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링컨의 ‘만남’은 극적이었다. 그는 선거에 여섯 번 나와 네 번째 떨어지던 날 링컨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겼다. 어릴 적 위인전에서 만난 링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 ‘새로운 만남’은 ‘극적인 재회’였다. “2000년 4월 13일 총선개표가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날 밤, 그 충격적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간디가 인종주의자에 의해 기차에서 쫓겨나 얼음같이 싸늘한 대기실에서 진리의 순간을 경험한 것처럼, 바울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뜨거운 모랫길에서 극적으로 예수를 만난 것처럼, 나는 링컨과 극적인 재회를 했다.”
이날 노무현은『세계를 감동시킨 위대한 연설들』에서 링컨의 두 번째 취임 연설문을 읽고 링컨에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링컨에 대해 깊이 알면 알수록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투사됨을 느꼈다. “4월 13일 링컨과의 충격적 만남 이후 세상이 새롭게 보였을 뿐만 아니라, 링컨의 본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인식되었다. 이전에는 조금 뛰어난 정치인 한 사람이 시대의 흐름과 우연히 맞아서 위인이 된 것으로, 난국을 극복한 역량있는 정치인의 하나로 링컨을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연설문을 읽으면서 링컨이 단지 좀 뛰어난 정치인이 아니라 고귀하고도 위대한 사상가이자 정치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노무현이 만난 링컨》의 에필로그가 ‘성공한 대통령의 길’이다. 그는 거듭된 패배 끝에 성공한 링컨의 길을 더듬으면서 그 역시 거듭된 패배의 길을 청산하고 ‘성공하는 대통령’을 꿈꾸었을까? 그는 분투하고 좌절하고 고뇌하는 링컨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테지만 140여년 전에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 된 링컨처럼 자신이 한국의 제16대 대통령이 도리라고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무현이나 링컨이나 둘 다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세력에 맞서 싸우다가 숱한 시련을 겪었다. 노무현은 ‘사람 사는 세상’과 동서화합을 위해 투쟁하다가, 링컨은 노예해방과 남북화합을 위해 싸우다가 수구기득세력으로부터 온갖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숙명이었다.
“링컨도 당시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었다. 보통의 정치참모들은 조언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워 적을 이겨야 한다는 당위를 설파하거나, 승리의 자신감을 불어넣어 강력한 지도력을 세우라고…. 그러나 링컨은 불의와 정의, 승리와 패배같은 용어를 멀리하려 했다. 남과 북을 똑같은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하고 자기의 고민을 끌어 안듯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이야기한다. 증오가 아닌 애정을, 내침이 아닌 관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존재와 삶의 방식에 대한 깊은 성찰로 담담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링컨을 느낄 수 있었다. 고통과 갈등 속에 있는 모순된 인간의 삶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극복하고자 하는 짙은 고뇌가 링컨에게서 배어 나옴을 보았다.”
노무현은 자신의 이상(理想)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고 했다. 노무현은 바로 링컨을 정면교사로 삼아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출발하는 전략적 현실주의자”가 된 것이다.
˝링컨은 현실이 어떻든 간에 성과를 내려고 하는 조급한 개혁주의자가 아니었다. 역사의 흐름에 자신의 과업을 맡겨두고 그냥 민심을 쫓아다니지도 않았다. 링컨은 인간의 가치, 사회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자신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단순한 원칙주의자의 옹졸함도 없었다. 진보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열망이 있었고 한 발 한 발 치밀하게 나아갔다. 그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선을 추구했다.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 서 있었으며,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성급히 내딛지 않았다. 링컨은 인간의 이성에서 눈을 떼지 않은 인도주의자였다. 동시에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출발하는 전략적 현실주의자였다.˝ - 노무현,『노무현이 만난 링컨』, 학고재, 2001년, 12쪽.
˝링컨은 정직과 성실로 자기가 맡은 일에서 성과와 신용을 얻었고, 끊임없는 도전으로 기회를 성공으로 만들어 낸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링컨은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런 사람은 많다. 그에게는 따뜻함이 있었다. 따뜻한 사람이라야 출세한 사람이 우리 이웃이 되고 우리 모두의 행복이 된다. 따뜻하지 않은 사람이 출세하면 알게 모르게 내 몫을 빼앗아가며 나를 배아프게도 하고 억울하게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링컨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무엇이 옳고, 일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다. 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과 역사에 대한 뚜렷한 통찰력이 있었고, 자기의 가치관에 대해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연방통합과 노예해방을 위해 전쟁을 치르기로 결단한 것은 이러한 통찰력과 신념에서 나온 용기였다.˝ - 노무현,『노무현이 만난 링컨』, 학고재, 2001년, 13쪽.
노무현은 이 책에 “위인의 약점은 범인의 위안”이라는 경구를 적었다. 위인에게도 약점과 과오가 있게 마련, 링컨도 인간인 이상 적잖은 약점이 있었다. 너무 ‘관대’한 나머지 사람들이 대통령을 우습게 여기고, 심지어 집권했을 때도 ‘힘없는 대통령’으로 여겨 함부로 대한 사례를 빼놓지 않고 적었다. 그러면서 노무현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링컨의 리더십’임을 역설했다.
˝강력한 지도력은 강권적 지도력이 아니다. 바로 대중의 신뢰와 민주적 절차에 뿌리박은 통합의 지도력이다. 또한 수평적이고 개방적이며 자율적인 지도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도력만이 남북 분단을 극복하고, 지역 갈등과 계층 대립이 만연한 우리 사회의 고질을 치유할 수 있다.˝ - 노무현,『노무현이 만난 링컨』, 학고재, 2001년, 15쪽.
˝민족이 남북과 동서로 분열되어 쟁투가 끊이지 않는 오늘의 이 시대는 링컨이 직면했던 시대와도 유사하지 않은가. 링컨은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다”는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내가 “동서간의 지역통합 없이는 개혁도, 통일도 모두 불가능하다. 통합의 문을 통과해야만 개혁도, 발전도 가능하다”고 한 주장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되길 바란다.˝ - 노무현,『노무현이 만난 링컨』, 학고재, 2001년, 16쪽.
● ‘신뢰의 위기’가 만들어낸 ‘노무현 바람’
우리나라 관료나 정치인들이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선임자들이 재임 기간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 후임자가 업무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고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게 된다.
20여년 전 필자가 영국 연방의회와 런던 시의회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다. 두 곳의 해외 홍보 담당관이 똑같이 “당신네 나라는 웬 돈이 그리 많아서 해마다 여러 팀이 찾아와서 똑같은 자료를 요구하느냐”는 짜증 섞인 코멘트를 날렸다. 해마다 한국의 여러 기관에서 관광차 방문하고는 ‘보고서용’으로 자료를 요구한 데 대한 코멘트였던 것이다.
묵은 얘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노무현이 해양수산부 장관을 퇴임하고 나서 8개월 동안의 경험과 문제점, 개선 방향 등을 묶어 펴낸 책이 바로《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다. 이 책은 현재 10쇄를 넘길 정도로 스테디셀러가 되었는데, 행정가와 CEO를 위한 리더십 연구서다.
노무현은 “우리 나라의 공무원이 어떻게 일을 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우리 나라의 장관은 어떤 조건에서 책임을 맡게 되며, 어떻게 장관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지를 생각했다. 공무원의 리더십이 행정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을 하면서 인간과 조직 그리고 리더십에 대한 평소 생각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겼다. 이 책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각하고 실천했던 나의 리더십과 지식경영에 대한 보고서다. 비록 짧은 장관 재임이었지만 이러한 경험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자 재임시절부터 틈틈이 생각과 활동을 정리해 두었다. 그리고 작년 3월 말 퇴임하자마자 그냥 버리기 아까운 기억들을 하나의 책으로 엮기 위해 새롭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등 매우 바쁜 가운데서도 국정운영의 리더십에 관해 자신의 경영 철학과 비전을 제시한 이 책을 집힐한 것이다.
미래경영개발연구원장인 김용구 박사는 “이 책은 국가행정을 전형적인 학습조직의 실천과정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저자가 1년 못 미쳐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과정을 보여준 이 책은 국가행정을 전형적인 학습조직의 실천과정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가행정에서도 21세기 경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습조직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 책임 있는 공직을 맡을 때 처음부터 이렇게 비전을 세워 공유하고, 생각하는 방법을 이해하고, 조직구성원들이 역량을 육성하고 발휘하게 하며, 현장 중심의 토론과 대화에 근거하는 학습하는 관점에서 시작한다면 한국의 국가행정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김용구는 이어서 노무현의 리더십을 잭 웰치와 정문술의 그것과 연결시킨다. “(이 책은)저자가 국가경영의 한 분야를 실천하는 가운데 보여준 현장중심, 토론과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 목적 수립과 장기적인 시각에 의한 상생(相生)의 실천프로그램, 그리고 열정과 애정에 기반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잭 웰치 리더십의 일정단계를 압축해서 국가행정에 보여 준 일면이 있다. 어떤 점에서도 미래산업의 정문술 회장이 보여주었던 신뢰경영, 공ㆍ사 구분 등의 원칙경영과도 상통된다.”
한편 시사평론가 유시민은 3김 정치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을 말하면서 ‘노무현 바람’은 기존 지도력에 대한 ‘신뢰의 위기’가 만들어낸 정치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노무현 바람’은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반영한다. 노무현은 독자적 비전과 정치적 패러다임을 완전하게 체계화하지는 못했지만 그 가능성을 보유한 새로운 리더로 떠올랐다. ‘노무현 바람’의 진원지와 지지층의 특성을 뜯어보면 한국 사회에 일찍이 없었던 신주류가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주류는 앞서 언급한 ‘합리적 개혁세력’이다. ‘개혁의 중단이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와 보다 효율적인 개혁을 기대하는 시민들의 집합’이다. ‘신주류’는 ‘구주류’와 기존의 정치적 리더들이 만들어 놓은 지역주의 정치구도와 특권적 권력문화, 제왕적 리더십을 거부하고 불신한다. ‘노무현 바람’은 기존 지도력에 대한 ‘신뢰의 위기’가 만들어 낸 정치현상이다.˝ - 유시민,「3김 이후의 정치적 리더십과 노무현」,『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행복한 책읽기, 2002년, 322쪽.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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