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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누나 이야기

 “신졸샘, 학교 어디 나왔다고 했지?”


이게 시작이었다. 누나가 첫 출근한 날부터 교육기간 내내 같은 질문이 수십 번씩 들어왔다.


그래도 누나는 일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무도 모르는 지방의 작은 대학 간호학과.


그리고 돌아오는 건 작은 코웃음 소리. 누나가 과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고 간호사 시험도


훌륭하게 치렀다는 사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2주 정도의 교육기간이 끝나고 근무표에 이름을 올리게 되자 더욱 힘들어졌다.


선배들보다 몇 시간은 빨리 오고, 또 늦게 가야 했다. 인수인계라는 핑계였다.


나이트를 하고 난 뒤에도 점심 먹을 때까지 붙잡혀 있기가 일쑤였다.


업무 조정은 없었다. 아무도 백업해주지 않았다. 친구가 생일이건 누가 아프건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동기들은 비교적 편안하게 업무를 봤다. 적어도 쓸데없는 괴롭힘은 당하지 않았다.


누나가 선배 간호사들 분풀이의 방패막이 노릇을 하는 셈이었다.


그때서야 자신이 태움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동기들과 대화하면서 깨달았단다.


말이 나온 김에 누나는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그런데 그 뒤로 괴롭힘이 더 심해졌다.


그나마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던 수간호사가 준비실에서 한숨 돌리던 누나를 보고는


"요즘 신졸은 참 편하네? 요즘 은주 씨 이름 많이 들리던데. 이유가 다 있네."


라는 말을 툭 건네고 떠났을 때 누나는 자신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동기들은 선배들과 같은 대학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때부터는 밥도 제대로 넘기기 어려웠다. 툭하면 뭐가 안 맞네, 린넨이 몇 개 부족하네 하며


호출하기 일쑤였다. 물론 누나의 잘못이 아니라도 사과는 없었다.


심지어 몇몇 악역을 자처-마음은 그렇지 않으나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하는


차트 간호사들은 온갖 쌍욕은 기본이요 차트로 머리를 찍기도 했다.


작은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활 당겨 콧물 씻는다는 격으로 탈의실에 신발이 날아다녔다.


웃는 얼굴에 침 뱉겠나 싶어 최대한 싹싹하게 굴고, 이유 없는 괴롭힘에도 괜찮다는 듯이


행동했지만, 태움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심해진 것 같았다. 한 번 태워지기 시작하니 뭘 해도


불난 집에 부채질이었다. 완전히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기 전까지는 멈추질 않는단다.


일 년이 지나고 신졸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어도 괴롭힘은 여전했다. 때리는 일은 줄었지만


오히려 더 교묘해졌다. 잘못을 뒤집어씌워 병신 취급도 하고, 후배 앞에서 창피를 주기도 했다.


화장이라도 안 하고 오면 그걸로 또 면박을 주었다. 병원의 어디를 가도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단다. 통통했던 누나는 비쩍 말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결국 그만두었다. 몸이 힘든 건 견뎌내도, 마음을 조금씩 살라먹는 불길은 견딜 수 없었다.


지방으로 다시 내려온 누나는 마음을 너무 많이 다쳤다. 간호사로 복직하기는 말할 것도 없고,


어디서라도 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다행히 누나네 부모님은 누나가 스스로 추스릴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내가 우리 병원에 들어오라고, 걱정할 일 없을 거라고 설득한 덕에 겨우


간호사로 복직했다. 몇 년이나 지난 뒤였다. 1년이나마 경력이 있으니 쌩 신졸 취급까지는


받지 않았고, 학교를 걸고넘어질 일도 없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지나니 누나는 차트 선생님이 되었다.


올해에도 누나가 일하는 병동에 신졸 간호사가 들어왔다. 누나는 자신이 겪은 바가 있으니


되도록이면 신졸들을 부드럽게 대해 왔다. 우리 병원에 악습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심하지는 않았고 누나는 그마저도 본인이 다 없애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일인지. 스테이션에 앉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신졸의 얼굴을 보니 짜증이


울컥 솟구친다나 보다.


"간호사하기 참 좋은 세상이네. 나 때는 저런 건 정말 상상도 못했는데. 신졸이 1분이라도


쉬고 있으면 이마에 볼펜자국이 났었어."


이런 말까지 한다.


하긴 이번 신졸은 내가 봐도 한심해 보인다. 무엇 하나 한 번에 숙지하는 일이 없고 주사자리도


아직 제대로 찾지 못한다. 정말 RN이 맞나 싶을 정도다.


몇 번을 같은 잘못으로 혼나고도 찻번샘 찻번샘 하며 웃으며 누날 졸졸 따라다니는 게,


누난 귀엽다기보다는 오히려 밉살스럽다고 그랬다.


그러다가 결국 사고를 쳤다. 주사를 잘못 놓아 환자의 팔이 퉁퉁 부어버린 걸 혼날 게 무서웠는지


곧바로 보고하지 않은 거다. 나이가 많은 그 환자는 몇 시간이나 방치되었다가 겨우


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보호자가 먼저 발견하는 바람에 담당의 멱살이 늘어지고 난리가 났다.


화살은 누나에게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졸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뭐했느냐고.


누나는 화가 치솟아 올랐다.


어떻게 그걸 실수할 수 있을까. 아니,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다고 쳐도 그걸 왜 숨기고 있었을까.


보호자도 없었던 사이에 퉁퉁 붓는 제 팔을 보는 노인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누나는 이제 어린아이 어르고 달래듯 하는 방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곳이기에, 조그만 실수라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주어야 한다. 또 어물쩡 넘어갈 수는 없었다. 누나가 신졸을 찾았다.


“신졸샘, 오늘 이브닝이니 곧 끝나지?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누나의 손에 차트가 꼭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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