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여정부’ 출범 그러나 험난한 여정의 시작
노무현의 대통령선거 당선은 한국 사회의 구조로 보아 참으로 놀라운 현상이었다. 정당, 지역기반, 자금, 언론관계, 이념지향 등 어느 것 하나 대선에 유리한 부분이 없었다. 뜻밖의 선거 결과를 놓고 분분한 해석이 따랐는데, 특히 “부모는 울고 자식들은 웃었다”며 청년세대가 기성세대에 반기를 든 ‘세대혁명’으로 풀이한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돈도 없고 계보 조직도 거느리지 못한 노무현의 당선은 낡은 정치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감동의 드라마였다”고 했다.
‘역사적인’ 노무현의 당선은 적잖은 정치·사회·문화사적 의미를 남겼다. 미국의 눈치나 역할이 배제된 최초의 자주적인 정권의 등장, 영남 출신 후보로서 호남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최초의 지역 통합형 대통령, 기성세대를 불신하며 투표에 적극 참여한 젊은 세대의 등장으로 새로운 정치문화 창출, 족벌신문들의 현저한 영향력 퇴조, 수구세력의 색깔 공세 약발이 떨어진 점, 김대중에 이어 ‘상고 출신’ 대통령 당선으로 정치 엘리트주의 극복, 지역연합을 통하지 않으면 승리가 불가능했던 대선구도를 깨고 진보세력의 결집력만으로 이룬 승리,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끌어낸 6·15평화선언정신의 계승,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의 현실화로 서민층과 청소년들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준 점이 그것이다.
노무현 당선의 이와 같은 의미와는 상관없이 한나라당을 비롯한 수구세력은 앙앙불락이었다. 노무현의 취임 초기부터 ‘잃어버린 10년’ 타령이 흘러나왔다. 김대중 정권 5년만 버티면 될 거라 생각한 기득권 주류에게 노무현의 등장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바주류의 상징인 노무현이 대권을 거머쥐자 해방 이후 한국을 지배해온 기득권 수구세력은 이성을 잃은 채 굶주린 하이에나 무리처럼 그를 맹렬히 물어뜯었다.
그들은 민의를 마구 억누를 수 있는 폭압의 자유, 가난한 이들을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는 착취의 자유, 파렴치하고도 부도덕한 짓을 해도 비판받지 않을 자유, 대대손손 무위도식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데 대한 분노를 모두 노무현에게 퍼부었다. 그들의 공격이 도를 넘어서자 노무현도 반격에 나섰다. “한번 해보자는 거지요?” 자신이 자세를 낮추고 관대하게 대응한다고 해서 그들의 광기어린 공세가 잦아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자신의 대선 승리가 “이례적인 사건, 특수한 조건들이 결합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인식했다. “2002년 승리는 나의 독특한 인생사 때문이다. 나는 부산에서 입신해가지고, 호남의 표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영ㆍ호남을 어느 정도 아우를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있었던 것이다. 청문회 스타라 해서 인지도도 얻었다. 그리고 내가 고집스러운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겹쳐져서 그때 바람을 만들어낸 거 아닐까? 그래서 이 승리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경우다.”
“당선에 이르기까지 노무현 후보는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초까지 의심없이 수용되었던 이회창ㆍ이인제 대세론, 4월 27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최종 확정되기까지의 국민 경선 과정, 5월에 들어서면서 나타난 지지율의 하강 곡선, 6ㆍ13지방선거 참패 이후 당내에서 본격화된 노무현 흔들기, 월드컵의 성과를 받고 출현한 정몽준 후보, 8ㆍ8재보선의 완패, 노무현 흔들기의 강도 강화, 전격적인 후보단일화와 정몽준의 전격적인 지지 철회 등….” 이처럼 노무현은 구조적으로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이겼다. 그만큼 승리는 값지고, 그에게 부과된 책무는 무거웠다.
동아대학교 생활체육학과 교수인 정희준은, 김대중에 이어 연거푸 ‘보수의 적자’ 이회창을 물리침으로써 보수정치인들에게 치욕을 안겨준 노무현 행정부의 ‘미래’가 저들의 반격으로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견했다. “DJ는 DJP 연합을 통해 보수층을 안심시켰지만 노무현은 대선 전날 한국 최대 재벌의 수장 중 한 명인 정몽준과 (정몽준 스스로 분을 못 이겨 뛰쳐나간 거지만) 결별했다. 그럼에도 인터넷, 휴대폰을 통한 ‘한 밤의 돌풍’을 일으킴으로써, DJ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다시 나섰던 이회창을 또 다시 패퇴시키며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경기고, 서울법대를 나온 한국 보수의 적자 이회창이 ‘상고출신’ 노무현에게 패배하고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모습은 보수의 치욕이었다. 또 보수의 원천이자 생명수와도 같은 조ㆍ중ㆍ동, 검찰, 서울대와 감히 맞서고 보수의 집성촌과도 같은 강남마저 건들겠다고 나서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들에게 고개 쳐들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대드는 그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노무현의 승리는 ‘선거혁명’이고 ‘정치반정’이었다. 5년 전에 김대중의 승리가 있었지만, 민주화개혁 세력의 단독 승리가 아닌 DJP연합 즉 보수세력의 한 자락을 끌어온 결과였다. 반면에 노무현은 단독으로 진보개혁운동의 기치를 들고 승리를 쟁취했다. 이로써 6백년을 기득권층으로 군림해온 보수세력의 기반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노무현 정권은 사면초가에 놓인 형국이었다.
노무현은 당선자로서의 첫 기자회견에서 “이번 선거에서도 지역주의의 장벽을 허물지 못한 데 대해서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충분히 가능하다는 희망은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또 “한반도 긴장 해소,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주도적 역할, SOFA 개정 등 한미간의 현안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절실한 기대에 부응하겠다”고 천명했다. 이어 그는 “대북관계나 대미관계를 포함한 외교관계에서 김대중 행정부의 기조를 이어갈 것”이며, 당정분리체제를 정착시킬 것을 재확인했다. 그는 이밖에도 국민통합, 정치개혁, 여야 협력, 서민경제 활성화, 재벌개혁과 노동유연성 개선 등을 약속했다.
노무현은 당선 첫날 오전 일찍 국립현충원을 찾아 참배하고 방명록에 ‘멸사봉공(滅私奉公)’이란 문구를 남겨 선열 앞에 진정한 공복(公僕)이 될 것을 다짐했다. 이어 수유리 4·19혁명 민주화지사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민주혁명의 정신을 받들 것임을 다짐했다. 당선자 노무현의 행보는 후보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언론과의 첫 인터뷰도 조·중·동은 물론 다른 중앙일간지나 방송을 제쳐놓고 당초 약속대로 인터넷신문《오마이뉴스》와 가졌다.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에 단 한번도 안 가고, <조선일보>와 단 한번도 인터뷰 안 하고 당선된 희귀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도 조중동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당선 후 첫 국내 언론인터뷰를 창간한 지 2년밖에 안된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와 했다. 2003년 2월 22일 나는 <오마이뉴스>의 대표기자로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곁에 마련된 인수위원회 사무실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그의 첫 마디는 이랬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당선 후 첫 국내 인터뷰도) 노무현 방식으로 해야지.” 우리는 그 인터뷰를 성사시키기 위해 여러 채널을 동원했다. 우리는 외신으로부터 ‘세계 첫 인터넷 대통령 탄생’ 이라는 말까지 들은 당선자이니까 인터넷 신문과 첫 인터뷰를 하는 것이 콘셉트에 어울린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성사되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당선자가 신생 인터넷 언론과 첫 인터뷰를 하는 것은 기존의 주류 언론과 보수언론에게 ‘특권 없는 언론정책’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그 인터뷰에서 정부와 언론의 뒷거래 온상이었던 “가판신문(전날 저녁에 발행되는 초판 신문)을 보지 않겠다”고, 했으며 “소주 사주면서 기사 빼달라는 소리 하지 않겠다”고 했다.˝ - 오연호,『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오마이뉴스, 2009년, 144쪽~145쪽.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인 강준만은 2000년대 첫 10년을 ‘노무현시대’라고 명명했다. 2003년 2월 25일 노무현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노무현시대’를 열었다. 10년의 초반은 김대중, 후반은 이명박의 집권기간으로, 그의 집권 기간은 절반밖애 안 되지만, “구시대의 막내, 신시대의 장남”이라는 그의 자부심과는 상관없이 이명박 집권기가 온통 ‘반노’였다는 점에서 강준만의 작명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노무현의 당선이 시민들의 역량으로 이루어졌다는 측면에서 새 정부의 목표와 가치를 정책 중심, 국민참여, 투명성과 효율성 운영에 두었고, 새 행정부의 명칭을 ‘참여정부’로 정했다. ‘참여’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노무현의 신념을 대변하는 명칭이기도 했다.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성경륭 위원은 10일 “우리 현대사는 건국ㆍ산업화ㆍ절차적 민주주의 단계를 거쳐 국민의 힘이 세상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민주화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며 ‘참여정부’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했다. 국민들 힘으로 탄생한 정부인만큼 앞으로 국정운영에서도 국민참여를 통해 진정한 국민주권시대와 희망의 정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인수위는 이와 관련, 지난 달 초 인수위내 국정비전팀을 설치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을 거쳐 1차 시안으로 ‘국민참여정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인수위 내부에서 “국민”이라는 말이 일제 잔재의 뉘앙스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참여정부’로 최종 낙점했다.˝ -〈경향신문〉, 2003년 2월 11일자.
인수위원회는 당선자의 국정철학에 맞추어 참여정부의 3대 국정목표를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로 결정했다. 또 당선자가 선거과정에서 핵심 구호로 내걸었던 ‘낡은 정치 청산’과 3대 국정목표 실현에 적합한 인물을 찾아 내각과 정부 요직에 추천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인수위원회로부터 국정목표를 건의 받은 노무현은 3대 국정목표에 이어 원칙과 신뢰, 공정과 투명, 대화와 타협, 분권과 자율을 참여정부의 4대 좌표로 설정했다. 3대 국정목표와 4대 국정좌표는 집권기간 참여정부의 핵심 정치이데올로기가 되었다.
● 참여정부의 서민 대통령
2003년 2월 25일, 노무현은 국회의사당에서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한 지 15년 만이다. 만 57세가 채 안 되었으니, 민선 대통령으로는 가장 젊은 나이였다.
노무현은 취임사〈평화와 번영과 도약의 시대로〉에서 “새 정부는 개혁과 통합을 바탕으로,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열어나갈 것”을 천명했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는 한반도 평화증진과 공동번영을 위한 정책 추진, 새로운 성장 동력과 발전 전략 추진, 21세기 동북아시대의 중심적 역할 수행, 한미간 호혜평등의 동맹관계 발전, 개혁과 통합을 위한 지속적 노력, 진정으로 국민이 주인인 정치 구현 즉 당리당략보다 국리민복을 우선하는 정치풍토 조성, 대결과 갈등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푸는 정치문화 정착, 제2의 과학기술 입국 달성, 우리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저마다의 소질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문화 혁신, 경제의 지속적 성장과 건강한 사회를 위한 부정부패 척결, 국가의 미래를 위한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국민통합을 위한 지역구도 완화 조치, 소득격차를 비롯한 계층 간 격차를 좁히기 위한 교육과 세제 등의 개선, 노사간 화합과 협력의 문화 조성, 노약자를 비롯한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복지정책을 내실화,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고 양성이 평등한 사회 지향, 개방화 시대를 맞아 농어업과 농어민을 위한 대책을 강구 등을 약속했다.
그는 이로써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하며,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원칙을 바로 세워 신뢰사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노무현은 취임 이틀 뒤인 2월 27일 참여정부의 조각을 단행했다. 기존의 관행과 서열을 파괴한 파격인사가 적지 않았다. 특히 검사 출신이 아닌 판사 출신의 젊은(검찰 수뇌부보다 고시 기수가 낮은) 강금실을 법무부 장관에 기용한 것은 신선한 충격인 반면 검찰개혁에 따른 파란을 예고하는 인사였다.
노무현은 조각과 관련, 자신이 제시했던 ‘개혁 대통령 - 안정 국무총리’, ‘개혁 장관 - 안정 차관’의 개념에 맞는 개혁내각의 진용이라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노 대통령의 성향과 개혁 인사들의 등용이라는 평이 따랐다. 청와대 비서진 역시 특정 지역에 편중되지 않고 전문성과 개혁성을 갖춘 인물들이 발탁되었다. 정치적 동지들과 학계·정당·시민단체 전문가들이 골고루 안배된 진용이었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인사는 출범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전북 새만금간척지 사태로 김영진 농림부 장관이 자진사퇴하고, 몇 개월 뒤 김두관 행자부 장관은 한나라당이 제출한 해임건의안 통과로 물러났다. 최낙정 해양수산부 장관은 구설수로 취임 3주만에,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은 부안 방사능폐기물 처리장 문제로 퇴진했다.
고영구 국정원장에 대해 한나라당은 처음으로 실시한 인사청문회에서 정보 분야의 비전문가이며 과거 국가보안법 폐지활동을 이유로 임명부적격 의견을 냈지만 수용되지 않자 사퇴권고결의안을 내는 등 파상적인 공세를 취했다. 국정원 기조실장에 임명된 서동만 상지대학교 교수에 대해서도 비슷한 성황이 전개되었으나 노무현은 두 사람을 바꾸지 않았다.
노무현은 국무회의를 일방적인 보고와 지시의 관행을 깨고 국정의 모든 현안을 토론을 통해 처리하고자 노력했다. 청와대에서 시작된 토론문화는 공직사회로 전파되었다. 국민의 참여는 곧 토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노무현의 철학이 시작되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공직사회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토론문화 활성화가 눈에 띈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토마토 (토요일 마다 토론하자)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토론문화는 상명하복식의 권위주의적 공직 분위기를 바꾸는 계기도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토론에 치중하느라 정책집행은 더뎠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부부처내의 토론도 있지만, 참여정부는 매주 화요 국무회의장에서 월 1회 이상 본 회의 직후 ‘테마 국무회의’를 개최했다. 특정 주제를 놓고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들은 뒤 관련 장관들이 아이디어를 붙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노무현은 첫 국무회의부터 권위주의적인 일체의 격식을 버리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의 실천에 나섰다. 초대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은 그의 부산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자와 가진 대담에서 “노 대통령이 커피를 직접 타서 마시고 다른 사람에 직접 커피를 타 주기도 했다. 국무회의장 문 앞에 커피 테이블을 놓고 일회용 커피를 타 마시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초대 청와대 인사보좌관이었던 정찬용도 같은 증언을 남겼다.
〃참여정부 첫 국무회의 때다. 회의 도중 중간 휴식 시간이 있었다. 노 대통령이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해놓은 다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자신이 직접 일회용 커피를 타서 마시는 것이었다. 주위 참모들이 놀라면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만류라도 할 듯한 몸짓을 보였다. “앞으로 자기가 마실 차는 자기가 타서 마십시다.” 대통령은 흔연스럽게 말했다. 다른 참석자들에게도 차를 각자 타서 마시라고 권했다. 회의장 한쪽 다탁에 커피와 녹차, 크림, 설탕, 쿠키 등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걸로 보아 대통령은 첫 국무회의 때부터 그런 문화를 만들려고 준비를 해두었던 것 같았다. 과거엔 물론 이런 일이 없었다. 그런데 차를 마시던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한 술 더 떴다. “대통령님 고맙습니다. 기왕 하는 김에 커피 종류를 좀 늘려주세요. 원두만 드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 그렇네요.” 그 뒤로 차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정찬용,「정찬용의 도전」, 102쪽~103쪽, 21세기 북스, 2009년.
이것은 하찮은 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거창한 가치나 이념도 그 실현은 그런 ‘하찮은’ 생활 속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그것도 최고 권부인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그리 하기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또 그러기에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파장도 더욱 클 것이다. 이는 권위주의를 극도로 싫어하는 노무현이기에 가능했던 일로, 결코 정치적인 ‘이벤트’가 아니었다. 그의 천성과 살아온 방식이 그랬다. 그는 평소 수직적 상하관계보다 수평적 인간관계를 높이 평가하고 중요시했다. 정찬용의 ‘비화’에 따르면, 한번은 경호실장이 대통령 때문에 대경실색했다고 했다.
˝전해들은 얘기다. 경호실장은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수행한다. 어느 날 사석에서 대통령이 김세옥 경호실장에게 술을 한 잔 권했다. “경호실장 형님, 한 잔 하세요.” 김 실장은 대경실색했다. “대통령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공석에서는 안 되지만 지금은 나와 사석인데 어떻습니까? 예전에는 내가 형님이라고 불렀잖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동등하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던 분이었다. 단지 맡은 역할이 달라서 자신이 대통령이지 별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분의 평등의식은 몸에 배어 있는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사람을 절대로 앉아서 맞는 법이 없었다. 청와대 부하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 혼자 들어가도 언제든지 자리에서 일어나 맞는다.˝ - 정찬용,「정찬용의 도전」, 103쪽, 21세기 북스, 2009년.
치열한 내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도처에 장벽이고 지뢰였다. 길게는 반 천년, 짧게는 반세기 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보수세력이 마련해둔 ‘반격무기’였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