인 곱사등이춤도 곁들였다. 이때가 1993년이니, 노무현도 어느덧 40대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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