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두봉에 뜨는 달
2.
소년은 고개를 들어 기우는 달을 바라보았다.
이렇듯 달빛이 훤한 밤이면 천봉자는 대금을 불었다. 길게 흐르다 굽이치고 높게 오르다 끓어질 듯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북두봉을 돌아서 계곡에 흩어지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치는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노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주인님은 이곳에 은둔하여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강호에서는 아무도 이 장소를 모릅니다. 만약에 강호에서 주인님이 이곳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보복을 하려는 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폐인이 된 몸으로 주인마님을 찾으러 나설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도련님은 주인마님을 찾아 뵐 때가 되었습니다.”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소년의 가슴 속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천봉자는 어머니가 신오무교의 본당인 신오전에서 소년의 외할아버지인 흑선비곡이라는 신오무교의 교주와 함께 기거한다고 했다. 죽림장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서 무공조차도 폐하여진 상태일 것이라고 말했다.
죽림장에서 벌인 대혈투로 일선교(日鮮敎)의 고수와 그 휘하에서 움직이던 오대문파의 고수들이 대거 천봉자에게 살상 당했다. 강호에서 그들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강호에 발을 디딜 곳이 없다는 말이다. 천봉자는 북두봉으로 피신한 후에 두문불출하며 지내다 죽었다.
어찌하여 의협심이 두텁고 호방한 천봉자가 그들을 적으로 삼는 터무니없는 일을 하였단 말인가,
그것은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일선교라는 은밀한 조직 때문이었다. 일선교에는 얼굴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쟁쟁한 실력의 고수들과 회유와 협박으로 그 휘하에 들어온 오대문파의 수많은 고수들이 있었다. 또한 천봉자가 몸담고 있었던 신오무교에도 일선교의 세력은 깊게 침투되어 있었다.
일선교는 무림의 정통집단에 도전하는 보복집단으로만 알려졌다. 그 중심세력은 오래전에 존재하였던 무림세가(武林世家)라고 전해질 뿐이었다. 무림 전체를 전멸시키려는 일선교의 은밀한 계획은 하나의 보검을 둘러싼 죽림장의 혈투로 그 마각을 드러냈다. 강호를 뒤흔든 이 사건은 천봉자 혼자서 수십여 명의 고수를 상대한 전대미문의 대결이었다.
이틀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선교 휘하의 고수들이 천봉자의 목숨을 뺏으려고 달려들었다.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천봉자는 의외로 강하였으며, 그가 펼치는 무공은 천하무적의 힘을 쏟아내었다. 일선교에 포섭되어 있었던 오대문파의 쟁쟁한 고수들이 단 한번을 오가는 천봉자의 손속에 목숨을 잃었다. 일선교로서는 생각조차도 하기 싫은 패배였으며 수치였다.
죽림장을 탈출하는 길목에서 천봉자는 독을 묻힌 표창과 바위 같은 벽공장에 척추를 맞았다. 비 오는 밤에 깊은 호수로 떨어진 천봉자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평생을 역류하는 기에 시달리는 앉은뱅이로 지내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북두봉에 은거하여 무림의 대가를 꿈꾸며 아들에게 평생 동안 연마한 무공과 파한천의 천기도에 암시된 천무를 전수시키려 애썼다.
노인의 투명한 눈에 비장함이 흘렀다. 화석처럼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노인의 안광이 더욱 빛났다.
“지금 강호에는 저주의 시대가 도래 하고 있습니다. 주인님이 그렇듯 염려하던 저주의 자혈검이 출현했다고 합니다. 오백 년의 세월동안 주인을 기다리던 자혈검이 드디어 주인을 만났다고 합니다. 피비린내 나는 자혈검의 저주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노인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듯 했다.
과연 자혈검(自血劍)의 저주란 무엇인가,
검의 섬광이 한번 번뜩이면 그 아래에 피가 뿌려진다.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면 자혈검은 다섯 번의 초식을 넘기지 않는다. 만약에 다섯 번의 초식 안에 상대방을 베지 못하면 검을 운용하는 자에게 자혈검은 반항한다. 검기가 역류하여 검을 잡은 자의 몸속에 살기가 침투한다. 그래서 오혈검(五血劍)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주인을 만나면 검은 순종한다.
오백 년 전에 철소마(鐵蘇磨)라는 대장쟁이가 있었다. 조상 대대로 칼만 만드는 집안이었고 철소마도 가업을 이어 평생을 칼만 만들었다. 요리하는 칼부터 도축하는 칼까지 모든 칼을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가 만든 칼은 날카롭고 단단하여 누구든지 평생 동안 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베는 검은 만들지 않았다. 천금을 가지고 와서 간청하여도 철소마는 무림의 칼을 절대로 만드는 법이 없었다.
그 당시에 반조(斑操)라는 강호의 검객이 있었다.
그는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한 인물로서 한 자루의 검으로 강호를 통일하려는 야심에 차 있었다. 어느 날 반조는 철소마를 찾아왔다. 최고의 명검을 소유하려는 욕심으로 검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거절당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반조는 미인으로 소문난 철소마의 아내를 납치했고, 며칠 후에 철소마의 아내는 겁탈을 당한 채 목이 베인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백일 간의 풀무질,
철소마는 반조에 대한 원한을 품고 검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는 숯불 속에서 빨갛게 달구어진 쇠를 꺼내어 두드렸다. 자신의 팔뚝에서 피를 내어 핏물에 뜨거운 쇠를 담금질하고, 다시 또 불 속에 넣어 달구고 두드리면서 검을 만들었다.
백일 동안의 작업 끝에 완성된 검에 피맺힌 원혼을 불어넣고 검을 반조에게 보냈다. 철소마는 인편으로 검을 보내자마자 몰골만 앙상하게 남은 몸을 지탱하지 못하여 쓰러져 죽었다. 자혈검을 받은 반조는 경악하였다. 번뜩이는 검의 양 옆에 새겨진 검법을 운용하는 법, 바로 자혈비급(自血秘級)이었다. 불길하게 받은 검의 내력은 고사하고라도 양면에 가득히 새겨진 비급의 내용은 실로 천둥벼락과 같은 충격이었다.
“주인이 아니라면 오초의 초식을 넘길 수 없다.”
이렇게 시작된 비급의 내용은 검의 살수로 시작하여 살수로 끝나는 무서운 초식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급을 읽어가면서 빠져드는 신묘한 살수의 검법에 반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자부하던 검법은 자혈비급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심오한 비급의 내용은 공포였다. 포악하기로 소문난 반조가 보기에도 너무나 끔찍한 살수였다. 넉자 길이의 단순한 검이 이렇듯 오묘한 경지를 달릴 줄은 전혀 몰랐다. 반조는 몇 년간을 비급에 몰두했다. 그리고 강호의 고수들을 상대하여 자혈검을 운용해 보기로 했다. 과연 자신이 자혈검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푸른 섬광,
몸을 날리는 순간에 칼집에서 뽑혀져 나온 자혈검은 푸른빛을 뿌린다. 흡사 번쩍하는 번개가 구름을 가르듯 날아든 자혈검은 여지없이 상대방을 베어버렸다. 실로 오초를 넘기는 고수는 없었다. 만약에 날아오는 자혈검의 초식을 무사히 다섯 번을 받아 넘기는 경우, 검의 주인이 아니라면 반조는 스스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간극의 틈을 가르는 자혈검을 당할 수 있겠는가, (계속)
글 / 은하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