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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5. 아름다운 패배가 키운 ‘차세대 지도자’ ⑴

참의부 |2013.12.08 21:03
조회 96 |추천 0

 

 

 

● ‘밭을 탓하지 않는’ 눈물겨운 정치인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은 초기에 육사 출신 장교들의 사조직인 하나회 해체,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등의 개혁정책으로 열화와 같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5·16쿠데타로 군부가 집권한 이래 32년 만에 태어난 ‘문민정부’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김영삼 정권은 본질과 한계를 드러냈다. 그 해 12월 민자당은 야당과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 농수산위와 재무위에서 추곡수매동의안 및 세법개정안을 날치기로 처리한 뒤 본회의에서 변칙 처리하려다 민주당의 실력저지로 본회의를 열지 못했다. 문민정부의 첫 정기국회에서 5·6공 때와 다름없이 날치기가 자행된 것이다. 김영삼은 또 “대통령직을 걸고 쌀 시장 개방을 막겠다”고 한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쌀 시장을 개방했다. 이에 국민의 반발이 거세지자 황인성 내각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다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에서 78명이 숨진 부산 구포역 열차 전복사고, 66명이 숨진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 292명을 수중고혼으로 만든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등 대형 참사가 잇따라 터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제대로 된 대정부투쟁 한번 해보지 못한 채로 자중지란을 거듭했다. 이기택 대표의 리더십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9인 9색으로 갈린 집단지도체제의 비효율성에도 책임이 따랐다. 김대중이 떠난 민주당은 새로운 구심점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대표와 최고위원들이 각자 ‘제몫 챙기기’에만 골몰하느라 정부여당의 독주나 실정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원외’ 노무현으로서는 표류하는 민주당을 정화시키고 이끌 힘이 없었다. 이때 구상한 것이 연구소 설립이었다. 앞으로 정치는 지방자치 쪽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1993년 9월에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었다.

 

˝최고위원 선거를 하면서 지방의원들 뿐만 아니라 일반 당원들과도 교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정당 민주화를 하려면 당원들과도 교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정당 민주화를 하려면 당헌을 연구하고 대의원들을 조직해야 했다. 중진 정치인들은 계보를 관리했지만, 나는 돈도 없고 실세도 아니어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치발전과 개혁이라는 과제를 중심으로 사람을 엮어보기로 했다. 마침 지방자치와 분권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어서 이것을 중심으로 지방의원들을 조직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향식 공천시대를 대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참여시대를 여는 지방자치실무연구소’라 이름을 지었다. 연구할 역량이 신통치 않는데 그냥 ‘연구소’라고 하려니 남을 속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굳이 ‘실무’라는 두 글자를 넣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130쪽.

 

그냥 ‘연구소’라 해도 될 것을 굳이 ‘실무’를 덧붙인 데서 그의 결백한 정직성이 묻어난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국민의 참여라고 믿었기에 ‘참여시대’라고 한 것인데 뒷날 그의 ‘참여정부’에서도 보이듯이 ‘참여’는 정치인 노무현의 정치철학에 있어 기본이었다.

 

이 연구소는 노무현이 정치의 큰 꿈을 키우는 작은 둥지가 되었다. 여기에서 안희정·윤태영 등의 핵심 참모들을 만나게 되고, 지방자치 및 중앙-지방정부 간의 분권의 가치와 철학을 정립하게 되었다. 소박하게 시작된 이 연구소는 차츰 노무현의 정치철학을 정립하고 인재를 키우는 미래정치의 산실로 자리를 잡아갔다. 연구소의 이사장을 조세형 국회의원, 소장을 김병준 국민대학교 교수가 맡음으로써 제법 틀이 잡히고 위상이 높아졌다. 안희정이 사무국장을 맡아 어려운 살림을 꾸렸다. ‘노무현 자문사단 제1호’로 불린 김병준은 이때부터 노무현의 정책자문역을 수행했다.

 

연구비와 사무실 운영비는 노무현이 직접 민주당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회원가입서와 함께 회비를 받은 것으로 충당했다. 대개 다달이 수만 원씩 세비에서 공제하도록 순순히 지원했는데, 당시 제정구 의원은 넉넉잖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다달이 100만원씩을 지원했다고 한다. 지방자치 선거 출마 희망자들과 중앙당 간부들도 관심을 갖고 회원으로 참여하여 연구소는 뜻밖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연구소는 10명의 연구원이 한 달에 한 차례 이상 세미나를 열고, 각종 정책과 현안을 연구했다. 노무현은 이때 컴퓨터에 재미를 붙여 조작법을 익히고 각종 참고자료와 정보를 입력해 나갔다. 정치인 치고는 앞서 컴퓨터를 익힌 노무현은 곧 손수 프로그램을 개발할 정도로 ‘전문가’가 되었다.

 

1995년 2월 24일, 민주당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이기택을 총재로 선출하고, 김원기·유준상·조세형·권노갑·노무현·한광옥·신순범·이부영(득표순)을 부총재로 선출했다. 당헌을 집단성 단일체제로 바꾸어서 치른 전당대회에서 노무현은 자력으로 부총재에 당선될 만큼 대의원들의 신뢰를 받았다. 민주당은 이날 전당대회에서 새한국당과의 통합을 선언하고 이종찬 새한국당 대표를 상임고문으로, 김근태 국민회의공동의장을 부총재로 추대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6월 27일의 제1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심각한 내홍을 치렀다. 동교동계와 이기택계의 주도권 다툼이 발단이었다. 두 세력은 특히 경기도지사 후보를 둘러싸고 감정싸움까지 벌였다. 동교동계는 수도권 바람몰이를 위해 이종찬 고문을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기택 측은 자파의 장경우 의원을 고집했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이종찬이 출마를 포기했으나 양측의 앙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후보선출대회에서는 폭력사태까지 일어났다.

 

● ‘대의명분’의 연이은 낙선 고배

 

노무현은 부산시장에 ‘대의명분’ 때문에 출마하게 되었다. 대선 패배 뒤 영국에 머물던 김대중이 귀국하여 정계에 복귀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부산에서는 다시 지역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초 경기도지사 출마를 염두에 둔 노무현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상대는 민자당의 이인제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노무현은 쳐다보지도 않고, 저마다 자파 후보를 공천하느라 이전투구를 벌였다. 계파 간에 나눠먹기 공천이 이뤄지면서 노무현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추천을 받지 못한 것이다. 계파 없는 설움을 톡톡히 당한 셈이다.

 

이 무렵 이해찬이 노무현을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된 조순의 러닝메이트로 지명하자고 제안했다. 노무현은 이 “솔깃한 제안”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고 너무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번에도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스스로를 ‘사지(死地)’ 부산으로 떠밀었다.

 

˝이런 상황에서 솔깃한 제안이 나왔다.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조순 씨였는데 무소속 박찬종 후보에게 많이 밀리고 있었다. 이해찬 의원이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노무현을 정무부시장 러닝메이트로 지명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정무부시장이 되어 차기 서울시장을 겨냥해 볼 수도 있겠구나, 침이 굴꺽 넘어갔다. 그런데 신속하게 결심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민주당 지방선거 경선후보 등록일이 닥쳤다. 그래서 부산시장 후보 경선에 등록했다. 부산에도 김영삼 대통령 이후를 겨냥하며 야당을 건설해야 했고, 민주당을 전국정당으로 만들어야 했다. 또 정치의 동서분할 구도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대의명분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경선후보로 등록을 한 것이다.˝ 

 

부산으로 내려간 노무현은 선거 전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내내 1위를 달렸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지역주의의 벽을 허무는가’ 싶었지만 결과는 민자당 후보 문정수에게 37 대 51로 지고 말았다. 지역주의의 벽은 너무도 강고했다. 이번에도 부산시민들은 만주당을 탈당하면 뽑아주겠다고 ‘회유’했지만 그에 응한다면 그건 ‘노무현’이 아니다.

 

비록 노무현은 낙선했지만 숱한 당내 갈등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예상 밖의 성과를 거두었다. 민주당이 잘 해서라기보다 김영삼 정권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이었다. 최대 관심사였던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주당의 조순 후보가 42.4퍼센트라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민주당은 전국 230개 기초단체장 가운데 84곳을 차지하여 70곳의 민자당을 눌렀다. 특히 수도권에서의 약진은 두드러져, 민주당은 인천·경기에서 민자당과 호각지세(16 대 18)를 이루고 서울에서는 전체 25곳 가운데 23곳을 휩쓸어 민자당을 충격에 빠뜨렸다. 광역의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은 최대 격전지인 수도권(서울·인천·경기)에서 전체 288석 가운데 200석을 차지하여 민자당(75석)을 크게 누르고 제1당이 되었다. 특히 서울에서 10석(전체 133석 중 민주당 123석)에 그쳐 전멸하다시피 한 민자당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민주당은 수도권에서의 압승에 힘입어 전국적으로도 353 대 284로 민자당에 앞섰다.

 

노무현은 자신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연구소’가 지방선거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되고, 회원 중에서도 많은 당선자가 나와 보람을 느꼈다. 민주당은 제1회 지방선거에서 낙승했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천 문제 특히 경기지사 후보 공천을 둘러싸고 동교동계와 이기택계 사이에 폭력사태까지 벌어진데다 이기택이 밀었던 후보가 낙마하면서 책임 문제로 비화되어 당은 연일 소란에 휩싸였다.

 

그런데 영국에서 귀국하여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고 통일문제 연구에 전념해오던 김대중 이사장은 지방선거 지원유세에 나서면서 사실상 정계에 복귀했다. 자신이 지원한 지방선거의 승리에 크게 고무된 김대중은 정식으로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9월 5일 창당대회를 열어 신당(새정치국민회의)을 창당했다. 95명의 민주당 의원 중 53명이 김대중을 따라 나가고 민주당에는(의원직 상실을 우려하여 탈당을 유보한 전국구의원 12명을 제외하면)사실상 30명만 남았다. 야권 통합 2년여만에 다시 ‘분열의 귀신’이 붙은 것이다.

 

민주당 잔류파는 이기택 진영과 구당(救黨)모임으로 나뉘어 내분을 겪다가 8월 28일 서울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전당대회를 갖고 홍영기·박일 의원을 공동대표로 선출했다. 노무현은 김원웅·제정구·원혜영·유인태·장기욱·이철·홍기훈·김종완 의원, 원외의 김정길 등과 함께 구당모임에 속했다.

 

노무현은 민주당에 잔류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치를 더 이상 할 것인가의 본질적인 문제에서 분열된 야권의 통합 문제에 이르기까지 고뇌는 끝이 없었다. 이 시기 그는 김원기 의원과 뜻을 같이 하면서 그를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그를 찾아가 상의했다. 김원기는 그의 정치고문이 되었다. 노태우 비자금 문제가 폭로되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등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지방선거 참패의 충격에 빠졌던 민자당은 대외 이미지 쇄신과 김영삼 대통령의 당지도력 강화를 위해 1995년 12월 6일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얼마 전에 이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이 다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세탁했는데, 이들 수구세력은 실체는 그대로 둔 채 이름 세탁으로 실정을 얼버무리고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는 데 도가 텄다. 영락없이 꼬리만 잘라주고 “나 이제 도마뱀 아니”라며 도망치는 도마뱀 꼴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또 거기에 속아 넘어갈지 지켜볼 일이다.

 

이런 가운데 제15대 총선이 1996년 4월 11일로 공고되었다. 정계는 김영삼의 신한국당,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 노무현 등 민주당 잔류세력의 통합민주당, 신한국당과 결별하고 신당을 만든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으로 재편되어 있었다.

 

노무현은 당의 결정에 따라 서울 종로구에 입후보했다. 이번에도 부산으로 내려갈 작정이었으나 소수 야당이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20석)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면 와해된다는 당의 결정을 존중하여 선거구를 서울로 바꾸게 되었다.

 

종로 선거구에는 신한국당에서 이명박, 국민회의에서 이종찬이 나와서 치열한 3파전이 전개되었다. 각 당은 ‘정치 1번지’에 자당의 명예를 걸고 중량급을 공천했다. 이명박과는 이때부터 끈질긴 ‘악연’이 시작되었다. 노무현은 이 선거에서 이명박과 이종찬에 이은 3위에 그쳤다. 야권의 분열로 표가 분산된 데다 이명박 캠프의 부정선거가 작용했다. 4월 11일의 총선은 노무현뿐 아니라 전체 야당의 참패였다. 299석 가운데 신한국당 139(전국구 18)석, 국민회의 79(전국구 13)석, 자민련 30(전국구 9)석, 민주당 15(전국구 6)석, 무소속 16석이었다.

 

47석이 걸린 서울에서는 신한국당이 27석을 차지하여 국민회의의 18석을 압도하는 파란을 연출했다. 민주당이 이부영이 강동 갑에서 유일하게 당선되었다. 서울의 전통적인 ‘여소야대’ 현상이 처음으로 깨진 것이다. 국민회의에서는 조세형·이종찬·정대철 등 서울을 비롯하여 수도권에서 압승을 거둔 것에 비하면 충격적인 참패였다. 야권 분열에 그 책임이 있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민주당은 제15대 총선에서 참패하여 원내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한 데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정부여당의 ‘당선자 빼내가기’ 공작으로 15명 중 이규택·황규선·최욱철 등 5명이 이탈했다. 6월 4일 전당대회를 열어 이기택 상임고문이 당권을 장악했으나 비주류 측이 당무에 참여하지 않는 등 당은 내분에 휩싸였다. 노무현을 비롯한 비주류 측은 9월 26일 “망국적 지역할거정치를 극복하고 지역ㆍ계층ㆍ세대간 대립과 갈등을 치유, 21세기 민족통일시대와 정보화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정치질서 형성을 위해 힘쓸 것”을 선언하고 ‘국민통합추진회의(이하 통추)’를 결성했다. 통추는 11월 9일 발기인 등 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대회를 갖고 독자적 정치결사체를 구성했다.

 

“처음에는 이 조직을 만드는 데 반대한” 노무현은 어쩔 수 없어 결국 “큰 기대 없이” 참여했다. “정치 조직을 만들면 1997년 대선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통추에는 김대중 총재와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과 신한국당으로는 결코 갈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나중에 어떻게 할 것인가? 김대중 총재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결국 신한국당으로 가자는 사람과 절대 못간다는 사람들이 또 갈라질 텐데. 그런 모습이 국민들 보기에 과연 좋겠는가? 그런 의문을 가졌다. 그렇지만 혼자 빠지면 ‘독불장군’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1996년 11월부터 큰 기대는 없이 참여했다. 김원기ㆍ김정길ㆍ유인태ㆍ원혜영ㆍ이강철ㆍ제정구ㆍ박계동ㆍ박석무ㆍ김부겸ㆍ이철ㆍ이호웅ㆍ홍기훈ㆍ김홍신ㆍ이미경ㆍ김원웅ㆍ임종인 등 좋은 분들이 많이 참여했다.”

 

노무현에게 어느 때라고 평탄한 시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이때는 정치활동 이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세월이었다. 정계에 입문하여 바로 초선 의원이 되고 청문회 스타로 뜨는 등 초년기는 화려했지만, 이후 두 차례의 총선과 한 차례의 지방선거에서의 연이은 낙선은 인생의 황금기인 40대를 온통 ‘정치 백수’로 보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좌절하지 않은 것은 원칙과 신념의 정치를 해왔다는 자부심, 대세를 추종하는 기회주의나 지역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외롭고 힘겨운 길, 바른 길을 걸어왔다는 그 자부심 때문이었다.

 

노무현의 일련의 ‘독자행보’에 대해 주위에서는 더러 ‘튄다’거나 ‘독선적’이라고 평하지만 노무현은 “그럼 올바르지 않는데도 ‘대세’라고 해서 무작정 따라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한다. “물론 내가 ‘대세’를 무작정 추종하는 정치인은 아니다. 그래서 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대세가 역사의 발전 방향에 부응하고 또 충분한 명분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앞장섰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대세’가 언제나 ‘올바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히틀러의 파시즘이나 일본의 대동아공영권도 당시 그 나라에서는 분명히 대세였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위험하고 파괴적인 ‘대세’였다. 3당 합당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 이후로 우리 정치는 극단적인 지역감정의 포로가 되었고, 정치권에서의 보편적 가치와 상식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중국의 사상가 맹자거(孟子車)는 “천하의 가장 넓은 데 거(居)하고 천하의 가장 바른 데 서고 천하의 가장 바른 길을 간다. 세상에 쓰이면 그 도(道)를 천하에 펴고 쓰이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몸에 낚는다. 부귀도 그를 타락시키지 못하고 빈천도 그를 변질시키지 못하며 더욱이 칼이나 창으로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이것을 대장부라 한다”고 말했다. 노무현은 맹자거가 말한 ‘대장부’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래서 더욱 외롭고 고단한 길이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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