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첫날
뉴욕시티는 맨하탄, 퀸즈, 브롱스, 브루클린, 스테이튼 아일랜드의 총 5개의 지역으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뉴욕시티의 꽃이라면 뭐니뭐니해도 맨하탄이라고 명할 수 있을 만큼 맨하탄은 뉴욕의 간판중에서도 대표간판이다. 판타스틱한 스카이라인과 그 속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공원들, 수많은 공연과 박물관이 즐비한 마력의 도시..
맨하탄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시계바늘을 돌렸다.(뉴욕은 한국보다 13시간이 늦다.) 나는 13시간이라는 반나절을 벌었으며 나의 나이는 만으로 하여 2살이 어려졌으니 이제 26.. 마치 2년 전으로 다시 돌아간 듯 나는 무작정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첼시에 위치한 숙소에 짐을 던져두고는 가이드 북 하나를 들고 길을 나섰다. 먼저 한달 동안 지하철과 버스를 무한정 탈수 있는 매트로 카드를 사고는 지하철에 올랐다. 이 카드가 앞으로 내 뉴욕 삶의 교통을 책임질 것이었다.
뉴욕 지하철은 우리나라와 달리 많이 낡고 퇴색되긴 했지만 그런 이질감마저도 나에겐 가슴 뛰는 흥분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온통 외국사람으로 가득 찬 지하철의 한 구석에서 나는 정신 없이 지도를 읽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곳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있는 34가.. (뉴욕의 지하철은 내릴 땐 카드 없이 입구를 통과한다.) 나는 입구를 나서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며 잰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빌딩 숲 속 에서도 단연 압도적으로 우뚝 솟은 고층빌딩.
“안녕, 엠파이어.”
나는 하늘높이 솟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그 빌딩이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는가!
34가에는 특히나 쇼핑할 곳이 많았다. 저렴하고 패셔너블한 옷과 악세서리가 즐비한 H&M이며 팬시한 클럽의상을 고르기에 적합한 bebe.. 2주마다 새로운 명품디자인을 선보인다는 Zara등 나는 한동안 아이쇼핑을 하며 이 옷 저 옷을 입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음껏 피팅을 즐길 수 있는 시스템과 어느 종업원도 옆에 붙어서 나를 괴롭히지 않는 자유로움.. 역시 뉴욕은 쇼핑조차 자유롭구나.
나는 작은 피자가게에서 피자 한 조각과 콜라한잔을 마시고는 다시 지하철로 향했다. 마치 내게 단 하루의 시간만이 주어진 듯 나는 마음이 바빴다. TV에서만 보던 명소들을 당장에 이 두 눈으로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의 도착지는 59가에서부터 110가까지 드넓게 펼쳐진 도심 속의 푸른 오아시스, 센트럴 파크다. 나는 책하나를 들고 뚜벅뚜벅 파크속으로 발을 옮겼다. 워낙 큰 파크인지라 인력거또는 마차를 이용하는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와 빅이 타던 마차.. 나는 가슴이 뛰었다. 넓디 넓은 잔디밭과 그 넘어 대조되는 스카이라인은 실로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다웠다.
8월의 햇살아래서 사람들은 비키니를 입은 채 태닝을 즐기거나 독서 또는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이 사람들.. 정말 평화롭게 사는 구나. 나는 아직도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기다려라 나도 언젠가는 여기서 데이트를 즐기리라.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다시 나는 42가에 자리잡은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수많은 뮤지컬 쇼의 열기와 밤의 화려함이 장난이 아니라는 그 곳.. 스테이션을 나서자마자 나는 거대한 간판의 네온사인에 흠뻑 취하고 있었다.
“와..”
나는 무턱대고 신이 났다.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는 관광객들 틈에서 나는 팔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정신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상점이 눈에 띄었다. 언젠가 트렁크를 사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던 지라 나는 상점에 들러 이리저리 트렁크를 살펴보고 있었다. 헌데 얼마있지 않아 꽤 험상궂게 생긴 멕시컨 종업원이 내게 다가서서는 당장 트렁크를 구매하라는 듯 원하는 가격을 말해보라고 눈을 부라리는 것이 아닌가? 뉴욕 한 복판에서 강매가 왠말이냐! 나는 연신 고개를 가로젓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상점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영웅처럼 내게 다가와 그 점원을 제지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브루스 윌리스처럼 머리를 빡빡 민 이 아저씨는 미국인이라기보단 유럽피언처럼 보였다.
“HI!”
아저씨가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트렁크 사게?”
아저씨는 반해버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질문을 시작했다. 사실 나의 눈웃음은 꽤나 매력적이다.
“그냥 보는 거에요.”
“음.. 참 똑똑해 보이는 아가씨네..”
“고마워요. 오늘 뉴욕에 왔는데.. 정신이 없네요.”
내가 또 한번 매력적인 눈웃음과 함께 답하자 아저씨의 눈은 더욱 크게 떠졌다.
“오! 그래? 그럼 내가 가이드 좀 해 줄까?”
뜻밖의 제안에 나는 잠시 주춤했다.
“Come on!”
그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상점을 나서고 있었다. 안 그래도 좀 심심하던 차였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따라나서도 될까? 하지만 의심과 불안도 잠시.. 나는 어느새 아저씨를 따라 총총총 상점을 나서고 말았다. 아저씨는 뮤지컬쇼의 티켓을 반값에 구입할 수 있는 TPS의 위치를 가르쳐주며 어떤 공연이 재미있는지 주변에 또 어떤 것이 있는지 설명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 없이 아저씨의 뒤를 따랐다.
“저녁 먹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뉴욕 도착 후 내가 먹은 것이라곤 한 조각의 피자가 다였다. 순간적으로 지독한 허기가 느껴졌다.
“Oh, Come on.”
아저씨는 곧바로 택시를 잡더니 택시의 문을 열었고 나는 택시에 올랐다.
“51th street and 7th avenue, Please.”
너무나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저씨가 목적지를 말하는 순간 나는 곧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랑스 요리 좋아해?”
라고 묻는 아저씨의 친절한 음성에 나는 곧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네..”
“내 친구 가겐데 최고로 맛있는 프랑스 요리를 맛볼 수 있을 거야.”
얼마 후 우리는 택시를 내렸고 아담한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레스토랑의 주인은 아저씨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포옹을 하고 나의 볼에 키스를 했다. 우리는 아늑한 곳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판을 들었다. 하지만 프랑스어와 영어가 뒤섞인 메뉴판을 보자니 정신이 혼미해질 뿐이었다.
“I don’t know. Can you recommend something for me?”
나는 아저씨에게 결정권을 돌렸다.
“음.. 양고기 좋아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은은한 촛불이 켜진 테이블에 앉아 Pinot noir를 한잔씩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Omar-- 46의 이혼한 프랑스태생 아저씨.. 일찍 사업을 시작해 꽤 성공한 사업가인 듯 했다. 하긴 타임스퀘어 한 복판에 상점을 경영하고 있으니 그도 그럴 것이었다. 아저씨는 나의 뉴욕행에 꽤나 관심을 가지며 어설픈 나의 이야기를 문법까지 고쳐주며 열심히 들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우린 끈적한 초콜렛 디저트까지 먹고서야 레스토랑을 나섰다.
“저기 바에서 칵테일 한잔?”
얼마를 걷던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뉴욕의 바..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아저씨는 이미 근처의 바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나는 애플마티니, 아저씨는 그랑마니에를 각각 앞에 두고서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피자조각 대신 값비싼 프랑스 요리를.. 콜라 대신 와인과 마티니를.. 뉴욕에서의 이런 뜻밖의 여유는 내게 무척이나 매혹적으로 다가왔고 이렇게 친절한 아저씨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든든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세계에서 만난 낯선이와 이렇게 마주앉아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특별한 느낌이었다. 어느새 아저씨는 내 손을 잡고 있었는데 나는 이 아저씨에게서 그저 아빠 같은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 끝없는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무턱 댄 친절함.. 그것이 위험한 유혹임도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어느 샌가 애플마티니를 세 잔째 비우고 있었고 한 순간 잠시 기억을 잃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메리어트 호텔의 리셉션데스크..
“재켱 재켱..”
아저씨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내가 몽롱한 눈으로 아저씨를 쳐다보자 아저씨는 내게 여권이 있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여권을 건내 주었고 리셉셔니스트는 내 여권을 확인한 후 아저씨에게 열쇠를 건냈다. 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12층에서 내린 후 한 방으로 들어섰다.
“어때? 방 좋지?”
아저씨는 문을 닫자마자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아저씨의 부푼 똥배가 느껴졌다.
“씻을래?”
아저씨는 나의 귓가에 속삭이며 나의 귀를 깨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로 들어섰다. 무언가 좋지 않은 느낌이 가득했지만 나는 아직도 취기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어느새 나는 습관적으로 옷을 벗고 샤워기의 물을 틀었는데 순간 찬 물이 내 머리로 쏴하고 쏟아졌다.
“앗 차거!”
그제서야 나는 정신이 번쩍하고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른 기억은.. 내가 택시에서 이 아저씨와 열정적인 키스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제길! 이 놈의 술.. 나는 온 몸을 떨었다.
“재켱, 같이 샤워할래.”
갑자기 아저씨가 밖에서 나를 부르며 화장실 문을 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놈의 화장실은 왜 잠금 장치도 없는 것인가!
“No!”
나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문을 닫았다.
“Yes!”
아저씨는 기어코 문을 열고 있었다. 공포감이 밀려왔다. 나는 남자를 안다. 저 아저씨.. 아무리 친절해 보여도 곧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No! No.. Please..”
알몸의 나는 문고리를 붙잡고 절규하고 있었다.
“Oh.. OK! 기다릴게.”
다행히 아저씨는 포기한 듯 더 이상 문을 열지 않았지만 나의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물기를 닦고 큰 타월로 몸을 감쌌다. 탈출을 위해선 연기를 해야 한다. 나는 화장실 문을 나섰다. 아저씨는 어느새 옷을 훌렁 벗고 침대에 앉아 타월로 감싼 나의 몸을 바라보며 탐욕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잔뜩 부푼 똥배를 보자 저녁으로 먹은 양고기가 올라 올 것만 같았다. 아저씨는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껴안으려는 듯 다가왔다.
“샤워 한 다음에.”
나는 그를 제지하며 거짓 미소를 흘렸다.
“Ok, dear.”
아저씨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화장실로 달려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들어가자마자 나는 순식간에 옷을 걸치고 호텔을 뛰쳐나와 택시를 잡고 숙소로 향했다. 친절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는 법..
술 조심.. 남자 조심…
뉴욕의 첫날은 나에게 이토록 무섭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